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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
홍 석 영
그는 눈을 떴다. 꿈이었다. 앞자리에서 자기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 같은 아내의 환영이 선연했다.
그녀의 일그러진 얼굴의 텅 빈 눈속에는 깊숙이 어둠이 흔들리고 있었다.
“어차피, 붙들릴걸 왜 도망쳐왔수?”
그 목소리는 디젤기관차의 우렁찬 기적소리에 잠겨버렸다.
으시시 춥다. 갑자기 차체가 덜렁 내려앉는 것 같더니 차바퀴의 진동소리가 커졌다. 철교였다.
문득 교각 사이의 어둔 모래밭에 산산이 찢기어 떨어져 꽂히는 자신을 느끼어 눈앞이 아찔해진다. 담배가 피고 싶다. 그러나 손 하나 까딱할 수가 없다.
가까스로 창 쪽으로 고개를 돌린다. 김이 서린 유리창 밖에 뭔가 스륵스륵 내려앉는 소리가 들린다.
저건 눈발일까? 그는 생각한다. 오랜 시간을 차압당하고 유폐되어온 사람들이 견디는 슬픔만큼이나 눈은 조용히 쌓이겠지.
“이제 깨셨군요.”
텅빈 공간을 타고 쇠뭉치가 떨어진 만큼이나 큰 목소리에 놀라 고개를 돌린
다. 앞자리에 웬 사나이가 웅크리고 앉아 있었다.
완행 삼등 열차칸의 을씨년스러운 풍경. 천장에 매달린 전구가 비쳐주는 어둠침침한 차안에 유폐된 사람들 같은 몇개의 얼굴 위에서 그제야 현실이 번쩍 빛을 내며 돌아온다.
아하 그동안 얼마나 오래 되었을까? 앞자리의 사나이가 낌새를 채고 삐긋이 웃는다. 색안경을 쓰고도 밖이 잘 보이느냐고 조롱하는 눈초리 같다. 작은 소주병을 들고 병째 찔금거리다가,
“나는 처음부터 형씨가 혹 장님이 아니신가 했었죠.”
돌연 적막을 휘젖는 정력적인 어조로 지껄이더니 불쑥 술병을 내밀었다.
“이 술 한잔 안 드시겠읍니까?”
그는 사나이의 입술에 거품을 낸 병 주둥이를 무심코 내려다보다가 고개를 내젓는다.
“나는 형씨와 좋은 말벗이 되겠거니, 허구 기다렸던 겁니다.”
불만으로 사나이의 눈이 동물적으로 번뜩인다. 여전히 눈발은 귓밥을 파는 소리를 내며 유리창을 긁고 있다.
이제 추위는 두 다리를 밀고 올라와 가슴까지 마구 떨리게 한다. 술을 마시고 싶다. 하지만 그 술을 병째 받아마실 수야 있느냐고 생각한다.
“그럼, 제 모처럼의 호의가 어떻게 되는 겁니까? 빌어먹을, 이 지루허구 불편한 여행에 자리를 같이했단 사실만으로도 우린 어떤 인연이 있는 건데, 안 그렇습니까?”
그는 끼었던 팔짱을 풀고 구걸을 청하듯 내민 사나이의 손을 바라본다.
참, 그렇군. 때로는 저런 손에 구원을 받을 수도 있는 걸까? 바다를 건너 탈추을 꾀했을 때 이미 죽음이라는 막다른 운명조차 감지했던 게 아니었던가? 무모한 일일지도 몰라. 그렇다고 그저 견디기엔 너무 슬픔이 켰어.
“보아허니 꽤 추우신 모양인데, 몇잔 허시면 속이 훗훗해집니다. 그래도 안하겠읍니까?”
어깨를 으쓱하며 사나이는 토라진 투로 말했다. 그는 염치없이 씨익 웃어보였다.
“먼저 드시고 남으면 병째 저를 주십시오.”
사나이는 잠깐 멍청해 있다가는 병을 나팔처럼 물고 재빨리 몇모금을 들이마셨다.
그는 술병을 받아들고 잠시 창 쪽으로 무연히 눈길을 돌린다. 철교를 벗어난 기차가 이제 들길을 가고 있다.
“오늘이 무슨 날이죠?”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 아님니까?”
“아, 크리스마스 이브.”
“왜. 그것도 모르섰단 말입니까?”
온 천만에, 잠깐 잊었을 따름이지. 소록도(小鹿島) 내의 모든 교회는 이틀 전부터 크리스마스 트리를 세우고 교회탑에는 오색 전등이 찬란하게 켜 있었어. 학교의 스피커에서는 캐롤이 숲속에 울려퍼지고 있었고.
꽃츠롱을 단 병원 앞 게시판에는 〈축 성탄〉이라고 굵직하게 갈겨쓴 곁에 각종 자선단체에서 보내진 특별 선물이 원생들에게 나눠지리라는 특보가 자잘하게 써 있었지. 그 옆에는 교도소의 모범 재소자들 몇명이 특별사면을 받게 되었다는 소식도 곁들여 있었어.
그는 거듭 결심한 듯 술병을 들었다. 단숨에 들이켜고 나자 사나이가 적이
놀랜 포정을 한다.
“그렇게 잘허시는 술을 왜 사양했었죠?”
그는 가볍게 재채기를 하고는 말없이 오징어를 씹는다. 담배가 피우고 싶군.
사나이가 먼저 담배를 태워문다. 담배를 권할까 하고 망설이는 눈치더니 그냥 집어넣는다. 그도 담배를 꺼내 문다. 사나이가 불을 건네려는 걸 묵살하고 라이터를 켠다.
술기운이 목구멍에서부터 차츰 얼굴에 달아오른다. 드문드문 앉아 있는 손님들은 좀체 꼼짝을 안한다. 이윽고 환한 불빛이 비쳐오고 눈보라에 갇힌 역이 나타나서야 두 사람이 일어나 나갔다.
“형씨는 어디서 내립니까?”
차가 다시 움직이자 사나이가 물었다.
“다음 역이오.”
“오, 용케도 같은 데서 내리게 됐군요. 댁이 시냅니까?”
“한 십리 걸어야 돼요.”
“십리길을 눈을 맞고 어떻게 갑니까?”
그는 포갰던 다리를 내려놓으며 대꾸를 안한다. 가야지. 그 넓은 황토길이나 구지레한 환자촌의 초가지봉에도 역시 눈은 수북이 쌓였을 게다. 더없이 평화로운 마을처럼. 지금쯤 눈속에 갇혀 모두 잠들고 있겠지. 아내까지도, 혹 초소에 섰던 자위대원들까지도 돌아가 어느 집 사랑방에서 담배내기 화투판이라도 벌였을지도 모르지. 그들 곁에는 푸짐한 두부 안주와 막걸리가 준비되어 있을까? 병원 숙직실에는 교화과의 그 떠버리가 아마 곤하게 잠들어 있지나 않을지.
“나는 오늘밤 여관에서 묵어야 할 판이죠. 제기랄, 크리스마스 이브를 객지에서 지내다니 운수가 사납죠?”
문득 사나이의 목소리가 어두운 강둑을 타고온 갯바람처럼 음울했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기분 나쁘게 내일 새벽 일찍 누굴 찾아가 결판을 내야 헐 판입니다.”
그렇군. 그자도 지금쯤 편히 잠들어 있겠지. 눈내리는 밤에는 잠자리가 비길데 없이 포근한 법이니까. 그는 갑자기 분격하는 표정이 된 사나이를 지그시 바라본다.
“눈이 곧장 멈출 것 같지 않죠?”
“글쎄요, 밤새 올지도 모르죠. ”
“오늘이 크리스마스 이브랬죠?”
“그렇습니다. 헌데 아까부터 뭐 그게 결리는 일이라도 있읍니까?”
사나이의 의아해 하는 눈초리에 부딪치자 휘딱 고개를 돌려 부인했다. 팔짱을 끼고 몸을 바싹 움츠렸다.
광장의 납골탑(納骨塔) 앞에는 자그마한 조화묶음이 놓여 있었어. 크리스마스 트리를 만들던 어느 소녀가 가버린 부모에 주는 눈물겨운 헌화였을까? 그런 곳에 꿎 따위를 가져다 놓을 만큼 아이들에게 남아 있을 정서는 없을 거야. 문둥이 새끼들은…….
그대 눈발이 조금씩 날리고 있었어. 하늘거리는 흰나비떼처럼. 스피커에서는 화이트 크리스마스의 노래가 유창하게 들려오고 있었고. 문득 나는 아내를 생 각했지. 가로막힌 육지 위의 먼 하늘을 바라보면서.
“형씨는 사람이 산다는 게 뭘까 허구 가끔 생각해보신 일이 있읍니까?”
갑자기 구둣발로 벽을 쿵쿵 차면서 물었다. 그것이 야간 위협적인 어조처럼 들려서 그는 얼떨떨했다.
“글쎄요, 가꼼…….”
“이런 얘기 어떨까 합니다만, 세상 산다는 거 다 엉터리죠. 그렇잖구선 이 더럽고 숨막히는 사회에서 무슨 맛으로 삽니까? 나도 알몸뚱이로 보람있게 살아보려구 피나는 몸부림도 쳐봤읍니다만, 결국 소용이 없더군요. 조금도 말예요, 제기랄. 내가 마지막으로 믿던 계집마지 나를 배신했읍니다. 형씨도, 배신당한 경험이 많습니까?”
“글쎄요, 가끔…….”
“아, 어쩜 그러고도 잘 견뎠읍니까?”
사나이는 울부짖듯 말했다. 견디고 말고. 견디지 않고서야. 그는 초조했다.
마침 전기불이 비쳐오고 금시 내려야 할 것이라는 강박감에 불안하고 초조했다.
“형씨가 당헌 일들을 듣고 싶군요.”
그는 말없이 두 대째 담배를 태워물었다. 그러자 기적을 울리며 차가 속도를 늦추고 역구를 향해 들어갔다. 옴싹을 않고 시트에 늘어져 있던 몇 승객이 후닥닥 몸을 일으켰다.
“이제 우리도 내려야 헐 판이군요.”
환한 불빛이 미련을 억제하고 있는 사나이의 완강한 옆얼굴을 비쳐주고 있
었다.
푸슥푸슥 내리는 눈발 속에 역광장을 지나 술집이 즐비한 골목길을 간다. 어디서나 왁자지껄하게 떠들고 있다. 사나이가 그를 따르고 있다. 그는 사나이를 떨쳐버 리고 싶으면서도 아무 말도 못한다.
저만큼 앞에서 칸델라 불이 켜진 손수레를 밀고 번데기장수가 오고 있다.
“뻔 뻔 뻔디기, 뻔 뻔 뻔디기…….”
아주 부산하게 며든다. 사나이가 급히 그의 곁으로 다가오며 후훗 하고 웃는다.
“저자는 시체를 팔구 있구먼.”
구수한 앙징스러운 미물. 할머니가 명주실을 뽑느라 자새질을 하고 있으면 고치를 삶는 솥가에 둘러앉아 번데기를 주워먹던 일.
할머니 보세요. 요 뻔데기 쭈그러진 게 할머니 합죽이 입 같네요. 에키 이놈, 그런 버릇없는 말을. 아냐 할머니, 사람도 죽으면 뻔데기처럼 되는 거지? 뭐야? 어린놈이 별 못할 소리가 없구나.
그는 문득 번데기를 한움큼 사고 싶다. 따스한 이불 속에 묻혀 아내와 둘이서 먹는다.
사랑해 .
허무했던 독신촌의 나날.
모험으로 찾은 우리들의 이 시간.
그는 주위를 돌아본다. 그런데 번데기장수는 어느새 옆골목으로 사라지고 없다.
한 술집 앞에서 사나이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그를 돌아본다.
“형씨, 잠깐 들러서 술 한잔만 허시구 갑시다.”
“아, 저는 가야 해요.”
“아니, 먼길을 가시려면 따끈히게 한잔 허셔야지.”
일방적으로 그의 등을 밀며 재촉한다. 별수없군. 둘은 술집 에 들어간다.
붉은 스웨터를 입고 그만큼 낯이 빨개진 색시가 싱글거리며 맞는다.
“방에 들어가시죠?”
안되겠어. 그는 생각하고 낼름 어둠침침한 구석자리에 가 앉는다. 사나이는 망설이는 눈치로 섰다가 마지못해 그 앞에 앉는다. 색시가 실쭉하고 돌아서며 뭘 하겠느냐고 퉁명스럽게 묻는다.
“약주 한 되.”
그리고는 그를 향하여 겸연쩍게 웃으며,
“우리 방에 가서 한판 오붓하게 헐걸 그랬죠? 나 돈 있는데·…….”
한다. 술을 가지고 와서 색시가 쓰러질 듯 사나이 곁에 앉는다. 그리고는 나 술 많이 했어, 정말 이러다간 안되겠는데, 하고 부스스한 머리에 손가락으로 빗질을 하며 신경질적으로 웃는다. 그녀의 벌어진 스웨터 사이로 풍만한 젖무덤이 내다보인다.
“왜 여긴 손님이 없지?”
“왜 없어요. 한 여남은 몰려와서 진탕 떠들고는 떠났는걸요. 아주 혼이 났어요.”
“수지 맞었겠구먼.”
사나이는 그녀의 허리에 팔을 감고 단숨에 잔을 비운다.
그는 도무지 난처하다. 이럴 일이 아니었는데, 할수없군. 한잔만 마시고 일
어서 리라 생각해본다.
“어서 드세요. 어머, 색안경 멋있어. 눈길에 그걸 쓰믄 좋대죠?”
사나이가 그녀의 말을 급히 가로막고, 자아, 하고 한 잔을 그 앞에 내민다.
그가 화들짝 놀랜다.
“왜 그러오, 형씨?”
그는 얼떨김에 말이 막힌다. 어떡허나? 당신의 입술이 닿은 잔에 입을 댈 수는 없어. 그는 고뇌를 감추려는 노력으로 비굴해져서 겨우 입을 연다.
“저는요, 선생, 이건 어려서부터의 버릇인데 용서허세요. 이상헌 청결벽이 있어서요. 잔을 나누기가……
“아하, 참 이상헌 성미구려. 술이란 주고받는 재미로 마시는 건데. 이건 영 정내미가 떨어지는걸.”
사나이가 이맛살을 찌푸리며 투덜거리다가 색시가 괜히 끼들거린다.
“손님은 외국 다녀오셨나? 서양사람은 잔을 권허는 법 없대며요.”
그는 가슴이 설렁해지면서 고개를 떨구었다. 미안해요, 뇌까리며 술잔을 틀었다. 꿀꺽 들이마셨다.
“형씨는 무척 호강허게 자란 모양이조? 인상과는 달리 무척 귀족적이신데.”
탐색하는 눈초리로 날카롭게 바라보며 말한다. 온 천만에요. 그는 씁쓰레 웃
는다.
“어느 다방 마담이 말야, 형씨 같은 이상한 성벽이 있었지. 어딜 가나 절대루 제 수저를 지니고 다닌단 말여요. 몸쓸 괴벽이지, 괴벽.”
색시는 졸리는지 하ㅍᅟᅮᆷ을 하고 시계를 들여다보며 태엽을 감는다.
“왜 누구와 약속이라두 했나?”
사나이가 옆구리를 꾹 찌르며 묻는다.
“피, 약속은 무슨 약속예요?”
“그럼 됐어. 오늘 크리스마스 이브에 나허구 어딜 갈까? 통행금지도 없구……
허리를 감은 팔에 힘을 주며 너스레를 떤다. 아! 놓세요. 숨이 가빠요. 그녀
는 몸부림을 치며 종알댄다.
사나이는 그녀의 귀에 입을 바싹 대고 뭐라고 잽싸게 속삭인다. 싫어욧. 그건 좋아요. 흥, 별꼴이야. 사람 그만 웃겨욧.
빨갛게 루즈를 칠한 입술로 수다스레 지껄이며 낯을 찡그렸다간 폈다간 하면서 응석을 부린다.
그는 옆창문을 바라보고 있다. 밖에는 바람이 부는지 창문이 요란하게 덜컹거린다. 문득 바람소리에 섞여 숙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사랑해요. 당신을 버리지 않겠어요.
당신이 병이라구요? 천만에요.
그럴 리가 없어요. 믿어줘요. 만약에 그런데도 어쩔 수 없어요.
허지만 절대로 당신은 병이 아네요.
“자아, 술을 따러 요 깍겡이. 저분에게도.”
사나이의 토라진 목소리에 그는 휘딱 고개를 제낀다. 색시가 술을 따르며 묘
한 웃음기 있는 눈길을 보내고 있다.
“술 드셔요. 저 양반 꼭 묵덕보살이야. 〈말없는 그 사내가 나를 울려요〉 하는 노래 있죠?”
취해오르는지 허튼 가락으로 흥얼거리며 손바닥으로 탁자를 탁탁 친다. 그러는 그녀의 얼굴을 할퀼 듯 사내가 욕정이 서린 게슴츠레한 눈으로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리며 묻는다.
“형씨, 무슨 말씀이래두 해보시구려. 정말 열차 안에서부터 형씨에겐 많은 얘기가 있을 것 같았는데.”
그도 술이 취해올랐다. 영 안되겠는데, 하고 긴장하면서도 웬지 기분만은 나쁘지 않다. 모처럼 신명이 나는걸.
그는 이윽고 사나이를 찬찬히 살펴보며 말했다.
“선생께선, 사람의 일에 관심이 많으신 것 같군요.”
“네? 그런 편이죠.”
“관심이 깊다는 건 그만큼 사랑해서일까요?”
“네? 좀 어려운 질문이신데…….”
순간 어리둥절하는 사나이의 얼굴에서 강렬한 혐오를 의식 한다. 제기랄, 묘하게 사람을 할퀴려 드는군. 야릇한 해학적인 기분을 드러내며 사나이를 날카룹게 찔러본다.
누구든 혼자일 뿐야. 누굴 사랑한다는 건 결국 자신을 사랑하는 거야. 그런데 자신조차 사랑하지 못한다는 건? 나무 위에 걸린 넝마 같은 자신. 헌데 당신조차 행복하지는 않은 모양이군. 당신 앞에서 구지레한 내 넝마를 헤쳐 보인다면 당장 당신은 껍질이 째지는 아픔을 느낄 거야. 자지러지게 놀라자빠질 꼴이 무척 한스러울 거야. 허지만 아직은 위장을 풀 때가 아냐. 당신의 우정에 보람없이 우리는 피차 적당히 마련된 얼굴을 가지고 있으면 돼.
“실례입니다만, 선생께선 어떤 사업 같은 걸 허시는 건가요?”
그가 마음에 없이 불쑥 물었다.
“잘 맞췄군요. 대단치는 않지만, 자잘한 기계 소개업 같은 걸 허죠.”
사나이가 약간 찔린 표정으로 한바탕 허랑하게 웃는다.
“거 수입, 괜찮으시겠죠?”
“뭐 그러저러 밥은 먹고 살죠. 헌데 형씨는 뭘 허신댔죠?”
그는 무심코 찼던 공이 되돌아와 아프게 맞았을 때처럼 슬며시 후회한다. 경계 하는 눈초리로 사내를 쏘아보며 말한다.
“구호단체에 관계하구 있죠.”
“구호단체라……·그것도 여러 종류일 텐데?”
사나이는 몇차례나 색시의 젖무덤을 더듬던 손에 저항을 당하고는 낭패한 낯빛이 되어가지고 어물쩍 말한다.
순간 도어가 우당탕 열리고 청년 셋이 비틀거리며 들어왔다. 색시는 잽싸게 그들 곁으로 간다.
“빌어먹을, 별 쑥 같은 계집이.”
칵 하고 가래침을 뱉으며 사나이가 중얼거린다. 두 손을 탁자 위에 얹고 맥빠진 표정이다.
“우린 딴데 가볼까요?”
“이제 시간이 너무 늦었어요.”
괜히 그럴 것처럼 그도 비감해진다.
“허지만 이 기분으론 잠이 들 것 같지 않은데. 빌어먹을, 나는 내일 일에 전생명을 걸고 있어. 그년을 놓친다면 완전히 패가망신이 되는 거야.”
“몹시 초조히신 모양이 신데…….”
사나이는 불끈 일어나 색시에게 간다. 돈을 치른다. 그도 마지못해 구 뒤를
따른다. 청년들 곁을 지나면서 유심히 노려보는 한 눈길에 부딪쳐 찔끔한다.
문을 나서자마자 뒤에서 청년들이 떠드는 게 들린다.
“야, 저 안경 쓴 치 문둥이 아냐?”
“뭐, 자세히 봤어?”
“뻔허지 뭐야. 요즘 시내 술집에 갱생원 뭉둥이들이 뻔질나게 드나든다던데.”
그는 별안간 등골이 오싹해 진다. 어개를 휘잡는 손길을 의식한 듯 퍼뜩 뒤를 돌아본다. 아무도. 없다. 한숨을 내리쉬는 순간에 앞서 가던 사나이가 문득 돌아본다. 그는 발길이 얼어붙는다. 어떡헌다? 도망칠 생각에 전신의 피가 갑자기 멈추는 것 같다.
“형씨, 이제 눈이 멎었구먼.”
사나이가 말한다. 그렇군. 그는 다시 혹 숨을 내리쉬며 어둔 하늘을 우러러
본다.
“초면에 선생께 너무 실례를 해서 어떡하죠? 저도 얼마큼 돈이 있는데……”
눈속에 빠지며 걷는 뿌듯한 기분에서 어디론지 멀리 떠나고 싶다. 차분한 슬
픔을 안고 유배지를 떠나는 사람처럼.
“온 별소릴. 아까 형씨께선 나에게 인간을 사랑허느냐 했던가.”
사나이가 들뜬 어조로 묻는다. 아아 그런 뜻만은 아니었는데…… 그는 사나이가 어느결에 반말을 쓰고 있는 걸 깨닫고 피식 웃는다.
“아, 그랬죠.”
그러자 사나이가 실성 들린 사람처럼 끼드득 웃었다. 그는 가슴이 설렁했다.
“사랑해? 차라리 인간 모두에게 앙갚음을 허구 싶은 기분이야. 정말이지. 나
는 사람을 믿었어. 그린데 본정없이 매번 내 뒤통수를 후려치고 달아났단 말야. 나는 어릴 때 고아로 자라났어. 인정을 모르고 매정스레 커났어. 그래서 인정이 그리웠단 말야. 절실하게 말이지. 헌데 생각해봐. 사회의 모든 사람들이 이권에 얽매여 번번이 배신을 한다 하더래두 말야, 이십 년이나 고락을 같이했던 아내마저 그럴 수가 있나? 글쎄, 이십 년이나 살을 부비고 살아온 계집이 돈에 눈이 뒤집혀 달아날 수가 있단 말야? 앙, 달아날 수가 있어? 형씨, 이건 챙피헌 얘기지만 올봄에 내가 재수없이 사기에 걸려 사업자금을 몽땅 잘렸거든. 영 수습허기 어렵게 빚더미에 빠지게 되었어. 하루아침에 말야. 그래 아내가 궁여책으로 밀수화장품 행상을 나섰거든. 참 기특한 일이거니 해서 며칠씩 집을 비워도 통 의심조차 해본 일이 없었단 말야. 헌데 그럴 수가 있어? 가을부터 외박이 잦아지고 장사도 시원찮은 모양이더니 십이월 초순쯤 해서 숫제 어디론지 행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단 말야. 청천벽력 같은 일이지. 나야 사업을 다시 일으켜보겠다는 일념으로 눈코뜰 새도 없었으니 아내의 동정 따위에 관심이 미칠 사이도 없었거든. 그게 잘못이었지. 해서 사단이 나서야 뒷조사를 해본즉 엉큼한 년이 글쎄 춤바람이 나서 어느 간부와 도망치게 되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단 말야. 빌어먹을, 원 기맥혀서. 그년이야 죽어쌀 창부 같은 년이니 미련이야 없지만, 어린새끼들을 보니 원 피가 끓어 견딜 수가 없단 말야. 그래 사업이구 뭐구 눈이 뒤집혀 이제껏 그년의 행방을 추심해 다녔거든. 신문에 광고도 내구 말야. 그러다가 결국 어제 믿을 만한 정보를 입수했단 말야.”
사나이는 허공에 대고 짐승이 포효하듯 부르짖는다. 그는 가슴이 드세게 울렁거렸다.
“그럼, 부인을 찾아 용서헐 심인가요? ”
그는 얼결에 물었으나, 곧 후회했다.
“그건 이차적인 문제지, 그건."
그는 조바심이 탄다. 웬지, 강하게 압도해오는 표정에 사로잡히고 말 것 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아내는 지금 잠들고 있을 거야. 그런데 나는 술이 취해서 개처럼 눈길을 헤매고 있어.
“선생께선, 일찍 주무셔야조. 내일 일을 위해서라두. 나는 집에 가야겠구.”
“아냐, 시간은 아직도 있어. 십리 길은 언제든 갈 수 있잖아?”
사나이가 원망하는 투로 말한다. 그렇겠지. 어떡한다? 그는 담배를 태워문다.
눈앞에서 성당의 첨탑에 얽힌 오색전등이 꿈꾸듯 명멸한다. 별안간 그는 침묵에 와락 겁이 난다.
“선생께 얘기를 해야겠어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고해하는 신도의 말투로 입을 연다.
“나는 아까 요양단체에 근무하는 것처럼 말했지만, 사실은 직원이 아니라 환
자입니다. 나는 요양원의 원생입니다. 그런데 오늘 거기를 탈출해나왔죠. 거긴 섬입니다. 감시의 눈을 피해서 겨우 고깃배에 숨어 바다를 빠져나왔읍니다.”
사내가 급히 째는 것 같은 목소리로 말을 가로막았다.
“형씨, 무슨 병이야?”
그 목소리는 칼날처럼 칵 가슴엑 찔렸다. 당황했다. 일순간에 변명을 생각해
냈다.
“폐병이죠.”
“아, 그래. 형씨는 눈도 나쁘지 않아?”
“눈도 한쪽이 나쁩니다.”
“만신창이로구먼.”
사나이는 중얼거리며 연민에 찬 눈으로 흘깃 돌아본다.
“헌데 왜 거길 도망쳐나왔지?”
“그저 오늘 아침 우연히 하늘을 보았죠. 바다 건너의 육지 하늘이 아주 딴세상처럼 보이더군요. 왈칵 슬퍼집디다. 고향의 아내 생각이 불현듯이 간절허더군요. 영 견딜 수가 없었죠.”
사나이가 훗홋 하고 웃었다. 그러다간 충격적으로 그의 어깨를 덥석 잡으면서 소리쳤다.
“야, 멋있어. 형씨는 행복허군. 참 부러운 친군데 ?”
멎었던 눈이 다시 내리기 시작한다. 사나이는 빙판에서 넘어져 한 다리를 절
고 있다. 대문마다 붉은 색등이 켜 있는 구지레한 골목 안에 들어선다.
그는 지쳐 있다. 점심조차 굶었다는 의식이 되살아온다. 허기진 눈앞에 붉은
전등빛이 번뜩이는 고양이 눈깔처럼 비쳐온다.
사나이는 모습이 비슷비슷한 세번째집 대문 앞을 지나면서 말한다.
“형씨, 어제 어떤 처녀의 자살사건이 있었는데 말야. 아, 그 처녀 대단하던데?”
그는 흠찔 놀라며 사납게 사나이를 흘겨본다.
“꽝꽝 언 저수지의 얼음을 하이힐 뒤꿈치로 깨고서 그 속에 빠져죽었대. 하이힐 한쪽을 얼음 위에 달랑 남겨둔 채. 헌데 그렇게 힘들여서 죽을 수 있을까?”
“힘들여서?”
“웬만해선 얼음을 깨는 작업 중에 죽음을 단념해버릴 법 헌데.”
허긴 그래. 소록도를 향하는 무더운 전라도 삼백 리길에서 끈질기게 따라온 죽음의 유혹이 있었어. 죽어? 그런데 죽은 뒤의 더러운 시체를 생각하니 기가 폭싹 꺾이더군. 죽음의 방범이 손쉽게 걸려들어도 단 한번도 손을 써보지 못한
거야.
“그래 그 시체는 바로 건졌나요?”
그가 한참만에 묻는데 사나이는 대꾸를 않고 어느 집 마당으로 들어섰다. 대문 소리를 듣고 포주인 듯한 아낙네가 방에서 뛰어나왔다. 사나이가 짧게 몇 마디 그녀와 주고받았다. 그녀가 고무신을 끌고 대문 밖으로 사라지자,
“형씨, 우리 저 방으로 들어가자구.”
선뜻 사나이가 앞장을 서 모퉁이를 돌아 뒷방문을 연다. 곰팡이가 서린 쉬어 빠진 냄새가 코끝에 닿는다. 겨우 한 간 됨직한 작은 방 한쪽에 때묻은 이불이
깔려 있다. 사나이는 방에 들어가고 그는 문턱에 걸터앉는다.
“야, 눈이 푸지게 오는구먼. 형씨, 방에 들어오지 않겠어?”
그는 대꾸를 안한다. 술이 깨이는지 으시시 몸이 떨려온다. 이제 별난 곳에까지 끌려왔군. 그는 소리없이 내리는 눈보라에 눈을 주면서 괜히 막연해 한다.
“허긴 곧 색시가 오면 우린 따로따로 떨어져야 하니깐.”
사나이의 말끝이 무섭게 떨린다. 이어 찔린 듯 허랑하게 웃고.
“창녀에겐 차라리 도의가 있어. 몸은 팔지만 마음까지 팔지를 않거든. 형씨, 이런데 가끔 왔었나?”
“아니요. 전 도대체…….”
그건 거짓이야. 그는 생각한다. 한 오년 전에 원생 몇이서 와본 일이 있었어. 단 한번. 도의원 선거 때였지. 종반전에 들면서 매표에 혈안이 된 입후보자들이 갱생원들의 표를 빼앗기 위해 갖은 추태를 다 부렸어. 원 미칠 일이지. 어떤 입후보의 참모란 작자가 우리 간부 원생 몇을 시내로 불러내어 술에 진창 빠지게 했었거든. 우린 기분이 나서 떠들었어. 문둥이 콧구멍에서 마늘씨 빼먹는다더니 ×할 놈들 언제부텀 우릴 대우허게 됐다냐? 세상에 불쌍헌 우리 문둥이에게 아첨을 다 하니, 새끼들 드럽게 안달이 났군. 치사헌 새끼들의 돈이라면 뭐 사양헐 거 뭐 있어? 썩는 건 피차 일반일 테니 기왕이면 색시라도 끼고 기분내는 게 어때? 해서 그 참모란 작자가 우리를 끌고 창녀를 찾아갔었지.
“형씨, 오늘밤 나 만나기 잘했는걸?”
사나이가 비꼬는 투로 중얼거렸다. 그때 아낙네가 들어왔다. 이어 오바를 걸
치고 웅숭그리며 두 색시가 따라왔다.
“야, 왔다. 자아 형씨, 이젠 이별이야. 어째 긴밤 자겠어, 아니면 잠깐 헐 테야? 어쨌든 자유롭게 해. 돈도 이제 각자 부담이구 말야.”
사나이는 이제 완전히 볼일이 끝났다는 투로 사뭇 설레는 기분을 드러내며 속삭였다. 엉거추춤 일어선 그 앞에서 사나이는 키가 큰 색시를 손짓해 안으로 들이고는 꽝 하고 문을 닫아버린다. 그는 조금은 허퉁한 기분으로 뒤로 물러났다.
“자, 이 손님 모셔.”
아낙네의 목소리에 을씨년스레 그를 바라보던 색시가 혼자서 모퉁이를 돌아간다. 그는 마지못해 그녀 뒤를 따른다. 색시가 방문 앞으로 기다렸다가,
“들어가세요.”
우울한 목소리로 말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선다. 구멍이 난 벽에 걸려 있는 전등으로 방문 한쪽이 어둡다. 그는 그쪽에 가서 앉는다. 색시가 밝은 쪽에 웅크리고 앉흔다. 둥그런 얼굴의 왼쪽 눈썹 옆에 수술자국이 있는 게 유독 눈에 뛴다. 그녀는 일어나 오바를 벗어걸며 궁금한 듯 이윽히 돌아보다가,
“옷 벗지 않으세요?”
한다. 그렇군. 옷을 벗어야지. 그러면서도 그는 꼼짝을 안한다.
“밤이 너무 깊었어요. 저도 자야죠. 빨리 벗으세요.”
졸리는 말투로 짜증을 낸다. 그는 그녀와 반대쪽으로 돌아서서 오바를 벗고 위아래 한 벌씩 벗는다. 슈미즈 바람으로 그녀가 감정 없는 냉랭한 어조로 묻
는다.
“불 끌까요?”
원 이렇게 사무적일 수가 있나, 하고 생각하며 그는 불을 끈다. 그녀가 누워 있는 곁으로 이불을 들추고 들어간다. 나란히 누웠으나 그는 할 말이 없다. 따분하다. 가볍게 몸을 뒤치며 팔을 빼려던 순간에 그의 안경이 손에 닿았던지.
“아니 자면서도 안경을 쓰세요?”
약간 놀라는 시늉만 한다.
아, 안경! 하다가 그는 태연해지려고 애쓰면서,
“어차피 불을 껐는데 안경은 쓰나마나지.”
하고 웃으며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는다. 뭉긋한 젖무덤이 손끝에 닿는다. 그녀가 가볍게 그 손을 밀어내며 묻는다.
“긴 밤 주무시조?”
“글쎄.”
“어차피 얼마 안 있어서 날이 샐 텍데요. 뭐."
그는 대꾸를 못한다. 가슴이 설렁한다. 그녀가 그의 손을 어루만지며 묻는다.
“술 자셨죠."
“응, 했어.”
“남자들은 술만 취하면 이런 데 생각이 나나보죠? 난 술냄새 질색인데.”
그는 대답 대신 그녀의 젖을 만져본다. 아아, 오랜 방황 끝의 평온함이여! 그녀는 가볍게 몸을 비틀며 코먹은 소리로 채근한다.
“빨리 허세요. 벌써 새로 두 시가 넘었잖어요.”
그 소리가 새삼 그를 암담하게 한다. 아침? 밝은 새아침이 되면 나는 어떡헌다? 밤중이 아니고는 아내에게 갈 수 없어. 그는 돌연 주무르던 손에 맥이 스르르 빠진다.
“어서요. 저는 피곤해요. 막 잠들려는 판에 끌려왔잖어요.”
미안해. 그러나 나도 지쳐 있어. 그는 시름에 잠겨 있다가 문득 일어난다. 옷을 찾아 호주머니에서 지폐 두어 장을 찾아든다. 그녀 손에 쥐어준다.
“미안해. 당신을 괴롭히고 싶진 않었는데……· 받아줘.”
그녀는 말없이 돈을 머리맡 요 밑에 찔러둔다. 그는 누워 그녀의 가슴에 손을 얹고 험껏 젖을 주무르기 시작한다.
“밖엔 눈이 오지?”
“예, 눈이 많이 와요. 크리스마스에 눈이 오면 멋있죠.”
“아하, 멋있다구?”
“왜 좋잖으셔요?”
그는 무겁게 한숨을 내리쉬고 묻는다.
“당신도 산다는 데 멋있는 적이 있어?
그녀가 잠깐 시름에 잠긴 척 하다가,
“글쎄요. 그런 멋이 뭔지 모르지만 조금은 있으니까 살겠죠?”
하고 까라진 어조로 대답한다.
“그럼 됐군. 사는 보람이 있으니까.”
“네에? 이양반 이상헌 말씀하셔.”
“우리 이렇게 히구 그만 잠들까? 아주 영원히.”
“네에? 이 양반 술이 많이 취하셨나봐.”
오솔길에는 향기로운 솔바람이 분다. 메마른 황토길을 걷는 발길에 흙발이 풀석풀석 일어난다. 뒤에서 클랙슨소리가 울린다. 택시를 탄 원생이 창밖으로 손을 흔들며 지나간다. 부화장에서 병아리를 깨어가지고 돌아오는군. 그도 손을 흔들어준다. 아내는 왜 여지껏 나타나지 않을까? 빨리 이 얼굴을 보이고 싶은데.
앞에서 한 다리가 절단된 노인이 지팡이에 의지하여 뒤퉁거리며 나타난다. 뭉특하게 잘린 허벅지에 바지가 나풀거린다. 얼굴이 문드러진 노인이 슬프게 웃으며 그를 보며 지껄인다.
“참 세상을 잘 만났어. 원 저렇게 멀쩡할 수가 있나?”
지독한 만물상 (신경 나환자)이로군. 그는 침을 칵 뱉으며 노인 곁을 재빨리 지나치려는데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서 싹 꺼져라. 그리곤 다시 만나면 아는 체두 말라.”
쫓기듯 달음질을 쳐서 집에 이른다. 방문을 벌컥 연다. 아하, 한간 남짓한 방 한쪽에 이불이 깔린 채 아내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여보, 나 왔어.”
아내는 어느새 짙은 화장을 하고 있다. 입술에는 빨갛게 루즈를 칠했고 흉칙
하게 눈썹을 새까맣게 그려놓고 있다. 그가 멈칫하자 그녀는 통 감정이 없는 표정으로,
“들어오세요.”
한다. 그는 방에 뛰어들어 아내를 껴안으며 소리쳤다.
“여보, 나 성형수술 했어. 여기 눈썹이 있지?”
아내는 힐끗 바라부고는 낯을 찡그렸다.
“왜 그래? 나는 이제 멀쩡한 사람이 누가 나를 보고 문둥이라 할 건가? 이제 나는 완전히 음성이야.”
아내는 기막히다는 듯 풀썩 풀썩 웃는다. 그는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오른다.
“왜 웃지? 뭐가 우습냐 말야?”
아내는 갑자기 웃음을 거두고 한심스런 표정으로 거울을 집어 그에게 내준다.
“보세요. 당신 눈썹이 수염처럼 부얼부얼 자랐어요.”
그는 거울을 본다. 악 소리친다. 이게 무슨 꼴이람. 눈썹이 머리칼처럼 뻗쳐
눈두덩을 덮고 있다. 아내는 말없이 가위를 찾아들고 그의 눈썹을 짧게 깎아준
다. 가위소리를 들으며 그는 화가 나서 어쩔 줄 모른다. 죽일놈 의사녀석. 배냇머리를 이식 하면 문제없다더니, 이게 무슨 흉한 꼴이야.
아내는 가위를 집어던지고 벌렁 드러눕는다.
“당신, 피로하시죠? 나도 졸리네요, 어젯밤 당신 기다리느라고 꼬박 잠을 설
쳤어요. 자 누워요.”
그는 억울해 흐느낀다. 그녀는 안되겠다는 듯이 그를 안고 억지로 눕힌다.
“우린 이대로가 좋아요. 당신의 눈썹이 뭐예요. 우린 어차피 모든 걸 버리고 만나지 않었어요? 어젯밤 당신이 안 오기에 무척 궁금했어요. 새벽에사 살풋 한잠이 들었는데 당신이 어떤 여자와 끼고 자는 꿈을 꿨어요. 아침에 일어나자
화장을 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아하, 아내가 괜히 자신을 옭아매려 드는구나, 하고 그는 새삼스레 분격한다.
“아냐, 이건 성형수술이 조금 잘못 됐을 뿐야. 나는 완전 인간이야. 이제 귀향증을 받아 갱생원을 떠나야 돼. 당신과 둘이서 도시로 나가 장사를 해서라도
떳떳이 살아야 해. 남들처럼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는 거야.”
아내는 대꾸 대신 그의 손을 끌어다가 자기 가슴 위에 놓는다. 그녀의 젖은 이미 몇 년 전부터 시든 채 있다.
“젖을 크게 만드는 주사가 있다던데?”
그녀가 한숨지으며 잠깐 슬픈 얼굴이 된다.
“그건 내 탓이야. 나는 애를 낳을 수가 없어. 놈들이 강제로 정관수술을 해버렸단 말야.”
“허지만, 애가 무슨 필요해? 우린 둘이셔 이대로가 좋아요.”
그녀가 그의 가슴을 후비고 주린 짐승처럼 입술을 부벼댄다.
순간 벌컥 방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서 밖으로 나왓.”
고함소리에 놀라 돌아보니 방문 앞에 교화과의 떠버리와 자위대원 두어 명이 험한 얼굴로 서 있는 게 아닌가?
“언제 소록도에서 도망쳐왔어?”
그는 화들짝 놀라 일어나며 말했다.
“뭐라고? 나는 병원에서 눈썹 정형수술을 받고 왔단 말예요.”
별안간 그들이 웃음을 터뜨리고 맞섰다.
“야, 허튼수작 마, 눈썹을 달았다구. 네 눈썹이 어딨어?”
“그럴 리가 없어요.”
“빨리 나오지 않을래? 너 체포해서 유치장에 가뒀다가 내일 소록도로 다시 송환허는 거야.”
“아냐, 그럴 리가 절대로 없어. 아하.”
그는 힘껏 부르짖으며 달려드는 자위대원과 맞서 몸부림을 치다가·…· 번쩍
눈이 뜨였다. 꿈 꿈이었다.
“야, 이 문둥이새끼 나왓.”
활짝 열어젖힌 방문으로 아침 햇살이 눈부시다. 그는 반사적으로 눈에 손을 가져갔다. 끼었던 안경이 없다. 섬광처럼 머리에 스쳐가는 기억이 있다. 곁에 있었던 것 같은 아내. 아냐 어젯밤 색시도 없구나.
“야, 문둥이새끼 일어나지 않을래?”
성난 목소리가 쇠뭉치처럼 머리를 치고 간다. 그쪽을 바라본다. 방문 앞에선 몇 개의 성난 얼굴들이 금시 달려들 것 같은 자세를 취하고 있다.
살벌한 현실. 거센 붕괴음을 내며 그의 육신이 어둔 벽에 부딪쳐 찢긴다.
여보, 어떡허지? 당신을 찾아가려고 도망쳐왔는데.
그는 무서움에 떨려 눈을 지그시 감는다. 절대절명. 이제는 한치도 도망칠 구멍이 없구나. 불현듯 심한 갈증과 시장기를 느낀다. 빌어먹을, 아하.
“냉큼 나오지 않을래? 이 벌레 같은 새끼야.”
쿵쿵거리는 발자국소리가 나더니 우왁스러운 구둣발이 그의 머리를 걷어찬다. 머리가 깨지는 것 같다.
그는 눌린 듯 일어난다. 저만큼 떨어져 있는 안경을 집으려는데 사나이의 구
두가 그의 손을 짓밟는다.
“새끼, 문둥이 주제에 색안경을 쓰고 무슨 나쁜 짓을 하려고 그래?”
안경이 산산이 깨어진다, 그는 손을 빼고 천천히 일어서서 다시 문 쪽을 본다.
“글쎄, 어둔 밤이라서 자세히 볼 수가 없었잖어요. 망측히게도. 글쎄, 그 애가 자다가 새벽에 일어나보니깐 안경이 벗어는데·…… 눈썹이 없드래잖아요. 얼마나 놀랐겠어요? 지금 그애는 죽는다구 길길이 뛰고 야단이어요.”
머리가 부스스한 포주인 아낙네가 곁에 선 청년에게 지껄이고 있었다.
“저 새끼를 끌고온 녀석은 언제 갔어요?”
얼굴이 우락부락하게 생긴 청년이 화난 목소리로 묻는다.
“고녀석은 새벽에 떠났어요.”
옷을 챙겨 입으려던 그는 아낙네의 말소리에 정신이 확 깨었다. 어젯밤 이곳까지 데려온, 그 신원을 알 수 없는 사나이. 그는 아내를 찾았을까? 그런데 나
는 어떡허지? 그는 새삼 무서운 고독감에 몸을 부르르 떤다.
“이새끼, 빨리빨리 않을래?”
방에 있던 청년이 달려들어 그의 앞 정갱이를 걷어찼다. 그는 푹 고꾸라졌다.
그의 구둣발이 얼굴을 다시 찼다. 코피가 주루룩 쏟아진다.
“어서 저새끼 경찰에 갖다 넘겨.”
성난 목소리가 들려오는 가운데 검붉은 피가 살아 있는 생명처럼 이불깃을 번져가고 있는 걸 바라본다.
문득 어디선지 크리스마스 캐롤이 들려오는 것 같다. 그는 몸을 떤다.
“어차피 붙들릴 걸 왜 도망쳐왔수?”
핼쑥하게 질린 아내의 얼굴이 눈앞에 따갑게 달라붙는다. 그는 손바닥으로 코피를 훔치고 종이로 콧구멍을 틀어막으며 일어선다. 옷을 챙겨 입는다.
“나환이 천형병이란 건 옛날 얘깁니다. 여러분, 음성환자들은 이제 보통 성한 사람과 조금도 다름이 없읍니다. 용기를 가지세요. 자활의 용기를. 모든 그릇된 편견이 지배하는 사회에 용감히 뛰어들어 싸우세요.”
원장의 꼬챙이 같은 음성이 귓바퀴를 때리고 지나간다. 그는 웃옷 단추를 잠
그며 생각한다. 원장님, 당신은 우리가 숙명의 늪에서 헤어나기에는 세상이 너
무도 밝다고 생각 못하시는군요. 아아, 당신이 어엿이 눈썹을 달고 있는 한 말야.
그는 천천히 문 쪽으로 간다. 그러자 모여섰던 사람들이 찔끔하여 물러선다.
신을 신고 그는 아낙네에게 묻는다.
“죄송해요. 돈을 드려야겠는데 얼마 드릴까요.”
아낙네가 이마에 경련을 일으키며,
“문둥이 돈 받겠다구 장사허는 건 아녀.”
하고 소리치자 한 사나이가 말한다.
“아니, 돈은 받어야죠. 이왕이면 많이 받으셔요, 아주머니.”
그는 호주머니에서 백원 지폐 다섯 장을 헤어서 내민다. 아낙네가 주저하는 척 하다가 빼앗듯 나꿔챈다.
“미안해요, 아주머니. 저를 너무 나쁘게 보지 마셔요. 이런 말씀 이해해주실지 모르지만, 전 지금도 병이 든 문둥이는 아니올시다. DDS란 약을 먹고 실제 병은 나았읍니다. 눈썹이 없다는 걸루 여전 전염환자로 생각하시겠지만.”
그는 괜히 울적해서 눈물이 왈칵 쏟아진다.
“새끼, 개수작 마라.”
순간 한 사나이의 목소리가 목덜미를 움켜잡는 것 같다. 그는 분연히 고개를
제끼고 사나운 눈초리로 사나이를 돌아본다.
“그럼 나를 어쩌겠단 말입니까? 자아, 마음대루 하십시오. 경찰서로 끌고 갈테면 나의 팔을 잡으십시오. 어서 두려워하지 말구요.”
그가 팔을 내밀자 사나이가 움찔하며 물러선다. 그걸 보며 그는 돌아선다.
“어젯밤의 색시에게 미안하다고 전해주세요. 허지만 병 같은 거 염려말도록 타일러주셔요.”
두려움에 질려 있는 그녀 앞에 고개를 굽신거린다. 그리고 대문을 향해서 걷
는다.
“재수없이 별꼴을 다 당허는구먼.”
사나이가 등뒤에서 지껄이는 걸 들으며 골목에 들어선다. 비로소 혼자라는 걸 의식하고 한숨을 쉰다.
밝은 하늘을 우러러뵨다. 바다 건너 소록도에서 마음의 깊은 늪속에서 새겨듣던 그 하늘이 왈칵 달겨드는 걸 의식하며 그는 허탈감으로 맥이 풀린 발걸음을 서서히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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