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의 방정식
갈라 3,22-29; 루카 11,27-28 / 연중 제27주간 토요일; 2024.10.12.
지난 40년 동안 국민들의 애틋한 정서를 대변하여 널리 알려진 국민 가수 이선희가 부른 노래 중에 ‘인연’이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파문을 던진 유명한 노래입니다. 이 노래의 가사가 이렇습니다.
약속해요 이 순간이 다 지나고 다시 보게 되는 그날
모든 걸 버리고 그대 곁에 서서 남은 길을 가리란 걸
인연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 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고달픈 삶의 길에 당신은 선물인 걸.
이 사랑이 녹슬지 않도록 늘 닦아 비출께요.
취한 듯 만남은 짧았지만 빗장 열어 자리했죠
맺지 못한데도 후회하진 않죠 영원한 건 없으니까
운명이라고 하죠 거부할 수가 없죠
내 생애 이처럼 아름다운 날
또 다시 올 수 있을까요
하고픈 말 많지만 당신은 아실테죠
먼길 돌아 만나게 되는 날 다신 놓지 말아요
이 생애 못한 사랑 이 생애 못한 인연
통속적인 유행가의 가사라기 보다는 무언가 불교적인 사색도 들어가 있는 듯 하고 인생을 달관한 것 같은 사색도 엿보다는 노랫말입니다. 오늘의 미사에서 들려오는 말씀을 묵상하면서 이 노랫말을 떠올리는 까닭은 예수님께서 만난 한 여인도, 사도 바오로도 우리가 인생을 살아가면서 피치 못하게 맺게 되는 인연을 떠올리게 하는 말씀을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곰곰이 곱씹어 보면 인연에 매일 것이 아니라 더 큰 인연, 즉 하느님과의 인연에 주목하라는 뜻이 숨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던 한 여인이 그분의 어머니를 칭송하는가 하면, 독서에서는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의 상속자는 율법을 지키는 유다인만이 아니라 세례를 받아 믿음으로 의롭게 된 신앙인들이라는 사도 바오로의 통찰이 나옵니다.
몸으로나 마음으로 사람은 일정한 관계망 안에서 삶을 시작하고 영위하며 마칩니다. 부모와 자식간의 인연을 뜻하는 혈연이나, 고향 또는 조국과의 인연을 뜻하는 지연이나 국적이 그러하고, 같은 학교를 다녔다고 해서 맺어지는 학연이 그러합니다. 하지만 혈연이나 지연, 학연이나 국적 같은 인연들이 자기중심적이고 배타적으로 흐르면 사람들의 일치를 해치는 사회악의 빌미가 되기도 합니다. 본의 아니게 악마의 도구가 되어 버릴 수도 있는 현실적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어머니를 칭송하는 여인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이들, 즉 신앙인으로서 하느님과 인연을 맺은 이들이 더 행복하다고 일깨워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혈연과 지연, 학연과 국적 등의 인연이 하느님께로 향하지 않는 한 그것은 살아가면서 스치는 풍경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노력해서 얻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아브라함에게 하느님께서 내려주신 축복은 혈통상의 후손들에게만 내려지는 것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믿음을 가진 이들에게 모두 내려지는 것입니다. 혈통으로 아브라함의 후손이면서도 정작 믿음을 거부하는 사람이라면 그 축복은 스스로 포기하는 셈이 되는 것입니다.
선교는 세속적인 모든 인연을 넘어서되, 때로는 그 인연을 활용해서 하느님과의 인연을 맺어주는 일입니다. 박해시대에 형성된 천주교 교우촌은 전통적인 두레나 품앗이, 계 그리고 향약을 모두 합친 장점을 망라한 신앙 공동체였습니다. 박해가 종식되고 도시화된 오늘날에는 일차적으로 거주하는 곳을 중심으로 한 본당에서 신앙 공동체가 형성되어 있지만, 대단히 많은 신자들이 한 본당에 소속되어 있기 때문에 공동체적인 친교를 이루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한 본당 안에서 지역별로 소공동체를 형성하기도 하고, 신심단체별로 소공동체를 이루기도 합니다. 이렇듯 종교적인 범주 안에서 이루어지는 공동체들은 사회적인 영향력이 극히 미미하기 때문에 선교적이지 못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이 있습니다.
그 반면에 지역사회의 현안을 협동 방식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공동체 운동이나, 사회적 약자들의 지위를 향상시키기 위해 벌이는 협동조합들에는 커다란 사회적인 영향력이 잠재되어 있으나 사람들의 참여가 저조하여 선교적 영향력이 아직 미약합니다. 하지만 협동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이들 사회적 공동체들의 미래는 창창합니다. 자본주의 체제 하에서건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건 상관없이, 인류의 미래가 이 사회적 공동체들의 연대에 달려 있다고 말해도 지나치지 않을 정도로 그 의미와 성장 가능성이 대단히 선교적입니다. 협동조합의 사고방식은 자본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한 가지 이야기를 예로 들어 보겠습니다.
시골에서 홀로 농사짓는 어머니가 도시에 사는 아들을 만나러 오셨습니다. 모처럼 만나 밤늦도록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자리에 든 모자는 각기 다른 생각을 품었습니다. 어머니는 월셋방에 사는 아들의 살림에 보태라고 20만원을 편지와 함께 서랍에 넣었고, 아들은 시골에서 외롭게 사시는 어머니가 맛있는 음식이라도 사 드시라고 20만원을 편지와 함께 어머니 짐 보따리에 챙겨 넣었습니다. 자본주의적 셈범으로는 서로 20만원을 주고 받았으니까 달라진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협동조합적 셈법으로는 다릅니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현금 20만원을 주면서 그만큼의 기쁨을 누렸기에 20만원 어치의 가치를 얻었고, 아들 역시 어머니에게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는 기쁨으로 20만원 어치의 가치를 얻었습니다. 두 사람이 수중에 쥔 현금 40만원과 기쁨 40만원 어치를 합하면 도합 80만원의 가치가 창출된 셈입니다. 이를 두고 사랑의 방정식이라고도 부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 이 선교적인 사랑의 방정식이 적용되었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 어떠한 거래도 오가지 않았을 뿐 아니라 법적인 절차도 생략되었지만, 서로가 서로를 위해 일생과 목숨을 바치는 인연이 맺어졌습니다. 이렇듯 우리가 하느님과 맺은 인연으로 사랑의 가치를 창출해 내는 인간관계를 이루어 나가는 일, 그것이 선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