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녕하십니까...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여수순천 4.3사건 다들 아시죠?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소재가 되었던...
반공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때문에 많이 왜곡되어 우리앞에
놓여져있는 사건이죠..
그래서 말인데..이 사건에 대해서 각기 다른 여러분의 관점에서 사건을 평가해주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건가요..
참고로..여수순천 사건을 간단히 적어놓을께요...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
1948년 10월 20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당시 국방군) 제14연대 일부가 일으킨 반란사건.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 약칭한다. 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눈앞에 다가오자 좌익세력은 온갖 수단으로 그것을 저지·방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48년 4월 3일, 공산분자들의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공작으로, 제주도 일원에 폭동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현지 주둔 국군 병력과 경찰이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벌였으나 폭동의 규모에 비하여 병력이 열세여서, 시급한 증원 병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 해 10월,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력 약 3,000명의 제주도 급파를 결정하였다. 한편 이 14연대에는 이미 공산당의 프락치가 침투되어 있었는데, 이보다 수일 전에 이 부대 소속 오동기(吳東起) 소령이 공산당 프락치임이 밝혀져 검거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프락치와 반란 음모 관련자들의 색출을 위한 조사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에 자신들의 검거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적색분자들과 관련자들은 극도의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어차피 음모가 노출된 이상 최후 수단을 택하게 되었다. 국군 제14연대가 여수항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1948년 10월 20일을 하루 앞둔 19일 밤, 반란군의 총지휘자 김지회(金智會) 중위·이기종(李起鍾)·박기암(朴基岩) 등 주모자들은, 미리 포섭해 놓았던 행동대 약 40명을 은밀히 규합하여 새벽 2시경 병기고(兵器庫)를 장악한 후, 비상소집 나팔을 울려 달려 나온 병사들에게 “38선은 인민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다. 지리산에도 만여 명의 인민군이 포진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졌다. 살고 싶은 자는 궐기하여 반동분자를 처단하고 새 세상을 맞자. 불응하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하며, 호응하지 않은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당시 연대장 박승훈(朴勝薰)은 연대부관의 긴급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다가, 이미 사태수습이 불가능해졌음을 알고 그 길로 목포로 피신하여, 상부에 긴급보고하여 진압을 요청하였다. 1,000여 명의 반란군은 날이 밝기 전에 경찰서를 비롯한 여수의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고, ‘인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인공기(人共旗)를 게양하였다. 날이 밝자 약 4만 명의 군중을 동원시켜 놓고, 새벽에 병사들을 협박·선동했던 방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지지와 협조를 강요하였다. 10월 27일,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주일 만에 토벌군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되기까지, 반란군은 한때 순천·남원·광주까지 진출하며 무법천지를 확대시켰는데, 특히 순천에서는 여수 이상의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토벌군에게 쫓기는 반란군은 최후발악으로 수많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여수의 고소동(姑蘇洞)·능동(陵洞)·서교동(西橋洞) 등에서는 민가 2,000여 호가 불살라졌다. 1주일 동안 무고한 인명피해가 300여 명, 공공건물 및 민가 소실이 수천 호에 달하였다. 반란군 중 상당수는 토벌군에 투항하였으며, 지리산 쪽으로 도주하던 잔당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
여러분들은 많은 의견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