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대야당 「한나라호」가 가까스로 침몰을 면했다.
가냘픈 한 여성 정치인이 국회 과반 의석을 가지고 있던 「공룡」 한나라당을 멸종 직전에서 살려냈다. 朴槿惠(박근혜) 대표는 총선에서 50석도 건지기 힘들다던 한나라당을 총선 20여 전에 맡아 개헌저지선인 100석을 넘겨 121석이란 의석을 확보했다.
朴대표는 대표로 당선된 지난 3월23일부터 총선 전날인 4월14일까지 하루 두세 시간씩 자면서 한나라당 후보들의 지원유세에 나섰다. 지지율 10%대로 폭락했던 당의 지지도는 「朴風(박풍·朴槿惠 바람)」을 올라타고 꾸준히 상승했다.
대구·경북에서 불기 시작해 부산으로 내려갔던 朴風은 추풍령을 넘어 수도권으로 북상했다. 처음엔 부드럽게만 보였지만, 추풍령을 넘어서까지 바람이 휘몰아쳐 전멸 상태였던 수도권까지 살려냈다.
朴대표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물론 朴대표의 아버지, 朴正熙(박정희) 대통령의 後光이 컸던 것은 당연하다. 유권자들은 朴대표를 보면서 늘 「朴正熙」를 떠올렸고, 陸英修(육영수) 여사를 회상했다.
그것만은 아니었다. 국민들은 어려운 경제사정에 국가혼란 상황들이 겹치면서, 「朴正熙 시대」에 대한 향수에 빠졌다. 왜 국민들은 朴正熙 시절을 그리워하게 됐을까? 朴대표를 23일간 동행 취재하면서 만난, 국민들의 마음은 아마 이렇게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朴正熙 시대에 정치적 억압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시절 경제는 고도성장했고, 대학을 졸업하는 젊은이들에게는 누구나 직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젊은 상사맨들은 해외로 나가서 시장을 개척했다. 당대에 사회 최상류층으로 뛰어오를 수 있다는, 내일은 잘 살 수 있다는 희망이 모두에게 있었다. 사는 게 어렵고, 경쟁이 치열했지만 그 시절 한국인의 얼굴은 밝았다. 청년 실업, 고용 없는 低성장, 사회의 계층화에 시달리는 우리가 가장 간절하게 바라는 것들이 朴正熙 시대에는 모두 있었다」
朴대표 본인의 대중성도 朴風의 진원지다.
朴대표의 고운 외모와 단아한 자세, 늘 맴도는 미소는 뭇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한나라당을 싫어한다는 20~30代도 朴대표가 나타나면 몰려왔다. 10代들은 연예인을 만난 듯 朴대표를 에워싸고 진한 애정표현을 감추지 않았다.
김해공항에서는 수학여행을 가기 위해 대합실에서 기다리던 고등학생 200여 명이 朴대표에게 달려들어 사인공세를 하고, 공항이 떠나갈 정도로 괴성을 질러댔다.
정치가 진지한 정책대결이나 이성 대신, 감성적으로 변한 세태를 반영한 인기였다. 朴대표는 대중성으로 유권자들에게 다가섰다. 50~60代에는 「朴正熙 향수」, 20~30代에는 「얼짱 신드롬」 등으로 인해 朴槿惠는 거대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朴順天(박순천) 여사 이후 첫 야당의 여성대표라는 점도 상품성을 더하는 요인이었다.
朴대표는 이번 총선 지원유세를 통해 자신의 정치지도자로서의 이미지를 확고하게 했다.
우선 자신이 지금까지 지켜온 정치적 소신을 자산화했다. 朴대표는 정치개혁을 일관되게 주장해 왔다. 국민참여와 돈 안드는 선거를 강조했고, 이번 총선 내내 상대방의 비방이나 네거티브 공세에 일체 대응하지 않았다. 이게 유권자들에게 신선하게 다가갔다.
경남 김해에서 만난 한 여성 유권자는 『한나라당에 대해 너무 실망했었는데, 朴槿惠씨가 대표가 되면서 좀 기대를 해도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朴대표는 고리타분하고 수구·보수적으로 인식돼 온 한나라당의 對北정책에 대해서도 유연한 자세를 보였다. 북한을 방문해 金正日 국방위원장을 만나겠다는 이야기도 했고, 앞으로 유연한 對北정책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한나라당이 달라진 모습을 보임으로써 결심을 하지 못했던 부동층을 이끌어오는 데 상당한 역할을 했다는 게 당내의 평가다. 열린당 鄭東泳(정동영) 의장의 표현처럼 한나라당은 朴槿惠 대표의 「치마 폭」 덕분에 살아났다.
朴槿惠 대표가 한나라당을 살려낸 4월15일 總選 때까지 23박24일은 朴槿惠 스스로는 자신의 정치생명과 몸을 던진 처절하고 긴 투쟁의 기록이었다.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습니다』
2004년 3월23일
한나라당 임시전당대회날. 예상을 깨고 朴槿惠 후보가 1차 투표에서 유효투표자의 54%의 지지를 얻어 3개월 임기의 대표에 당선됐다. 당초 이날 경선에서는 朴후보와 洪思德(홍사덕) 후보가 박빙의 승부를 펼쳐 2차 투표까지 갈 것이란 예상이 지배적이었으나 의외였다.
대통령 탄핵 逆風(역풍)에 휘말려 창당 이후 최대의 위기를 겪고 있던 한나라당은 52세의 여성 정치인을 새 선장으로 선택했다. 절박한 위기감은 1965년 민주당 朴順天 총재에 이어 39년 만에 여성 정치인을 대표로 선택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朴대표는 이날 경선에서 『저는 부모님도 없고, 더 이상 얻을 것도 잃을 것도 없는 사람』이라며 『오로지 여러분과 대한민국이 있을 뿐』이라고 말했다. 총선 기간 동안 朴대표의 무기였던 「感性」이 전당대회에서도 통했던 것이다. 그러면서 朴대표는 『제게는 아직 12척의 배가 남아 있다는 忠武公(충무공) 李舜臣(이순신)의 비장한 각오를 되새기면서 이 자리에 섰다』며 『누가 대표가 되는 것을 국민들이 원하고 총선에서 도움이 되는지, 우리 후보들에게 한 표라도 도움이 될지를 생각해 달라』고 말했다.
朴대표는 전당대회에서 선출되자마자 기자회견을 갖고, 『현재의 당사에는 들어가지 않겠다. 오늘 천막이라도 쳐서 내일부터 들어가겠다』고 말했다. 총선에서 국민에게 변화된 모습, 국민이 새로운 눈으로 한나라당을 바로 볼 수 있게 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었다.
대표실에 경제 상황판 설치
2004년 3월24일
朴대표는 취임 첫날을 「속죄의 날」로 정했다. 「차떼기당」이란 오명을 벗기 위한 노력도 발빠르게 실천됐다. 국립묘지 참배, 천막당사로의 이전, 3대 종교의 참회의식 참여 등이었다.
첫 일정은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에서 시작했다. 이른 새벽, 李承晩 前 대통령을 비롯해 아버지인 朴正熙 前 대통령의 묘소를 차례로 참배했다. 이어 국회의사당 앞의 중앙당사로 갔다. 호화당사란 소리를 듣던 그 당사다. 그러나 朴대표는 발도 들여 놓지 않았다. 대신 당직자들과 함께 한나라당 간판을 떼어냈다. 당직자들과 함께 떼어낸 간판을 들고 朴대표는 여의도공원을 지나 중소기업 전시관 빈터에 마련된 「천막당사」까지 걸어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현판식을 가졌다.
朴대표는 「국민 여러분께 드리는 말씀」을 통해 『국민에게 지은 죄를 진심으로 참회하면서, 오늘부터 이곳 천막에서 새로운 한나라당의 길을 설계하고자 한다』며 『당사를 천막으로 옮겼다고 해서 국민에게 저지른 잘못을 용서받을 수 없겠지만, 깨끗한 정치를 향해 새롭게 출발하려는 마음만은 받아 주시기를 부탁드린다』고 말했다.
朴대표는 『한나라당이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며 『한나라당에 대한 노여움을 푸시고, 새 출발을 하는 한나라당을 지켜봐 달라』고 했다. 참회를 바라보던 사무처 요원들의 눈에 눈물이 어렸다.
입주식을 마치자마자 朴대표는 곧바로 상임운영위원회의를 주재하면서 『기존의 중앙당사를 폐지하고, 천막당사로 모든 것을 옮기라』고 지시했다. 朴대표의 지시에 따라 다음날부터 대표실에 실업률과 환율, 주가변동 등의 수치가 담긴 경제현황판이 등장했다.
朴대표는 이어 가톨릭, 기독교, 불교 등 3大 종교의 참회의식에 참여했다. 명동성당과 조계사, 영락교회를 잇달아 방문했다. 가톨릭 신자인 朴대표(세례 이름은 율리아나)는 명동성당에서 고해성사를 올렸다. 그리고는 곧장 조계사로 가서 108배를 올렸다. 당초 3000배를 올리겠다는 의지를 표명했으나 주지인 지홍스님은 『큰일 할 사람이 몸을 상해선 안 된다. 숫자가 중요한 게 아니다』고 만류했다.
朴대표는 이날 처음으로 불교식으로 절하는 법을 배웠다. 108배를 올리기 전 죽비(불교에서 수행자를 지도할 때 사용하는 법구)를 쳐주기 위해 옆에 섰던 일수 스님에게 어떻게 절하는지를 물었고, 그대로 따라했다. 朴대표가 108배를 시작하자 조계사 신도 30여 명이 따라했다. 『딱, 딱』 소리에 맞춰 朴대표는 따박따박 절을 올렸다. 30여 분이 흐르는 동안 朴대표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어느 한순간 朴대표의 다리가 흔들렸을 때 마죽비 소리가 세 번 울렸다. 108배가 끝났다는 신호였다. 함께 절하던 일수 스님의 머리와 얼굴에는 줄줄 땀이 흘렀다. 그러나 朴대표는 땀을 전혀 흘리지 않았다. 여성 신도들은 『成佛(성불)하세요』,『(대표당선을) 축하드립니다』라고 앞다투어 악수를 청했고, 일부 신도는 『힘내세요』라며 박수를 쳤다.
朴대표는 『잘못을 사죄하고 참회하는 마음을 108배에 담았다』며 『정말 깨끗하게 거듭날 수 있도록 하겠다』고 거듭거듭 말했다.
영락교회에서는 이철신 담임목사를 만난 뒤 저녁예배에 참석했다. 李목사는 『朴대표에게 거는 기대가 크다』고 했고, 朴대표는 『정치가 걱정만 끼쳐드려 죄송하다』고 고개를 숙였다.
취임 첫날은 이렇게 흘렀다. 바쁘게 일정을 소화했으나, 이는 앞으로 다가올 朴대표의 살인적인 스케줄과 비교해 보면 느긋한 시간이었다.
朴대표는 이날 열린당과 민주당 방문계획을 잡았으나 무산됐다. 민주당은 흔쾌히 승낙했으나 열린당 측이 『탄핵에 대한 사과를 하지 않으면 올 필요가 없다』고 거절했다.
눈물 흘리는 남대문 시장 상인들
2004년 3월25일
새벽부터 본격적인 「뉴 한나라 플랜」을 가동했다.
새벽 5시, 서울 북창동 인력시장을 찾았다. 경기가 좋지 않아 인력시장 자체가 서지 못하자 朴대표는 바로 남대문시장 순방에 나섰다. 「민생탐방」의 시작으로, 총선 선거운동 내내 朴대표는 가는 곳마다 시장을 둘러보며 민생을 챙기는 「시장 유세」를 알리는 서곡이었다.
「朴風」의 조짐은 이날 새벽시장에서부터 나타났다. 가는 곳곳마다 상인들이 몰려와 朴대표의 손을 잡았고, 『너무 반갑다, 동네가서 자랑해야지』, 『(당대표 당선을) 축하한다. 너무 멋지다, 잘해 달라』고 했다. 朴대표의 사인을 받으려고 장사진을 이뤘고, 상인들은 『장사가 잘되게 좀 해달라』고 부탁했다.
상인들은 이구동성으로 朴正熙 前 대통령과 陸英修 여사를 언급했다. 朴대표의 모습을 보고 눈물을 흘리는 상인들도 있었다.
朴대표가 서민들을 만나는 스타일은 기존 한나라당 대표들과는 달랐다.
예전의 당 대표들은 대부분 수행원들에 둘러싸여 이리저리 흔들리다 돌아오기 일쑤였는데, 朴대표는 최소한의 수행원만 데리고 시민들과 악수했다. 꼼꼼히 시장 경기를 물어보고, 사인을 해주면서 친근감을 표현했다. 딱딱한 격식은 찾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안내하는 당직자가 나가는 곳을 잘못 알아서 시장을 다시 돌아나올 때도 朴대표는 불평 한마디하지 않았다.
들어가는 곳과 나오는 곳의 동선을 일일이 파악하고 철저한 계획에 따라 움직이던 예전 당 대표들의 스타일과는 사뭇 달랐다.
새벽시장을 둘러본 뒤 朴대표는 모 언론사의 행사에 참석했다가 택시를 타고 「천막당사」로 향했다. 행사장에서 열린당 鄭東泳 의장과의 조우가 기대됐으나, 오겠다고 했던 鄭의장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朴대표는 이날 민생탐방의 일환으로 택시를 타고 당사로 향하던 도중, 택시기사의 쓴소리를 많이 들었다. 운전사 최금철씨는 朴대표에게 『정치인들이 죽어라고 싸움만 하니 나라가 이 꼴이다. 서민들만 다 죽는다. 내 얘기가 바로 성난 민심의 목소리』라고 말했다.
최씨는 朴대표가 『제가 대표가 되면서 국민들이 먹고 사는 문제를 챙기는 데 당력을 집중하려고 하고 있고, 이렇게 당사까지 옮겼다』고 하자 『한나라당이나 열린당이나 모두 당사 가지고 쇼하는 것을 다 알아요』라고 말을 잘랐다.
朴대표는 택시기사와의 만남에 대해 『혼이 많이 났다』고 했으나 이 경험이 총선기간 동안 『먹고 사는 민생정치를 챙기겠다』고 여러 차례 언급하는 계기가 됐다. 朴대표의 「택시탐방」에 이어 열린당 鄭의장도 이후 「택시번개」라는 이름으로 택시를 타고 민심을 듣는 등 민생투어의 한 방식이 되기도 했다.
朴대표와 鄭의장의 만남은 번번이 좌절됐다.
YTN 초청 5당 대표토론회가 이날 오후 예정돼 있었으나, 鄭의장이 불참을 통보하면서 무산됐다. 열린당 측은 朴대표가 막 대표로 선임된 상황에서 굳이 토론회에 참석하면서까지 朴대표를 띄워 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한 것으로 알려졌다.
朴대표는 이날 朴世逸(박세일) 서울大 국제대학원 교수를 영입, 비례대표 출마자를 선정하는 「공천심사위원장」에 임명했다. 비례대표 선정을 둘러싼 진통이 거듭되면서 朴대표는 첫 시련을 맞았다. 당내의 갈등과 당 밖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조정해 줄 사람도 없는 상황. 朴대표는 모든 짐을 자신의 어깨에 짊어지고 이를 헤쳐나가야 했다.
鐵女
2004년 3월26일
경제행보는 이날도 이어졌다. 중소기업협동중앙회와 대한상공회의소, 증권거래소 등을 잇달아 방문하면서 경제살리기 이미지 부각에 힘썼다.
일정이 점점 많아지면서 朴대표의 수면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었다. 대표선출 이후 연일 2~3시간밖에 자지 못했다. 「鐵女(철녀)」 소리가 당 주변에서 저절로 나왔다. 남성 정치인과 달리 머리손질 등에 드는 시간이 많아 시간부족 현상은 더했다. 그러나 자신의 사이월드 홈페이지에 소개한 대로 단전호흡 등 평소 건강관리가 큰 도움이 됐다.
손가락만으로 푸시 업을 할 만큼 朴대표의 건강상태는 좋다.
朴대표는 이날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해서 「실천하는 정치」를 강조했다.
그녀는 『중소기업이 잘돼야 한국 경제가 제대로 된다』며 『그동안 정치권은 좋은 말만 많이 했지만, 앞으로는 말이 50%면, 실천이 절반이 될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증권거래소를 방문했을 때 예전의 정치인 방문 때와 달리 株價가 올랐다.
朴대표는 이날 10.57포인트가 오른 株價를 쳐다보며 『우리 당 지지율도 좀 같이 올랐으면 좋겠다』고 속내를 털어놓았다.
대한상공회의소 방문 때는 朴容晟(박용성) 회장이 예전에 언급했던 「기업할 수 있는 나라 만들기」를 강조했다.
당내 갈등 해결도 朴대표의 선결과제였다. 당 개혁을 요구하면서 한강 둔치에서 천막농성을 하고 있던 소장파들을 방문해 당내 화합을 당부했고, 소장파들은 농성을 중단했다.
열린당 鄭東泳 의장은 이날 朴대표에게 「1 대 1 토론」을 제의했다. 전날 YTN이 주최키로 한 5당대표 TV토론에 鄭의장이 불참한 것이 朴대표와의 대결을 의도적으로 피하는 것처럼 비쳐지자 전격제안한 것.
朴대표는 『만나자고 할 때는 자꾸 피하더니 지금 와서 왜 만나자는지 모르겠다』며 『특히 다른 당 대표들도 있는데 두 사람만 토론한다는 것은 좀』이라고 거절했다.
2004년 3월27일
용산과 청량리 지역의 민생탐방이 이어졌다. 서울역 앞 후암동 「쪽방촌」을 찾아가 실직, 신용불량 등 갖은 사연을 품고 고단한 삶을 이어가는 영세 서민들을 위로했다. 이어 청량리 재래시장과 동대문 의류전문상가를 방문했다. 젊은이들과의 즉석토론을 갖는 등 바닥으로 파고들었다.
朴대표는 햇빛이 하나도 들지 않는 1평 남짓한 쪽방에서 손자, 손녀와 함께 네 식구가 살고 있는 주기선(68)씨 부부로부터 『사회 밑바닥 계층도 잘 살 수 있도록 해달라』는 말을 듣고 『어려운 분들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다짐했다.
첫 방문지 光州에서 「巨與 견제론」 제기
2004년 3월28일
광주방문이 결정됐다. 첫 지방 나들이를 광주로 잡은 것은 민주화세력에 대한 화해의 몸짓이었다. 朴대표는 이날 오전 광주 망월동 5·18 묘역을 찾았다. 정치권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3共 회귀론」에 대한 대응이었다.
朴대표는 방명록에 『민주화를 위해 숭고한 희생을 하신 분들께 진심으로 경의를 표하며 다시는 이런 슬픈 역사가 없기를 기원한다』고 적었다.
묘역을 찾은 광주시민들은 먼 발치에서 朴대표를 지켜봤다. 악수를 거절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한 대학생은 朴대표에게 다가가 사인을 받았다. 대학생은 『가까이서 보니까 참 좋은 것 같다. 한나라당을 좋아하진 않지만 잘 변화했으면 좋겠다』고 했다. 朴대표는 지역민들에게 『이제 광주로부터 사랑받고 싶다』며 『이념과 세대, 계층으로 갈가리 찢긴 나라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한마음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朴대표는 이 자리에서 처음으로 「巨與(거여) 견제론」을 제기했다. 그는 『열린당이 엄청나게 뜨고 있는데, 우리로선 얻을 의석이 거의 없다는 위기감이 있다』며 『견제와 균형의 정치를 이루는 것도 생각해 달라』고 했다. 탄핵 이슈를 지역일꾼 뽑기로 변화시키려는 안간힘이었다.
朴대표는 『총선은 국정에 대한 심판이고, 나라를 위해 일할 수 있는 人材를 선발하는 기회』라며 『탄핵찬성이냐 반대냐, 親盧(친노)냐, 反盧(반노)냐로 결정되는 것은 불행한 일』이라고 말했다. 국정심판론도 제기하면서 「泣訴(읍소)」했다.
「탄핵총선」이 계속될 경우, 한나라당이 참패할 수 있다는 위기감 때문이었다. 이날부터 朴대표는 선거날까지 20~30분 단위로, 심할 때는 10분 단위로 이동하며 유세를 펼쳤다.
朴대표는 한나라당 대표로는 사실상 처음으로 광주의 거리에서 시민들과 만났다.
다른 대표들은 망월동을 참배하고 기자간담회나 당 행사만 갖고 光州를 떴으나, 朴대표는 달랐다. 휴식 일정을 취소하고 충장로로 나갔다. 충장로는 광주의 「젊음의 거리」이다. 반응은 뜨거웠다. 예상밖이었다. 몸을 움직이기 힘들 만큼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사방에서 카메라폰이 터졌다. 손을 흔들거나 소리를 지르는 사람도 있었다. 40代인 김상도씨는 『대통령도 잘못하면 탄핵되어야 하는데, 열린당이 너무한 것 같다』며 『후보는 민주당, 정당명부제는 한나라당을 찍겠다』고 朴대표에게 말했다.
朴대표는 『한나라당도 호남에서 사랑받기 위해 이렇게 찾아왔다』며 『희망이 보이는 것 같다』고 화답했다.
朴대표의 한 측근은 『광주에서 이렇게 환영받을 줄은 꿈꾸지 않았다』며 『표가 될 지를 떠나 朴대표의 대중성을 확인하는 기회였다』고 흥분했다.
오후 늦게 광주에서 올라온 朴대표는 비례대표 선발을 둘러싸고 고심을 거듭했다. 원래 이날 비례대표를 결정하기로 했으나, 하루 늦췄다. 朴世逸 위원장은 심야에 朴대표와 만나 의견을 교환했다.
朴대표는 『저도 잠 좀 자게 해주세요』라고 주변에 하소연했다.
울산에서 시작된 「朴風」
2004년 3월29일
선대위 발대식을 하는 날이었다. 오전내내 날이 흐리다가 조금씩 개기 시작했다. 한 당직자는 『이런 날 비까지 오면 너무 암담할 텐데 다행』이라고 했다. 朴대표는 이 자리에서 『검증되지 않은 인물을 뽑으면 정치의 질이 나빠진다』며 『국정심판과 지역일꾼을 뽑는 선거에 신중한 선택을 부탁한다』고 호소했다.
선대위 발대식을 마치자마자 朴대표는 울산으로 내려갔다. 탄핵 이후 6개 지역구 전체가 흔들리는 상황. 긴급하게 「SOS」를 받은 朴대표는 내려가자마자 全지역구를 순회했다. 공항에서 朴대표를 맞는 후보들의 얼굴은 死色(사색)이었다.
朴대표의 울산방문은 산업화 세력 껴안기의 일환으로 해석됐다. 영남권에 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전초전이기도 했다. 朴대표는 울산지역 기자간담회에서 『열린당이 뜨는 것은 반사이익 때문이나 반사이익은 물거품과 같은 것』이라며 『이제 약간 희망이 보인다. 변화와 개혁의 모습을 보이면 다시 지지받을 수 있다』고 말했다.
朴대표는 중소기업지원센터를 방문하는 등 서민과 함께 하는 민생·경제정당으로의 환골탈태도 약속했다.
『朴風이 서서히 부는 조짐이 보인다. 울산 지역구를 돌자마자 울산에서 분위기가 좀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나오고 있다. 후보들도 朴대표를 맞는 유권자들의 반응을 보면서 굉장한 바람이 불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한나라당 선대委 핵심관계자).
朴대표의 울산방문은 「朴風」의 시작이기도 했다.
朴槿惠의 눈물
2004년 3월30일
처음으로 TV방송 토론에 나서는 날이었다. 朴대표는 이날 방송기자클럽 토론회에 참석한 뒤 TV 광고를 녹화했다. 그리고 밤에는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에서 젊은이들과 만났다.
이날의 화제는 TV광고에서 보여줬던 朴槿惠의 「눈물」이었다. 감성정치의 극단적 표현이란 비판도 받았지만, 朴대표의 애절하고 처절한 눈물은 유권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朴대표는 이날 총선 TV방송연설에서 먼저 삶을 비관한 가족동반 자살사건, 청년실업 등을 상기시킨 뒤 「조국 근대화의 깃발」을 들었던 아버지 故 朴正熙 대통령에 대한 국민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朴대표의 눈물은 1960~1970년대 해외근로자 파견 및 베트남 파병을 언급하면서 터졌다.
『못 먹고 못 입으면서 자식에게 만큼은 이 가난을 물려주지 말자는 일념으로 허리띠를 졸라매고 열심히 일해 왔다. 가난이 제일 큰 적이었고 그렇게 가슴에 맺힌 한을 풀기 위해서 우리는 정말 열심히 일했다. 그렇게 일으켜 세운 대한민국이 무너지고 있다. 마지막으로 한나라당에 기회를 한번 더 달라.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오늘의 제가 있을 때까지 국민이 부모가 됐다. 바른 정치로 국민에게 진 큰 빚을 갚고 싶다. 10명의 자식을 둔 어머니는 아무리 어려워도 자식을 굶기지 않는다. 그런 정신으로 하겠다』
한나라당은 朴대표의 눈물이 상당한 효과를 가져올 것으로 내심 기대했다.
朴대표는 이날 저녁, 서울의 대표적인 젊음의 명소인 삼성동 「코엑스몰」을 찾아 1시간 이상 식당가와 서점 등을 돌았다.朴대표를 맞는 20~30代 젊은이들은 사인공세를 펴고 카메라폰을 찍어댔다.
한 여대생은 『여성으로서 朴대표가 1당의 대표가 된 것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했고,朴대표는 『인터넷 사이트 「싸이월드」에 홈페이지가 있으니 놀러오라』고 말하며 젊은이들과 가까워지려고 노력했다. 코엑스몰의 한 CD가게는 朴대표가 들어오자 「새마을 노래」의 리메이크를 계속 틀었다.
젊은이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인파가 몰려든 것은 비슷했으나, 朴대표가 누군지 모르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누구야, 얼굴 많이 봤는데』
『어, 朴槿惠인가?』
『朴槿惠가 누구야?』
『朴正熙 부인』
황당한 대화들이 주변에서 쏟아졌고, 『야, 강금실이다』라는 젊은이도 있었다.
朴대표의 코엑스몰 방문은 한나라당에 등을 돌리고 있는 20~30代 젊은층 유권자를 겨냥한 것이었다. 이에 앞서 가진 방송기자클럽 TV토론회에서는 무난하게 질문들을 소화했다.
朴대표는 『과거 잘못을 뉘우치고 국민신뢰를 회복하는 정당으로 거듭나겠다』면서 『마지막 기회를 달라』고 호소했다. 朴대표는 특히 부패와의 단절을 강도높게 강조했다. 그는 『부패와의 단절을 위해 어느 당보다 분발해야 한다』고 한 뒤 선거비용 인터넷 공개, 국고보조금 매월 보고, 선관위 감사 등을 제시했다.
朴대표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朴正熙 後光(후광)」에 대해 솔직하게 입장을 정리했다.
『아버지는 국가관을 심어 줬다. 국익을 위해 어떤 양보도 하지 않았다. 또 사심 없는 정치였다. 국가관과 사심 없는 마음으로 임한다는 것이 좌우명이다. 산업화와 경제발전을 아주 압축적으로 시키는 과정에서 부정적인 면도 있었다. 그 점은 정말 확고하게 확실하게 바로잡아야 한다. 後光은 그 시절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사람이 많다는 것으로, 칭찬으로 생각한다』
朴대표는 『경제발전을 하는 과정에서 민주화에 소홀했던 점을 인정한다』며 『당시 피해를 받은 분들에게는 죄송하다』고 말하기도 했었다.
이날 朴대표는 비례대표 후보명단을 최종 결정했다.
우여곡절 끝에 비례대표 1번을 金愛實(김애실) 한국外大 교수에게 배정했다. 남성후보는 공천심사위원장인 朴世逸 선대위원장을 2번에 배치했다. 당료들에 대한 배려가 부족하다며 일부 사무처요원들은 당무 거부에 들어가는 등 진통이 있었다.
朴대표는 당료대표들을 직접 만나 다독거렸고, 총선에만 매진할 수 있었다.
「울지마라 근혜야」
2004년 3월31일
천안을 시작으로, 충남, 충북, 대전을 거쳐, 대구, 부산, 경남으로 이어지는 2박3일간의 유세가 시작됐다. 차량으로 서울에서 천안까지 이동한 朴대표는 하루에 10여 개의 일정을 소화하면서 강행군을 시작했다.
이날 천안에서는 전날 TV광고에서 보였던 「눈물의 연설」이 화제였다. 천안 중앙시장 방문 때는 한 여성 유권자가 급하게 달려오더니 『잠깐만요, 잠깐만요, 너무 보고 싶었어요』라며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면서 그 시민은 『어제 왜 우셨냐』고 물었다.
朴대표는 『감정이 북받쳤다. 한동안 울음을 몰랐는데, 나도 모르게 울음이 났다』고 했다.
가는 곳마다 환영인파들이 들끓었다. 대전의 지하상가를 방문하는 동안에는 여고생들이 달려들었다. 분식점에서 저녁을 먹었다. 朴대표는 육개장에 거의 손을 대지 못했다. 연일 이어지는 강행군 때문일까?
朴대표는 『원래 조금씩 자주 먹는 편인데, 요즘은 밥맛이 좀 없다』고 했다.
대구에 도착해서는 그동안 소홀했던 지역구(대구 달성)를 찾았다. 비공식적인 일정으로, 지구당 관계자들과 만나 인사하는 정도였다.
2004년 4월1일
새벽부터 다시 시작이다. 농산물시장인 매천시장에서는 경매를 하던 상인들이 잠시 일손을 멈췄다. 朴대표에게 마이크를 넘기며 한 말씀을 부탁했다. 상인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朴槿惠 연호가 터졌고, 새벽에 온다는 소식을 듣고 택시까지 타고 찾아온 시민들이 있었다.
朴대표가 탄 버스가 떠나려고 할 때는 100여 명이 손을 흔들며 아쉬워했다.
朴대표는 이 자리에서 깨끗한 정치를 강조했다. 집에서 새는 바가지가 밖에서도 샌다며 돈쓰고 불법선거하는 후보는 국회에서도 그럴 것이라며 공명선거를 강조했다.
朴風은 대구 서문시장에서 폭발했다. 상인들은 즉석에서 종이박스에 「울지마라 근혜야」, 「근혜 보면 눈물 난다」 등의 환영문구를 써서 朴대표를 맞았다. 朴대표가 가는 곳마다 시민들이 몰렸고, 朴대표는 즉석 연설을 여러 차례 하고서야 시장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2~3층 상가에서는 상인들이 난간에 매달려 朴대표를 환영했고, 『우리나라도 여자 대통령 한번 해야지』하는 상인이 있었다. 약국 주인이 건강에 조심하라고 드링크제와 비타민을 건네고, 주민들이 건넨 야쿠르트가 넘쳤다.
朴대표는 「巨與 견제론」을 집중 강조했다.
『지금 상태로 가면 여당이 200석 이상을 독식한다고 한다. 지난 1년 동안 흔들렸던 국정을 견제하기 위해서는 힘있는 야당이 필요하다. 한나라당의 미래에 국운이 달려 있다. 우리는 대오각성하고 국민들의 먹고 사는 문제에 치중하겠다』
朴대표는 이날 대구에서 부산까지 고속철을 타고 이동했다. 朴대표는 고속철에서 기자들의 질문을 받았다. 이때 처음으로 목표 의석을 언급했다.
朴대표는 『개헌저지선을 못 지키면 힘들지 않겠느냐』며 『대구의 열기를 부산, 전국으로 몰고 갔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TV 방송광고에서 눈물을 흘린 것에 대해서 언급했다.
그녀는 『국민께 용서를 호소하고 탄핵과 관련해 당 대표로서 「나는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하겠다」고 말한 것이었다』며 『저도 왜 그렇게 눈물을 쏟았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朴대표는 『그동안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힘든 일을 많이 겪어 더 흘릴 눈물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녹화 중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계속 솟았다』고 했다.
부산 남천 해변시장, 못골시장 등의 시민들은 朴대표를 따뜻하게 맞이했다.
밤에는 비가 내렸다. 그러나 朴대표는 젊은이들이 몰리는 남포동 「PIFF광장」을 찾았다. 朴대표의 팬클럽인 「朴槿惠 대통령 만들기 운동본부」 회원들이 나와 朴대표를 환영했고, 젊은이들은 디지털 카메라를 내밀며 함께 사진을 찍자고 했다.
朴대표는 기자들의 요청에 호프집에서 간담회를 가졌다. 연일 계속되는 빡빡한 일정이었지만, 朴대표는 흔쾌히 응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에 목소리까지 잔뜩 잠긴 朴대표는 『조금씩 국민들의 마음이 열리는 것을 느낀다』며 『마지막 기회라는 생각을 갖고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책임감이 강하게 들었다』고 말을 꺼냈다.
朴대표는 「왜 이렇게 힘든 일을 사서 하느냐」는 기자의 물음에 가볍게 웃었다. 그러면서 朴대표는 『부모님이 몸져 누워 있으면 자식이 약초도 캐오고 하면서 병을 낫게 하려고 노력하는 게 당연한 것』며 『힘들다고 포기할 수는 없지 않느냐』고 했다.
이날 열린당 鄭東泳 의장의 「60~70代 폄하발언」이 알려졌다. 朴대표는 『이해가 안 된다』고만 했다. 중앙당에 지나치게 대응하지 말라는 지시를 이미 내린 시점이었다.
朴대표는 『선거운동을 다니면서 너무 바빠 흰머리가 늘고, 손톱 깎을 틈도 없다』고 했다.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못해 힘들다고 호소했다.
巨與 견제론에 이어 「국정 심판론」 제기
2004년 4월2일
공식선거운동이 시작됐다. 부산 공동어시장을 찾은 뒤 경남 마산의 3·15 국립묘지 참배로 朴대표는 지원유세를 시작했다.
경남 기자들과 창원에서 만난 자리에서 공식 출사표를 던졌다. 朴대표는 이번 총선의 의미를 「盧武鉉 정부에 대한 심판」이라고 못박고 「巨與 견제론」을 재삼 강조했다. 또 지방순방에서 어느 정도 자신감을 얻은 듯 「국정 심판론」을 조심스럽게 제기했다.
朴대표는 『1년 동안 盧武鉉 대통령이 국정 이끄는 것을 보고 이대로 4년을 더해도 되는지 국민들이 심판해야 한다』며 『정치와 총선에만 「올인」하는 정부가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 국민이 심판해 줘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朴대표는 경남 창원을 출발해 마산→진해→김해→양산→서울로 이동했다.
마산 어시장에서는 鄭東泳 의장과의 조우가 예상됐으나 鄭의장이 「노인폄하」 발언이 예상 외로 파장이 커지면서 급거 상경하는 바람에 불발됐다.
朴대표는 창원에서 『창원은 아버지가 관심을 갖고 계획한 곳이어서 특별히 남다르게 생각하고 있다』고 했다. 朴대표는 이날 창원 가음정 시장에는 붉은색 무개차를 타고 나타나 눈길을 끌었다. 마산 어시장에서는 유세차에 한 상인이 뛰어올라 朴대표와 포옹하는 장면이 연출됐다.
盧武鉉 대통령의 고향인 김해 유세에서도 500여 명의 주민들이 몰렸다.
朴대표는 『총선 선거일은 지역일꾼을 뽑는 날이고, 나라 발전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는 날』이라며 『못난 한나라당이 착한 한나라당으로 거듭나겠다』고 했다.
朴대표의 유세를 지켜보던 20代의 한 여성은 휴대전화로 친구와 통화하면서 『朴槿惠는 괜찮아 보이는데, 그래도 열린당 찍을기다』라고 했고, 한 50代의 한 남성은 『죽은 朴正熙는 왜 자꾸 끄집어내냐』고 퉁명스럽게 얘기했다.
경남도당의 한 관계자는 『朴대표의 울산 방문 이후 전멸 분위기던 한나라당이 조금씩 살아나고 있다』며 『慶南에서 좋은 성적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는 『李會昌(이회창) 대통령 후보가 왔을 때와 비교해 보면 오늘 분위기가 훨씬 좋다』고 했다.
마산의 3·15 국립묘지 참배 때 「朴槿惠는 3·15를 더럽히지 말라」고 적힌 현수막이 내걸리고, 「열린사회 희망연대」의 회원 10여 명이 『朴正熙의 망령 朴槿惠, 참배 말라』는 구호를 외쳤다.
당의 「네거티브 캠페인」 요청을 거절
2004년 4월3일
대표 취임 후 첫 지방 방문지를 광주로 택했던 朴대표는 충청을 거쳐 영남권에서 지원유세를 펼친 기세를 몰아 주말 이틀동안은 최대의 승부처로 꼽히는 수도권 공격에 나섰다. 인천이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인천상륙작전」이라고 했다. 한국전쟁 때 낙동강에서 밀렸던 국군이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세를 역전시켰듯 朴대표가 영남권에서 남동풍을 불러일으켜 추풍령을 넘기려는 시도였다.
朴대표는 「경제우선」 발걸음을 시도했다.
그는 경제자유구역을 조성 중인 송도매립지를 찾아 현안을 들었고, 희망의 나무를 심었다. 朴대표는 이 자리에서 『과거 일로 싸우는 것은 이제 지양하고 세계와 경쟁해야 한다』며 한나라당이 경제특구법 통과에 앞장 선 사실을 상기시켰다.
朴대표는 문학경기장에서 열리고 있는 프로축구 개막식에 참석했다. 경기장을 한 바퀴 돌면서 인사했고, 가족단위의 관람객들이 큰 박수로 맞아줬다.
열린당 鄭의장의 노인폄하 발언에 대한 대응 자제를 지시했던 朴대표는 이날 인천 만수2동 아파트 단지內 경로당을 찾아 「老心(노심)잡기」를 병행했다.
朴대표는 경로당에 있는 40여 명의 노인들과 만나 『얼마전 스스로 목숨을 끊은 평택의 15세 소녀가장은 죽기 전에도 병든 어머니를 위해 밥을 한솥 지어놓는 효심을 보였다』며 『한국인의 마음속에는 효도와 어르신을 모시는 피끓는 심정이 흐른다고 생각한다』고 했다. 우회적으로 鄭의장을 비판한 것이다.
한나라당의 한 관계자는 『朴대표에게 노인발언과 관련해 약간 네거티브적 성격이 강한 발언을 요구했는데, 거부당했다』며 『朴대표가 네거티브 캠페인에 대해서는 알레르기 반응을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朴대표는 실제로 유세기간 내내 상대방에 대한 폭로나 공세를 하지 않았다. 朴대표는 이날 아홉 곳의 일정을 소화하고 밤늦게 귀경했다.
陸여사가 자주 찾던 「라자로 마을」 방문
2004년 4월4일
주말유세 이틀째. 朴대표는 陸英修 여사가 자주 찾았던 한센병 환자 수용소인 경기 의왕의 「聖라자로 마을」을 찾았다. 陸여사가 지어준 「정결의 집」 앞에서 朴대표는 과거를 회상했고, 환자들의 손을 일일이 다 잡아 주었다.
마을 관계자는 朴대표에게 과거 陸여사가 기공식에 참석했던 사진과 朴대표가 어린 시절 방문했던 사진 등을 선물로 주었다.
朴대표는 『여러분들을 뵈니까 정치의 목적이 무엇인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다』며 『여러분들의 생활을 더 편하고 세심하게 챙길 수 있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이 자리에는 孫鶴圭(손학규) 경기지사가 참석해 朴대표를 지지하는 듯한 발언으로 선거법 위반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全지역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밀리고 있던 수원. 朴대표가 방문한 수원 영동시장에는 수원지역 4개 지역구 후보 전원이 모였다. 지지자들은 대형 태극기를 내걸었고, 「근혜 누나, 사랑해요」 등의 플래카드를 걸었다.
朴대표는 이자리에서 공명선거를 다짐하는 배지를 각 후보들에게 직접 달아 주었다.
분당지역의 반응은 뜨거웠다.
중앙공원에는 1000여 명의 유권자들이 몰렸고, 삼성프라자 방문 때는 수십 명이 따라다니며 朴대표를 성원했다. 朴대표는 이날 서울 중구 신당동 떡볶이촌에서 저녁식사를 한 후 대학로 마로니에 공원을 방문하는 것으로 일정을 마무리했다.
하루 주행거리 1500km
2004년 4월5일
식목일 아침. 朴대표는 속초에서 동해안을 따라 포항까지 내려오는 동해안 유세를 펼친 뒤 다시 경북과 충청을 거쳐 서울로 올라가는 1박2일간의 일정이 잡혀 있었다.
朴대표는 서울 강서구 구암공원에서 주목을 식수한 뒤 양양行 비행기를 타기 위해 김포공항으로 향했다. 그러나 비행기가 결항이었다. 바람 때문에 양양공항 착륙이 불가능하다는 것. 朴대표는 차량행을 택했다. 이때부터 서울에서 속초·강릉·동해·삼척·영덕·포항·대구로 이어지는 「천리마」행군이 이어졌다.
朴대표를 수행하던 한 당직자는 『하루에 뛴 거리가 1500km가 넘을 정도』라고 말했다. 따라다니던 기자들도 10시간이 넘는 이동거리 때문에 고생을 했다.
朴대표는 우선 강원지역 공약부터 발표했다.
핵심은 「동계올림픽의 강원유치」였다. 열린당이 전북 무주로 동계올림픽을 유치하려는 것에 맞서 강원도 민심을 끌어당기려는 의지였다. 朴대표는 단호하게 『2014년 동계올림픽 유치가 강원도민의 염원으로 떠올랐는데, 전북과 유치경쟁도 있지만, 개인생각에서는 자연환경이나 조건이나 시설조건이나 인지도 등 여러 면에서 강원도가 적지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총선 결과 강원도에서 한나라당은 상당한 선전을 했다. 「평창 카드」가 먹힌 것이다.
朴대표는 鄭東泳 의장의 탄핵 취소를 위한 토론을 단호하게 거절했다.
『憲裁의 판결을 차분하게 기다리고 승복하는 길만 남았는데, 새삼스럽게 무슨 토론을 벌이고 하는 것이 별로 도움이 되는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憲裁의 어떤 판정이 나더라도 그것을 깨끗하게 겸허하게 수용하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朴대표는 이때부터 1시간씩 이동하고 10여 분 유세하는 일정을 빡빡하게 소화했다. 경북경찰청은 한나라당의 요청에 따라 朴대표의 차량을 에스코트해 줬다. 경찰의 협조가 없었다면 朴대표가 일정을 다 소화할 수 없었다.
朴대표는 이날 TV 카메라에 머리를 부딪히고, 다리를 접질렀다.
악수하느라 오른손이 부어올라 파스를 붙였다. 朴대표는 아픈 손을 부여잡는 유권자들에게 일일이 환한 미소로 응대했다. 웃음이 몸에 체화된 듯했다.
『陸여사가 오셨다』
2004년 4월6일
대구에서 1박한 朴대표는 구미를 찾았다. 朴正熙 대통령의 고향이다. 원래 구미를 찾을 때마다 朴대통령의 生家를 찾았지만, 이번에는 포기했다. 괜한 朴正熙 향수를 자극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싶지 않았다.
「민주 對 反민주」로 선거판을 짜려는 의도에 대한 경계였다.
朴대표는 대신 구미의 한 요양원을 찾았다. 노인환자들을 수용한 시설에서 朴대표는 환자들의 손을 잡았다. 과거 陸英修 여사의 자애로움을 환자들은 기억하는 듯했다. 심지어 한 환자는 『陸여사가 오셨다』고 했다.
朴대표는 노상리 경로당 앞에서 가진 유세에서 「孝」를 유독 강조했다.
朴대표는 의성과 안동, 영주 등을 거쳐 충북 보은으로 이동했다. 대전에서는 한 아파트內의 노인정을 찾아 노인공약을 발표했다. 암·골다공증을 검진할 때 무료로 해주고, 치매 등 요양시설 이용자에 대한 세제 지원 등이 골자였다.
朴대표는 鄭東泳 의장이 또 다시 여야 대표회담을 제의한 데 대해서 단호했다.
『도대체 왜 만나야 하는지 모르겠다. 鄭의장만 헌법재판소 결정에 승복을 약속하면 되는데, 총선 후유증을 왜 우려하는지 알 수 없다. 오히려 鄭의장이 국민들을 위해 憲裁 결정을 100% 수용하겠다는 약속을 하라. 또 열린당의 비방과 흑색선전 등을 중단하라는 약속을 하라』
朴대표는 6일 유세 때 유난히 흑색선전과 비방에 대한 목소리를 높여갔다. 그는 영주 유세에서 『요즘 난생 처음으로 매일매일 욕을 먹고 있다. 하루가 멀다하고 흑색선전에 비방을 해대는데 견딜 수가 없다』고 했다.
특히 朴대표는 『개혁을 하겠다고 태어난 열린당이 하는 이 같은 행태가 개혁이냐』며 『욕 먹고 참는 게 힘들지만 국민을 위해 끝까지 참겠다』고 했다.
일부 언론이 「朴대표가 시계를 만들어 돌렸다」는 기사를 내보내고, 이를 토대로 열린당이 비난성명을 발표한 것에 대한 분노 표시였다.
열린당이 비난한 시계는 2002년 제작하다가 더 이상 만들지 않은 것으로 시점도 내용도 불명확한 것이었다.
朴대표에게 오는 「SOS」가 급격하게 늘어났다.
경북 문경·예천의 申榮國(신영국) 의원은 朴대표의 차량을 납치하다시피 자신의 지역구로 모셔가 지원유세를 벌였다. 朴대표가 서울에 도착한 시간은 밤 12시가 넘어서였다.
울산 시당 관계자 『민심이 변하는 게 피부로 느껴진다』
2004년 4월7일
두 번째로 울산을 찾는 날이었다. 울산의 全지역구를 순회한 朴대표는 다시 비행기를 타고 제주로 향했다. 울산에서 朴대표를 맞는 후보들의 얼굴이 1차 방문 때에 비해 활짝 개어 있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朴대표는 「손뼉론」을 얘기했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데, 상생의 정치를 하려고 해도 여당이 너무 흑색선전을 해서 어쩔줄을 모르겠다. 네거티브 캠페인을 안 하겠다는 약속을 꼭 지키겠다』
가는 곳곳마다 청중들은 구름처럼 몰렸고, 朴槿惠의 인기는 대단했다.
울산시당의 한 관계자는 『전멸할 줄 알았던 울산이 그나마 숨을 쉴 수 있게 됐다』며 『거리에 나가 보면 민심이 변하는 것을 피부로 느낄 수 있다』고 말했다.
朴대표를 보는 주민들의 눈길은 따뜻했다.
역전시장에서는 시민들이 『쪼만해 가지고 보통이 아니네』라고 했고, 손을 잡으려는 시민에게 옆사람이 『신문도 못 봤느냐. 손이 많이 아프더라』며 손을 잡지 말라고 말렸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하던 아주머니들까지 뛰어나왔다. 미용실 주인은 朴대표가 비를 맞으면서 유세를 하는 바람에 머리 스타일이 헝클어지자, 머리를 손봐 주겠다며 朴대표의 손을 끌었다.
제주로 향하는 朴대표는 비행기 안에서 머리를 끄덕이며 졸았다.
朴대표는 제주 유세 때부터 다시 오른손에 파스를 붙였다. 오른손을 잡기만 하면 화들짝 놀랄 만큼 통증이 심해져 왼손으로 사람들과 악수했다.
朴대표에게 제주의 인심은 후했다. 제주 해녀들은 갓잡아 올린 전복을 선물했고, 감귤로 만든 초콜릿 목걸이가 건네졌다. 朴대표의 고생에도 불구하고 제주도에서는 단 한 석도 건지지 못했다.
제주에서 서울로 향하기 직전, 한 언론에서 「朴대표가 총선 이후 북한을 방문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고 보도한 것이 전해졌다. 다음날 예정됐던 외신 기자회견에서 언급하려던 내용이었다. 동행하던 기자들은 난리가 났다. 물을 먹은 것이었다.
공항에서 朴대표를 기다리던 기자들은 비행기에서 간단한 인터뷰를 요구했고, 서울 김포공항에 내려서 약식 간담회를 가졌다. 밤 10시를 훌쩍 넘긴 시간이었다. 朴대표는 『한나라당의 對北정책이 다소 경직됐다는 비판이 있는데, 한반도의 평화구축을 위해 미국과 북한을 방문할 생각』이라고 했다.
한나라당의 보수적인 색깔에 비해 다소 전향적인 방향으로 한발 다가선 셈이었다. 젊은층의 표심을 자극하기 위해서는 「수구·꼴통」이란 이미지를 벗는 게 중요하다는 판단이었다. 朴대표는 살짝 對北문제의 자세 변화를 언급했을 뿐, 당의 이념과 정책은 왼쪽으로 옮기지 않는 선에서 절충점을 찾았다.
「시집은 아무나 가는 게 아니더라」
2004년 4월8일
외신 기자회견을 가진 뒤 재향군인회 정기총회에 참석했다.
朴대표와 鄭東泳 의장은 어색하게 만났다. 鄭의장은 이날 보수성향의 모임에서 줄곧 불편함을 느꼈고, 반면 朴대표는 뜨거운 환영을 받았다.
두 사람은 모임 내내 아무 말도 하지 않았고, 사진기자들의 요청에 겨우 악수를 나눴다. 중간에 민주당의 최명헌 사무총장이 끼어 있었던 탓인지, 두 사람은 행사동안 앞만 쳐다봤다.
연설 때 두 사람에 대한 향군회원들의 반응이 극단적이었다.
朴대표는 연설도중 수십여 차례의 박수를 받았지만, 鄭의장은 네다섯 번 정도 박수를 받았다. 鄭의장은 연설이 끝나고 퇴장하면서 향군 회원들의 거센 항의를 받았다. 노인폄하 발언 때문이었다.
『말만 앞세우면 뭐하냐』
『똑바로 해』하는 항의가 鄭의장의 뒤통수를 때렸다.
朴대표는 행사가 끝나자마자 경기지역을 순회했다. 朴대표는 이동 중에 도시락으로 점심을 때웠다. 도시락은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싸준 김밥이었다.
2004년 4월9일
서울·경기·인천 14곳에서 유세다. 10분 단위로 이동하는 게릴라 유세였다.
朴대표는 유세 출발에 앞서 천막당사에서 「디지털 선포식」을 가지면서 20~30代를 겨냥한 청년공약을 발표했다. 일자리 창출, 사병 월급 인상, 보육시설 확대, 이공계 대학 지원, 모기지론 활성화 정책 등이 포함됐다.
이날 朴대표는 「근혜야 도와줘!」라는 이벤트를 갖고, 네티즌과 한 시간 동안 인터넷으로 대화를 했다. 네티즌들은 「악수하느라 부은 손은 어떠냐」, 「얼짱 문화에 대한 견해는 뭐냐」, 「결혼은 왜 안 했나」 등 호기심어린 질문을 던졌다.
朴대표는 『부은 손에 국민의 사랑과 기대가 담겨 있다』, 『얼짱, 몸짱 못지않게 맘짱이 최고다』, 『시집은 아무나 가는 게 아니더라』고 재치 있게 답변했다.
2004년 4월10일
강원도를 다시 찾았다. 주위에서는 『강원도에 더이상 갈 필요가 없다』고 했지만, 朴대표가 가겠다고 결심했다. 한나라당은 예상 밖으로 6석의 의석을 강원도에서 얻었다.
朴대표는 원주 중앙시장에서는 열린당 鄭의장의 『과반수 1당이란 목표에 빨간불이 커졌다』는 발언을 겨냥한 듯 『거대한 초대형 여당이 탄생할 것이라는 조사가 나오고 있지 않느냐』고 반문했다.
朴대표는 이날 하루 10개 시장을 방문하고 9군데에서 거리유세를 했다.
유세현장에는 이날도 300명에서 1000명에 이르는 지지자들이 몰려들어 「朴槿惠 대표의 손을 아껴 주세요」라고 적힌 피켓을 흔들었다.
강원지역의 한 후보는 『과거에는 청중을 동원하려면 굉장히 힘이 들었는데, 朴대표가 온다는 말만 해도 요즘은 사람들이 몰린다』고 말했다.
싸우지 않겠다
2004년 4월11일
하루 동안 해야 할 유세가 20곳을 넘어서면서 『朴대표의 복제인간이 필요하다』는 말이 나왔다. 朴대표는 이날 하루 포천에서 양주, 의정부, 파주, 일산, 은평, 서대문, 마포, 종로 등을 연쇄 방문하면서 수도권 바람몰이에 나섰다.
朴대표는 이날 처음으로 한나라당의 상징인 파란색 점퍼를 입었다. 전날 강원지역 순방 때는 발이 휘청거릴 정도로 몸상태가 좋지 않아 수행원들을 긴장시켰다.
朴대표는 유세 내내 『싸우지 않겠다』는 말을 계속했다. 국민들이 정쟁에 지쳐 있다는 점을 朴대표는 잘 알고 있었다. 이렇게까지 부드럽게 선거를 치러도 될까 싶었지만, 朴대표의 고집은 질겼다. 일부에서는 이슈를 만들어서 싸움을 해야 야당이 승리할 수 있다고 했으나, 우직할 만큼 원칙을 고수하는 모습이었다.
당의 한 관계자는 『처음에는 야당의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朴대표가 꾸준히 깨끗한 선거, 싸우지 않는 정치를 역설하는 것을 보고 국민들이 진솔하게 받아들일 수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기존의 정치틀을 깨려는 朴대표의 노력이 과거에 젖어 있던 당직자들의 마음까지 흔드는 듯 했다.
狂風으로 변한 부산의 朴風
2004년 4월12일
朴대표가 경남·부산지역을 다시 찾았다. 예전에 들르지 못했던 접전지역이 대상이었다. 現 정권의 실세인 金斗官(김두관) 前 행정자치부 장관과 맞붙은 朴熺太(박희태) 의원 지역구가 첫 방문지였다.
朴대표는 경남 김해 유세 때 전날 열린우리당의 許仁會(허인회) 후보가 『朴正熙 대통령의 스위스 은행 비자금이 유입됐다』는 의혹제기를 정면 반박했다.
그녀는 김해 김수로왕릉 앞 유세에서 『열린당 許仁會 후보가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정자금이 나에게 건네졌다고 주장하는데, 새 정치를 위해 끝까지 규명돼야 한다』며 『許후보가 내일까지 관련 자료를 내놓지 않을 경우 법적 조치를 취하겠다』고 했다.
朴대표는 열린당의 「청중동원설」에 대해 『열린당이 우리가 돈 주고 청중을 동원했다고 하는데 여기 돈 받고 온 사람 있느냐』고 반문했다.
부산의 朴風은 「狂風(광풍)」으로 변해 있었다.
접전지역으로 꼽혔던 부산 영도의 金炯旿(김형오) 의원에게는 朴대표가 구세주처럼 보였던 모양이다. 남항시장에는 수천 명의 인파가 1시간 동안 朴대표를 기다렸다. 4차선 도로를 가득 메운 사람들은 朴槿惠의 손을 한 번이라도 잡아보려고 기를 썼다. 태풍이 부는 느낌이었다. 길이 막혔지만,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다.
부산시당 관계자들은 상기된 표정으로 『부산은 뒤집어졌다』고 외쳤다. 불과 20일 전만 해도 3분의 1도 건지기 어렵다고 死色이었던 사람들이었다.
열린당 鄭東泳 의장은 이날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선대위원장직과 비례대표에서 사퇴했다. 노인폄하 발언에 따른 지지율 하락을 막기 위한 고육책이었다. 朴대표는 보고를 받고는 『아, 네, (잠시 있다가) 알았습니다』라고 말했다. 경쟁당 내부의 일에 무슨 할 말이 있겠느냐는 의미였다. 그녀는 鄭의장의 사퇴를 언급하지 않고 무시해 버렸다.
마지막으로 애국심에 호소
2004년 4월13일
서울의 취약 지역인 강서·강북지역을 순회했다. 총 26곳이었다.
이동시간을 줄이기 위해 朴대표를 수행하는 차량은 「신호 무시, 차선무시」였다. 최대한 시간을 단축해 보려고 했지만, 유세 때마다 몰려드는 인파 때문에 출발이 지연되면서 朴대표는 밤 11시까지 움직여야했다.
밤 10시가 넘으면 마이크를 사용할 수 없는 탓에 육성으로 청중들에게 인사해야했다.
朴대표의 원칙을 철저히 지켜 연설원 등록을 하지 않은 경우에는 절대 연설을 하지 않았다. 일부 지역구에서는 표찰이 준비되지 않자, 다른 사람의 표찰을 朴대표에게 건넨 적도 있었다. 그러나 朴대표는 자신의 사진이 아닌 것을 보고는 거절했다.
2004년 4월14일
유세 마지막 날 朴대표는 서울·경기·인천·부산·대구로 이어지는 마지막 유세를 벌였다. 이날부터는 「5분연설」로 유세 시간을 최대한 줄여 가며 될수 있는 대로 많은 지역을 돌기 위해 애썼다. 메시지는 「후보도 기호 1번 한나라당, 정당도 기호 1번 한나라당」. 압축적인 표현으로 유권자들에게 기호 1번을 강조했다.
朴대표는 對국민 호소문에서는 애국심을 호소했다. 朴대표는 『내일은 앞으로 4년간 나라를 이끌고 갈 일꾼을 뽑는 날』이라며 『대통령을 위해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이 아니라 국민을 위해 일할 일꾼을 뽑는 것』이라고 말했다.
朴대표는 『우리 역사는 말 많은 소수가 아니라 조용한 다수의 땀으로 이끌어왔다』면서 『말은 없지만 누구보다 나라를 사랑하는 여러분의 애국심을 보여줄 때』라고 강조했다.
朴대표는 그러나 부산의 긴급호출에 화들짝 놀란 듯했다.
주말을 고비로 한나라당의 지지율이 정체하고 있다는 보고 때문이었다. 예정에 없던 부산역 유세를 하기로 했다. 지역구인 대구에 내려가기 전 부산으로 방향을 돌린 것이다. 朴대표의 최종 지원유세 덕분에 부산은 17 대 1로 한나라당이 압승할 수 있었다.
대구를 마지막으로 찾은 朴대표는 지역구민들에게 고개를 숙였다. 그동안 지역구를 찾지 못한 미안함 때문이었다. 시험을 앞둔 학생 모양으로 대구 자택으로 들어간 朴대표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朴대표는 『온몸이 부서질 지경까지 내몰렸지만, 혼신의 힘을 쏟은 만큼 후회는 없었다』고 했다.
다음엔 승리해야죠
2004년 4월15일
운명의 날. 朴대표는 대구 지역구에서 투표한 뒤 서울로 올라왔다. 긴장된 시간이 흐르고 각 방송사의 개표방송이 시작되던 시간, 朴대표는 혼자였다. 예상보다 큰 의석차로 열린당이 승리하는 것으로 나왔을 때 朴대표는 당혹스러워 보였다.
오후 8시쯤 당사에 도착한 朴대표는 그러나 『감사하다』고 했다.
朴대표는 개표과정에서 한나라당 후보들이 선전하면서 개표방송과 달리 한나라당 의석이 120석 가까이 늘어나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국민께 한 약속을 지키고, 초심을 잊지 않고, 바른 길만 가겠다』고 다짐했다.
집으로 가면서 朴대표는 자신의 큰 뜻을 감추지 않았다.
한 당직자가 『無에서 有를 창조했다』고 하자, 朴대표는 『지금부터 잘해서 다음 번엔 승리해야지요』라고 했다.
朴대표를 수행했던 한 당직자는 기자에게 이런 얘기를 했다.
『부끄럽다. 朴槿惠란 상품 하나에 거대 의석을 가진 보수정당이 목숨 걸듯 매달려 선거를 치를 수밖에 없었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으나, 朴대표는 온몸을 던졌다. 이제 朴대표에게서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올바른 정치, 과거와 다른 정치로 보답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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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동의 드라마... 주착없이 눈물이 또 나옵니다...
눈물이 다나네....ㅡ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