곽영주 (1924-1961)
1924년 1월 10일 경기도 이천군 읍내면 율현리(현 경기도 이천시 율현동)에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에 경성공립직업학교 기계과를 졸업하고
일본 제국 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여 병기 병과 군조에까지 올랐다.
광복 후 경찰이 되어 구 일본총독의 관사 경비업무를 보다가,
이곳이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경무대가 되는 바람에 곽영주도 그대로 경무대경찰서에 근무하게 되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이승만의 눈에 들어 1950년 경무대경찰서의 경위로 승진했으며 1951년 경무대경찰서의 경감으로 승진,
1955년에는 내무부 치안국의 경무과에 전보됨과 동시에 총경에 올랐다.
1956년 경무대경찰서장에 임명되었으며 1957년 치안국으로 다시 전보되었다가 경무관에 승진하는 등 줄곧 출세가도를 달렸다.
지금의 경찰공무원 근속 승진 운영규칙과 당시 운영규칙은 판이하게 다르다.
총경에서 경무관에 오르는데는 보통 7년이 걸리지만 곽영주는 이승만의 총애를 등에 업고
경위에서 경무관까지 7년이 걸렸으니 그야말로 파격 중에서도 파격인사라고 할 수 있다.
곽영주는 이승만의 빽을 믿고 대통령 경호 임무를 넘어서는 월권을 행사하며 이리저리 날뛰기 시작한다.
이정재와 동향이고 잘 아는 사이었던 곽영주는 이정재가 어떤 문제를 일으키든 무조건 그의 편을 들어줬다.
그 결과 이정재는 경찰에 신고당해도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으며
도리어 신고한 사람이 잡혀가는 황당한 경우마저 발생하기도 했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통령경호실장이 행정부에 사사건건 참견을 해대는
심각한 수준의 월권 행위를 저지른 셈으로
이 때 곽영주가 얼마나 설치고 다녔는지 '부부통령(副副統領)' 내지는 '곽박사'라는 별명도 얻었을 정도였다.
재미있는건 이런 안하무인적인 월권 행태는 훗날의 유신 시절 대통령경호실장 차지철도 충실히 계승한다.
곽영주는 군 장교의 진급 심사에도 참견했는데 나름대로는 자기 기준선에서 불온분자 소탕에 적극적이었는지
해당 장교의 소양보다는 당사자나 가족의 사상 관계를 캐묻는 경우가 많았다고 한다.
이런 식으로 태클 걸렸던 사람이 아이러니하게도 김익렬과 박정희.
김익렬은 4.3 사건 당시 무분별한 경찰의 진압에 회의를 느끼고
빨치산과 일시 휴전을 맺은 탓에 공개 석상에서 면박당하고 끌려나갔으며 결국 1950년대 내내 찬밥 신세였다.
박정희는 형 박상희가 사회주의자라는게 문제가 되어 매장당할 뻔 하다가
김정렬 당시 국방부 장관과 백선엽이 도와주어 가까스로 진급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권불십년 화무십일홍이라 1960년 4.19 혁명이 발생하자 곽영주의 앞날도 어두워지기 시작한다.
그는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고 경찰력을 동원하여 시민들을 무력 진압했는데
서대문 앞 총격 사건이나 이기붕 자택(현재의 4.19 도서관 터) 발포 사건은 그의 직접 명령에 의한 것이었다.
이후 이승만이 4.19 혁명으로 하야하자 곽영주는 자신의 권력 기반을 잃게 되었고
그대로 체포되어 장면 정권하에서 벌어진 재판 결과 단기형을 받았다.
하지만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혁명재판이 벌어지자 다시 체포되었는데
묘하게도 같은 혐의로 같이 체포된 홍진기[와 유충렬이 사형 선고 후 각각 무기징역과 징역 20년으로 감형된 것과 달리
곽영주는 그대로 사형이 집행되었다.
결국 곽영주는 최인규, 이정재, 임화수, 신정식과 나란히 1961년 교수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