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0
6월13일[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사제 학자 기념일/연중 제10주간 화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NcdZ2JNVAio
(박기석 사도 요한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어촌에 살아보니 굴 껍데기로 인한 괴로움이 만만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굴은 어촌 주민들의 큰 소득원이지만 손질하고 남은 폐기물 껍질의 양이 엄청납니다. 동물 사료라든지, 시멘트 비슷하게 만들어 해양 블록 제작 재료로 활용도 되지만, 비용이 만만치 않습니다.
그러나 워낙 양이 많은 관계로, 여기저기 쌓아놓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보기도 흉할뿐더러 악취도 만만치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들의 끝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데가 없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굴 껍데기를 바라보며 나는 과연 쓸모있는 존재인가? 돌아보게 됩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었다는 것을 인간에게 비유하면, 겉은 멀쩡한데, 내면이 텅 비어있거나 부실한 상태를 의미하겠습니다.
겉으로는 살아 숨쉬고, 말도 하고, 먹기도 하지만, 영혼이나 정신, 하느님이나 영적인 측면들이 사라져버린 존재, 그러니 살아있지만, 죽은 목숨이나 다를 바 없는 좀비 같은 존재가 아닐까요?
하느님께서 우리를 이 아름다운 세상에 소풍을 보내주시면서, 참 많은 달란트와 가능성, 자질과 역량을 우리에게 부여해주셨는데, 얼마나 하느님께 되돌려드리고 있는지, 이웃과 세상을 위해 얼마나 소용이 되고 있는지? 다른 무엇에 앞서 하느님 앞에 얼마나 쓸모 있는 존재로 살아가고 있는지 돌아보고 또 돌아봐야겠습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짠맛을 잃어버린 쓸모없는 소금, 다 까먹고 버린 폐각처럼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 성찰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지금 우리의 시대, 가장 큰 문제 가운데 하나가 생명경시 풍조입니다. 경제에만 치중하다 보니 소외된 계층에 대한 인권은 뒷전입니다. 오로지 한 목표를 향해 내 살길만 챙기는 데 혈안이 되다 보니 뒤처진 이웃들의 고통에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이런 시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주어진 중차대한 과제 하나는 생명 운동입니다. 그 어떤 생명이든 모두가 하느님의 작품으로 차별 없이 대우받도록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생명의 숨결이 이미 다 빠져나간 존재, 아무런 의미가 없었습니다. 순식간에 부패하고 순식간에 소멸의 단계로 넘어가더군요. 결국 가장 소중한 것은 생명입니다. 특히 관심을 기울여야 할 생명은 꺼져가는 희미한 생명입니다.
어떻게 해서든 살아있어야 합니다. 어떻게 해서든 무너지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어둠이 깊어도, 아무리 상처가 심해도 상관없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일어서려고 몇 번이고 나를 일으켜 세울 때, 우리도 모르는 사이 하느님 자비의 손길이 살포시 우리 어깨 위에 내려앉을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66MboDO07c8
++++++++++++++++++
<소금이 제맛을 잃는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
예수님은 오늘 복음에서 우리가 빛과 소금이라고 하십니다. 이미 빛과 소금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빛과 소금은 나의 빛과 짠맛으로 무언가에 영향을 준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영향을 주는 일이 ‘착한 행실’, 곧 ‘사랑의 실천’입니다.
예수님은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조금 이해하기 어려운 말씀도 하십니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짠맛을 잃은 소금이 있을까요? 짜지 않은 소금이 있을까요? 그런데도 그럴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오늘 복음이 어제의 ‘행복 선언’에 이어진다는 것에 착안해야 합니다. 맛을 잃은 소금이란 행복을 잃은 그리스도인을 말합니다. 그리고 행복이란 그리스도를 닮아가며 얻는 자존감의 상승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례 때부터 이미 빛과 소금입니다. 하느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믿음은 성령으로 생기고 자랍니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기쁨과 평화입니다. 곧 행복입니다. 행복을 잃은 사람은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그런 사람은 아무리 착한 행실을 보여주려 해도 주님을 찬미하게 만들지는 못합니다.
뤽 벡송이 감독한 ‘레옹’(1994)은 매우 다른 두 캐릭터, 즉 고독하고 감정이 없는 암살자 레옹(장 르노)과 마틸다(나탈리 포트만) 사이의 깊고 특이한 관계에 관한 영화입니다.
여기서 매우 상징적인 소재가 등장하는데, 레옹이 즐겨 마시는 우유와 화분입니다.
우유는 아직 레옹이 정신적으로는 어른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하고, 화분은 그 이유가 땅에 뿌리박지 못한 식물과 같은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레옹은 어렸을 때 살인을 저지르고 더는 성장하지 못한 화분에 심어진 아이와 같은 킬러입니다.
아이와 같은 레옹에게 가족을 잃은 마틸다가 도움을 요청합니다. 마틸다는 어린애입니다. 처음에 레옹은 마틸다를 꺼렸지만, 그녀를 받아들이고 복수를 원하는 그녀에게 살인 방법도 알려줍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살인하면 더는 성장하지 못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마틸다는 레옹의 말을 듣지 않고 원수를 죽이러 가고 그 과정에서 마틸다를 구하기 위해 레옹은 자기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에게 오히려 식물은 화분이 아니라 땅에 뿌리박고 살아야 한다고 말해줍니다. 오히려 정신적으로는 마틸다가 레옹에게 영향을 준 것입니다. 레옹은 글도 읽을 줄 모르지만, 마틸다는 읽습니다. 그리고 사람은 더 큰 사람에게서 성장한다는 것을 압니다.
레옹은 오히려 마틸다에게 사랑을 배우고 희생을 배웠습니다. 마틸다는 레옹으로 상징되는 화분을 땅에 심습니다.
마틸다는 자신이 땅에 심어져야 거기에서 영양분을 얻고 자랄 수 있음을 알았습니다. 레옹은 아닙니다. 성장할 수 있는 에너지를 얻지 못했습니다. 화분은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자라지 못합니다. 그러나 땅에 심어진 식물은 저절로 자랍니다.
누군가에게 좋은 영향을 미치려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이어서는 안 됩니다. 그러면 누군가의 도움만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땅에 심어진 식물은 크게 자라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화분에 심어진 사람이 맛을 잃은 소금입니다. 누구도 짜게 할 수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마리나 채프먼은 원숭이들에게 길러졌습니다. 원숭이들은 자신들의 정체성만큼 마리나를 키웠습니다. 그가 사냥꾼들에게 발견되었을 때 그녀는 사창가의 몸 파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이는 그들의 수준이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다음엔 사랑 가득한 사람을 만났습니다. 그 사람을 통해 결혼하고 가정을 꾸렸습니다. 내가 어느 땅에 심어지느냐에 따라 제맛을 내느냐, 그렇지 못하느냐가 정해집니다.
내가 뿌리박고 있는 땅이 하느님이어야 합니다. 그래야 나를 그리스도로 만드는, 내 안에 그리스도를 잉태하게 하는 성령을 흡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만이 새로운 정체성을 얻고 주님을 찬미하게 됩니다.
하느님께 심어진 소금은 제맛을 잃지 않습니다. 그 맛이 곧 자기 정체성에 대한 믿음입니다.
교리서는 말합니다. “(사제는 누구입니까. 그는)…. 하느님이 될 것이고 다른 이를 하느님이 되게 할 것입니다.”(CCC, 1589)
내가 하느님께 뿌리를 박고 있다면 내 안에 하느님이 계신 것을 먼저 믿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되어감에 행복할 것입니다. 이 맛을 잃으면 화분에 심어진 식물입니다. 누구에게도 도움이 될 수 없습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이 되었음을 믿읍시다.
식물은 땅과 하나입니다. 이 믿음만이 내가 소금이되 짠맛을 잃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는 것과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는 것은 차이가 있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면 이해하게 됩니다. 나의 허물과 잘못도 돌아보게 됩니다. 분노의 바람이 불다가도 마음이 평온해 집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오해하게 됩니다. 상대방의 허물과 잘못이 눈에 들어옵니다. 평온해야 할 마음에 거센 파도가 생기게 됩니다. 신부님들과 캠핑을 갈 때였습니다. 같이 가기로 한 신부님이 10시 30분에 떠나면 좋겠는데 11시에 가자고 했습니다. 11시에 맞추어서 가니 아직 준비가 안 되었다고 합니다. 짐을 정리해서 차에 옮겨 실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프다고 합니다. 짐을 옮기면서 조금씩 짜증이 났는데 허리가 아프다니 할 말이 없었습니다. 이왕 기다리는 것이면 라면이라도 끓여 먹자는 생각에 라면을 먹었습니다. 이번에는 허리가 아파서 못 가겠다고 합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고 생각하면 화가 납니다.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고 생각하니 마음이 편해졌습니다. 성지순례를 하면서 허리가 삐끗했다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주일 미사에도 못 나갔다는 말도 생각났습니다. 예전에 저를 위해서 미사를 대신 해 준 것도 떠올랐습니다. 통증병원에 데려다 주면서 치료 잘 받으라고 했습니다. 캠핑장에 도착하니 다른 신부님들이 준비를 다 해 놓았습니다. ‘그럴 수가 있나’라는 생각이 마음에 일어나면 ‘그럴 수도 있지’라는 생각을 떠올리면 좋겠습니다.
오늘 독서에서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아멘에는 4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 의미는 ‘순명’입니다. 성모님께는 ‘이 몸은 주님의 종이오니 그대로 제게 이루어지소서!’라고 하셨습니다. 요셉 성인께서도 남모르게 파혼을 하기로 했지만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성모님을 아내로 맞이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거두어 주소서.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제 영혼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하느님의 뜻을 따르겠다는 다짐입니다. 성인과 성녀들은 순명의 삶을 살았습니다. 두 번째 의미는 ‘결심’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랑보다 더 큰 사랑은 없습니다. 일곱 번씩 일흔 일곱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하느님과 재물을 함께 섬길 수는 없습니다.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여러분도 하나가 되십시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합니다. 나는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려고 왔습니다. 여러분은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아멘이라는 말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삶으로 실천하겠다는 결심입니다.
세 번째 의미는 ‘청원’입니다. 내비게이션은 정해진 목적지를 향해서 길을 찾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은 비록 잘못된 길을 가더라도 안심할 수 있습니다. 내비게이션은 새로운 길을 알려 주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위해서, 가족을 위해서, 교회를 위해서, 이웃을 위해서, 평화를 위해서, 아픈 이들을 위해서 기도를 드립니다. 그 기도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는 것이 아멘입니다. 네 번째는 ‘찬양’입니다. 우리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목적은 ‘하느님의 더 큰 영광’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뜻이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의 가치가 드러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부귀함보다 가난함을 택할 수도 있고, 건강함보다 질병을 택할 수도 있고, 오래 사는 것보다 일찍 죽는 것을 택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믿고 구원받아서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 태어난 것입니다. 그러기에 아멘은 하느님의 영광을 찬미하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럴 수도 있지’라는 삶을 살아간다면, ‘아멘’의 삶을 살아간다면 우리는 누구나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될 것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소금은 음식을 상하지 않게 하면서 동시에 음식을 맛나게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인들도 방부제 역할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자신이 지닌 참맛을 잃어서는 안 된다. 여기서 말씀하시는 소금은 사도들이 전해준 말씀으로 가득 찬, 참된 지혜로 가득한 마음을 의미한다. 그 소금이 우리 마음에 뿌려지면 지혜의 말씀이 우리 안에 자리 잡는다. 이런 마음을 소금에 비유하는 것은 소금의 좋은 맛과 신선함 때문이다. 소금이 없으면 음식을 썩지 않게 맛나게도 못하는 것처럼, 사도들의 가르침이 없으면, 우리는 건강하지 못하고 활기가 없으며 하느님 보시기에도 아름답지 못하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하겠느냐?”(13절) 우리가 믿음과 지혜를 버린다면, 우리는 당장에 이단에 빠지거나 믿지 않는 이들의 어리석음으로 돌아갈 것이다. 악의 세력에 넘어가 제맛을 잃고 믿음의 은총을 잃어버린 신앙인은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게 된다.
“세상의 빛”(14절)은 참되고 영원하신 분으로부터 비추어져 그들도 어둠 속에서 빛이 되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태양이시고 이제 빛줄기 같은 제자들을 통하여 온 세상에 당신 지혜의 빛을 쏟아 주셨다. 우리는 진리의 빛을 보여줌으로써 오류의 어둠이 사람들의 마음에서 달아나게 해야 한다. 십자가 위에 매달린 그 등불, 빛은 교회 안에 머무는 모든 이에게 영원한 빛을 비추신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15절) 등불은 아버지와 아들이 켜고, 그 등불은 말씀이다. 말씀의 등불은 교회에서나 세상에서나 길을 알려주도록 빛을 내는 것이다. 등경은 생명의 말씀을 지닌 교회이며, 하느님의 말씀을 지닌 모든 사람을 의미하고 있다. 함지라는 것은 악덕으로 등불이라는 덕을 감추는 것인데, 빛을 피해 어둠으로 숨는 사람들의 모습을 말한다.
예수님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로 끝나지 않는다. 예수님은 즉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16절) 하셨다. 이것은 우리의 착한 행실이 남이 보더라도, 우리는 오직 하느님의 영광만을 생각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의 선행이 알려지도록 두는 것은 오로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이다. 이는 사람들이 우리 신앙인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우리의 착한 행실을 삶을 보도록, 빛나고 그들을 가르치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3-16)
예수님의 ‘산상설교’는 당신의 제자들(신앙인들)만을 대상으로 하신 설교가 아니라, ‘모든 사람’을(군중을) 대상으로 하신 설교입니다.(마태 7,28) <제자(신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도 하신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라는 말씀과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있는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인답게 살아라.”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여서 하느님과 세상 사람들과 자기 자신에게 쓸모 있는 존재가 되어라.”라는 ‘부르심’, 또는 권고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들은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다.”라는 뜻의 말씀이 아닙니다.>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이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신앙인이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이라는 뜻이 되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복음을 믿고 받아들이기를 거부하면”이라는 뜻이 됩니다.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라는 말씀은, 표현만 보면 ‘불가능한 일이다.’라는 말씀으로 생각하기가 쉬운데, 그것은 아니고,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구원받을 수 없다.”, 또는 “복음을 거부한 채로 구원받을 수는 없다.”로 해석됩니다.
하느님은 전능하신 분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느님께는 불가능한 일이 없습니다.(루카 1,37) 따라서 하느님은 ‘제 맛을 잃은 소금’도 다시 짜게 하실 수 있는 분입니다. 그렇지만 인간 쪽에서도 믿고, 회개하고, 부르심에 온전히 응답하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여기서 ‘쓸모가 없다.’라는 말은,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한다.”라는 뜻이고, ‘밖에 버려진다.’라는 말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아무 쓸모가 없으니”라는 말씀과 “밖에 버려져”라는 말씀은, 사실상 ‘뜻이 같은’ 말씀입니다. 쓸모없으니까 밖에 버려지는 것이고, 밖에 버려지니까 쓸모없게 되는 것이기도 합니다. <구원받을 자격을 얻지 못하니까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는 것이고, 그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니까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 말씀은, 신앙인답게 살지 않으면, 또는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버려질 것이라는 경고 말씀이기도 합니다. <반대로, 신앙인답게 제대로 살면, 이 세상에서도, 또 하느님 나라에서도 대단히 쓸모 있는 ‘귀한 존재’가 될 것이라는 격려 말씀이기도 합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세상의 등불이 되어라.”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는 빛을 받아라.”라고 부르시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라는 말씀은, 신앙인들에게는 “자신의 신앙을 감추지 마라.”라는 명령이고, 아직 신앙을 갖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내가 주는 ‘구원의 빛’을 외면하지 마라.”라고 타이르시는 말씀입니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전쟁 때 피난처로 삼을 수 있는 고을을 뜻합니다. 여기서는 ‘영원한 안식처’인 하느님 나라를 상징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구원의 빛’은 ‘영원한 안식처’로 우리를 인도하는 빛입니다. 그 빛만 잘 따라가면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교회와 신앙인들이 세상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주는 일은, 바로 그 ‘영원한 안식처’를 알려 주고, 안내해 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주시는 영원한 생명과 안식과 평화는 하느님 나라에 들어간 다음에나 얻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되어서 그곳에서 완성됩니다. 교회와 신앙인 공동체도 지금 여기에서부터 세상 사람들에게 안식처가 되어 주어야 합니다.(이사 56,7) <누구든지, 신앙인이 아닌 사람이라도, 교회에서 참된 안식과 평화를 얻을 수 있어야 합니다.>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라는 말씀은, “세상의 모든 사람을 비추어서 인도하여라.”라는 뜻인데, 가장 먼저 비추어야 할 사람은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 자신이 먼저 올바른 길을 잘 걸어가고 있어야 다른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습니다.(루카 6,39)
<‘아리마태아 요셉’과 ‘니코데모’의 경우를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그 뒤에 아리마태아 출신 요셉이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게 해 달라고 빌라도에게 청하였다. 그는 예수님의 제자였지만 유다인들이 두려워 그 사실을 숨기고 있었다. 빌라도가 허락하자 그가 가서 그분의 시신을 거두었다. 언젠가 밤에 예수님을 찾아왔던 니코데모도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 리트라쯤 가지고 왔다.”(요한 19,38-39) 요셉과 니코데모는 유대인들의 박해가 무서워서 신앙인이라는 것을 숨기고(자신의 등불을 감추고) 살았지만, 예수님의 죽음 때에는 오히려 신앙을 드러내면서 예수님의 장례를 행했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등불로 세상 사람들 앞을 비춘 것과 같습니다. 적극적으로 나섰어야 할 사도들마저도 모두 달아나서 숨어 있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그 두 사람의 행동은 모든 신앙인들에게 모범이 되는 행동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제자들을 소금과 빛에 비유하십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음식 맛을 내는 데 소금이 꼭 필요하듯이, 제자들도 세상에 꼭 필요한 존재들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만일 소금이 짜지 않다면, 그것은 어디에도 쓸모없는 하얀 가루에 지나지 않습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여기서 ‘제맛을 잃다’는 뜻의 그리스 말 동사 ‘모라이노’의 본뜻은 ‘어리석게 되다’입니다. 제자들이 자신의 본분을 잊고 어리석은 길로 향하는 모습을 제맛을 잃은 소금에 비유하신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두 번째 은유도 마찬가지로 제자들이 세상에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존재임을 일깨워 줍니다. 참빛으로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처럼(요한 1,9; 8,12 참조) 그분의 제자들도 세상의 빛으로서 구원의 진리를 선포하는 소명을 지닌 사람들입니다. 따라서 그들은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처럼, 그리고 ‘등경 위에 놓인 등불’처럼 세상 사람들이 바라볼 수 있는 곳에 서서 늘 진리의 빛을 밝히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 그 빛을 바라본 사람들, 곧 제자들의 ‘착한 행실’을 본 사람들은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되고, 그들도 또 다른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 하늘 나라의 복음을 전하는 일꾼이 됩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된 우리는 모두 세상의 빛이며 소금입니다. 그러나 소금의 구실을 하여야만 비로소 소금이고, 빛의 구실을 하여야만 비로소 빛입니다. 우리는 자신을 녹여 싱거운 세상에 짠맛으로 간을 맞추는 참된 소금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 어두운 세상을 환히 밝히는 참빛의 구실을 하고 있는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하늘 나라를 세우는 데 꼭 필요한 일꾼이라면, 그 구실에 알맞은 역량을 기르는 데 노력을 게을리하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김웅태 요셉 신부님]
<너희는세상의 빛이다>
오늘 복음에 "너희 빛을 사람들 앞에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하셨습니다.
예수님 당시에 그 나라 사람들의 말이 "선" 하다는 말에는 두 가지 뜻으로 사용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단순히 성질이 선한 것을 의미하기도 했고, 또 하나는 단순히 선할 뿐 아니라 매력 있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믿음을 가진 자의 착한 행위를 단순히 선할 뿐 아니라, 마음을 끄는 힘이 있는 착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이다.
유감스럽게 누가 어떤 때 착한 행위를 하지만, 무엇인가 굳어지고, 차고, 엄해서 다른 이가 근접하기 어려운 것을 우리는 경험하기도 할 것입니다.
또한 그리스도인의 착한 행위는 사람들의 주의를 자기 자신에게 끄는 행위여서는 안되고, 자신을 통하여 하느님에게로 돌릴 줄 아는 착한 행위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언젠가는 몇몇 젊은이들이 진지한 신앙심을 가지고 철야 기도를 가진 다음에 자기 선생님을 아침에 만났을 때 "선생님 저희 얼굴이 믿음으로 빛나지요?!" 할 때 그 선생님은 "모세는 자기 얼굴이 빛나는 것을 자기 자신은 알지 못했습니다!" 했답니다.
예수님은 당시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 빛이다" 하시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들은 "이방인의 빛"이 되라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민족이 비치는 빛은 그 자체가 빛이 아니라 하느님을 반사하는 빛입니다. 즉, 우리 자신들을 남 앞에 빛으로 비추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느님의 진리의 빛을 받아서 반사하는 하느님의 빛을 드러내는 빛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달이 밝은 것은 달이 태양의 빛을 받아 반사하기 때문입니다.
빛은 사람에게 보여집니다. 이스라엘의 마을은 산 위에 있어서 밤에 멀리서 보면 마을이 빛이 났습니다. 팔레스티나의 가옥은 지름이 50센티미터 정도의 창문 하나로 어두었습니다. 성냥이 있기 이전이므로 한번 끄면 켜기가 어려웠습니다.
등잔을 평소에 나무로 된 등잔대에 얹어 둡니다. 그러나 외출 시에는 흙으로 만든 말 위에 얹어 불날 위험을 없앱니다. 등잔불의 본 기능은 사람들을 비추는데 있습니다.
크리스찬은 어떤 매력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은 착한 행실! 선한 행위로 다른 이들에게 하느님을 아는 빛을 드러내서, 다른 이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여야 하는 것입니다. 아멘.
=====================
[서울대교구 김지영 사무엘 신부님]
<소금의 역할>
소금은 물에 녹음으로써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 수 있고, 또한 음식물에 들어가야만 비로소 자신의 역할에 대해 알 수 있다. 소금은 짠맛을 간직하고 있지만 소금의 진정한 역할은 그것이 담겨진 주위를 짜게 하는 것이다.
소금의 짠맛은 그 자체로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 일단 소금이 음식이나 물에 들어가 녹아 없어지면 물이나 음식을 짜게, 맛나게 해서 제 소임을 다하게 된다.
물에 녹아 없어지지 않는 소금은 아무리 하얗게 반짝이고 언제까지나 썩지 않는다 할지라도 아무 소용이 없다.
소금이 제 모양을 조금도 손상됨 없이 그대로 간직하고 있으면 아무 쓸모가 없다. 녹아 없어지지 않고, 잃지 않고, 손해 보지 않고는 진정한 소금의 역할을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러한 음식은 싱거워서 먹지 못한다.
소금은 자신의 형체를 녹아내리는 아픈 몸부림으로 음식에 스며들어 음식에 맛을 주고 음식의 목적을 달성케 하는 것이다.
소금은 자신의 형체와 모습을 온전히 버리고 비움으로 타인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다. 소금은 자신을 희생제물로 온전한 헌신과 투신을 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한 소금이시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이 가르침대로 예수님은 우리 안에 스스로 녹아들어 마지막 한 점까지도 남김없이 사라질 때까지 진정한 소금의 역할을 하셨다.
우리도 그리스도를 본받아 세상의 소금이 되도록 노력해야 하겠다. 빛과 소금의 삶은 자신의 몸을 녹이고 태워야 하기에 아픔과 고통이 따를 수밖에 없으며 자신의 희생이 요구되는 것이다.
=====================
[대구대교구 조완 리카르도 신부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이 세상 사람들 모두 잠들고
어둠 속에 갇혀서 꿈조차 잠이 들 때
홀로 일어난 새벽을 두려워 말고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겨울밤은 깊어서 눈만 내리고
돌아갈 길 없는 오늘 눈 오는 밤도
하루의 일을 끝낸 작업장 부근
촛불도 꺼져가는 어두운 방에서
슬픔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라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절망도 없는 이 절망의 세상
슬픔도 없는 이 슬픔의 세상
사랑하며 살아가면 봄눈이 온다.
눈 맞으며 기다리던 기다림 만나
눈 맞으며 그리웁던 기다림 만나
얼씨구나 부둥켜안고 웃어 보아라
절씨구나 뺨 부비며 울어 보아라
별을 보고 걸어가는 사람이 되어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
봄 눈 내리는 보리밭 길 걷는 자들은
누구든지 달려와서 가슴 가득히
꿈을 받아라
꿈을 받아라.
- 정호승 시인의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 시집 《서울의 예수》(1982)라는 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라고 하십니다. 세상에서 꼭 필요한 사람…, 없어서는 안 될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빛이 없으면 생물이 살 수 없습니다. 빛이 없다면 이 세상의 화려한 색깔도 내 옆에 사랑하는 사람도 보지 못합니다.
음식에 짠 맛이 없다면 음식은 너무너무 싱거워 아무 맛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 몸에 소금 성분이 없다면 우리는 살 수 없습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우리에게 세상에 꼭 필요한 사람이 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몇 가지 단계를 거쳐야 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나를 필요로 해야 합니다. 세상에서 내가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면 정말 내가 이 세상에서 할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나 자신이 ‘세상은 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면 정말 내가 세상에서 필요 없는 사람이 되어버립니다.
그 다음 환경을 탓하거나 시간을 탓해서는 안 됩니다. 내가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이 세상은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하느님의 일을 하기에 짧은 인생이지만 그런데도 충분한 시간을 보냅니다.
내가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지금부터라도 하느님을 통해 깨닫게 된 모든 것을 이 세상에 전파하기 시작한다면, 이 세상은 충분히 넓고 내 시간은 충분히 여유가 있는 것입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못하는 것은 절대 아닙니다.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우리는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명령입니다.
세상의 빛과 소금, 세상에 희망을 주는 이들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서 필요한 사람…. 나를 보고 다른 모든 사람이 너도나도 빛과 소금이 될 수 있게 우리가 먼저 세상을 위해 나서야 합니다.
앞에서 시인이 노래한 것처럼 절망과 슬픔조차 없는 이 시대, 이 세상에 한 줄기 빛과 한 움큼의 소금이 되어야 합니다. 그렇게 세상에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다신 누구도 이 세상에 희망이 없는 것을 보고, 다른 이들에게 희망을 만드는 사람이 되라는 말을 할 수 없게 우리가 그렇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내 안에 소금이 맛을 잃었다면 그걸 도록 찾도록 기도하십시오. 내 안에 빛이 함지박 속에 갇혀 있다면 그 함지를 치워버리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이 세상에 빛과 소금이 되십시오. 인생을 그리 길게 살지 못했지만 제 기억에 가장 많이 남는 사람들은 바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는 사람입니다.
오늘 하루 여러분 모두 하느님의 사랑 안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이 되길 기도해봅니다. 그래서 다른 이들의 기억에 항상 남는 그런 사람이 되길 기도해 봅니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소금이 짠 맛을 잃으면 이미 소금이 아닙니다. 빛이 빛을 내어 밝게 비추지 못한다면 이미 빛이 아닙니다. 소금이 짠맛을 내고 빛이 빛을 내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이치입니다.
그러므로 그 본성을 찾아 자기 몫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모두 각자의 삶의 자리에서 자기의 역할에 충실할 때 빛과 소금이 됩니다. 특별히 하느님의 자녀가 되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로 부르는 영광을 감사하며 그 품위를 지켜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4)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 소금이 되라, 빛이 되라고 하지 않으시고 이미 소금이요, 빛이라고 확인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맛을 내고, 비추는 것은 당연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맛을 내지 못하고 빛을 내지 못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그 사람은 참으로 한심한 사람입니다. 내가 소금이고 빛이라는 것을 사실을 잊고 살 때가 많음에 부끄러움이 큽니다. 그러니 가끔은 자신에게 ‘정신 차려 이 사람아!’ 하고 꾸짖을 필요가 있습니다.
소금의 중요한 역할은 부패를 막는 것과 맛을 내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세상의 부정부패를 막는 것과 살맛 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마땅한 사명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의 삶은 예수님으로 가득 차 있을 때 빛나게 됩니다. 그리고 착한 행실은 곧 생활화된 신앙을 말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착한 행실은 우리에게 되돌아오는 칭찬을 기대하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 아버지를 찬양하도록 하는데 초점을 맞추게 됩니다. 제자들의 소명이나 오늘 우리의 소명은 결국 빛나는 삶의 행실로 아버지의 영광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의 삶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하늘 아버지를 드러내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삶의 모범으로 표양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에 흔들리지 않고 침착하게 그저 해야 할 일을 함으로써 감사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선을 행하되 자신의 공로에 관한 생각이나 칭찬을 구하지 않음으로써 진실하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이 자기를 포장하여 들어내려고 애를 쓰지만 믿는 이들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통하여 그 믿음의 진실성을 확인받게 됩니다.
따라서 “하느님에 관하여 탐구하지 말고, 선행을 통해서 하느님을 찾으십시오.”(성 골롬바노)
그리고 “이 세상의 선한 행위는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며 하느님께로 귀결”(십자가의 성요한) 된다는 사실을 상기해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모두 이미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 맛을 잃지 않고 빛을 가리지 않는 가운데 행복할 수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우리가 가난한 이들과 병자들을 위해 헌신할 때 그리스도의 향기가 납니다” "그리스도의 향기는 언제나 교회를 증명해준다. 비참함에 짓눌린 사람들은 ‘교회의 우선적 사랑을 받는’ 대상이 된다. 교회는 초기부터 많은 지체들의 과오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끊임없이 그들을 구제하고, 보호하고, 해방시키려고 노력해 왔다."(가톨릭 교리서 2448항)
"교회는 언제나 잘못과 실수를 범해 왔지만, 가난한 이들과 자비의 활동을 할 때에는 언제나 성령님의 이끄심을 따랐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인 배려로 그리스도의 빛이 되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샤워하는데 갑자기 눈이 아픕니다. 눈썹이 눈에 들어간 것 같았습니다. 손으로 비벼서 눈썹을 빼려 했지만 잘 빠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욕실의 거울에 눈을 비추면서 눈썹 하나를 조심스럽게 뺄 수 있었습니다. 이 거울을 보면서 들었던 생각이 있습니다.
거울 앞에 서면 제 얼굴이 보입니다. 이제 거울 앞으로 더 다가가서 거울에 얼굴을 딱 붙여보십시오. 더 가까이에 아니 완전히 붙어있는데도 자기 눈으로 자기 얼굴을 볼 수 없게 됩니다. 즉, 거울을 통해 자기 얼굴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합니다. 이처럼 자신을 제대로 보려면 거리를 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기를 잘 안다고 말하지만, 자신을 모르는 사람이 많아 보입니다. 특히 자기에게 딱 붙어 바라보면 절대 알 수 없게 됩니다.
저 역시 저를 잘 몰랐습니다. 어렸을 때, 말을 잘하지 못했기에 남들 앞에서 말할 일이 없을 것이라고 예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항상 남들 앞에서 말을 해야 합니다. 또 한 가지는 학창 시절에 과제로 글짓기를 하곤 했지만 단 한 번도 칭찬받은 적도 그리고 상을 받은 적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글쓰기 역시 저의 영역이 아니라고 말했습니다. 하지만 지금 제가 그래도 잘한다는 말을 듣는 것이 이 글쓰기입니다.
자기에 관한 판단도 함부로 할 것이 아니었습니다. 나를 제대로 바라보기 위해서는 거리를 둬야 했습니다. 남 보듯이 나를 바라봐야 객관적으로 나를 바라볼 수 있으며, 나를 통해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자기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놓아야 그 안에서 주님께서 적극적으로 활동하시게 됩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13),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 5,14)라고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소금이나 빛은 우리 삶에서 아주 중요합니다. 먼저 소금은 음식의 맛을 낼 뿐아니라, 썩는 것을 막아주기도 합니다. 이렇게 귀한 소금이기에 고대와 중세에는 화폐나 임금의 수단으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빛도 아주 중요하지요. 어둠을 밝게 비추는 역할을 통해 우리가 제대로 앞으로 갈 수 있도록 합니다.
이렇게 귀한 우리임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스스로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쓸모없는 존재인 것처럼, 힘과 재주가 없다면서 늘 뒤로만 물러서려고 합니다.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지 않겠다고 선포합니다.
작은 것을 가지고도 크게 만드시는 주님이었습니다. 빵의 기적만 봐도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은 수많은 군중을 배불리 먹였습니다. 작고 힘없는 우리인 것처럼, 주님께서 우리가 귀하다고 선언하셨기에 정말로 귀하고 중요한 우리입니다. 주님께서 설마 거짓말을 하시겠습니까? 진리의 하느님이신 주님의 말씀은 절대로 어긋나는 것이 없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가만히 있지 마라>
마태오 5,13-16 (세상의 소금과 빛)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가만히 있지 마라>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있는 그곳에
그저 가만히 있지 마라
그대 보내신 하느님의 맛으로
온 누리 살맛나도록
깊숙이 스미어라
그리하여
그대 흔적조차
사라지더라도
사랑하는 나의 사람아
그대 있는 그곳에
그저 가만히 있지 마라
그대 보내신 하느님의 빛으로
온 누리 밝아지도록
널리 비추어라
그리하여
그대 흔적조차
사라지더라도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착한 행실은>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
주님의 오늘 이 말씀에 비추어볼 때 착한 행실이란 한편으로는 사람들 앞을 비추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를 사람들이 찬양케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사람들 앞을 비추지 못한다면 착한 행실이 아니고, 그 행실로 인해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하지 않는다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착해도 그의 행실이 자기를 드러내고 자기가 찬양받기 위한 것이라면 착한 행실이 아닙니다.
사실 많은 착한 행실이 착한 행실임에도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그것이 사랑에서 나오지 않고 자기를 위해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하고, 이웃 사랑 때문에 착한 행실을 해야 하는데 그렇지 않을 때 사람들은 즉시 그것이 자기 과시라는 것을 압니다.
그래서 그것이 사람들에게 빛이 되지 못하고, 그것으로 사람들이 하느님을 찬양케 하는 것이 되지 못합니다.
하느님 사랑 때문에 하느님께 순종하고, 하느님 사랑 때문에 이웃 사랑을 할 때 그것이 착한 행실이고 그것이 이웃에게 빛이 되고 하느님께 영광이 됩니다.
이런 면에서 오늘 코린토서에서 바오로 사도가 얘기하는 주님은 우리의 착한 행실의 모범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그렇습니다. 착한 사람의 입에는 늘 ‘예’만 있습니다.
그렇다고 아무에게나 또 아무 말에나 ‘예’하는 ‘Yes Man’이 아니라 하느님께만 ‘예’하고 하느님 말씀에만 ‘예’하는 착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느님께 순종하기 위해 사람들에게는 ‘아니요’해야 할 때는 ‘아니’라고 할 수 있고, ‘예’해야 할 때는 ‘예’라고 할 수 있어야겠습니다.
사람들에게는 빛이 되고, 하느님께는 찬양이 되는 그런 ‘Yes Man’과 그런 착한 행실의 우리가 되기로 마음먹는 오늘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세상의 소금과 빛>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십시오”-
"주님만 바라고 선을 하라,
네 땅에 살면서 태평을 누리리라.
네 앞길 주게 맡기고 그를 믿어라,
몸소 당신이 해주시리라."(시편37;3.5)
어제부터 마태복음 산상설교의 시작입니다. 늘 읽어도 새롭고 감동적입니다. 어제 주제는 진복팔단의 참 행복이었고, 이를 바탕으로 “성덕의 여정”에 대해 강론했습니다. 결국은 살아야 할 성덕의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후에야 깨달았습니다. 바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의 중심에 예수님이 계시다는 사실을! 참 행복을 그대로 사셨던 예수님은 참행복의 중심中心이자 원조元祖임을 깨닫습니다.
참으로 참행복을 살 때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저절로 참행복을 살게 된다는 것을 늦게야 깨달았습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랑한다면 자발적 기쁨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사랑하여 자발적 기쁨으로 살 것입니다. 바로 이의 모범이 성 베네딕도입니다. 성인은 그의 규칙서에서 두차례 이를 말씀하십니다.
“아무것도 그리스도께 대한 사랑보다 더 낫게 여기지 말라.”(성규4,21)
“그리스도보다 아무것도 더 낫게 여기지 말 것이니, 그분은 우리를 다 함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실 것이다.”(성규72,11-12).
참으로 그리스도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할 때 참행복의 실천이요 성인입니다. 참행복을 살았던 바오로가 예수님의 정체를 감동 깊게 밝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 하느님의 많은 약속이 그분에게서 ‘예’가 됩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도 그분을 통해서 ‘아멘’합니다.”
하느님의 “예스맨(yes-man)”이자 “아멘”이신 예수님을 닮아 참행복을 살 때 우리 역시 하느님의 “예스맨”이 “아멘”이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아멘”을 세례명으로 해도 기막히게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참행복의 진복팔단에 이어지는 소금과 빛의 비유가 의미심장합니다. 바로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하여 진복팔단의 참행복을 살 때 저절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삶이라는 것입니다.
역시 예수님의 삶자체가 세상의 소금이자 빛의 삶이셨습니다. 세상의 원소금, 원빛이 예수님이기에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 때 예수님을 만나 예수님과 일치의 삶도 날로 깊어질 것입니다.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그러나 소금이 제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다시 짜게 할 수 있겠느냐?
아무 쓸모가 없으니 밖에 버려져 사람들에게 짓밟힐 따름이다.”
세상의 소금! 바로 우리의 신원입니다. 비상한 성인이 아니라 이렇게 제 삶의 자리에서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의 소금입니다! 세상을 떠난, 세상과 격리된 소금이라면 무의미합니다. 세상의 소금, 바로 선교가 우리의 존재이유임을 깨닫습니다. 나혼자만의 삶이 아니라 세상 이웃의 소금이 되는 삶입니다.
그러니 부패로 변질變質, 변절變節됨이 없이 한결같이 제맛을 내는 세상의 소금으로 사는 것입니다. 소금이 제맛을 잃듯, 제맛을 잃은 우리 삶이라면 존재이유의 상실입니다. 늘 제맛을 지닐 때 비로소 아름답고 향기로운 매력적인 삶입니다. 젊음은 나이에 있는게 아니라 늘 제맛을 지님에 있음을 깨닫습니다.
바로 세상의 소금이 되어 제맛을 지니고 사는 이가 성인입니다. 세상이 아무리 썩었다 해도 곳곳에 이런 세상의 소금같은 성인들이 있어 유지되고 지탱되는 세상입니다. 저는 주변에서 이런 성인들을 많이 만납니다. 세상의 부패를 막아주는, 세상을 맛나게 하는 세상의 소금 같은 사람들입니다. 소금은 녹아 세상 속에 녹아 사라져 보이지 않지만 세상은 부패되지 않고 제맛을 지니니 얼마나 멋지고 겸손한 삶인지요!
“맛이 갔다!”
음식뿐 아니라 변질된 사람을 빗댄 말이기도 합니다.
“음식은 맛이가면 버리기라도 하는데 사람은 맛이가도 버릴 수 없으니 참 난감합니다.”
언젠가 들은 말인데 수십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습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회개한 성인’은 있어도 ‘부패한 성인’은 없다 말씀하십니다. 부패의 변질을 막아주면서 세상의 소금으로, 제맛을 지니고 살게 하는 것이 바로 끊임없는 기도요 회개임을 깨닫습니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 산 위에 자리 잡은 고을은 감추어질 수 없다. 등불은 켜서 함지 속이 아니라 등경 위에 놓는다. 그렇게 하여 집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을 비춘다.”
세상의 소금 같은 개인이나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세상의 빛과 같은 개인도 공동체도 있습니다. 세상의 빛! 역시 우리의 신원이며 선교는 우리의 존재 이유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의 빛이지 세상을 떠난 빛은 존재 이유의 상실입니다.
어떤 사람은 함께 있으면 분위기가 생생히 살아나고 환해지고 유쾌해지는 느낌이니 이런 이들이 그대로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반면에 어떤 이는 분위기를 무겁게 불편하게 하고 어둡게 하는 이들도 있으니 바로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이 결핍된 이들입니다. 개인뿐 아니라 공동체도 똑같습니다. 과연 내 몸담은 가정공동체는, 수도공동체는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다하고 있는지 자주 살펴봐야 하겠습니다.
“과연 내 몸담고 있는 성 베네딕도회 요셉 수도원은 세상의 소금과 빛의 역할을 잘하며 부패로 변질되지 않고 제맛을 잃지 않고 있는가?”
제가 자주 성찰하는 주제입니다. 부패로 변질됨이 없이 늘 제맛을 지니고 살고자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의 삶이요 제가 매일 쓰는 강론입니다. 바로 참행복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사셨던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러니 정말 변질되지 않고 제맛, 제빛을 내는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기위한 유일한 처방이자 대책은 예수님을 열렬히 한결같이 사랑함으로 날로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닮아가는 길뿐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성인의 삶이요 이것이 세상에 태어난 의미이며 보람일 것입니다. 그 좋은 모범이 오늘 기념하는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성인의 파란만장한 짧은 삶이 불꽃처럼 강렬하고 아름답습니다. 정말 세상의 소금과 빛처럼 시공을 초월하여 한결같이 신선한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아우구스티누스 참사회에 입회하여 생활했으나 소박한 프란치스코회 수도자들의 삶에 매료되어 옮겼고, 이어 모로코에 선교사로 파견되었으나 심한 병으로 포르투갈로 귀국길에 올라 회항 중 배는 심한 폭풍우로 항로에서 벗어나 시칠리아에 당도합니다.
성 안토니오는 토스카나에 도착하여 그곳 수도원에 들어갔고 후에 로마냐의 포를리에서 살게 됩니다. 바로 거기서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와의 결정적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됩니다. 안토니오의 됨됨이를 파악한 성 프란치스코는 1224년 프란치스코회원들의 교육을 안토니오에게 위임합니다.
이후 안토니오는 설교가로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당대 그를 능가할 설교가는 없었으며 어느 학자는 성인을 ‘그리스도교의 자랑’이라 했으며 교황궁에서 한 설교는 ‘성경의 보물창고’라는 칭송도 받았습니다. 어느 분은 안토니오를 ‘이단자를 부수는 망치’, ‘살아 있는 언약의 궤’등으로 불렀습니다. 전설에 따르면 그가 리미니란 곳에서 영감을 받아 바다 물고기들에게 설교했고, 물고기들은 그의 말을 경청했다고 하니 정말 성 프란치스코의 제자답습니다.
성인은 만35세 짧은 나이에 병사한 후 선종한 다음해 1232년 5월 30일 교황 그레고리오 9세에 의해 성인으로 시성되었으며, 1946년에는 교황 비오 12세로부터 교회학자로 선언됩니다. 특히 안토니오는 잃어버린 물건이나 사람을 찾는 이들의 수호성인으로 유명합니다.
정말 믿는 이들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이 살았느냐의 “삶의 양”이 아니라 얼마나 열렬히 한결같이 그리스도 예수님을 사랑했느냐, 그래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실천하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서 잘 살았느냐의 “삶의 질”입니다. 주님의 날마다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날로 우리 모두 주님과의 일치를 깊게 하시며 세상의 소금과 빛으로 살게 하십니다. 우리 모두를 향한 주님의 간곡한 당부 말씀입니다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5,16).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다"(마태5,13.14)
<나도~>
오늘 복음(요한6,51-58)은 '세상의 소금과 빛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소금은 부패하는 것을 막아줍니다. 빛은 어둠을 밝힙니다. 이 세상 안으로 파견되신 예수님은 소금이시고 빛이십니다. 소금과 빛의 모습으로 파견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지금 여기에서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야 합니다.
"이와 같이 너희의 빛이 사람들 앞을 비추어, 그들이 너희의 착한 행실을 보고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를 찬양하게 하여라."(마태 5,16)
오늘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를 기억하는 날'입니다. 안토니오 성인은 포르투칼 리스본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우구스티노 수도회를 거쳐 성 십자가 수도회에서 생활하다가 사제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모로코에서 순교한 작은형제회 첫 순교자 다섯 명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아 작은형제회로 옮깁니다. 이후 이탈리아의 파도바로 파견되어, 그곳을 복음화하는데 아주 큰 역할을 합니다.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는 오늘 본기도에 드러나 있듯이, '뛰어난 설교자요 곤경 속의 전구자'이십니다. 안토니오의 탁월한 설교로 파도바의 거의 모든 사람이 회개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리스본이 아닌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입니다.
오늘 독서(2코린 1,18-22)에서 사도 바오로는 말합니다.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예!'도 되시면서 '아니요!'도 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그분께는 늘 '예!'만 있을 따름입니다."(1,19)
'예!'는 '아멘!'입니다. '아멘!'은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안토니오는, 예수님처럼, 그리고 그의 사부인 아씨시의 성 프란치스코처럼, 하느님 아버지의 뜻(명령)에 늘 겸손하고 기쁘게 "예!"라고 응답함으로써, 파도바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나도 지금 여기에서 말과 행동으로 예수님이 되어 봅시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d-0hxUsGpto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다."(마태 5, 13)
소금에게는
소금의 길이
있습니다.
우리를
살리시는
소금의 사랑을
아낌없이
실천하시는
예수님의
사링입니다.
소금과
설탕은
분명히
다릅니다.
소금이 소금을
구원합니다.
절절한
소금의 사랑을
마지막까지
만납니다.
그래서
신앙이란
소금이 되는
길을 배우는
것입니다.
소금의 목적지는
언제나
지금 여기에서
소금이 되는
것입니다.
소금과 빛은
언제나
함께 갑니다.
우리가
사는 이곳에
소금같은
사람이
살고 있습니다.
더 내려가고
더 자주
하느님 안에서
녹는 소금의
생활이 신앙인의
참된 생활입니다.
가슴으로
사는 삶이
소금의 삶입니다.
녹는 것이
합쳐지는
삶입니다.
더 사랑하기 위해
소금이 되는
소금의 고백입니다.
부풀어 오르는
것이 아니라
녹는 사랑도
있습니다.
녹아야
서로에게
들어갈 수 있는
참된 사랑입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