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 건설이 초읽기에 들어가며,
박정희 대통령은 각 부처에 고속도로 건설소요비용 예산계획을 편성할 것을 지시합니했다.
구체적인 경로나 공법에 대한 설명 없이 ‘총 길이 428km의 고속도로’만을 공지한 상태였다.
여기서 재미있는 사건이 있었는데. 각 부처에서 제출한 예산안은 완전히 제각각이었다.
건설부는 650억, 재무부는 330억, 육군 공병감은 490억, 서울시는 180억을 써서 냈는데,
최고가와 최저가의 갭이 470억 원이나 났던 이유는 예산 산정 기준이 완전히 달랐기 때문이다.
건설부는 세계 공사비 표준을 기준으로,
서울시는 일반적인 시내 도로 건설비용을 바탕으로 예산안을 작성했다.
최고액을 제출해 민망해진 주원 건설부 장관은 다른 부처들을 향해
“그 돈으로 책임지고 건설하게 하라”고 분노했다고 전해진다.
한편 박정희 대통령은 보고받은 예산안을 든 채 정주영 현대그룹 초대 회장을 만납니다.
당시 현대건설은 태국의 파타니-니라티왓 고속도로를 수주해 완공(1968년 3월)하며
국내에서 유일하게 고속도로를 건설한 경험이 있는 건설사였다.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현대건설은 서울-부산 간 고속도로 건설비용을 280억 정도로 추산해 대통령에 보고했다. 고속도로 예산은 최고액과 최저액의 중간치,
그리고 현대건설이 제출한 280억 원을 참고해 300억 원으로 정해집니다.
이에 예비비 10%를 더해 총 330억 원으로 결정되었다.
고속도로는 시기상조다
물론 고속도로 계획이 모두의 찬성 아래 진행된 건 아닙니다.
일부 지식인들은
자동차 한 대조차 우리 손으로 생산하지 못하는 처지인데다
차량보급률도 미미한 나라에서 고속도로 건설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을 제기했다.
실제로 1967년 우리나라 차량 대수는 6만대에 불과했고,
1969년까지 도로 포장률은 8%밖에 되지 않는 실정이었다.
포장도로도 흔하지 않던 시기에 고속도로라는 개념이 일반 시민들에게 존재할 리 없었다.
당시 야당이었던 신민당 국회의원들도 고속도로 건설안에 이견을 제기합니다.
경부고속도로의 건설이 성공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는 지금에 와서 그들의 변을 해 보자면,
야당 의원들도 고속도로 건설 자체를 반대한 것은 아닙니다.
한때 조작된 사진과 ‘고속도로 공사 현장에 드러누웠다’는 이야기가 퍼졌지만, 이도 사실과는 다릅니다.
다만 주원 장관이 박정희 대통령으로부터 고속도로 건설을 가장 우선순위에 두고 재가 받은 것에 대해
야당은 ‘날치기 재가’라 하며 비난했다.
예산 편성도 제대로 되어 있지 않고,
경제개발 5개년계획에 포함되지 않는 고속도로 공사를 선순위로 할 수 없다며 주 장관의 사퇴를 촉구합니다.
야당 의원들은 수도권과 충청을 지나 영남으로 꺾이는 고속도로의 경로에
그들의 정치 기반이었던 호남이 제외되었다는 점에서 지역 소외나 불균형 발전을 우려했습니다.
실제로 고속도로의 노선이 대략적으로 정해지고 공사 시행이 결정되자,
호남과 강원지역의 반발이 크게 있었다.
정부는 청주를 지나는 고속도로의 노선을 대전을 지나는 것으로 변경하고,
이곳을 분기점으로 호남고속도로를 신설할 것을 약속합니다.
또한 영동고속도로 건설 계획을 꺼내들어 강원지역의 반발을 잠재웠다.
우여곡절 끝에 삽을 뜬 ‘영끌 고속도로’
한편, 고속도로 건설 준비가 한창이던 1960년대 후반 우리의 경제지표는 어땠을까요.
인구는 3,013만, 1인당 국민총생산(GNP) 142달러, 수출액은 3억 2,000만 달러였습니다.
경제개발 5개년계획이 순탄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각종 지표는
여전히 전형적인 후진국의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세계은행의 차관도 거절당했고,
국회의 예산안 동의를 받는 것도 녹록치 않은 상태에서 고속도로를 건설할 수백억의 돈을 구할 길이 없었다.
어떻게든 자금을 끌어 모아야 했다.
정부는 일단 세금을 인상해 세수를 확보합니다.
석유류세법의 개정으로 휘발유세가 두 배 인상되었고, 각종 통행세가 신설되었습니다.
50억 원 가량의 도로 공채를 발행해 운수업 등 도로교통 관련 기업들이 소화하게 했다.
한일협정 당시 일본에게서 받은 27억도 고속도로 건설비로 사용됩니다.
정말 가용할 수 있는 온 돈을 끌어다가 보탠 ‘영끌 고속도로’였던 셈입니다.
고속도로 건설에 앞서 토지보상은 속전속결로 진행되었다.
제한된 예산에 토지보상에 큰 비용을 쓰기 어려웠으므로,
대통령은 서울시장과 경기도지사를 불러 평당 300원 아래로 땅을 매입할 것을 지시합니다.
신속한 공사를 위해 기공승낙서를 우선적으로 받고
추후 대략적인 편입면적으로 보상금을 산정하는 방식의,
지금이라면 상상도 못할 주먹구구식으로 토지매입이 진행되었다.
하지만 토지를 소유한 국민들도 번듯한 고속도로와 경제성장에 대한 소망으로
별다른 반발 없이 땅을 내 놓았고, 평균적으로 평당 236원에 토지매입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할 수 있었다.
토지보상의 진행되며 박 대통령은 매입한 부지 양옆 50m에 어떠한 건물도 짓지 못하게 할 것을 지시합니다.
예산이 부족한 지금은 양방향 네 개의 차로를 만드는 것이 최선이지만,
누구나 자동차를 소유한 미래에는 분명 더 많은 차로가 필요할 것이고,
고속도로의 확장을 위해서는 주변에 건물이 들어서면 안 된다는 판단에서였다.
이는 정확한 선구안이었고,
통행량이 많아 잦은 정체를 빚는 양재-판교 구간이나 동탄-오산 구간 등은 현재 10차로까지 확장되어 넓어졌다.
정부는 고속도로 공사를 시공할 시공사를 ‘지명경쟁입찰’이라는 생소한 방법을 통해 결정합니다.
선정 기준은 ‘1968년 기준 도급계약액 5억 이상,
장비의 보유·발주·도입이 가능한 자,
풍부한 기술과 5년 이상의 포장경험이 있는 자,
건설업계에서 신용이 있고 공사실적이 우수한 자’로서 다소 주관적이고 모호했습니다.
‘경쟁’이라는 말이 붙었지만 사실상 정부의 ‘픽’으로 지명하겠다는 뜻이었다.
이 기준에 따라 정해진 6개 시공사는 현대건설과 대림산업, 동아건설, 삼부토건, 삼환기업, 대한전척이었다.
여기에 포함되지 않는 건설사들의 반발은 불 보듯 뻔했고, 정부는 결국 10개사 정도를 추가해 시공을 맡겼다.
지역별로 공구를 7개로 쪼개어 진행된
고속도로의 공사에서 현대건설이 전체 구간의 40% 정도를,
나머지 구간을 15개의 건설사와 건설공병단이 맡아 진행하게 되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1968년 2월 1일,
경부고속도로의 첫 삽을 뜨는 기공식이 현재 궁내동 서울톨게이트 자리에서 열렸다.
관에서는 주원 건설부 장관이, 민에서는 정주영 회장이 건설 현장을 직접 뛰며 실무를 담당했다.
대통령으로부터 특명을 받은 정 회장은 공사 현장에 마련된 천막에서 떠나지 않을 정도로 열성이었다.
고속도로 건설을 진두지휘하는 최고사령탑은 청와대였다.
대통령의 집무실에는 항상 전국 지도가 펼쳐져 있었는데,
박 대통령은 시간이 날 때마다 지도 위에 선을 그리며 고속도로의 경로를 고민했다고 합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헬기를 타고 비행하며 지형을 확인했고, 수시로 현장 시찰을 나갔다.
<참고자료>
ㅇ「50년의 자부심 세계로 미래로」, 한국도로공사 50년사 자료집
ㅇ 국토교통부, KBS 역사저널 그날 유튜브 채널
[출처] “임자, 고속도로 옆 50m는 비워놔”···박정희는 50년 뒤 교통 수요까지 예측했다 [사-연]|작성자 지산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