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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12.07.15)]
/ 부르심의 소망(이장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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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오후설교]
/ 여호수아 8장
에베소서 1:15~19 부르심의 소망 2012. 7. 15
“15 이로 말미암아 주 예수 안에서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16 내가 기도할 때에 기억하며 너희로 말미암아 감사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17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영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18 너희 마음의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함이 무엇이며 19 그의 힘의 위력으로 역사하심을 따라 믿는 우리에게 베푸신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떠한 것을 너희로 알게 하시기를 구하노라”
바울의 기도에 대하여 계속하여 보고 있습니다. 지난주는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시기를 구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야 마음의 눈이 밝아집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져야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인지 이것을 이루시기 위한 능력의 지극히 크심이 어떤 것인지를 알게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교회를 다니면서도 이런 내용에는 별 관심이 없었다는 이야기를 지난주에 나누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에 대하여 시간상 생략하였는데 오늘 한 번 더 보도록 하겠습니다.
고린도후서 4:3~6절입니다. “3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 이 세상의 신이 가리고 있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의 광채를 모르고 부르심의 소망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런 자들에게 태초에 빛이 비치라고 하신 그 창조의 능력으로 복음의 광채를 알게 되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사도는 에베소 교회를 향하여 이런 기도를 하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편지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어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는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을 이루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소망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지 않고 스스로 교회로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정성을 바침으로 자신의 소원을 이루고자 합니다. 이것이 모든 종교의 보편적인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소망을 가지고 있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요한일서 2:15~17절입니다. “15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16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 17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이 세상이나 이 세상에 속한 것을 사랑하는 것이 소망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아닙니다. 그런 것은 세상에서 다른 사람보다 나아지는 조건을 소망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은 세상이라는 조건이 무너지면 다 무너져 내리는 소망이기에 헛된 소망입니다.
그러므로 바울사도는 이미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심으로 마음의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신 그 부름의 소망이 무엇인지 알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녔거나 아니면 중간에 교회를 다녔거나 간에 별 차이가 없는 것은 우리가 평소에 소원하고 바라는 것들이 같기 때문에 차이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얼마를 다녔는가 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과연 그 사람이 무엇을 소망하는가를 보면 그 사람의 신앙의 내용을 알 수가 있습니다.
우선 에베소서에서 우리를 부르신 소망이 무엇인지 살펴보겠습니다. 에베소서 1:4~6절입니다.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는 것이 부르심의 목적입니다. 우리가 평소에 이런 기도를 해 본적이 있습니까? 우리가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세워지기를 소원하는 기도를 얼마나 하십니까? 또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게 하시기 위하여 부르셨습니다. 이런 것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은혜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소망이 있는 자가 부르심을 입은 사람입니다.
에베소서 4:1~6절입니다. “봉독”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합니다. 부르심에 합당하게 행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모든 겸손과 온유로 하고 오래 참음으로 사랑 가운데서 서로 용납하고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고 합니다.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한 몸이기 때문입니다.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이와 같이 부르심의 한 소망 안에서 부르심을 받았다고 합니다. 부르심의 소망이 같으면 부르심을 받은 일에 합당하게 행하라고 하는 일들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지게 됩니다.
에베소서 5:26~27절입니다. “봉독” 우리를 교회로 부르신 것은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사 거룩하게 하시고 자기 앞에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우사 티나 주름 잡힌 것이나 이런 것들이 없이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부르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통하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하는 것은 거룩한 신부로서의 교회가 아니라 어마어마한 부동산의 규모와 사람들의 숫자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자고 합니다. 이것은 아직 지혜와 계시의 영이 임하지 않아서 마음의 눈이 밝아지지 않아서 그렇지 않겠습니까! 그러므로 지혜와 계시의 영을 주셔서 마음의 눈을 밝아지게 하여 달라고 기도하는 것이 마땅한 기도입니다.
다른 서신에서 부르심의 소망을 간단하게 보겠습니다. 골로새서 3:15절입니다.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 데살로니가 후서 1:11~12절입니다. “11 이러므로 우리도 항상 너희를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하나님이 너희를 그 부르심에 합당한 자로 여기시고 모든 선을 기뻐함과 믿음의 역사를 능력으로 이루게 하시고 12 우리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대로 우리 주 예수의 이름이 너희 가운데서 영광을 받으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 우리를 부르심은 주의 이름이 영광을 받으시고 우리도 그 안에서 영광을 받습니다.
디모데 후서 1: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참으로 놀라운 부르심입니다. 우리가 주님을 불렀다면 우리의 소망을 말하겠지만 우리는 부를 생각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부르신 것은 우리의 뜻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서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부르신 것입니다. 이렇게 부르신 하나님께서 무엇을 하려고 부르셨다고 했습니까? 앵벌이 시키기 위하여 부르신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광에 참여시키기 위한 부름입니다.
히브리서 3:1절입니다. “그러므로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깊이 생각하게 됩니다. 히브리서 9:15절입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새 언약의 중보자시니 이는 첫 언약 때에 범한 죄에서 속량하려고 죽으사 부르심을 입은 자로 하여금 영원한 기업의 약속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얼마나 엄청난 부르심의 내용입니까? 이러한 부르심의 부요함은 우리의 평생에 알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8~9절입니다. “8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여 동정하며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부르심을 받은 이유가 이렇게 풍성합니다. 요한계시록 17:14절입니다. “그들이 어린 양과 더불어 싸우려니와 어린 양은 만주의 주시요 만왕의 왕이시므로 그들을 이기실 터이요 또 그와 함께 있는 자들 곧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진실한 자들도 이기리로다” 땅의 음녀와 짐승들을 이기는 분이 어린 양이신데 그와 함께 부르심을 받고 택하심을 받은 성도들도 이긴다고 합니다.
이제 부르심의 궁극적인 목표를 한 곳에서 보고 말씀을 마무리 하겠습니다. 로마서 8:30절입니다.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미리 정하신 자, 창세전에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정하신 자들을 부르십니다. 부르신 이유는 의롭다 하시고 영화롭게 하셨다고 합니다. 우리가 역사내 존재로서 경험하기로는 아직 의롭지 않다고 여깁니다. 죄가 나오는 것을 보면서 어떻게 의롭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죄인을 의롭게 하시는 예수님 안에서 이미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믿음으로 받을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영화롭게 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영화로움은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이 변화산에서 본 모습이며(마17장) 사도요한이 밧모섬에서(계1장) 본 영광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실 때에 우리가 홀연히 영광스럽게 변화되어야 영화롭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미 영화롭게 하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은 약속 그 자체가 이미 완결이며 존재이기 때문이 하늘에서는 이미 확증된 일입니다. 그러므로 영화롭게 되는 것을 목적으로 부르심을 받은 자라면 영화롭게 되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우리는 믿음으로 받습니다. 이러한 믿음은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믿음이지 우리의 능력이 아닙니다.
그러나 역사내 존재로서 아직 영화롭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자들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로마서 8:18절 부터 봅니다. 성도에가 반드시 고난이 있습니다. 성도가 당하는 고난은 금요일 공부를 하였습니다만 자신이 죄를 짓지 않았는데도 복음으로 인하여 고난이 있습니다. 또 자신의 죄로 인한 징계의 고난이 있습니다. 이런 징계는 죄에 대한 형벌이 아닙니다. 죄에 대한 형벌은 사망입니다. 그러므로 징계가 있다는 것은 사생자가 아님을 히브리서 12장에서 증거 합니다. 그리고 애매히 고난 받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고난들도 장차 나타날 영광과 비교할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런 고난을 통하여 성도는 소망하게 됩니다.
19~22절입니다. 피조물이 고대하는 바가 있습니다. 피조물이 소망하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서 그 썩어짐의 종노릇 한데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의 자유에 이르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광의 자유에 이르지 못하도록 이 세상의 신이 막고 있다는 것을 앞에서 보았습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지 못한 자들은 허무한 것과 썩어질 것에 평생 종노릇하다가 영원한 멸망을 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만 온 피조물이 탄식하며 고통 하는 것을 알게 됩니다.
23~25절입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를 받은 우리라고 합니다.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분의 열매를 받은 우리까지도 속으로 탄식하며 양자 될 것 곧 우리 몸의 속량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로마서 8:30절에서 이미 영화롭게 되었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언약 안에서 묵시 세계에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역사 내 존재로 있는 우리는 몸의 구속이 이루어질 때 까지 속으로 탄식합니다. 탄식하지만 소망으로 구원을 얻었습니다. 그러므로 보이는 것은 소망이 아닙니다. 보이는 것을 누가 바라겠습니까? 보이는 것들은 다 쇠하고 낡아지고 썩어지고 불타 없어질 것들입니다. 보이지 않는 소망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말씀으로 약속하신 이 약속들을 바라고 있다면 참음으로 기다리라고 합니다.
26~27절입니다. 우리가 보이지 않는 소망을 바라면서 참고 기다릴 힘과 능력이 없습니다. 그래서 성령님께서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우리는 마땅히 기도할 바를 알지 못합니다. 기껏 기도한다고 하는 것들이 보이는 소망들을 이루어 달라고 기도하는 수준입니다. 그러므로 성령께서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하나님의 뜻대로 간구하여 주십니다. 그러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은 우리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부르신 분의 소망이 우리 안에 이루어지고야 맙니다. 그 이유는 성령님과 예수님께서 계속하여 기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 결과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것이 무엇입니까?
28~29절입니다. “28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29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이것이 하나님께서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 이루실 소망의 내용입니다. 이 소망이 우리에게 현실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주일오후설교]
/ 여호수아 8장
여호수아 8장 2012. 7. 15
아이성의 재공격. 처음 아이성 공격의 실패는 아간의 범죄로 인한 것이었습니다. 한 사람의 범죄로 민족 전체가 고통당한 것입니다. 이 아간을 제거하고서 다시 아이성을 공격합니다. 아이성 공격실패의 직접적인 원인은 아간이지만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상태도 패인의 원인이었음을 보았습니다. 한 번의 승리로 교만하여 자신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는 생각에 대한 심판이 아이성의 패배였습니다.
8:1~2절입니다. 여호와께서 여호수아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합니다. 처음 여리고 성을 공격할 때 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에 나의 수나 힘을 의지하고 상대를 보는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아이성에서는 동일한 진멸전쟁이지만 탈취한 물건과 짐승은 가지도록 합니다. 그리고 작전지시를 하나님께서 내리십니다. 처음에 자기들의 힘으로 이길 수 있다고 해서 간 숫자의 10배가 넘는 숫자를 보내며 아주 치밀한 작전을 사용합니다. 이것은 사람의 계획과 방법과는 전혀 다르게 일하시는 하나님임을 보여주십니다. 그러므로 사건 사건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으면 안 되도록 조치하십니다.
8:3~29절 여호와의 지시대로 적을 진멸합니다. 아이성 사람들이 성문을 열어둔 채로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나온 것은 전날에 이겼다는 교만과 오늘 또 이스라엘이 패하는 것을 보고서 자신감을 얻어 달려 나온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교만으로 전쟁에서 졌는데 이제는 아이성 사람들이 교만한 것입니다. 교만은 언제나 패망의 앞잡이가 됩니다(잠16:18, 18:12.) 결국 완전히 진멸 당하게 되었습니다. 왕은 사로잡혔다가 나무에 달아 죽이고서 저녁에 돌무덤을 만들어버립니다. 나무에 단 채로 밤에 두지 않은 것은 신명기의 법대로 행한 것입니다.
신명기 21:22~23절입니다. “22 사람이 만일 죽을죄를 범하므로 네가 그를 죽여 나무 위에 달거든 23 그 시체를 나무 위에 밤새도록 두지 말고 그 날에 장사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시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를 받았음이니라” 진멸당하여 죽은 아이성의 왕과 같은 죽음을 누가 당하였습니까? 지난주에도 보았던 대로 예수님께서 우리가 대신 진멸당할 벌을 받으신 자리가 십자가입니다. 그 나무에 달려 저주 받아 죽은 죽음이(갈3:13) 어떻게 연결이 되는지 바로 이어지는 말씀에서 나옵니다.
8:30~35절 에발산과 그리심산. 배경을 이해하기 위하여 신명기 27:1~8절을 봅니다. “1 모세와 이스라엘 장로들이 백성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명령을 너희는 다 지킬지니라 2 너희가 요단을 건너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는 날에 큰 돌들을 세우고 석회를 바르라 3 요단을 건넌 후에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위에 기록하라 그리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 곧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 네가 들어가기를 네 조상들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말씀하신 대로 하리라 4 너희가 요단을 건너거든 내가 오늘 너희에게 명령하는 이 돌들을 에발 산에 세우고 그 위에 석회를 바를 것이며 5 또 거기서 네 하나님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 곧 돌단을 쌓되 그것에 쇠 연장을 대지 말지니라 6 너는 다듬지 않은 돌로 네 하나님 여호와의 제단을 쌓고 그 위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 번제를 드릴 것이며 7 또 화목제를 드리고 거기에서 먹으며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즐거워하라 8 너는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그 돌들 위에 분명하고 정확하게 기록할지니라”
모세의 명령대로 여호수아가 그대로 행합니다. 여기서 주목해 볼 말씀은 제단이 쌓아진 장소입니다. 그리고 철 연장으로 다듬지 않은 돌로 제단을 쌓은 것입니다. 우리는 축복을 좋아합니다. 만약 우리에게 축복이 선포되는 그리심산과 저주가 선포되는 에발산 중에 선택하여 서라고 하면 다들 그리심산으로 달려갈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제단이 에발산에 세워졌다는 것입니다. 그리심 산에서는 순종하면 복을 받는다는 곳이기에 희생의 제물을 드릴 제단이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에발산은 불순종하면 저주를 받는다고 선포되는 곳이기에 늘 제단이 필요한 곳이 됩니다.
계속되는 신명기 27장의 말씀에서 저주의 내용만 선포됩니다. 에발산에 선 사람들이 이 선포에 아멘을 해야 합니다. 지금 여호수아가 백성들을 양편으로 나누어 세우고는 율법의 말씀들을 돌에 기록하고 또 선포합니다. 저주가 쏟아지는 에발산에 제단이 있다는 것은 저주를 누가 대신 받아야 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그러면 축복의 말씀은 어디에 나옵니까?
신명기 28:1~14절까지 봅니다. “봉독” 이런 복을 받기 위하여 선행조건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모든 명령과 규례를 다 지켜 행하여야 합니다. 만약 하나라도 어기면 복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됩니다. 그 내용이 신명기 28:15~68절입니다. “봉독” 우리가 복을 받을 것인지 저주를 받을 것인지 자명하여집니다. 어떤 인간도 자신의 행위로 복을 받을 자가 없다는 것을 복과 저주의 선포의 말씀을 통하여 알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이 스스로 율법의 행위로 의롭게 되려거나 복을 받으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저주아래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 복을 받기 위하여 온갖 정성을 바치려고 합니다. 그것이 단을 철 연장으로 다듬는 것입니다. 제단을 쌓을 때 철로 된 연장으로 다듬지 못하게 하신 것은 인간의 기교를 받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온갖 축복받는 비결들을 쏟아내고 있는 한국교회의 현실을 보면 복을 받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저주를 받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스스로 율법을 지켜서 복을 받으려고 한 행위 즉 그리심산에 서려고 한 자들의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대신 저주받은 자로 오신 예수님을 배척한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저주를 받았다고 여기는 세리와 창기와 죄인들과 이방인들에게는 예수님의 대신 저주 받으심이 복된 소식이 되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14절입니다. “10 무릇 율법 행위에 속한 자들은 저주 아래에 있나니 기록된 바 ㄷ)누구든지 율법 책에 기록된 대로 모든 일을 항상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 27:26) 11 또 하나님 앞에서 아무도 율법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지 못할 것이 분명하니 이는 ㄹ)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하였음이라(합 2:4) 12 율법은 믿음에서 난 것이 아니니 ㅁ)율법을 행하는 자는 그 가운데서 살리라 하였느니라(레 18:5) 13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 바 ㅂ)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에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신 21:23) 14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라"
에발산에 쏟아지는 그 저주의 선포에 아멘 하는 사람들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 에발산에 제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 제단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대신 저주 받으심으로 그것도 나무에 달려죽은 저주로 인하여 예수님을 믿는 자는 영원한 저주를 받지 않게 됩니다. 이것이 복음의 소식입니다. 자기 솜씨 발휘하여 복을 받으려고 하지 말고 대신 저주 받으신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것이 영원한 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