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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 명성스님 |
“복은 스스로 짓는것…부처님만 불러선 안돼” |
진실한 삶은 모나지 않아…둥글게 화합하며 살아야 마음 있는자는 모두 성불…불성엔 남녀차별 없어 여성의 온화한 말.행동이 행복한 가정과 사회로 어느 날 나무 그늘 아래서 한가로이 책을 읽는데 구렁이 한 마리가 낼름낼름 기어왔다. 얼마나 무서웠을까, 꽃만한 간을 지닌 그 소녀는. 오로지 저 흉측한 뱀을 제도해야겠다는 일념으로 겁을 삭혔다. 신이(神異). 순간 멈춰선 뱀은 자리에서 꼼짝 않다가 온몸이 굳은 채 죽어버렸다. 염력(念力)의 힘이었을까. 원래 제 명이 다한 것일까. 여하튼 더 이상 살생을 범하지 않게 된 건 다행한 일. 뱀이 스스로 제 죄업을 물어뜯은 환지본처, 소녀는 다시 둥그런 꿈을 꾼다.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 명성스님을 지난 9일 서울 수서동에 위치한 조계종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에서 만났다. 뱀과 관련된 기이한 추억은 전국비구니회장직의 고충을 털어놓는 도중 우연히 나왔다. 스님은 “비구니회관의 운영비도 빠듯한 데다 집행부를 구성할 스님 섭외조차 하늘의 별따기”라며 애태웠다. 하지만 지인들은 그것이 괜한 조바심임을 안다. 스님은 부처님을 위한 일이라면 반드시 해낸다. 전국비구니회는 운영위원회를 확대하고 유치원 건립을 추진할 만큼 어느 때보다 탄탄한 조직으로 성장했다. 무엇보다 진토만 흩날리던 청도 운문사를 세계 최대 수준의 비구니 교육도량으로 일신했으니 할 말이 없다. “화력 수력보다 강한 것이 염력이고 원자폭탄의 파괴력을 발밑에 두는 것이 염파(念派)”라는 믿음으로 평생을 지탱해 왔다. 진심으로 원하면 이뤄지지 않는 일이 없다는 말은 진실이었다. 그럼에도 ‘치기언과기행(恥其言過其行).’ ‘자기가 한 행동을 과장해 말을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라’는 뜻의 좌우명이다. 스님은 보시를 할 때에도 ‘내가 먼저 1000만원을 낼테니 사중에서도 1000만원을 보태라’ 이런 식이다. “염불이 타력신앙이라고들 하는데 … 복은 자기 스스로 지어야지, 밤새 부처님을 부른다고 이뤄지지 않아요. 그리고 복이 될 만한 일을 몸소 해야죠. 입이나 벌리고 누워 있으면 부처님이 미워서라도 복을 안 주지.” 한 일자를 그린 채 앙다문 스님의 입술이 미덥다. 사흘 동안 밤을 지새가며 책을 읽을 정도로 스님은 어릴 때부터 공부벌레였다. 즐겨읽은 책은 위인전. 공자나 잔 다르크의 삶을 나침반으로 삼았다. 우등생이자 모범생이었던 건 당연지사. 친구들과 다투게 되면 ‘관세음보살 같으면 이때 어떻게 처신했을까’ 고민할 만큼 불서도 탐독했다. 부처님을 제대로 만난 건 여고 졸업 후 잠시 교편을 잡던 시절, 〈반야심경〉 관자재보살의 자비사상이 삶의 진로를 바꿨다. “〈반야심경〉의 핵심은 반야 곧 지혜입니다. 스스로 노력해 잘 살아보겠다는 의지가 없는 사람에게 무작정 퍼주다 보면 복 받는 이나 복 주는 이나 거지가 되듯, 지혜가 없는 자비는 자비가 아니에요. 그렇다면 과연 반야가 뭘까.” “내가 반야가 되자”는 믿음으로 머리를 깎았다. 출가의 길은 값진 만큼 모질었다. 특히 여자에게 공부가 권장되지 않던 시절, 해인사에서는 공양주를 하며 치문을 들으러 다녔다. 설거지까지 마친 뒤에야 강당에 좌복이 주어졌다. 서른 너머 늦깎이로 동국대 대학원에 재학할 때는 숭인동 청룡사에서 학교까지 걸어서 통학했다. 공고한 남존여비의 체제에서 스님도 그 시대의 수많은 ‘후남이’, ‘종말이’들처럼 강해졌다. 뱀과 맞서던 자세로 눈에 불을 켰고 선과 교를 겸비, 비구니계를 대표하는 스님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스승의 제자사랑엔 성별이 없었다. 선암사 성능스님이 전강을 하며 일언반구없이 좌복 하나만 쓰윽 밀어주던 기억은 지금도 감동이다. 통도사 극락암 경봉스님도 끔찍이 아껴, 혹여 남이 영특함을 질투해 해코지라도 할까봐 절대 큰 소리로 책을 읽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기도 했다. 동국대 박사과정 당시, 강의 도중 ‘여자는 성불할 수 없지 않느냐’는 누군가의 물음에 ‘그런 무식한 질문이 어딨느냐’며 핀잔을 주던 김동화 박사의 역정은 무언의 격려가 됐다. “부처님은 〈열반경〉에서 ‘마음이 있는 자는 모두 성불한다’고 가르쳤습니다. 성에는 남녀가 있지만 불성엔 남녀가 없어요. 여성이야말로 세상의 꽃이며 만물의 어머니입니다. ‘하루 일하지 않았으면 하루 먹지 말라’는 백장청규를 되새기면, 여성이 할 수 있는 일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정진하세요.” 불성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모성은 여자에게만 부여된 특권이다. “훌륭한 영웅 뒤엔 언제나 현명한 아내가 있었죠. 관세음보살처럼 대승자모가 되세요. 여성들이 가정에 선사하는 온화한 표정과 친절한 행동, 유순한 말이 이웃과 사회에 번져가 희망의 씨앗이 됩니다.” 이 땅에서 여자로 산다는 게 꽤나 수월해진 편이다. 일견 남자보다 차고 넘치는 구석도 보인다. 교육수준이 향상된 결과다. 하지만 승가의 경우, 뿌리깊은 관습과 제도 탓에 비구니 스님은 뒷전에 물러나 있는 것이 아직도 미덕으로 여겨진다. 물론 비구니 스님들이 허울만 스님일 뿐 사찰의 하녀 취급을 당하는 남방불교의 사정에 비하면 양반이다. 이들이 한국 비구니 승단을 세계 최고라며 극찬하는 이유는 교육환경에 대한 부러움 때문이다. “배워야만 대접을 받죠. 내가 운문사에 35년간 머물며 후학과 함께 경학을 연찬하는 것도 교육의 절대적 중요성 때문입니다.” 스님은 동국대 석사과정을 마친 후 선방에 가려다 운문사 스님들의 적극적인 ‘스카우트’ 공세에 못 이겨 운문사에서 바랑을 내려놓았다. 그때가 1970년. 운문사승가대학은 어느새 전국 강원 가운데 가장 많은 270여명의 학인들이 모여 공부하는 도량이 됐다. 스님이 배출한 졸업생들만 수천명에 이른다. 이중 외국에서 학위를 취득하는 등 박사만 30명에 달한다. 장학금은커녕 해외 나갈 여비 한푼 대주지 못했지만 수행과 포교 각 방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제자들을 보면 기특하기만 하다. 스님은 “공부는 스스로 짓는 복이기에 특별히 강조하거나 다그치는 법이 없다”면서도 후학들에게 한 가지만은 분명히 다짐을 받는다고 한다. 즉사이진(卽事而眞). ‘매사에 진실하게 살라’는 가르침이다. 스님이 가장 좋아하는 외국어 낱말도 라틴어 베리타스(veritas), 바로 진리라는 뜻이다. 〈사미니율의〉를 출간하는 등 계율의 대가이면서도 계율의 문자적 의미에 집착하지 않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상황에서나 진실된 행동을 하는 것이 참다운 지계(持戒)”라고 강조한다. 그렇다면 진실은 무엇인가. 물론 고정된 개념이나 맹목적인 광신은 아니다. 얼른 ‘상식’ ‘양심’이란 단어가 희미하게 떠오를 뿐이다. 하나의 간명한 화두로 잡히지는 않는 찰나, “나는 모난 그릇조차 싫어한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언제 어느 때나 이치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이치에 거슬리지 않으면 모든 일은 이루어집니다. 작은 일이라고 소홀히 여기지 말고 큰일이라고 두려워 맙시다. 이치는 우리 마음속에 단순한 모습으로 살아있어요. 다들 똑똑히 알고 있으면서 제 욕심과 어리석음에 못 이겨 모른 체할 뿐이지.” 스님은 “언제 어느 때나 둥글게 둥글게 서로 화합하며 살아야 한다”고 말씀을 마무리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경향각지서 우글거리는 수많은 ‘뱀’들, 스님의 말씀에 눈이라도 한번 깜빡일까. 장영섭 기자 flowergirl@ibulgyo.com 사진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 명성스님은… 운문사 비구니도량 세계 최대로 키워 명성스님은 지난 2003년 10월 제7대 조계종 전국비구니회장으로 취임했다. 전국비구니회는 지난 1968년 “불교 현대화에 이바지할 비구니총림을 세우자”며 광우스님 명성스님 등 뜻있는 스님들이 의기투합해 결성한 ‘대한불교 비구니우담바라회’에서 출발했다. 서울 숭인동 청룡사에 둥지를 튼 우담바라회는 1985년 전국비구니회로 이름을 바꾸고 조직도 개편했다. 비구니회는 포교, 교육, 복지라는 3대 원력 실천에 매진, 이해부터 전국비구니 수행교육을 매년 실시했으며 1995년에는 양천구민체육센터를 위탁받아 복지 분야에서도 활약을 보였다. 1990년 조계사 내로 사무실을 이전한 비구니회는 단일 수행도량 건립의 원력을 세웠다. 이윽고 1998년 서울 강남구 수서동에 지하 2층 지상 3층, 총면적 2500여 평의 비구니회관 기공에 들어가 2003년 8월19일 전국 7000여 비구니스님의 총본산인 전국비구니회관 법룡사의 문을 열었다. 비구니회관은 각종 법회를 비롯해 다도, 불화.민화그리기, 고전무용, 사찰음식 요리 등 다채로운 문화강좌를 개설해 불자들을 맞이하고 있다. 1952년 해인사에서 선행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법계 명성(法界明星)스님은 1958년 선암사 강원 대교과를 졸업했다. 같은 해 성능스님으로부터 전강을 받아 선암사 강원 강사로 취임해 47년간 후학을 양성했다. 1966년 해인사에서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제3.4.5.8.9대 조계종 중앙종회의원을 역임했으며 1987년 운문승가대학장, 1997년 운문승가대학원장으로 취임했다. 〈불교학논문집〉 〈구사론대강〉 등 다수의 논문과 번역서가 있다. 조계종 포교대상 공로상 환경부장관 특별공로상 등을 수상했다. 1966년 서예로 국전에서 입선할 만큼 붓글씨도 빼어나다. |
첫댓글 감사합니다.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