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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고(15) - 부마 민중항쟁의 전개과정(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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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마민중항쟁의 전개과정 대중집회를 방불케 한 그날 저녁, 그동안 익명을 강요당해온 얼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이 거리를 메웠다. 민중의 파도 속에서 애국가가 출렁거렸다. 아아 그것은 진정으로 부를 수 없는 시대의 진정한 노래였다! 10월 민중항쟁 첫째 날(10·16) 1) 부산대학생들의 선도적 투쟁 부산대 1차 시위계획의 좌절과 2차 시위계획의 추진(15일) '유신독재정권 타도'를 부르짖은 유신 초유의 대중정치투쟁으로서의 10월 민중항쟁의 단초가 된 10·16 부산대생 시위는 15일 시위계획의 좌절을 배경으로 놀라운 결집력과 추진력을 안게 되었다. 15일 아침 단풍이 서서히 내려오는 금정산 아래 부산대학 캠퍼스는 '민중의 시대'를 알리는 두 종류의 선언문으로 술렁거렸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이었다. 「민주선언문」은 학원의 민주화, 언론자유, 인권보장에의 신념을 확인하고 정치권력과 야합된 관료독점자본을 바탕으로 한 한국경제의 구조적 모순, 대외종속화를 비난하며 반민중적 유신헌법의 철폐와 유신독재정권의 퇴진을 요구했다. "한민족 반만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처절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반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로 시작된 「민주투쟁선언문」은 언론봉쇄와 민중에 대한 기만선전, 매판기업가와 관료세력에 의한 한국경제의 종속화와 YH사건 등 병든 근대화의 표상인 노동자 탄압을 비판하면서 유신독재정권의 종언을 선언했다. 1,200여 장에 이르는 두 선언문은 똑같이 유신독재정권이 '조직적 악의 근원'이며 '악의 표상'이라 일컫고 타율과 굴종을 벗고 의연히 투쟁하자고 강조했다.1) 주 : 1) "……제도화된 폭력성과 조직적 악의 근원인 유신헌법과 독재정권층의 퇴진만이 오천만 겨레의 통일의 첫걸음이요 …… 형제의 피를 요구하는 자유와 민주의 깃발을 우리가 잡고 반민주의 무리, 착취의 무리, 불의의 무리들을 향해 외치며 나아가자! 1979년 10월 15일 10시 도서관 앞"(「민주선언문」) "한민족 반만년 역사 위에 이토록 민중을 무자비하고 처절하게 탄압하고 수탈한 반역사적 지배집단이 있었단 말인가? …… 모든 경제적 모순과 실정을 노동자의 불순으로 뒤집어씌우고 협박, 공포, 폭력으로 짓눌러왔음을 YH사건에서……타율과 굴종으로 노예의 길을 걸어 천추의 한을 맺히게 할 것인가 아니면 박정희의 유신과 긴급조치 등 불의의 날조와 악의 표본에 의연히 투쟁함으로써 역사발전의 장도에 나설 것인가?……1979년 10월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 부산대학교 민주학생 일동"(「민주투쟁선언문」) 두 선언문은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에서 반유신 반독재 시위가 있음을 알렸다. 두 진영에서 9월부터 구체화된 계획이었다. 1대는 공대 이진걸(기계설계학과 3)군을 중심으로, 2대는 법대를 중심으로 시위계획을 구체화시켰다. 1대는 13일(토) 최종점검을 마치고 시위일, 시위장소, 시위방법을 확정시켰다. 시위장소로는 남포동, 서면, 캠퍼스 중 캠퍼스로, 시위일은 15일 10시, 고정 참가학생 수는 5, 60명, 전체 참가학생 수는 미상. '1979년 10월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이 결정되었다. 15일 계획을 은폐시키기 위해 '17일 시위설'을 유포하고 「민주선언문」 제작에 들어갔다. 2대는 학내 시위의 한계성과 시내 진출 시위 가능성을 논의하면서 시위계획을 구체화시켰다. 결국 12일 최종 계획점검에서 학내시위로 굳히고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에서 시위를 벌이기로 결정했다.2) 2대의 경우 학생들의 상황인식과 실천의지를 고양시키기 위한 방법으로 '모 여대에서 보내온 가위'설과 '운동화를 신고 다니라' 등의 루머를 퍼뜨리고 여론을 추적하고 있었다. 2대는 15일 10시 도서관 앞에서 「민주투쟁선언문」을 낭독할 예정이었다. 주 : 2) 1대와 2대는 사전에 시위추진의 연합을 모색했다. '10월 15일 오전 10시 도서관 앞' 시위계획은 두 진영이 각각 분리된 상태에서 결정된 것이었다. 두 진영의 연합이 실패한 원인으로는 1대 진영의 경우 2대 진영 시위계획의 불투명성, 2대의 경우 1대보다 상대적으로 조직성이 결여된 상황과 주체적으로 접촉해나가기 어려웠던 여건이 지적되었다. 15일은 2학기 중간고사 1주일 전 월요일이었다. 15일 1, 2대는 아침 9시 30분부터 캠퍼스 곳곳에 선언문을 뿌렸다. 1대의 이진걸, 남성철군은 본관 311호 강의실부터 시작, 상대(현미술관) 앞 벤치, 문창회관, 식당, 휴게실, 운동장 스탠드, 도서관에 「민주선언문」을 뿌렸다. 2대는 본관 강의실, 미리내 계곡 주변 벤치를 돌아다니며 「민주투쟁선언문」을 살포했다. 1대는 선언문 살포에 예정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도서관 앞에 나왔을 때는 이미 10시 20분. 학우들은 채 모이지 않았고 사복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1, 2대의 눈앞에는 10월의 가을바람에 흔들리는 안타까운 나무들만 보였다. 10시 30분경, 1대의 주도팀 이진걸, 남성철군은 동지들이 시위대 동원에 실패했다고 판단하고 구정문을 통해 빠져나갔다. 1, 2대의 시위예정 시간이 45분 지난 10시 45분부터 선언문을 받아 쥔 학생들이 구도서관 앞에 집결하기 시작하면서 유신의 파수꾼과의 긴장이 감돌기 시작했다. 도서관과 교내 곳곳에서 몰려든 학우들, 운동장에서 ROTC 검열시범을 참관하고 교련수업을 마친 학우들이 그대로 도서관 앞에 모이자 11시경에는 300여 명에 이르렀다. 학생들이 속속 모였다. 학생들은 도서관 잔디밭, 계단을 메우고 시위 주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대학생활 동안 단 한번도 스크럼 대열을 짜본 경험이 없는 학생들이었다. 단단히 마음먹고 집결한 학생들이었지만 시위 주도자가 없는 상황에서 어쩔 줄 몰랐다. 계획에 차질을 빚게 된 1대와 2대는 새로운 대응을 모색해야 했다. 그러나 시위 주도자가 빠져나간 상황에서 시위계획을 강행시키는 것이 무리라는 판단을 내린 1대는 계속 상황을 주시하기로 했다. 1대와 접촉이 안된 2대는 '내일 1대 주도의 시위는 틀림없이 성공할 것'이라 판단을 내리고 시위 무산을 위로했다. 시위를 하기 위해 모였던 학생들이 서서히 해산하기 시작했다. 정오까지 학생들은 모두 해산하고 짙은 여운만이 남았다. 그때 해산하는 학생들의 얼굴에는 못내 아쉬워하는 안타까움 그것으로 가득 찼다. "독재정권과 맞서 타율과 굴종을 벗어버리고 의연히 투쟁하지 못하는 모습이 초라하고 왜소하게만 느껴졌다. 그리고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때 학생들의 가슴에 진한 각인이 새겨졌다. 이러한 상황은 16일의 대규모 '독재타도' 시위를 결행케 한 뜨거운 열기를 불러일으켰다. 「민주선언문」과 「민주투쟁선언문」의 급격한 파고가 퍼져나간 오후, 선언문 사건 주모자를 찾는 경찰의 허겁지겁한 행태를 조롱이라도 하듯 제 2 시위 계획이 은밀히 진행되고 있었다. 학우들의 가슴 깊이 억누를 길 없는 분노 사이에서 정광민(상대 경제학과 2)군을 중심으로 추진된 2차 시위계획은 직접·간접으로 1, 2대와 관계를 맺으며 진행되었고 '내일 10시, 다시 도서관 앞'이 학생들에게 전파되었다. 유인물 제작, 시위주도를 담당한 정광민군은 전도걸군과 함께 뜬눈으로 밤을 지새우며 유인물 500여 장을 등사했다. 민중 생존권의 수탈, 경제적 불평등의 문제를 집중거론한 이 유인물은 유신헌법의 철폐, 언론·집회·결사의 완전한 자유, 소득분배의 정의실현, YH무역 등 반윤리적 기업주의 엄단, 학도호국단 폐지, 학원사찰 중지, 전국민에 대한 정치보복 중지를 요구하는 '폐정개혁안' 7조항이 새겨졌다.3) 주 : 3) '폐정개혁안'은 동학농민전쟁시 전봉준의 '폐정개혁안'에서 따온 것. 16일의 이 선언문은 현재 회복이 불가능하다. 15일 「민주투쟁선언문」과 16일 선언문은 시내 항쟁에서 다시 뿌려지기도 했다. 15일은 부산대학 전체 학생들에게 '술렁거리는 하루'였다. 추상 같은 정의감이 15일의 팽배한 분위기였다 하더라도 내일을 기약한 그들 어느 누구도 내일의 결행이 유신의 압제, 저 거역의 밤을 사르는 엄청난 민중항쟁의 횃불로 타오르리라고는 예측하지 못했다. 결연한 '독재타도' 시위―부산대생의 투쟁(16일 10 : 00∼12 : 00) 10월의 하늘 청아한 햇살이 새벽 벌을 비추는 아침 술렁이는 가슴으로 등교한 학생들은 도서관(현 구도서관)과 본관 주변에 진을 치기 시작했다. 10시 인문사회관에서 상대생들이 시위대를 형성했고, 도서관 앞에는 4, 5백여 명의 학생들이 운집했다. 인문사회관에서 있은 상대 경제학과 2학년 화폐금융론 시간, 정광민·엄태언군은 유인물을 배포했다. 정군이 열변을 토했다. "드디어 오늘이 왔다! 저 유신독재정권에 맞서 우리 모두 피흘려 투쟁하자!" 상대생들은 그 자리에서 즉시 시위대를 형성했다. '독재타도'를 외치며 상대(현 미술관) 앞에서 대열을 정비한 80여 명의 시위대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민주, 자유'를 부르며 도서관을 향했다. 선언문 뒷면에 '자유'라고 휘갈겨 쓴 피켓이 대열의 머리 위로 흔들거렸다. 10시 도서관 앞. 너무나 차분하고 처절한 노래가 울렸다. 4, 5백여 학생들의 가슴을 찢어내는 듯한 노래가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만 같이 절박하게 퍼져나갔다. '아침이슬' '선구자' '애국가' '교가' '통일의 노래' '기다리는 마음'의 절절한 가락이 학생들의 가슴과 가슴을 밟으며 이어져갔다. 이때 상대 시위대의 노래와 구호가 다다르자 조용하고 긴장에 가득 찬 노래가 폭발했다. 크고 감동적인 노래가 역사의 새벽으로 용솟음치듯 솟구쳐올랐다. 새벽 벌에 반역의 어둠을 불태우는 결연한 함성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총장을 비롯한 보직교수들이 몰려와 '학생들이 이러면 안된다'면서 해산을 종용했다. 그들에게 "어용교수 물러가라"는 질타가 가해졌다. 이 분노의 파도 속으로 사복경찰의 공격이 감행되었다. 도서관에 들어가 동료 학생들에게 '투쟁의 날'이 왔음을 알리고 나오는 정광민군을 향해 뛰어든 사복경찰들이 정군의 멱살을 잡자 우르르 몰려간 학생들은 두 형사를 포위하고 뭇매를 가했다. 두 형사는 3미터 언덕 아래로 떨어져버렸다. 도서관 3층에서 사진촬영을 하던 형사들이 쫓아가는 학생들에게 밀려 사진기를 버리고 도망쳤다. 사복경찰들과 5분간 난투극을 벌인 후 500여 학생들은 스크럼을 짜고 '유신철폐' '독재타도'를 외치며 본관을 향해 뛰기 시작했다. 본관을 중심으로 현 재료관 앞을 지나 미리내 계곡을 끼고 뛰어간 시위대는 이미 2천 명으로 확산, 구호를 외치며 운동장으로 내려갔다. 그것은 분노와 노여움의 대열 그것이었다. 유신헌법에 대한 당위의 거론이 긴급조치에 걸려드는 가증스런 시대에 '독재타도'를 부르짖는 분노의 대열이 신정문으로 나아가 유신독재정권이라는 물신의 폭력에 투석으로 맞섰다. 10시 30분. 신정문에서 경찰과 전투를 벌인 학생들은 페퍼포그를 앞세우고 돌진해 들어오는 경찰에 밀려 운동장과 본관 쪽으로 후퇴했다. 페퍼포그와 무장기동대가 운동장 안과 본관 진입로를 헤집었다. 학생들은 농구대, 투석, 그리고 운동장의 ROTC 사열용 엄호 잡초에 불을 붙여 대항했다. 캠퍼스의 가을이 온통 최루개스로 채색되었다. 다시 도서관 앞에 집결한 학생들은 대열을 정비하고 구호를 외쳤다. '유신정권 물러가라!' '정치탄압 중지하라!' 구호선창에 이어 정광민군이 「민주선언문」을 낭독했다. 학생들은 강고한 투쟁의지를 다지며 독수리 탑을 돌아 다시 신정문으로 향했다. 학우들 사이에 시내진출과 가두시위 의견이 오갔다. 캠퍼스 전역에서 구름같이 모인 학생들은 운동장을 돌며 독재타도의 열기를 터뜨렸다. 그것은 400미터 트랙을 완전히 메우면서 선두와 후미의 구별조차 할 수 없는, 7천여 명의 길고 긴 노여움의 물결이었다. 신정문을 사이에 두고 촌각의 앞을 짐작할 수 없는 거대한 분노의 대열이 독재타도, 유신철폐의 합성을 올리며 운동장을 돌았다. 7천의 대열이 신정문에서 500여 진압부대와 대결전을 벌였다. 진압부대는 발악하며 신정문을 사수하고 있었다. 치열한 접전을 벌인 시위대는 가두진출을 시도했다. 11시경 구정문으로 진격한 1천여 명은 굳게 잠긴 구정문을 향해 돌진, 수위실 옆 담벼락을 넘어뜨리고 교문 밖으로 500여 명이 진출하여 악을 쓰듯 쏘아대는 경찰의 최루탄에 돌과 음료수병으로 대항하면서 구정문 앞 네거리에서 치열한 접전을 벌였다. 페퍼포그와 줄다리기를 하면서 곤봉에 터져 피를 흘리는 혈전이 벌어졌다. 구정문에서 1진이 혈전을 벌이며 줄기차게 가두진출을 시도하는 가운데 신정문 접전을 벌이던 학생들은 효과적인 돌파구를 찾고 있었다. 12시경 학생들은 사대부고로 통하는 철책을 뜯어내고 사대부고로 진입했다. 사대부고 정문에서 접전을 벌이며 왼쪽 담을 허물어뜨리고 가두진출에 나섰다. 2진 1천여 명이 진출하자 경찰의 화력이 집중되어 나머지 학생들은 다시 교내로 밀려들어갔다. 사대부고 담을 뚫고 곧바로 산업도로로 진출한 2진은 '유신철폐' '독재타도' '언론자유'를 외치며 온천장으로 향했다. 한편 2진은 진출한 지 15 내지 20분 후, 전열을 가다듬은 학생들이 다시 사대부고로 진출을 시도하여 접전을 벌여 성공, 6, 7백여 명이 3진을 형성하여 2진의 뒤를 따라 산업도로, 온천장으로 향했다. 가두진출과 시내진출(11 : 30∼13 : 30) 구정문 앞 네거리에서 혈전을 벌인 1진은 좁은 거리에서 페퍼포그와 곤봉에 대항해 싸우면서 전진과 후퇴를 되풀이했다. 일부는 신정문 전투에 합류했다. 약 500명 정도가 구정문 우측 골목길을 통해 식물원, 온천장 방면으로 향했다. 2진, 3진에 비해 비조직적으로 진출한 1진은 온천장에서 2진과 합류했다. 산업도로로 진출하여 구호를 부르며 온천장으로 진격해나간 2진 1천여 명은 고속버스, 택시승객, 행인들로부터 대환영을 받으며 행진했다. 학생들의 구호와 애국가, 교가에 시민들은 박수를 치며 격려했다. 그들은 교통차단에 아랑곳하지 않았으며 가능한 모든 방법으로 지지를 표시했다. 2진은 온천장 입구에서 무장기동대와 부딪혔다. 이 접전에서 많은 학생들이 구타를 당하며 연행되었다. 그러나 학생들은 우측 금성사 방면, 명륜동 방면으로 갈래를 지으며 나아갔다. 우측 금성사 방면으로 진출한 500여 명은 구정문에서 분산진출한 1진과 합류, 사직동 미남로터리 방면으로 전진했다. 미남로터리를 전진한 1, 2진은 미남로터리를 방어하기 위해 진을 진 무장기동대를 격퇴하고 사직동, 거제리로 향했다. 거제리 군부대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는 다시 기동대와 접전을 벌이면서 수세에 몰렸다. 왼쪽은 군부대 담이었고 오른쪽은 허허벌판이었다. 접전의 와중에서 1, 2진은 '2시 부산역 집결'을 전파하며 해산, 시내로 진출하기 시작했다. 2진이 진출한 후 15 내지 20분 만에 2진의 진로를 따라 산업도로, 온천장으로 향한 3진은, 온천장 입구에서 일전을 벌인 후 사직동 미남로터리 방면으로 전진한 2진의 주류 외에 학교로 되돌아오거나 개천을 건너 명륜동 방면으로 빠져나간 학생들을 흡수하면서 명륜동 방면으로 치고 나가 동래경찰서를 지났다. 동래경찰서 옥상에서는 무비카메라를 돌리며 학생시위대에 위협을 가했다. 그때 동래경찰서에서는 수명의 경비병만 남아 있었으며 오히려 시위대가 돌진해 올까봐 겁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그 사실을 몰랐던 시위대는 그대로 통과, 교대 앞까지 진출했다. 700여 명 이상의 시위대 구호가 시민들의 지지반응의 반향을 넓혀가며 거리에 물결쳤다. 교대 앞에 다다른 시위대는 무장기동대의 강고한 방어선에 봉착, 3진이 겪은 최대의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시내진출을 위해서는 목지점인 교대 앞을 통과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러나 도로와 육교 위에서 기총소사를 하듯 맹폭을 가하는 기동대와 전투는 많은 학생의 부상을 낳았으며, 학생 시위대는 수세에 밀리게 되었다. 더 이상의 진격로가 막혀버린 3진 진영 사이에 '2시 시청 앞 집결'이 전파되었다. 3진은 일단 해산한 후 시내에서 재집결하기로 하고 분산했다. 학생들은 '시청 앞'을 외치며 해산했다. 한편 학교내 시위대에서는 '2시 부산역 집결'이 전파되었다. 학생들은 학내 시위의 한계를 명백히 인식했고 시내진출 계획에 따라 제각기 버스를 타고 이동하기 시작했다. 오후 1시부터 캠퍼스는 썰렁한 가을바람과 매운 연기, 그리고 함성의 여운만 남은 채 텅 비었다. 1, 2, 3진과 교내 시위대의 시내진출로 시내로 향하는 버스가 꽉 차 버렸다. 차비를 받으려 하지 않는 안내양, 어깨를 치거나 손을 잡아주는 승객, 그리고 격려의 말을 건네는 운전기사. 한 대 한 대의 버스가 다 시위버스였다. 버스를 차단하기 위해 경찰차가 뒤쫓아오면 운전기사는 더 빨리 차를 몰았다. 부산대학교 교문을 연한 제 1 방어선이 붕괴되자 경찰은 서면을 제 2방어선으로 잡고 학생시위대의 시내진입을 막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시내버스를 세우고 일대 검문에 나선 경찰이 학생차림의 남녀를 끌어내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찰은 서면에서의 방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았다. 버스 대열이 줄을 이었다. 이미 이 분노의 대열은 검문으로 제지될 수 있는 한계를 넘어선 것이었다. 시경당국은 학생 시위대가 부산역에 집결한다는 정보에 따라 부산역을 방어선으로 잡았다. 부산역 광장, 지하도, 버스정거장 주변에 병력을 깔았다. 제 3방어선이었다. 부산역에 미리 도착하여 버스를 내린 학생들이 연행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부 연행되는 학생들이 끌려가면서도 버스를 향해 내리지 말라는 손짓을 했다. 연행되지 않은 학생들은 걸어서 시청, 남포동으로 향했다. 이어 시위버스는 부산역을 지나 남포동으로 향했다. 경찰의 제 3 방어선이 무너져버렸다. 2) 민중항쟁으로의 전이와 발전 '독재타도'의 대열이 번잡하고 화려한 장식의 양지와 그 속에 깊이 패인 차디찬 질곡이 뒤엉킨 도시 한가운데로 뛰어들었다. 그것은 거대한 의식의 연대를 집적시킨 현장이었다. 타도시에 비해 월등한 정체적 인구의 팽창이 유신 독재정권의 반민중적 경제정책과 실패의 결과물로 집적되어 있었다. 일용노동자, 서비스업 종사 노동자, 가로상을 비롯한 영세상인, '가난한 민중'의 밀집주거지로 된 배후지의 형성, 그리고 경제피폐에 따른 중과세에 중소상인들이 시달리고 있었다.4) 주 : 4) 민중의 '삶의 조건'에 관해서는 2장을 보라. 또한 도시 교통이 이곳을 통하게 되어 있었다. 남서쪽으로는 공장지대인 북구로 트인 간선도로, 북쪽으로는 서면방면으로 트인 주도로가 열려 있었다. 남포동, 국제시장, 대청동, 광복동, 충무동, 신창동 등지는 상가, 어시장, 극장가를 형성, 인구 밀집지구로서 도시의 핵심부였다. 학생과 민중의 연대(14 : 00∼17 : 00) 2, 3백 명씩 시청, 부영극장, 미화당백화점 앞 등 충무동, 남포동, 광복동 주요거리를 중심으로 곳곳에서 진을 친 학생 시위대가 오후 2시 부영극장 앞에서의 '유신철폐!' 구호를 시작으로 가두시위에 돌입했다. 광복동거리로 진출한 시위대의 '유신철폐' 구호는 대중의 의식 속에 잠재한 노여움을 폭발시키는 기제였다. '잘한다'는 호응 사이로 학생 시위대가 구호를 외치며 몰려다녔다. 시위대가 뛰어 다니는 분노의 대열이라면 대중은 박수를 치는 집단으로 놀라운 결합력을 보여주었다. 이 시대, 총체적 모순의 담지자인 민중이 항쟁의 주체로서 등장하기까지 학생들은 치열하고 끈질긴 투쟁을 벌였다. 광복동 미화당백화점을 중심으로 분산되어 있던 학생들은 동아데파트 앞에 집결, 연좌시위에 들어갔다. 학생들의 명백한 반유신 시위를 향해 시민들은 명백한 지지를 표시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거역의 시대를 사르는 불길이 급속히 퍼져나갔다. 위로는 고층건물의 사무실과 다방에서 너나 할 것 없이 박수를 쳤다. 시위대 곁으로는 시위대를 둘러싸고 '잘한다'고 북돋우는 시민들이었다. 경찰에 쫓겨 도망하는 학생들을 상점 안에 숨기고 셔터를 내려버리는가 하면 시위 학생들에게 행상아주머니들이 김밥, 계란, 빵, 음료수를 건네주었다. 경찰과의 접전이 점차 치열한 양상을 띠게 되었다. 오후 3시 미화당백화점 앞길에서 1천의 대규모 시위대를 형성한 학생들이 '유신철폐!' '언론자유!'를 외치며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시위대의 머리 위로 경찰의 최루탄이 쏟아져내리고 방망이 세례가 퍼부어졌다. 후퇴한 시위대는 대청동 미국문화원 방면으로 진출하면서 수십 개의 시위대로 분산, 경찰에 대항했다. 시위대는 국제시장, 대청동, 보수동 지역에서 한 번 정면접전을 벌인 후 다시 돌아와 경찰의 뒤에서 공격을 가했다. 사통팔달의 골목으로 된 이 지역에서 경찰은 무력해졌다. 동아데파트 앞에서 연좌시위를 벌인 시위대는 3시경 시위대를 증강시키고 국제시장 안으로 진입했다. 시위대 앞에 태극기가 등장하고 학생들은 태극기를 흔들며 구호를 외쳤다. 시민의 절대적인 호응에 사기가 충천했다. 대대적인 가두시위가 전개되었다. 헤아릴 수 없는 갈래를 이루며 100 내지 300명 규모의 시위대는 시민의 강력하고도 절대적인 지지물결을 타고 밀물처럼 거리와 상가골목을 누볐다. 전체가 하나의 큰 물결을 이루며 각 시위대는 보다 큰 물결로 커져갔다. 경찰은 속수무책으로 시위대의 꼬리를 쫓아다니며 공격했다. 그러다가 바로 뒤에서 함성을 지르며 몰려오는 다른 시위대의 위세에 질려버리는 것이었다. 경찰과 부딪힌 시위대는 썰물처럼 다른 거리로 빠진 후 다시 밀물처럼 몰려들었다. 학생시위대와 시민들은 오랫동안 묵혀온 역사의 운명에 대해 초읽기라도 하듯 강한 연대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 연대가 절박하고도 긴 노래처럼 시위대의 물길을 감쌌다. 그것은 '독재타도'의 노래였다. 3시 30분 새부산예식장 앞 거리에서 맹렬한 기운으로 증강된 시위대는 본격적인 '독재타도' 시위에 들어갔다. 거리는 온통 '독재타도'를 외치는 함성으로 가득 찼다. 학내에서 못 다 뿌린 「민주투쟁선언문」 200여 장이 시민의 손에 뿌려졌다. 지칠 줄 모르는 시위대와 열렬이 호응하는 시민 사이에서 유일한 죄인은 경찰이었다. 경찰이 시위학생을 붙잡아 몽둥이질을 하려 하면 모여든 시민들이 '우우' 하며 고함을 지르며 욕설을 퍼부었다. 경찰은 어느 한 시위대도 '일망타진'하지 못했다. 고층건물에서 경찰의 머리 위로 재떨이, 화분, 연탄재, 병이 마구 쏟아져내렸다. 학생들을 쫓아간 경찰은 학생이 들어간 후 셔터가 내려진 상점 앞에서 멋적은 시늉을 냈다. 가로상인들은 학생들이 빠져나간 후 경찰이 나타나면 비켜둔 리어카로 길 가운데로 몰았다. 이미 경찰은 학생 시위대를 상대로 싸우는 것이 아니라 온 시민을 상대로 싸워야 했다. 시민들의 눈 때문에 제대로 구타하지도 못했다. 학생시위대와 시민에 비하면 소규모에 지나지 않는 경찰진압대는 각 방면에서 형식적으로 쫓아다니는 꼴 그것이었다. 4, 5시 사이에 8개 지역에서 규모가 큰 시위대가 독재타도, 유신철폐, 언론자유를 외쳤다. 용두산공원지역(4 : 00), 제 1대청파출소 앞(4 : 05), 구시민회관 중앙동사무소, 용두산 방향, 부산우체국, 제 1대청파출소 방면으로 시위한 시위대(4 : 20), 창선동 국민은행 앞(4 : 30), 부영극장 앞(4 : 35), 동아데파트 앞(4 : 50), 부산우체국 앞(5 : 05) 등이었다.5) 경찰은 학생시위대를 1,500명 선으로 파악했다. 그리고 도시룸펜 청년의 시위가담을 보고했다.6) 주 : 5) 당시 중부경찰서 상황실에 보고된 내용. 그러나 이것은 정태적 파악에 지나지 않는다. 주 : 6) 4∼5시 실제 학생시위대는 2,500명선. 이 시간대부터 정체적 과잉인구, 즉 산업예비군(industrial reserved army)이 가담하는 양상을 보인다. 오후 2시부터 5시에 이르는 3시간 동안의 '독재타도' '유신철폐' '언론자유' 투쟁은 학생시위대와 공개적이며 노골적인 지지를 보내는 시민들과의 연대하에 경찰을 무력하게 하면서 '시위형'으로 전개되었으며 따라서 구체적인 공격목표가 없다는 특징이 있었다. '시위형' 투쟁은 2시간여의 투쟁과정을 더 거치면서 민중시위대로 발전, '항쟁형' 투쟁으로 나아갔다.7) 주 : 7) 여기서는 공격목표가 결여된 비폭력적 저항을 '시위형'으로, 구체적 공격목표물이 등장하는 폭력적 저항을 '항쟁형'으로 일컫는다. 민중항쟁으로의 전이과정에서 '시위형' 투쟁은 항쟁형의 전단계로서 시간대 양상의 추적에서 드러난다. 10월항쟁 첫날의 경우 시위형(2∼5시), 항쟁형으로의 양상(5∼7), 항쟁형(7시 이후). |
유고(15) - 부마 민중항쟁의 전개과정(2)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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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중항쟁의 준비(17 : 00∼19 : 00) 오후 5시 바닷바람이 도심의 거리를 쌀쌀하게 감싸기 시작할 때 하기식 애국가가 울려퍼졌다. 여기저기 흩어진 학생들과 시민들이 제자리에 꼿꼿이 서서 애국가를 합창했다. 정지한 구호와 대열. 그 위로 엄숙한 애국가가 파도처럼 출렁거렸다. 학생들은 쉰 목소리로 애국가를 부르며 감격어린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 '부산대학교가'를 불렀다. 이제 도심에서의 반독재 투쟁대열이 학생들만의 그것이 아님이 명백해진 것이었다. 오후 5시가 지나면서 시위의 양상은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했다. 도심에서의 반독재 투쟁소식이 전시내에 퍼졌다. 시내로 인파가 몰리기 시작했다. 거리는 더 혼잡해졌다. 5시 40분 부영극장 앞에서 언론의 취재차량이 시위대의 투석에 밀려났다. 관제언론이 최초의 공격대상으로 등장했다. 학생, 시민들의 돌이 화살처럼 날아갔다. '뭣 하러 여기 왔느냐'는 질타가 가해졌다. 투석세례를 받은 차가 꽁무니를 빼었다. 시위대는 전열을 가다듬은 경찰진압대와 치열한 접전을 벌이며 보다 강고한 물리력에 밀고 밀리면서 다시 수십 개의 물결을 이루면서 국제시장, 대청동, 충무동, 신창동, 광복동 일대를 휩쓸었다. 시위대에 가담한 시민들이 눈에 띄게 늘어가는 가운데 곳곳에서 줄기찬 접전이 벌어졌다. 주머니를 털어 담배, 빵, 과일을 사들고는 시위대에 건네주고 함께 뛰는 청년들, 태극기를 꺼내주는 문방구 종업원, 김밥, 음료수를 대주는 가로상들, 쫓기는 학생을 숨겨주는 상인들, '선구자'와 '통일의 노래'를 크게 틀어놓고 진압대가 오면 소리를 낮추고 사라지는 그들의 뒤를 향해 다시 크게 틀어놓는 전파상, 이 모든 상황이 몰려드는 인파들과 더불어 본격적인 민중항쟁을 준비하고 있었다. 허물어지는 것은 유신독재정권이었으며 되살아나는 것은 민중의 큰 함성이었다. 압제자의 최루탄에 질식할 것만 같았지만, 그보다 더한 질곡을 너무도 오래 겪어온 그들이었다. 최루탄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러나 그것은 점점 밀려드는 물길에 포위되었다. 민중항쟁의 전개(19 : 00∼01 : 00)―5만 민중의 대회전 역사적인 16일 오후 7시, 그동안 익명을 강요당해온 얼굴들이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거리를 메웠다. 부영극장 앞 육교를 중심으로 시청 앞에서 충무동에 이르는 4차선 도로와 광복동 일대를 꽉 메운 거대한 대열이었다. 5만여 명에 이르는 인파가 대중집회를 갖듯 거리를 점거했다. 오랜 압제와 수탈에 저항하는 길고 긴 노여움의 대열이 도시를 벅차게 만들었다. 한 거리에서 시작한 애국가가 거리와 거리를 적시면서 더 깊은 바닷물처럼 출렁거렸다. 그것은 진정으로 부를 수 없는 시대의 진정한 노래였다. 민중들은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었다. '독재를 타도하자!'는 구호가 거리에서 거리로 이어지고, '유신철폐!' '언론자유' '김영삼 총재 제명을 철회하라!'는 구호가 퍼졌다. 민중은 스스로 감격하고 있었다. 한 기자가 "당신은 왜 여기에 있는가?"라고 묻자 "우리는 지금 독재타도를 외치고 있다"고 했다. 유신독재정권의 압제 아래서 그들이 집단적으로 '독재타도'를 외쳐보지 못했다. 유신정권 아래서 최초이자 유일한 민중항쟁이 벌어지고 있었다. 민중들은 자기자신과 타인을 신뢰하고 있었으며 독재정권과 맞닥뜨려 투쟁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이 5만의 대열은 민중항쟁의 출발과 유신독재정권의 종언을 알리는 큰 북소리였다.8) 주 : 8) '5만의 대회전'은 이후 상황이 치열하게 전개됨에 따라 다시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날 저녁 7시 이후로 게릴라전의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민중의 '독재타도' 대열을 뚫고 헤집으며 경찰진압대의 무리가 공격해 오면서 도심은 온통 잿빛 개스로 뒤덮였다. 격렬한 시위가 시작되었다. 돌과 병으로 압제의 무리에 대항하면서 곤봉에는 가로수 버팀목으로 맞섰다. 밀고 당기는 접전이 충무동, 광복동에서 벌어졌다. 극악한 최루개스와 곤봉세례에 밀려나는가 하면 다시 퇴각하는 경찰을 향해 야유를 던지면서 구호를 외쳤다. 독재타도의 대열이 격전지를 중심으로 동구, 서구 지역에서 줄을 이었다. 한쪽 거리 차도에 증파되어 오는 경찰병력이 있는가 하면 민중의 대열이 인도를 메우며 이동했다. 경찰은 가혹하게 폭력을 가했다. 부상한 사람을 업고 병원으로 향하는 모습을 보면서 민중의 적대의식은 더욱 고양되었다. 경찰의 폭력행위는 학생들의 시위이래 어느 한때도 공세의 기선을 잡지 못한 상황에서 신경질적인 것이었다. 그것은 민중들의 쌓인 분노를 더욱 휘저으며 불을 붙였다. 진압에 실패한 경찰은 항쟁의 확산을 막기 위해 남포동, 창선동, 광복동, 충무동 입구만 차단하고 안간힘을 썼다. 국제시장 상인들에게는 철시를 요구했다. 그러나 상인들은 듣지 않았다. 격전지로 모여드는 대열에게는 위협을 가하며 돌아가라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진을 치고 버티었다. 경찰과의 치열한 접전을 거듭하면서 투쟁양상이 바뀌었다. 구체적인 목표물이 등장했다. 시내 일원에 확산된 항쟁은 게릴라전의 양상을 띠면서 구체적인 목표물을 향해 과감하게 전진했다. 분노의 대열 한가운데로 목표물이 기어 들어왔다. 남포동, 광복동, 창선동 주위 입구에 포진, 포위망을 형성한 경찰이 최루탄, 곤봉, 발길질로 가혹한 공격을 가해왔다. 이때 500여 명에 의해 남포파출소가 파괴되었다. 곧 이어 8시 50분에서 9시 사이 남포동 골목으로 작전상 후퇴를 한 항쟁대열을 향해 부산진경찰서 진압대가 남포동 지하도 부근으로 진입했다. 진압차량을 둘러싸고 경계에 들어간 그들을 투석, 병으로 집중공격한 시위대는 접전을 벌인 후 경찰을 패퇴시켰다. 경찰은 그 위세에 눌려 모두 도주해버렸다. 이어 도심 한가운데에서 '펑' 하는 폭음과 함께 불길이 솟았다. 경찰에게 노획한 순찰차와 작전차가 불길에 휩싸인 것이다. 박수와 환호가 거리를 채웠다. 파출소와 언론기관은 제 1표적이었다. 게릴라 형태의 수십 개 시위대는 수백 명씩 몰려다니며 파출소와 언론기관을 공격했다. 항쟁 첫날밤 민중들은 남포동, 광복동, 신창동, 보수동, 충무동, 영선동, 부평동, 대청동 등 중구, 서구 지역에서 활발한 항쟁을 벌였다. 시위대의 주진격로는 영선고개 방면, 부산우체국 방면, 동대신동 방면이었다. 10시가 되자 경찰이 격화된 항쟁을 진화하기 위해 분주하게 '통금시간 연장'을 방송하며 10시부터 통금을 실시한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소용없었다. 항쟁의 불길은 더욱 확산되어갔다. 통금연장 방송이 울리던 10시 부평파출소가 박살났다. 10시 30분에는 보수파출소가, 20분 후에는 중앙파출소가 부숴졌다. 이와 함께 각 방면으로 진출한 항쟁대열에 의해 파출소가 연쇄적으로 박살났다. 한 시위대가 부수고 간 후 다른 시위대가 남은 것을 파괴했으며 그것은 다시 다른 시위대에 이어졌다. 여기저기 파출소에서 끌려나온 박정희의 사진이 불탔다. 항쟁 첫째날 학생 282명을 포함한 시민 400여 명이 연행되고 600여 시민이 부상을 당했다. 애국가를 불렀다는 이유로 어린 우유배달 소년을 연행해가면서까지 경찰은 3천 명에 이르는 대병력으로 패퇴했다. 경찰은 시종 학생 체포에 열을 올리면서 극악한 폭력으로 대응했다. 5만 민중항쟁의 성격을 축소시키고 진압하기 위해 학생들을 대거 연행했던 것이다. 반유신독재투쟁은 이미 오후 7시 '5만 대회전' 이후 명백한 민중항쟁으로 전화 발전되었다.9) 주 : 9) 이날 항쟁에서 학생의 비중은 10퍼센트 이상(19 : 00)에서 5퍼센트(22 : 00)선. 민중항쟁의 발발은 국내외에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더없이 강고하게 보이는 유신독재정권의 물리력에 맞서 최초로 '독재타도'를 부르짖으며 격렬한 투쟁을 전개한 10월항쟁은 민중의 항쟁으로서, 대중정치투쟁의 리얼한 양상을 그려냈다. 17일 아침 일본언론들은 16일의 부산민중항쟁이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보도했다. "부산 위기가 민중봉기의 성격을 띠고 있음이 17일 아침 분명해졌다. 부산진경찰서에 연행된 31명 중 학생은 10명도 안되었다." 새벽 1시까지 전개된 항쟁에서 언론기관 1, 파출소 11개소가 파괴되었다. 이날 민중은 승리했다. 10월 민중항쟁 둘째 날(17일) 16일의 민중항쟁은 유신정권하 초유의 대규모 민중항쟁으로서 정권에 도전, '독재타도'를 외쳤다는 점에서 전국적인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보도통제 상황에서 민중항쟁 소식이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항쟁 둘째날 학생들은 다시 항쟁의 촉매 역할을 담당하는 기동성을 보였다. (항쟁의 계기가 학생운동에 의해 제기되는 메카니즘에 대해서는 2장을 참고하라.) 17일은 10월유신의 반역의 역사가 7주년을 맞는 날이었다. 이날의 도시상황을 도시여론, 대학상황, 적상황을 통해 살펴본다. 17일 아침부터 도시내의 모든 공장, 사무실, 시장, 가정에서 전날의 항쟁이 커다란 여론의 바퀴를 굴렸다. 두 사람이 모이면 즉시 어젯밤의 항쟁이 화제로 떠올랐다. 매스콤에는 아무 내용도 보도되지 않았다. 시내에는 아침부터 경찰과 진압차량이 요소요소에 진을 치고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부산대학은 임시 휴교조치로 문을 닫았다. 학교당국은 전날의 시위와 사내 항쟁에 놀라 임시휴교를 단행, 교문에 임시휴교공고를 붙였다. 경찰이 교문을 통제하고 신정문과 구정문에는 완전무장한 기동대가 배치되었다. 출입이 차단된 1천여 학생들이 구정문을 중심으로 집결했다. 학생들은 구호를 외치고 노래를 불렀다. 전경을 향해 야유를 퍼부으며 대열을 지은 후 10시 30분경 금정국교, 식물원 방면으로 진출했다. 노래와 구호를 외치며 서서히 행진해간 시위대는 식물원 입구에서 기동대의 습격을 받았다. 경찰과 진격을 벌이면서 분산한 학생들이 다시 시내진출에 나섰다. 동아대학에서는 교련수업을 중단한 법대생들을 중심으로 교내에서 시위를 벌였다. 운동장을 돌던 시위대는 기동대의 페퍼포그에 맞서 대항하면서 분산한 후 다시 잔디밭에 집결, '애국가' '통일의 노래' '봉선화' 등 노래를 불렀다. 17일 동대생들이 항쟁에 적극 가담했다. 한편 오전 10시 시민회관에서는 다시금 '10월유신'의 당위를 강조하는 10월유신 7주년 기념행사가 유신학술원 부산지부 주최로 열리고 있었다.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유신의 수족 2,500여 명이 '집결'한 가운데 이 기념식은 '유신으로 총화단결을 더욱 공고히 하자'는 결의문을 채택했다. 민중항쟁의 격화와 확산(18 : 30∼01 : 30) 정오부터 시내 다방, 술집, 극장 등에 자리잡고 진을 치기 시작한 학생들이 국제시장, 부영극장 지역으로 집결하기 시작한 오후 3시. 코앞의 시청에서는 내무부장관 구자춘이 기자회견을 갖고 있었다. 그는 기자회견에서 경찰병력을 충분히 증강시킬 수 있다고 강조했다. 16일 진압 실패를 물어 정부는 부산시 시경국장을 해임시켰다. 어제보다 더 화창한 가을 날씨였다. 오후 6시 30분, 남포동에 모인 학생들이 '모여라!'는 신호와 함께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대를 형성했다. 시위대는 '독재타도' '유신철폐!'를 외치며 두 갈래로 나뉘어 국제시장과 충무동 방면으로 진격했다. 16일 항쟁과 마찬가지 상황이 벌어졌다. 시내 곳곳에 시위대열이 형성되고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맹렬한 접전이 벌어졌다. 애국가가 최루탄 개스 속에 묻힐 때면 시민들이 발을 굴렀다. 시위대는 전면적인 게릴라전으로 돌입, 경찰의 완강한 진압에 맞서며 구호를 외쳤다. 2, 3백명 규모의 각 시위대는 대학생, 일반인, 청년, 고등학생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구성되었다. 무수한 갈래의 시위대가 먼지와 땀에 범벅이 된 채 무수한 거리를 누비며 중구에서 서구, 동구로 확산되어갔다. 진압경찰은 모두 3,400명. 시위대는 무서운 분노의 대열이었다. 대청동 미국문화원 앞에서 시위대를 공격하는 경찰의 머리 위로 밤하늘에 벌겋게 곡선을 그리며 불 붙은 연탄재가 떨어졌다. 연탄재, 화분에서부터 집어던질 수 있는 모든 것이 그들의 진영에 떨어졌다. 경찰은 자신 외의 모두를 적으로 하여 힘겨운 전투를 벌였다. 시위대의 갈래를 모두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시위대가 없는 거리는 없었으며 애국가와 구호가 울려퍼지지 않는 곳이 없었다. 무수한 갈래의 시위대는 중구, 동구, 서구 지역의 거의 모든 파출소와 경찰서, 공공기관을 공략했다. 충무동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시청 방면으로 전진, 경찰과 대격전을 벌인 후 다시 두 갈래로 갈라져 부산역 방면과 운동장 방면으로 진출했다. 운동장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충무파출소를 박살내고(7 : 25) 서부경찰서에 투석한 후 동대신파출소를 박살내면서 파죽지세로 서구지역을 휩쓸었다. 각 시위대는 전진하는 가정에서 몇 갈래로 나누어지고, 나누어진 갈래마다 보다 많은 젊은이들을 흡수하여 하나의 시위대를 형성하는 양태로 뻗어나갔다. 한편 부산역 방면으로 진출한 시위대는 초량 1파출소를 습격하고(8 : 20) 부산진역 방면으로 진출했다. 1천여 명으로 증강된 시위대가 부산진역 앞 동부경찰서에서 경찰과 접전을 벌였다(8 : 55). 경찰의 무자비한 공세에 밀려 KBS로 후퇴한 시위대의 중앙을 가르면서 수십 대의 무장한 군트럭이 뒤에서 덮쳤다. 이 소동에 분산한 시위대는 KBS를 포기하고 다시 집결, 2,500명의 대규모 시위대를 형성하여 부산역, 시청으로 진격했다. 이 시각에 시내 중부세무서와 서대신 3동사무소가 박살났다. 중구, 동구, 서구 전지역의 요로에서 분노에 떠는 시위대는 구호와 애국가를 부르면서 경찰을 유린, 맹렬한 시위를 벌였다. 독재타도의 물결이 폭포처럼 강한 힘으로 온 거리에 물밀듯이 밀려다녔다. 국제시장에서 포위망을 뚫고 나온 시위대는 영선고개로 진출하면서 메리놀병원 맞은편의 제 2대청파출소를 박살내고 방범오토바이를 불태워버렸다. 가는 곳마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항쟁대열은 민중의 힘을 확산시키면서 폭발되어갔다. 9시 35분 KBS공격에 실패한 시위대가 부산역을 거쳐 시청 방면으로 진입하면서 부산일보와 MBC에 응징을 가한 후, 시청 앞에서 대대적인 격돌을 벌였다. 구름처럼 몰려든 시위대 위에 발악하듯 최루탄이 떨어지고 곤봉세례가 덮쳤다. 페퍼포그의 개스속에서 시위대가 분산, 도망을 치자 경찰은 골목 구석까지 추적하여 안면에 개스를 뿜어대고 구타를 가했다. 시위대의 무기는 돌, 병, 가로수 버팀목, 공사장의 각목 등이었다. 시위대는 공격 목표물을 훑어내고 또 훑었다. 뒹구는 독재자의 사진이 무수한 민중의 발길에 찢어졌다. 항쟁은 새벽 1시 30분까지 계속 이어졌다. 항쟁 둘째 날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21개의 파출소가 파손 내지 방화되고, 경찰차량 6대 전소, 12대 파손, 경남도청, 중부세무서, KBS, MBC, 부산일보, 동사무소 등이 파괴되고 투석세례를 당했다. 이러한 목표물은 전날에 비해 확대된 것이었다. 시청 옆의 국제신보가 시청 방어선 병력에 의해 수난을 면했으며 기독교방송국은 공격대상에서 제외되었다. 나머지 모든 언론기관, 공공건물이 파출소와 함께 응징 당했다. 경찰은 3,400의 대병력으로도 항쟁을 진압할 수 없었다. 대청동 미국문화원 앞에서 2관구사령관의 지프차와 호위차들이 습격당하기도 했다. 자정을 기해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서울 지역의 공수부대 2개 여단이 투입되었으며 계엄군이 진주했다. 유신체제 등장 당시로부터 7년 만에 비상계엄령이 다시 발동된 것이었다. 민중항쟁 셋째 날(18일) 비상계엄령10)과 함께 거리마다 계엄포고문과 박정희의 담화문이 붙었다. "친애하는 국민 여러분"으로 시작한 이 담화문은 "우리의 유신헌정은 거듭된 국민적 합의에 의하여 선택 정립된 것이며 지난 7년 동안의 국민적 실천과 체험을 통하여 국난을 극복하여 민족중흥을 추진함에 있어 그 효율성과 정당성이 여실히 입증된 바 있으며…… 이 길만이 우리 3,700만 국민의 생존권을 지키고……" 운운했다. 대학 휴교, 모든 집회, 시위 등 단체활동 금지, 언론·출판 검열, 사업장 이탈·태업 금지, 야간통행금지 연장(22 : 00∼04 : 00), 영장 없는 체포를 알리는 포고문이었다. 주 : 10) 5·16 군사쿠데타 이후 4번째(5·16 군사쿠데타 직후, 6·3 사태, 1972년 10·17). 셋째 날 저녁 궂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뿜어댄 최루개스의 메케한 공기가 비에 씻겨 내렸다. 공수부대, 계엄군의 탱크와 장갑차가 도심에 포진하여 위협을 가했다. 도시의 분위기는 몹시 울적했다. 다시 전투 상황이 벌어졌다. 오후 7시 55분. 어둠이 깔린 거리로 몰려나온 시위대가 동명극장 앞에서 구호를 외쳤다. '계엄철폐'와 '독재타도'였다. 남포파출소를 또다시 훑어버린 시위대가 시청을 향해 전진했다. 시청을 방어하던 공수부대가 구름같이 몰려드는 2천 시위대의 전면에 최루탄 공세를 가하며 대검 꽂은 총을 휘둘렀다. 공수부대는 시위대를 헤집으며 구타를 가했다. 2천 시위대는 비가 주룩주록 내리는 거리를 빠져나가며 담화문과 포고문을 찢어내었다. 공수부대의 개머리판에 많은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뇌수술을 받는 시민까지 있었다. 시위대, 행인의 구별 없이 공수부대의 잔인한 구타를 당하였다. 이리하여 사흘에 걸친 부산지역 항쟁이 끝났다. 부산지역 민중항쟁이 막을 내림과 동시에 마산지역에서 민중항쟁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민중항쟁의 파고가 대구, 광주, 서울로 번졌다. 최루개스와 곤봉의 상처가 채 아물기 전에 민중은 독재자의 죽음을 보았다. 부마민중항쟁의 평가 및 전망 우리는 앞의 글에서 유신독재정권의 탄압정치로 인한 민주화 열망과 경제적 위기의 심화로부터 발생한 민중생존권 압박에 대한 불만이 동시적으로 그리고 폭발적으로 분출되었던 10월항쟁을 체계적으로 조망해 보았다. 이와 같은 연구는 10월항쟁이라는 한 역사적 사실에 대한 민중·민족사적 인식의 심화와 함께 그것을 통한 실천적 전망을 가능하게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실천적 전망은 객관적 사실에 대한 주체적 수용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따라서 10월항쟁의 주체적 수용을 위해서는 현실의 실천적 과제에 응답하는 정확한 평가와 전망이 뒤따라야 한다. 이하에서는 '항쟁'의 성격규정, 그리고 의의와 한계를 통해서 항쟁에 대한 평가를 시도하고 아울러 그 현재적 의미를 실천적으로 전망해보고자 한다. 1. 부마민중항쟁의 평가 1) 부마민중항쟁의 성격 10월항쟁에 대한 성격은 항쟁주체의 분석에서 출발한다. 그러나 주체분석이 계급구성원의 양적 우위성만으로 파악되어서는 안된다. 『광주민중항쟁의 민중운동사적 재조명』에 의하면 "부마항쟁 후의 구속자들 중에서 약 반수가 일반인이었고 이들 대부분이 민중이라고 불릴 수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점을 통해 부마민중항쟁이라는 규정을 내릴 수 있다"라는 지극히 일면적이고 피상적인 규정을 내리고 있다. 이것은 명백한 오류이다. 왜냐하면 항쟁주체의 다수가 민중이라는 사실 때문에 민중항쟁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항쟁의 내용=구체적인 싸움의 전개양상이 어떤 것인가라는 질적 규정에 의해 항쟁의 성격을 파악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우선 민중항쟁으로 규정할 수 있는 주체의 양적 구성을 파악함과 아울러 주체의 구체적인 대응형태를 통일적으로 접맥시키고자 한다. (1) 항쟁주체의 양적 규정 항쟁주체의 분석은 시위장소와 시간대에 따라 항쟁주체가 전이되어갔으므로 동태적으로 파악해야 하고 또한 실증적 분석을 시도해야 하나, 여기서는 항쟁기간에 검거된 자 중 구속 기소된 사람을 대상으로 개략적인 분석을 하고자 한다. 부마항쟁으로 인한 총검거자는 1,563명으로 이중에서 87명은 군법회의에 회부되고 31명은 일반검찰에 송치되었다. 군법회의에 회부된 87명 중 형 선고자는 20명으로 학생 7명, 노동자 5명, 상인 1명, 무직 4명, 기타 2명의 분포이다. 마산의 검거자는 505명이었는데 이중에서 구속·기소자는 48명으로 학생 18명, 노동자 21명, 자영업자 6명(공업 2, 상업 2, 농업 2), 무직 3명의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부산의 경우 검거자는 1,058명으로 구속·기소자는 70명으로 파악되나 그 직업구성을 확인하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봉기의 중심지역이었던 중구관할의 중부경찰서에 연행된 260명 중 학생 70명, 종교인 2명, 야당당원 2명, 일반인 186명으로 비록 일반인 186명의 직업은 드러나지 않지만 구속·기소자의 직업구성을 추측케 해준다. 이상에서 항쟁주체의 계급분석을 구속·기소자의 직업구성이라는 한정된 범위내에서 살펴보았지만 그 속에서도 항쟁주체의 압도적 다수는 '민중'이라는 사실이 재확인되고 있다. (2) 항쟁주체의 질적 규정 항쟁주체의 구체적인 투쟁형태를 통해서 압도적 다수를 구성하는 민중들의 존재 조건을 규정하는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문화적 제요인에 어떻게 대응하였는가를 파악할 수 있다. 항쟁주체의 투쟁형태는 적대적인 동시에 폭력적이었다. 이는 항쟁의 전기간 동안 민중들의 공격대상이 되었던 제기관 및 부속물에 대한 파괴와 방화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부산지역 2관구사령관 승용차가 박살이 난 것을 비롯하여, 경찰순찰차, 소형 경찰트럭, 방범오토바이 등을 방화하였다. 또한 경찰서 2개(서부서, 동부서), 남포파출소, 보수파출소, 중앙파출소 등 21개 파출소가 전부 혹은 일부 파괴되었으며, MBC, KBS, 부산일보 등 어용언론기관도 돌세례를 받았다. 이외에도 경남도청, 중부산세무서, 동사무소 등이 성난 민중들의 공격을 받았다. 여기서 민중의 적개심을 잘 나타내주는 예로서, 파출소를 습격한 후 박정희의 사진을 짓밟고 태워버린 사실도 있었다. 이와 같은 적대적으로 폭력적 투쟁형태는 민중의 자기발전을 규제하는 억압적 현실에 대한 변혁의지를 강하게 내포하는 것이며 그것은 반민중적 반민주적 사회구조를 해체하고 민중·민주적인 자기이해가 관철되는 새로운 사회로의 지향을 의미하는 것이다. 따라서 10월항쟁의 성격은 항쟁주체의 양적 규정 및 질적 규정에서 보는 바와 같이 반유신독재·민중항쟁으로 규정할 수 있다. 2) 부마민중항쟁의 의의와 한계 먼저 '항쟁'의 역사적 의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유신독재라는 전무후무하였던 폭압적 상황을 뚫고, 유신체제의 몰락을 가져오게 한 최초의, 그리고 최후의 대규모 민중항쟁이었다. 이는 70년대 한국사회 전체의 민주화운동의 중요한 성과이며 새로운 민주화운동의 가능성을 열어주었다. 둘째, 지역민중의 내재적 혁명성이 폭발적으로 분출됨으로써 지역민중운동의 현실적 가능성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 아울러 광주민중항쟁과 함께 부마민중항쟁은 지역사회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게 되었다. 셋째, 한국사회에 있어서 학생운동의 선도성이 확인되고 있다. 부마항쟁의 발전메카니즘 속에서 학생운동의 선도적 정치투쟁은 민중의 정치의식을 고양시켰고 급기야 대규모의 민중항쟁으로 전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역사적 의의를 갖는 부마민중항쟁은 또한 많은 한계를 지니고 있다. 그 한계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사회 전체의 학생운동의 선도성을 인정한다고 하더라도 운동의 불균등발전으로 인한 부산지역 학생운동 역량의 상대적 저위성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열악한 운동역량을 고려할 때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던 부산대운동의 기동성은 한편으로 놀라운 사실이지만 다른 한편으로 그러한 역량의 한계가 곳곳에서 노출되고 있다. 그것은 철저한 과학적 인식의 결여와 아울러 조직역량의 미숙성의 결과이다. 둘째, 항쟁 당시 부산지역의 사회운동기구들의 대중운동역량의 부재 또한 크게 반성해야 할 점이다. 이는 앞의 「박정권 민주화운동의 발전과정과 그 역량분석」에서도 명백히 드러나듯이 당시 부산지역 공개기구들의 항쟁에 대한 조직적 대응은 전무하였다. 물론 이러한 사실은 70년대말 우리 사회 전체의 일정한 운동수준을 반영하는 것이지만 그 한계에 대한 구체적인 반성은 부마항쟁에서 찾아야 한다. 셋째, 부산지역 민중의 압도적 다수가 노동자계층임에도 불구하고 지역노동운동의 최소한의 지도역량조차 확보되지 못하고 있었다. 이로 인해 항쟁에서 나타난 지역민중의 폭발적 에네르기를 조직적으로 수용하지 못하였거니와, 항쟁의 중심지역·확신지역 외의 특히 사상공단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지에서의 대규모 노동자투쟁을 이끌어낼 수 없었다. 넷째, 대중운동을 전국적인 차원에서 지도할 수 있는 '연대의 틀'이 없었다. 이로 말미암아 광주항쟁에서 다시 지적되는 것처럼, 부마항쟁에서도 부산과 마산지역내에서 고립적인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고, 서울을 비롯한 다른 지역에서는 폭발적인 대중봉기에 놀란 나머지 입만 벌리고 있었다. (후략)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