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구에서 고안나
묶인 배와 묶이지 않은 배가
서로 열심히 바라본다
마음의 팔은 분명 저만큼 뻗어 몸을 묶고 싶지만
무정타 생각 바뀐 포구여
박탈당한 자유와 완전한 자유가 공존하는
그 사이에 개펄이다
미처 물과 묶지 못한 불찰이다
습관은 정신을 묶었다
목 사슬 묶인 채, 말 잘 듣는 아이처럼
안일한 행동을 묶었다
고삐 묶인 소, 맞다
이랴 그러다 말뚝에 묶인 채
꼼짝 않고 하염없이 시간의 풀만 뜯는다
자꾸 돌아봐도 엄연히 갈 수 없는 풀밭이여
시(詩)에 연루되어 혐의에 묶인 지 오래다
사랑보다 더 질긴 너를 풀까 말까
물의 가족 천양희
물을 거꾸로 쓰면 룸이고
룸을 뒤집으면 물이 된다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는 거대한 물의 룸이라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물소리 높아지면 파도가 된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길 깊어져 수심이 되었다고 말하고 말았다
수평선 바라보다
수평한 세상에서 살고 싶네, 너가 말했을 때
하늘을 쳐다보다
땅에서 하늘까지 아직도 수직이네, 다시 말했을 때
경계 없는 것들이 좋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흘러가는 것들이 눈물겹다고 말하고 말았다
누구도 대신할 수 없어 바다는 위대한 것이라고 너가 말했을 때
바다의 모든 소리는 뒤에 여운을 남긴다고 다시 너가 말했을 때
마음에도 밀물 썰물이 있다고 말하고 싶었으나
물결에도 들숨 날숨이 있다고 말하고 말았다
소리와 의미가 잘 맞아 철썩이는
우리는
물의 가족
목포항 김선우
돌아가야 할 때가 있다
막배 떠난 항구의 스산함 때문이 아니라
대기실에 쪼그려 앉은 노파의 복숭아 때문에
짓무르고 다친 것들이 안쓰러워
애써 빛깔 좋은 과육을 고르다가
내 몸속의 상처 덧날 때가 있다
먼 곳을 돌아온 열매여
보이는 상처만 상처가 아니어서
아직 푸른 생애의 안뜰 이토록 비릿한가
손가락을 더듬어 심장을 찾는다
가끔씩 검불처럼 떨어지는 살비늘
고동 소리 들렸던가, 사랑했던가
가슴팍에 수십 개 바늘을 꽂고도
상처가 상처인 줄 모르는 제웅처럼
피 한 방울 후련하게 흘려보지 못하고
휘적휘적 가고 또 오는 목포항
아무도 사랑하지 못해 아프기보다
열렬히 사랑하다 버림받기를
떠나간 막배가 내 몸속으로 들어온다.
누구나 한 번 쯤
섬이기를 박하경
홀로이길
겁대가리 없이 갈망하다
섬이 되었던 날
떠다니던 자유를 깃대에 꽂아
왕국을 선포하고 문패를 달았다
허무의 안개로 짙은
닻을 내리던 수많은 날이
다가오고 또 다녀가자
희끄무레한 철학의 덧셈으로 탄생했던
오만의 거울을 부수고
돌아서 섬 탈출기를 써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