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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묵상글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 지금 여기서라도.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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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 지금 여기서라도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에 우리의 전례는 당연히
마태오 복음의 마지막인 제자들 파견 얘기를 듣습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면서
당신의 평생 과업인 복음 선포를 제자들에게 넘기시는 겁니다.
그런데 잘 아시다시피 마태오 복음에서 제자들 파견은 두 단계입니다.
10장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을 먼저 이스라엘 백성에게만 파견하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서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여라.”
이렇게 다른 민족에게는 가지 말라던 주님께서 이제 마지막에는
모든 민족들에게 가라고 파견하시는 건데 왜 그러시는 것입니까?
그것은 오늘 첫째 독서 이사야서 말씀처럼 두 단계의 구도 때문입니다.
오늘 이사야 예언자는 모든 민족들이 주님의 집이 서 있는 산으로 몰려오며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라고 할 때가 올 것이니
“야곱의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라며 야곱의 집안을 독려합니다.
그러니까 1단계는 야곱의 집안이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는 것이고,
그다음에는 야곱의 집안이 그렇게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는 것을
모든 민족들이 보고 주님의 집이 있는 산으로 따라 올라가는 것입니다.
이 이사야 예언자의 독려를 야곱의 집안인 이스라엘이 귀 기울여 들었다면
지금 하마스와 전쟁하듯 이웃 민족과 나라들과 전쟁을 벌이지 않음은 물론이고
주님의 말씀처럼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스라엘 족속은 이제나저제나
그 역할은 못 하면서 선민이라고 자처하기만 합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의 주님께서는 너희가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라고,
너희가 야곱의 집안이 되라고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며 파견하시고,
오늘의 우리에게도 빛과 소금이 되라고 말씀하시며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는 것,
그것은 그리 대단하고 특별한 것이 아닙니다.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복음으로 행복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행복을 살라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것은 남을 위한 큰 희생이 아닙니다.
행복해서 남 줍니까?
남 주고 자기는 불행한 겁니까?
그러므로 우리가 복음의 선포자가 되는 것을 주저한다면
그것은 복음의 선포를 너무 대단하게 생각하거나
우리가 복음으로 행복하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복음으로 진정 행복하고 넘치도록 행복하다면
우리는 나만 행복한 것이 미안하고
그가 행복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것이고,
그래서 나의 행복을 나누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여기서 나의 행복과 평안에 안주하지 않고,
지금 전쟁 중인 나라들의 그 불행한 사람들을 위해
도움의 손길을 뻗칠 것이고 적어도 기도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더 큰 행복과 더 큰 사랑 때문에 그들에게 달려가지 않더라도
우리가 복음으로 진정 행복하고 조그만 관심과 사랑이 있다면
지금 여기서라도 민족들의 평화를 위해 할 수 있는 사랑이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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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고인현 도미니코 신부님.
오늘은 연중 제 29주일이자 민족들의 복음화(전교)주일입니다. 복음화'란 말과 '선교' 혹은 '전교'라는 말은 같은 의미의 말은 아니지만 교회는 10월 마지막 주일의 앞주일을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하면서 전교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복음화’ 라는 용어는 제 2차 바티칸공의회 이후에 널리 사용하게 된 용어입니다. 이전에는 주로 선교를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서 ‘복음 선포’를 지칭하는 용어로 사용되어 왔습니다. 그 의미를 풍부하고 다양하게 재해석하게 되었고 ‘선교’를 대신하는 교회의 공식용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그동안 교회 안에서는 ‘선교’란 용어를 주로 사용해 왔습니다. 선교는 ‘파견’을 뜻하는 것으로 복음 선포자들이 아직 그리스도를 모르는 민족이나 지역에 파견되어 복음을 전하고 교회 공동체를 건설하는 활동을 지칭하며(선교교령6항 참조), 그러한 지역을 전교(포교)지방이라 일컬어 왔습니다. 그리고 비(非)그리스도인들에게 교리를 가르치고 세례를 베풀어 교회 공동체를 설립하는 초기적 선교단계와 구분하여 이미 성세성사를 받고 신자가 된 사람들의 영적생활을 돌보는 활동을 사목이라 하여 세분해 왔습니다. 그러나 복음화는 보다 풍부하고 역동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복음 선포 행위뿐 아니라 교회의 사명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입니다. 즉 종래의 ‘선교’와 ‘사목’의 의미는 물론이고, 복음의 힘으로 모든 사람들을 내적으로 쇄신시켜 하느님의 말씀과 구원 계획에 위반되는 모든 인간적인 판단 기준, 사상의 동향 그리고 가치관과 생활양식 등을 복음적 생활로 인도하는 활동까지를 폭넓게 의미합니다 (현대 복음 선교 17, 18, 19항 참조).
그러므로 복음화는 이 세상을 창조주와 구원자의 뜻에 부합하도록 변화시켜야 할 교회의 사명과 활동 전체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목적은 자신이 먼저 하느님 사랑의 빛 안에 내적으로 변화되어 새사람으로 거듭난 기쁨을 모든 사람과 함께 나누는 것입니다. 이러한 복음화는 우리 각자가 속해 있는 가정, 직장, 뜻을 같이하는 구성원 공동체 등에서 이루어집니다. 복음화는 여러 차원이 있겠지만 크게 3가지로 묵상해 볼 수 있습니다.
첫번째는 말씀선포입니다. 오늘 우리가 듣는 제2독서에서 사도 바오로의 말처럼 하느님의 기쁜 소식의 말씀을 전해주는 사람이 없으면 들을 수가 없습니다. 이와 같이 구원을 위해 필요한 신앙은 말씀을 통한 복음 선포를 전제로 합니다. 교회가 선포해야 할 복음의 핵심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주시고, 이루신 하느님 아버지의 사랑과 구원의 은혜입니다.
두번째는 삶의 증거입니다. 다시 말해 자기 스스로 복음화 되는 것입니다. 언행이 일치된 신앙 생활은 가장 강력한 살아있는 복음 선포가 됩니다. 복음화에서 중심 되는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 아버지이시며, 무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 안에서 온 인류를 품어 안으시고 영원한 생명으로 불러주신 그분의 사랑을 삶으로 증거하는 일입니다.
마지막으로 성사생활입니다. 교리를 가르치고 복음을 해설하는 말씀의 선포를 복음화의 출발점이라고 한다면, 성사로 말미암은 내적 변화와 새 생활은 그 도착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사생활, 특히 성체성사의 생활화는 복음화의 정점을 이룹니다. 이 성체성사의 삶은 그리스도처럼 자신을 온전히 내어주는 사랑의 삶입니다.
자신이 먼저 복음화 되어 세상에 복음의 기쁨을 증거할 수 있도록 은총을 청합시다.
✝️ 일요일 성체의 날✝️
<세계 도처에 일어난 성체의 기적(마리아 헤젤러)>
거룩한 미사와 성 이시도르의 경작지
세계적으로 유명한 도시, 마드리드의 주보성인은 어느 한 농가의 하인이었던 이시도르이다. 그는 1070 년에 마드리드에서 태어나 1130 년에 그 곳에서 사망하였다.
날품팔이꾼이었던 이시도르가 죽은 지 어느덧 90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도 마드리드에서는 5월 10일부터 일주일간 그를 위한 축제가 열린다. 그러나 이시도르 자신의 인생은 결코 즐거운 나날이 아니라 고통스럽고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다. 온 몸에 땀을 흘리며 자신과 부인 그리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이내 당신께로 불러 가신 하나밖에 없는 어린 자식을 위하여 그는 열심히 일을 하였다. 어느 날 그 성실한 이시도르는 자신을 시기하는 동료가 고자질을 하는 바람에 그의 엄격한 주인인 이반 드 바르가스(lvan de Vargas) 에게 불려갔다. 마드리드에서 그의 농장은 오늘날까지도 유명하다. 그 농장주는 그에게 욕설을 퍼부며 말했다.
“사람들이 네가 이른 아침에 일하러 나가지는 않고 성당이나 나간다고 말하더구나. 난 너를 성당이나 보낼려고 고용한 게 아니야! 일을 시킬려고 고용했단 말이야!”
“제가 아침마다 미사에 참례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이시도르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제가 주인 어른의 일 뿐만 아니라 주님께도 봉사를 한다는 것을 잊으시면 안됩니다. 제 부모님은 기도하는 것과 아울러 일하는 것을 가르쳐 주셨읍니다. 수확을 거두었을 때 주인 어른께서는 제가 제 임무를 충실히 행하였는지 아시게 될 것입니다. 만일 그 때 주인 어른께서 만족하지 않으시거든, 제 임금을 줄여도 좋습니다.”(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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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평화 관상 기도의 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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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님.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입니다. ‘전교’ 혹은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릴 때 주의해야 할 것이 하나 있습니다. 곧 ‘전교’ 혹은 ‘복음화’를 교회의 대형화와 거대화처럼, 몸집 부풀리기로 알아들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왜냐하면, 복음화는 커져가고 중심이 되어가고 힘을 길러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라기보다, 오히려 나누어지고 쪼개져서 번져가는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양적으로 물리적으로 늘려가는 것만이 아니라 나아가서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는 이들의 진정한 내면화와 성숙, 신앙의 실천도 포괄적 의미에서 복음화에 포함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맥락에서, 이미 신자가 된 우리 역시 여전히 복음화의 대상이라 할 수 있으며, ‘새 복음화’, ‘자기 복음화’라는 말을 떠올려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모든 민족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그들이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을 이사야의 환시를 통해 보여줍니다.
<제2독서>에서는 바오로 사도가 복음이 전파되어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들에게 구원이 베풀어질 것을 선포합니다.
<복음>은 스승을 잃고 슬픔에 빠져 아직도 두려워하고 의심하는 제자들에게 나타나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새로운 신원과 복음전파의 사명을 부여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절망하고 의심에 떨어져 있는 제자들에게 꾸짖고 책망할 만도 한데, 오히려 새로운 신원과 사명을 주십니다. 그만큼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보다 더 사랑하시고, 더 믿고, 더 희망하십니다. 우리는 여기에서 항상 우리의 사랑보다 더 크신 우리 주님의 사랑을 보게 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께서는 항상 우리가 당신을 사랑하는 것보다 우리를 더 사랑하십니다.
오늘 <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첫 번째 부분은 “전권선언”이요, 두 번째 부분은 “전도명령”이요, 세 번째 부분은 “현존약속”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먼저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마태 28,18)고 전권을 선언하십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자신이 지니신 권능으로 가르치시고, 죄를 용서하시고, 병을 고쳐주셨습니다. 그리고 이제 부활하신 후, 이 모든 권한으로 세상을 통치하심을 선언하십니다. 그리고 바로 이 전권으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새로운 사명과 함께 새로운 신원을 부여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치고 지키게 하여라.”(마태 28,19-20)
이는 제자들에게 있어, 두 가지 의미의 어마어마한 사실이었습니다. 곧 제자들의 새로운 신원과 새로운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단지 복음의 선포자로만이 아니라 사람들을 ‘제자로 삼는’ 새로운 신원인 ‘스승’으로의 사명을 주어 파견하십니다. 곧 “모든 민족”, 유다민족이나 이방민족이나 우방이나 적국이나 구별 없이 모든 민족에게로 가서, 남녀노소 빈부귀천을 가리지 않고 누구에게나 복음을 선포하라는 새로운 사명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 곧 제자로 삼는 사명을 구체적으로 두 가지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는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어”(마태 28,19) 제자로 삼는 일이요, <또 하나>는 “주님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마태 29,19)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곧 자신의 주장이나 의견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하신 분께서 “명령하신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는 일이요, 자신들의 제자가 아니라 파견하신 분의 제자로 삼는 일입니다.
이처럼, 말씀을 실행하는 일이 곧 제자가 되고, 동시에 스승이 되는 일입니다. 그리고 바로 그 일을 위해서 당신께서는 언제나 제자들과 동행하실 것을 약속하십니다.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20)
이는 ‘항상 함께 계시는 임마누엘’이신 당신 존재의 정체성에 대한 계시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당신의 동행에 대한 약속이요, 항상 우리와 함께 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면서 당신이 부여하신 사명을 동행하십니다. 복음은 하느님으로부터 오는 것이지, 우리 자신으로부터 우러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사실은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 곧 자기 자신을 복음화 시키는 일이 됩니다. 그렇습니다. 만약 자신이 복음을 선포하지 않는다면, 자신 역시 복음화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복음을 선포하는 것이 곧 제자 되는 길이 됩니다. 그리고 그렇게 먼저 참된 제자가 되는 이가 참된 스승이 됩니다.
오늘 우리는 “전교주일”인 “민족들의 복음화 주일”을 맞이하여, 특별히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하신 말씀 하나를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은 우리가 그들을 복음화 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를 복음화 시켜주기 때문이다.’ 아멘.
오늘의 말·샘기도(기도나눔터)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마태 28,20)
주님!
가르치기에 앞서 먼저 가르침을 배워 익히고 지키는 자 되게 하소서!
당신께 뿌리박고 살아가게 하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당신과 함께 하게 하시고,
어디에 있더라도 당신께 눈을 떼지 않고 당신께 속한 자 되게 하소서!
당신의 숨결이 되고 당신의 생명을 드러내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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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믿고 감당하면 눈이 열린다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고 모두가 구원받고, 진리의 말씀을 선포하기를 원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당신께서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이 시간 전교의 사명에 대해서 생각하는 가운데 우리의 마음을 새롭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을 통하여 모든 이가 구원을 받는다는 기쁜 소식, 곧 복음을 전해야 하는 것은 우리 모두의 의무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주님께서 명한 것을 지키고, 가르치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리고 믿음은 들음에서 오기 때문에 말씀은 선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듣게 되고 들음으로써 주님께 문을 두드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주님의 부르짖음이 우리 안에 숨겨지지 않도록 우리 각자의 능력에 따라 구원의 진리를 전해야 합니다.
많은 분이 나는 말을 잘 못한다. 아는 게 없다고 하면서 개신교 신자들의 전교 열정과 성경에 대한 해박한 지식, 말 잘하는 것을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운동을 잘하려면 운동을 꾸준히 해야 합니다. 농구든 야구든, 피아노를 치든 잘하려면, 그만큼 노력해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를 잘하려면 자꾸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배우게 됩니다. 성경을 읽음으로써 하느님을 더 잘 알게 됩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예수님을 다른 사람에게 전함으로써 더 전할 수 있는 용기, 잘 전할 수 있는 지혜도 얻게 됩니다. 그런데 그것에 대한 수고 없이 잘하려고 하니 문제입니다.
솔직히 여러분이 말을 잘 못하십니까? 남 얘기하는 데는 뒤떨어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아는 게 없습니까? 여러분이 좋아하는 것에는 많은 것을 알고 있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 트로트 가수의 이름뿐 아니라 사생활 일거수일투족을 꿰뚫고 있는 분도 계십니다. 그런데 성경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심이 있으신가요?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채우면 꼭 필요한 것이 들어갈 데가 없습니다. 사실 주님을 전하는 것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고 하셨습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베풀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것은 인간의 말재주로 하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인간의 말재주로 전하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코린1,17).
“말로도 좋은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행동으로 모범을 보인다면 훨씬 더 큰 영향력을 지니게 됩니다. 신앙은 말로 선포된 복음을 충실히 살아가는 이들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큰 매력을 느끼게 되고 이를 통해 더욱 전파되게 됩니다.”“교회는 매력과 증거로 성장합니다.” 세례받은 이가 복음의 향기를 풍기는 삶의 증거를 통하여 선교에 나서고 복음화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프란치스코 교황). 나는 가족 구성원에게, 이웃에게 어떤 매력을 주고 있을까요? 저는 예수님을 알고 있어요. 당신도 예수님을 알았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할 때 어떤 반응을 보일까요? 어떤 사람이‘어떻게 이럴 수 있을까? 사람을 대하는 그의 친절, 헌신, 사랑, 희생이 감동이야! 역시 성당 다니는 사람은 달라’ 한다면, 이 순간이 예수님을 보여주는 행동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내가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합니다. 기쁨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더 큰 믿음을 얻게 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따를 수 있기도 하지만 따름으로써 믿음을 다지게 됩니다. 구역 반모임에서 성경 통독을 합니다. 아직은 부족하지만, 반응이 다양합니다. 큰 감동이 있다고 하시는 분도 계시고 살맛이 난다고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계속 이어지고 더 많은 분이 함께할 수 있길 희망합니다. 어제는 구역 미사를 봉헌했는데 40여 명이 함께 하셨습니다. 선한 일을 하면 우리가 감히 상상하지 못한 은총으로 넘치도록 채워질 것입니다. 우리가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하신 주님의 약속을 믿고 맡겨진 일을 성실히 감당할 때 이윽고 믿음의 눈이 더 크게 열리게 됩니다. 사도행전이 그것을 증언합니다. 사도행전을 보면 다락방에 숨어 지내던 사도들이 어떻게 변했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1코린 2장 4절에 보면 “나의 말과 나의 복음 선포는 지혜롭고 설득력 있는 언변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성령의 힘을 드러내는 것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믿음이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하느님의 힘에 바탕을 두게 하려는 것이었습니다.”라고 적혀 있습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능력을 믿고 전교하시길 바랍니다. 때로는 실패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실패는 늦춰진 성공일 뿐입니다. 더 큰 결실을 위한 믿음의 단련 시기입니다. 그러므로 상대방의 반응 여하에 실망하지 말고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하느님의 뜻을 전하시길 바랍니다. 온 세상이 우리의 활동 무대입니다. 주님께서 원하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주저하지 말고 나아가십시오. “우리가 예수님에게 이끌려 그분을 기쁘게 따른다면 다른 이들도 이를 알아차릴 것입니다”(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처럼 되어야 합니다. 다시 말해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교회가 바깥으로 나가지 않을 때, 교회 내에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수많은 악 때문에 교회는 병들고 맙니다. 왜 교회 내에 이런 병페가 있는 것일까요? 바같으로 나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물론 바깥으로 나갈 때 사고의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하지만 안에 갇힌 채 병든 교회가 되는 것보다, 복음을 선포하기 위해 바깥으로 나가 사고를 당하는 교회가 더 낫습니다. 하느님은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십니다. 하느님은 아버지이시기 때문에, 사랑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이와 동일하게 행동해야 합니다. 언제나 바깥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은 거만함 없이 오직 겸손을 통해 선포되어야 합니다.”
베드로 전서 3장 15절의 말씀을 보면 “여러분의 마음속에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거룩히 모시십시오. 여러분이 지닌 희망에 관하여 누가 물어도 대답할 수 있도록 언제나 준비해 두십시오. 그러나 바른 양심을 가지고 온유하고 공손하게 대답하십시오.”라고 적고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주님의 말씀으로 무장 되어있어야 주님을 제대로 전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자주 읽고 또 말씀을 실천함으로써 주님을 깊이 만났으면 좋겠습니다.
몇 년 전부터 한국에서는 개신교신자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사회봉사 및 이웃 사랑을 실천하는 데 인색하고, 전도활동이 지나쳐서 혐오감을 주며 헌금을 너무 강조한다. 진리 추구보다 교세 확장에 집착하고 너무 시끄럽고 요란하다. 물량주의에 물들어 있다. 도덕적으로 사회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많다”(이원규. 감신대.종교사회학교수).고 분석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러한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합니다.
천주교에서도 경계의 목소리가 나옵니다. “천주교인들이 개인화하고 있고, 부유해지고 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에 관한 관심이 줄어들고 점점 보수화, 권력화하고 있다.”고 합니다. 거리 홍보나 공연, 작품활동을 통한 문화 선교를 개신교에서 배우는 것은, 긍정적인데 기존의 좋은 것을 잃어서는 안 된다는 반성입니다. 그렇다면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주님의 말씀을 통한 새 삶을 살아감으로써 주님을 증거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전교주일을 보내면서 무엇보다는 내 마음을 풍요롭게 하시길 빕니다. 기회가 좋든 그렇지 않든 소명 의식을 가지고 밖으로 나가야 하겠습니다.
세례를 받은 지 몇 년이 되었든 나를 통해서 성당을 찾아 세례를 받은 사람이 있다면 그나마 다행입니다. 그것은 열매를 맺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인이 되었으면서도 나의 영향으로 하느님을 찾게 된 사람이 아직 없다면 나는 열매를 맺지 못한 것입니다. 들꽃이나 과일나무도 일 년에 한 번 열매를 맺는데 우리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주님께서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혜를 이웃과 더불어 나누는 가운데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길 바랍니다. 지난 주일에 19명이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축하드리며 아울러 다시 예비자 모집에 마음을 모아주시길 당부드립니다. 우리의 삶이 예수님을 닮아야 하겠습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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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세상에는 믿기지 않는 일들이 있습니다. 며칠 전에 읽은 글입니다. “미국 메릴랜드의 한 마을에 남루한 복장의 서적 외판원 청년이 나타났습니다. 더위와 배고픔에 지친 청년은 마을 입구의 한 허름한 집을 찾았는데 한 소녀가 나왔습니다. 청년은 시원한 우유를 한 잔 부탁했습니다. 소녀는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청년이 비용을 지불하려 하자, 소녀가 말했습니다. ‘어머니가 친절을 베풀 때는 대가를 바라지 말라고 하셨답니다.’ 20년이 지난 후에 메릴랜드 병원에 한 여성 중환자가 실려 왔습니다. 병원장 하워드 켈리박사는 의사들을 총동원해 환자를 살려냈습니다. 그 여인은 1만 달러가 넘는 치료비 청구서를 받아들고 한숨을 쉬었습니다. 그런데 청구서 뒤에는 이런 글이 적혀있었습니다. ‘그날 한 잔의 우유로 모든 비용은 지급되었답니다.’ 우유 한 잔의 친절이 감당 못할 병원비를 대신했습니다. 우유 한 잔의 친절이 한 여인의 목숨을 구했습니다.”
100살의 아브라함은 자녀가 없었습니다. 그런 어느 날 낯선 손님들이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와 함께 손님들을 정성껏 대접했습니다. 창세기는 아브라함의 행동을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리, 제가 나리 눈에 든다면, 부디 이 종을 그냥 지나치지 마십시오.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시어 발을 씻으시고, 이 나무 아래에서 쉬십시오. 아브라함이 소 떼가 있는 데로 달려가 살이 부드럽고 좋은 송아지 한 마리를 끌어다가 하인에게 주니, 그가 그것을 서둘러 잡아 요리하였다. 아브라함은 엉긴 젖과 우유와 요리한 송아지 고기를 가져다 그들 앞에 차려 놓았다. 그들이 먹는 동안 그는 나무 아래에 서서 그들을 시중들었다.” 물론 아브라함도 친절을 베풀면서 대가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런 아브라함과 사라에게 손님은 이렇게 이야기하였습니다. “내년 이때에 내가 반드시 너에게 돌아올 터인데, 그때에는 너의 아내 사라에게 아들이 있을 것이다.” 아브라함의 친절이 100세 넘은 아브라함에게 아들로 되돌아 왔습니다. 아브라함의 친절은 자손의 축복과 땅의 축복이 되었습니다.
저도 ‘친절’에 대한 작은 경험이 있습니다. 용문 청소년 수련장에서 있을 때입니다. 서울 신학교에 수업이 있을 때는 용문역에서 기차를 탔습니다. 기차가 정확하고 편했기 때문입니다. 어느 날입니다. 한 자매님이 제게 서울 가려면 어디서 타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마침 서울에 가는 길이기에 저랑 같이 타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자매님과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면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불교 신자인 자매님의 남편이 암으로 아파서 요양 중에 있다고 하였습니다. 제게 기도를 청했고, 저는 기꺼이 기도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렇게 인연이 되었습니다. 형제님은 베드로로 대세를 받고 하느님 품으로 가셨습니다. 자매님은 ‘다도(茶道)’를 가르치는 교수였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좋은 차를 선물해 주었고, 제가 성소국장으로 있을 때는 성소후원회 임원피정에서 ‘다도’에 대한 강의를 해 주었습니다. 자매님은 제게 ‘음차대주(飮茶代酒)’라는 멋진 말을 알려 주었습니다. 중국에서는 술을 못 마시는 경우에 술 대신에 차를 마시는 것은 예의에 어긋나는 것이 아니라고 하였습니다. 사업 상 술을 마실 경우에도 대신 차를 마시면 된다고 하였습니다. 서로 다름을 인정하고 포용하는 멋진 말이었습니다.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라는 말도 있습니다. 선을 베푸는 집에는 반드시 좋은 일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오늘은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전교주일)’를 봉헌하는 날입니다. 목마른 이웃에게 시원한 우유를 주는 것도 친절입니다. 길 가는 나그네를 초대해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것도 친절입니다. 길을 묻는 이에게 기꺼이 동행하는 것도 친절입니다. 영적으로 메마른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영적으로 메말랐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물을 마시는 자는 누구나 다시 목마를 것이다. 그러나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안에서 물이 솟는 샘이 되어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복음을 전하는 우리의 사명은 이웃에게 베푸는 작은 친절에서부터 시작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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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민동규 다니엘 신부님.
찬미 예수님
어느 날 어떤 꼬마 아이가 아빠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아빠, 제가 믿는 하느님을 볼 수 없을까요? 하느님을 볼 수 있으면 확실한 믿음을 가질 수 있을 텐데요.’라고 말했습니다.
아빠는 아들에게 ‘자, 고개를 들고 심호흡해라. 그리고 뿜어내라.’라고 말했습니다. 아들이 그대로 했습니다.
그러나 아빠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숨 쉴 때 뭐가 들어갔니?’ ‘바람이요.’
‘숨을 내쉴 때 뭐가 나왔니?’ ‘바람이요.’
아들의 대답을 듣고 난 다음 아빠는 ‘바람이 들어왔다 나가는 것을 어떻게 아니? 그 바람을 보았니?’라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아들은 ‘에이 아빠, 바람이 눈에 보이나요? 그러나 느낌으로 알 수 있잖아요.’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빠는 말했습니다. ‘바로 그거란다! 하느님께서는 영이시기 때문에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가 숨 쉼으로 살아가듯이 하느님도 성령의 바람으로 우리를 이끄신단다.’
이렇게 하느님이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무슨 뜻일까요? 이 뜻은 우리가 봉헌하는 미사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미사 안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도, 또 하느님의 모습도 볼 수 있지요. 다름 아닌 성체를 통해서 말입니다.
예수님이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계시기 때문이지요. 그러니 여러분도 성체를 보고, 또 모시면서 주님을 만나고 또 성령의 바람을 느끼면서 행복하길 빕니다.
엄마가 많이 아파요.
석 달 정도 지난 일입니다.
미사 후 성당 앞에서 교우분들께 인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자매님께서 제게 가까이 다가오셨습니다.
저는 인사를 건넸습니다.
그 자매님은 제게 기도를 부탁했습니다.
엄마가 많이 아프세요. 엄마가 이곳(갑곶 성지)을 참 좋아하셨어요. 그래서 신부님께 기도를 부탁드리러 왔습니다.
저의 어머니는 000(000)이십니다.
그리고 며칠 후
어머니의 생미사는 연미사로 변경되었습니다.
지금도 미사를 봉헌하다 보면
그분께서 앉으셨던 자리에 그 자매님께서 계신 것 같습니다.
이렇게 갑자기 병원에 가시고 이렇게 갑자기 하느님 품으로 가실 줄 알았더라면…. 제가 할 수 있는 뭐라도 듬뿍 해드렸을 텐데 말입니다.
사람은 늘 후회하며 살아가나 봅니다.
하느님 품에서 행복하시기를 다시 한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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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몇 년 전, 친구 아버님께서 선종하셨다는 소식을 듣고 장례식장을 찾아갔던 기억이 납니다. 이 장례식장에서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글쎄 조문객들이 너무 많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중에 제 고등학교 동창들도 참 많았습니다. 상주는 저의 고등학교 동창인데, 당시에는 그렇게 특별하지 않았던 친구였습니다. 공부도 잘하지 못했고, 운동도 영 시원찮았습니다. 그렇다고 언변이 좋아서 인기 있는 친구도 아니었습니다. 하지만 이 친구는 늘 웃었습니다. 화도 낼 수 있는 상황인데도 늘 웃으면서 주변의 사람들을 편하게 해주었습니다.
고등학교 때, 이렇게 웃는 것이 큰 장점이란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공부를 잘하고, 그 밖의 특별한 능력과 재주가 있어야 장점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30년도 훨씬 지난 지금에 와서 보니, 당시의 능력과 재주가 그렇게 중요하지 않음을 깨닫습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이었습니다.
행복은 사람과의 관계 안에서 더 크게 자리 잡는다고 합니다. 단순히 자기 욕심과 이기심을 채우는 것에서 얻는 행복은 순간적인 만족에 그칠 뿐 오랫동안 간직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관계 안에서 얻는 행복은 훨씬 더 오래 갑니다.
이런 실험이 생각납니다. 영상을 보여 주고는 여기에 등장하는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으라는 집단, 그냥 단순히 손으로 입꼬리를 올리라는 집단, 마지막으로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짓는 집단으로 나눈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행복도 변화를 조사했습니다. 배우를 따라 웃는 표정을 지은 사람은 전보다 32% 행복감이 상승했고, 손으로 입꼬리를 올린 집단도 22% 상승했습니다. 그에 반해 펜을 입에 물고 웃는 표정을 지은 집단은 1.8%의 상승에 그쳤습니다. 표정에 따라 기분이 달라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놀라운 사실이 드러났습니다. 이 웃는 모습을 본 사람도 행복도가 올라갔습니다.
오늘은 전교 주일입니다. 주님께서 주신 선교 사명을 깨닫고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해 기도하는 날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여라.”라면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이 말씀이 이 세상 삶을 모두 마치시고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마지막 당부임을 기억하면, 우리 역시 당연히 지켜야 함을 깨닫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주님을 세상에 알릴 수 있을까요? 가두 선교를 하면서 알리는 것도 있겠지만, 사람들과의 관계를 잘 맺는 것도 훌륭한 선교입니다. 즉, 사랑 안에서 행복감을 전달할 때, 주님의 말씀은 더 큰 울림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나의 이웃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는 방법은 무엇일까요? 모든 민족들의 복음화는 여기에서 시작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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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명언: 명확한 목적이 있는 사람은 가장 험난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고, 아무런 목적이 없는 사람은 가장 순탄한 길에서조차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토머스 칼라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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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키엣 대주교님.
생활속의 선교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는 가장 위대한 선교자이십니다.
베드로 성인은 3천명에게 세례를 주었는데 이것은 보통 사람이 할 수 없는 상상을 초월하는 능력입니다. 바오로 성인 역시 지칠 줄 모르는 선교와 그리스도 모임을 조직하고, 다수의 서간을 저술하였습니다. 비록 12사도에 포함되지는 않지만, 13번째 사도라고도 불입니다.
두 분의 선교가 그토록 열정적이고 위대한 결과를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무엇 때문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바로 성령의 은총입니다. 선교의 시작은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베드로 성인은 3년이라는 시간을 예수님 곁에서 예수님의 가르침과 기적, 죽음 등 예수님의 모든 것을 지켜봤습니다. 더구나 부활하신 예수님을 뵙고, 가르침을 듣고, 같이 식사하고 이야기하는 영광의 은총을 받았습니다.
바오로 성인은 예수님의 생애동안 예수님을 직접 만나지는 못했지만 다마스커스로 가는 길에 일생 최대의 사건,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직접 만나고 체험했습니다. 그 후 사막에서 생활하는 동안 여러 번 주님을 직접 만나는 영광을 가졌습니다. 주님과의 만남은 일생동안 또렷이 각인되었고 성령의 은총으로 자신들이 보고 들은 것을 전달하기 위해 쉼없이 선교를 떠날 수 있었습니다.
주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
베드로 성인은 주님 곁에서 주님의 사랑을 직접 보고 체험하였지만 스승께서 고난과 죽음에 처하셨을 때 스승을 부인하는 죄를 저질렀음에도 여전히 자신을 사랑으로 용서하셨다는 것을 체험하였습니다. “베드로야,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라는 부활하신 주님의 물음은 그 어떤 말보다 더 깊이 베드로를 뼛속까지 뉘우치게 했고 용서의 사랑을 체험하게 하였습니다.
바오로 성인 역시, 주님을 만나기 이전에는 그리스도인을 체포하는 사람이었지만 이방인을 선교하는 사람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용서의 사랑을 체험한 그분들은 깊은 사랑으로 답했습니다.
삶의 변화
두 분 성인의 삶은 주님을 떠나서는 무엇 하나 생각할 수 없을 만큼 주님과 가까이 하나되는 사랑이 되었습니다.
우리들 또한 자신만을 믿는 자만한 사람이 아니라 주님의 힘에 의지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신의 뜻에 따라 생각하고 행동하는 삶이 아니라 모든 것을 주님의 뜻에 따라 행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선교에 대한 열정
주님의 사랑으로 그들은 주님의 증거자가 되었고 일생동안 쉼 없이 선교를 하였습니다. 선교의 고단함과 추적, 폭력과 감옥에 갇히는 그 모든 고난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끝내 주님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도 바쳤습니다.
우리 역시 선교에 대한 염원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선교를 어떻게 시작해야 할 지 몰라 주저하고 있다면 두분 성인의 길을 따라야 할 것입니다.
먼저 주님과 가까이 살아야 합니다. 영혼의 삶에서 주님을 만나고, 모든 일을 주님과 함께 하고 주님의 깊은 사랑을 체험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가장 중요한 선교의 첫 단계입니다.
나의 삶을 바꾸어 주님께 의지하는 삶, 의로운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에게 사랑을 나누는 삶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의 모범이 되는 생활과 봉사와 박애 정신을 실천하는 생활을 해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뜻이며 나를 위한 것입니다.
주님, 저희가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두 분의 열정적인 선교를 이어갈 수 있도록 도와 주소서. 아멘.
함께 묵상해 봅시다.
1.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사도의 주님의 사랑에 대한 체험에 대해 생각해보십시오.
2. 선교를 하고자 하십니까? 그러기 위해 준비해야 하는 건 무엇인지 생각해보십시오.
말씀의 실천
1. 선교를 위해 기도하고, 믿음의 모범이 되는 생활과 봉사와 박애 정신을 실천하는 생활, 그것은 무엇보다 나를 위한 것입니다. 그것이 쌓여갈 때 주님의 은총도 쌓여갈 것입니다. 미루지 말고 지금 바로 선교의 삶을 시작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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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복음 선포의 삶
-안으로는 제자, 밖으로는 사도-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느님, 우리를 어여삐 여기소서.
우리에게 복을 내리옵소서.
어지신 그 얼굴을 우리에게 돌이키소서.”(시편67,1)
연중 제29주일이자 제97차 전교주일인 오늘, 우리는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봉헌합니다. 참으로 믿는 이들이라면 누구나 안으로는 주님의 제자, 밖으로는 주님의 사도가 되어 복음 선포의 삶을 삽니다. 바로 이것이 믿는 이들의 신원입니다. 전교주일을 맞이하여 새롭게 확인하는 우리의 정체성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교회는 물론 우리 모두의 존재이유입니다. 언제 어디서든 하느님 중심의 복음 선포의 삶에 충실해야 하는 우리들입니다. 복음 선포의 사명은 오늘 복음에서 보다시피 예수님의 지상명령입니다.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명령한 모든 것을 지키게 하여라.”
세상의 모든 민족들이 누구나 예외 없이 복음 선포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교황님은 전교주일 담화에서 “타오르는 마음, 움직이는 두 발”(루카24,13-35참조)을 주제로 세부분에 걸쳐 참 유익한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1.“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올랐습니다. 선교 활동에서 하느님 말씀은 마음을 밝혀주고 변화시킵니다.
2.빵을 떼어 주실 때에 우리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성체 안에 계신 예수님은 우리 사명의 원천입니다.
3.부활하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다른 이들에게 전하는 기쁨으로 우리는 두 발을 떼어 길을 떠납니다. 언제나 밖으로 나가는 교회는 영원한 젊음입니다.
우리의 복음 선포의 삶이 잘 요약되어 있습니다. 사랑과 기쁨, 감사와 행복의 복음 선포입니다. 언제 어디에서나 우리 삶의 자리, 바로 거기가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참으로 좋으신 주님을 널리 알리는 주님의 제자이자 사도로서 우리의 삶입니다. 여기서 우선적으로 필요로 하는, 꼭 세 번째 강조하는 말마디가 간절함입니다.
“저의 성소는 간절함입니다. 하루하루 수도생활에 전념하게 하는 것도, 날마다 한밤중 일어나 강론을 쓰게 하는 것도 이 간절함입니다.”
저뿐 아니라 우리 수도형제들 하나하나의 성소가 간절함이요 이 간절함으로 삽니다. 이 간절함이 무너지지 않고 견뎌내고 버텨내고 감당하게 하는 힘입니다. 이런 간절한 믿음, 간절한 희망, 간절한 사랑, 결국은 주님으로 모아지는 간절함입니다. 이 간절함은 저절로 주님 사랑을 나누는 복음 선포의 삶으로 표현되기 마련입니다. 어제 써 여러분들과 나눴던 “모두가 다 좋다”라는 짧은 시가 생각납니다. 사랑과 감사, 기쁨과 행복이 응축된 시입니다.
“햇빛 밝은 날은
햇빛 밝은 날대로 좋고
비오는 날은
비오는 날대로 좋고
흐린 날은
흐린 날대로 좋고
모두가 다 좋다
주님이 계시기에”
우리의 삶의 자리 언제 어디서나 우리의 영원한 주님이자 목자이자 스승이자 도반이신 주님이 함께 하신다는 것은 우리의 기쁨이자 자랑입니다. 오늘 복음말미에서 주님 친히 주신 약속입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
세상 사람들 다 떠나도 끝까지 우리와 함께 하시겠다는 임마누엘 하느님,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이 주님과의 날로 깊어지는 우정이 관상의 제자, 활동의 사도가 되어 복음 선포의 사명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게 하는데 결정적 요소가 됨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복음 선포의 삶에 우선적 전제가 주님과의 만남이요 공부입니다. 이래서 파견에 앞서 날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공부를 통한 주님과의 관상적 만남이 절대적입니다. 이사야의 꿈이자 비전은, 환시는 이미 오늘 지금 여기서 거룩한 모임인 미사공동전례로 부터 실현되고 있습니다.
“자 주님의 산으로 올라가자, 야곱의 하느님 집으로! 그러면 그분께서 당신의 길을 우리에게 가르치시어, 우리가 그분의 길을 걷게 되리라. 이는 시온에서 가르침이 나오고 예루살렘에서 주님의 말씀이 나오기 때문이다.”
주님의 산이 상징하는 바, 어디에서나의 성전입니다. 바로 주님을 만나는 오늘 지금 여기 미사전례의 성전 자리가 영적 시온이요 예루살렘입니다. 주님을 만나 기도도 말씀도 배우고 익혀야 하며 성체도 모셔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르는 것이라 일찍이 성 예로니모는 갈파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마음의 귀를 열어주어야 성경을 알 수 있고 성경을 알 때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날마다 거행하는 성찬례가 교회의 삶과 사명의 원천이자 정점일진대 성찬의 빵을 모시는 것보다 더 중요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다음 이사야의 평화의 꿈은 얼마나 황홀하고 멋진지요! 무엇보다 하느님의 원대한 평화의 꿈을 배우는 우리들이요, 복음 선포의 현장에서 평화의 주님과 함께 평화의 사도가 되어 이 평화의 꿈을 실현해야 할 우리들입니다.
“그러면 그들은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고, 한 민족이 다른 민족을 거슬러 칼을 쳐들지 않고, 다시는 전쟁을 배워 익히지도 않으리라. 야곱 집안아, 자, 주님의 빛 속에 걸어가자.”
작금의 전쟁의 시대에 얼마나 화급한, 절박한 주님의 평화인지요! 정말 마음 설레어 뛰놀게 하는 아름다운 평화의 꿈, 평화의 이상입니다. 복음 선포의 삶은 바로 이런 평화의 꿈을 실현해야 함을 깨닫습니다. 멀리 갈 것 없이 바로 우리 삶의 자리가 복음 선포의 현장입니다. 오늘 지금 여기서 평화를 실천하며 주님의 빛속에 걸어가는 겁니다.
그러니 주님을 배우고 공부했으면 관상의 제자로만 머물 것이 아니라 주님 평화의 사도가 되어 각자 삶의 자리로 파견되어야 합니다. 주변 모두가 복음 선포의 대상이자 구원의 대상입니다. 사람들 사이에는 차별이 없습니다. 같은 주님께서 모든 사람의 주님으로서, 당신을 받들어 부르는 모든 이에게 풍성한 은혜를 베푸십니다. 과연 주님의 이름을 받들어 부르는 이는 모두 구원을 받습니다. 참으로 복음 선포의 선교가 얼마나 중요한지 역설하는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심금을 울립니다.
“자기가 믿지 않는 분을 어떻게 받들어 부를 수 있겠습니까? 자기기 들은 적이 없는 분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선포하는 사람이 없으면 어떻게 들을 수 있겠습니까? 파견되지 않았으면 어떻게 선포할 수 있겠습니까? 믿음은 들음에서 오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우리 모두 관상의 제자로 안주할 것이 아니라 주님 평화의 사도로, 또 하나의 예수님이 되어 복음 선포의 사람이 되어 사는 것입니다.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의 발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저절로 찬탄을 받을 것입니다. 참으로 최고의 매력적인, 아름다운 모습은 주님의 빛으로 가득한 복음 선포자의 삶일 것입니다. 끝으로 두 분의 성인의 예를 들고 싶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이 극찬한 다시 소개하는 사막의 성자 샤를로 후코입니다.
“미소로, 단순함으로 성 샤를로 형제는 복음을 증거했다. 결코 결코 개종이 아닌, 바로 증거다. 복음화는 결코 개종을 통해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의 증거(witness), 사랑의 매력(attraction)을 통해 이뤄진다.”
이어 14세기 영국의 신비가 노리치의 율리안나가 전하는 말씀도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줍니다.
“깊은 통회와 연민과 함께 하느님을 향한 참된 열망을 지니고 온유해질 때, 하느님께서 보시는 앞에서 그분의 은총으로 드높여집니다. 그때에 죄와 고통에서 플려나 지복으로 들어 올려지고 마침내 성인이 됩니다. 우리는 통회로 깨끗해 지고, 연민으로 준비를 갖추며, 하느님을 향한 참된 열망으로 의로워집니다. 이는 모든 영혼이 천국에 이르는 세가지 방법입니다.”
참으로 오늘 지금 여기에서 천국을 앞당겨 살게 하는 통회와 연민, 하느님 향한 열망은 복음 선포자의 기본적 자질임을 깨닫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날마다 주님의 사랑의 빛과 향기를 전하는 매력적인 평화의 사도로, 또 통회와 연민과 열망의 사도로 살게 하십니다.
“보라, 내가 세상 끝 날까지 언제나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ㄴ).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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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022.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주일.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사랑>
사랑이신
성부 하느님
사랑이신
성자 예수님
사랑이신
성령
갈림 없는
하나이신
사랑이
부르시어
사랑으로
만드시니
사랑이
되어
사랑이
보내시니
모두가
사랑이 되도록
사랑하러
길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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