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913 가해 연중 24주일
창세 50:15-21 / 로마 14:1-12 / 마태 18:21-35
아량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오늘 들은 제1 독서는 요셉과 형들의 이야기 후반부 내용입니다. 아시다시피, 이 이야기는 아량 혹은 관용을 보여주는 가장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창세기 37장부터 50장까지 보면, 아버지 야곱은 아들들 중 유독 요셉을 사랑했습니다. 그렇지만 요셉은 그런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자주 꿈 이야기를 하면서 형들을 불편하게 했고, 급기야 형들은 요셉을 노예로 팔아버렸습니다. 이집트로 팔려 간 요셉은 천신만고 끝에 주인의 신임을 얻어 주인집 청지기를 맡게 되지만, 주인 아내의 유혹을 거절한 것 때문에 오히려 모함을 당해 억울하게 감옥에 갇히게 됩니다. 그러나 감옥에서 파라오의 꿈을 해몽해 준 것이 계기가 되어, 그는 풀려나서 마침내 이집트에 닥칠 흉년에 대비할 책임을 맡은 총리로 신분이 상승합니다. 참으로 온갖 역경을 헤치고 일어선 입지전적 인물입니다. 그런데 성경은 여기서 놀라운 반전을 전합니다. 흉년이 들어 곡식을 얻으러 온 형들과 재회한 것입니다. 이제 처지가 완전히 뒤바뀌게 되었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요셉이라면 어떠하겠습니까? 쉽게 용서가 되겠습니까? 사실, 상담하다 보면 적잖은 사람들이 어렸을 적 받은 상처로 인해 평생 마음 깊은 곳에 고통을 안고 삽니다. 그런데 그 고통을 들어보면, 어떤 거창한 이념이나 제도 때문에 다쳤기 보다는 나와 가까이에 있는 부모, 형제자매, 친척, 친구 등과의 관계에서 벌어진 일들입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평소에 전혀 의식하지 못하고 지내다가, 피정과 같은 자신을 깊이 들여다보는 때에 무의식 안에 감추어진 과거의 상처들이 올라와서 당황하고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곤 합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은 요셉과 같이 인생의 큰 충격으로 인해 나의 인격 형성에 지장을 준 커다란 어둠을 안고 삽니다. 그렇지만 성경은 요셉이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갚았다고 이야기합니다. 오늘 독서에서 요셉은 다음과 같이 감동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나에게 못 할 짓을 꾸민 것은 틀림없이 형들이오. 하지만 하느님께서는 도리어 그것을 좋게 꾸미시어 오늘날 이렇게 뭇 백성을 살리시지 않았습니까? 그러니 이제 두려워하지들 마십시오. 내가 형들과 형들의 어린것들을 돌봐 드리리다.” (창세 50:20-21)
요셉의 이야기와는 달리 오늘 들은 복음은 정반대의 상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어떤 종이 왕으로부터 일만 달란트 되는 빚을 탕감받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는 자신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사람에게는 득달같이 달려들어 진 빚을 다 갚을 때까지 그를 감옥에 가두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주변 사람들은 어이가 없어서 이 사실을 왕에게 알렸고, 왕은 그 종을 불러서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이 몹쓸 종아, 네가 애걸하기에 나는 그 많은 빚을 탕감해 주지 않았느냐? 그렇다면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할 것이 아니냐?” (마태 18:32-33) 그리고 그를 빚을 다 갚을 때까지 형리에 넘겼습니다. 우리는 이 비유 이야기를 듣고 그가 얼마나 빚을 졌는지 감이 잘 오지 않을 것입니다. 당시 1데나리온은 노동자 하루 품삯입니다. 1데나리온을 우리나라 노동자 8시간 하루 최저임금 기준으로 환산해 본다면 82,560원입니다. 그러니까 100데나리온은 100일 임금인 약 825만 원인 셈입니다. 그러면 달란트는 얼마인가요? 당시 1달란트는 6,000데나리온입니다. 이것을 오늘날 화폐로 환산해 본다면 약 4조 9,536억 원입니다. 이렇게 오늘날 화폐단위로 환산해 보니, 감이 좀 오시나요? 즉, 왕은 종에게 약 5조 원에 달하는 채무를 탕감해 주었는데, 종은 고작 800여만 원 빚을 악착같이 받아내려고 했던 것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비유를 듣고 놀랐을 군중들의 심정을 여러분도 좀 공감이 되나요?
친애하는 교우 여러분!
우리는 너그럽고 속이 깊은 마음 또는 남을 넓게 받아들이고 이해하는 마음을 ‘아량(雅量)’이라고 표현합니다. 여기서 ‘아(雅)’란 ‘우아하다, 바르다’라는 뜻이고, ‘양(量)’이란 도량을 재는 단위 혹은 그릇을 뜻합니다. 이런 면에서 아량이 넓은 사람은 우아하고 바른 사람이란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요셉과 같은 사람이 대표적인 예라고 하겠습니다. 이와 상반되는 단어가 ‘옹졸(壅拙)’입니다. 여기서 ‘옹(壅)’은 ‘흐르는 물길이 막혔다’라는 뜻이고, ‘졸(拙)’은 ‘능숙하지 못하고 어설프다’라는 의미입니다. 이런 면에서 옹졸한 사람은 능숙하지 못한 사람, 어설픈 사람을 말하며 그러한 미숙함이 모든 일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막게 해서 자신과 주변을 꽉 막고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을 지칭합니다. 우리 선조들은 아량과 옹졸이란 단어를 대비해서 자연스러운 사람과 부자연스러운 사람을 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신앙의 관점에서 아량이 넓은 사람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요? 우선, 자신을 성찰해야 합니다. 요셉이 아량이 넓은 사람이 된 것은 하루아침에 된 것이 아닙니다. 그는 철부지 아이 때 노예로 팔려 가 갖은 고초를 겪으면서 때때로 자신을 이렇게 만든 형들을 원망하고 저주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꿈꾸고 해몽하며 그 의미를 찾았던 것처럼 자신의 인생 현실이란 꿈을 해몽하면서 주님의 섭리를 찾으며 거기서 조금씩 조금씩 성숙의 길로 들어섰을 것입니다. 그러기에 그는 총리가 되어 형들을 만났을 때도 오래되었지만 해결되지 않은 감정의 덩어리를 내놓은 것이 아니라, 주님과 오랜 씨름을 통해 깨달은 깊은 지혜를 갖고서 포용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그는 인생의 역경을 통해 우아하고 바른 그릇을 갖춘 ‘아량’ 있는 사람으로 변모한 것입니다.
그에 반해 5조 원을 탕감받았으나 고작 800만 원을 받아내려고 악다구니를 쓴 종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해결하지 못하고 자신의 집착으로 인해 그 엄청난 선물을 날려버렸습니다. 그 원인은 뭘까요? 저는 그가 요셉처럼 인생 역정을 통해 뼈를 깎는 성찰이 없이 복권에 당첨되듯 갑자기 엄청난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그 복을 감당하지 못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그 복을 담기엔 너무나 작은 그릇을 가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결과적으로 그 복을 담지 못하고 낭비해 버렸습니다. 다시 말해 하느님으로부터 엄청난 복을 받아 봤자 그는 그 복을 담을 준비가 전혀 되어 있지 못했기 때문에 결국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이 비유는 어떤 의미에서 주님으로부터 엄청난 죄의 사함을 받고 세례로 새로 태어난 우리 믿는 자들을 향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오늘 제2독서에 사도 바울은 각자의 잣대로 형제자매들을 평가하고 단죄하는 교인들을 향하여 서로 비난하지 말라고 당부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무한히 자비하신 주님 앞에 모두 죄인이고, 주님은 이런 우리를 위해 십자가에서 대속하시고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자의 주님도 되시고 산 자의 주님도 되시기 위해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심판할 수 있으며 또 멸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다 하느님의 심판대 앞에 설 사람이 아닙니까?” (로마 14:9-10)
그러므로 우리가 자신을 성찰할 때, 무엇보다 중요한 점은 십자가 앞에서 우리를 죽기까지 용서하신 하느님의 무한하신 사랑을 깊이 느끼고, 십자가와 부활의 은총으로 새로 태어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먼저 내가 살아오면서 받은 상처와 아픔을 내놓고, 주님 십자가의 보혈로 치유하십시오. 그런 다음, 주님의 마음으로 나를 상처 준 사람들을 바라보십시오. 주님은 여러분도 치유하지만, 동시에 그들도 치유하시는 분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주님의 보혈로 치유되고 그분과 함께 여러분의 어두움을 죽이고 부활한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한 차원 더 높은 세계로 올라가는 것입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과 하나 되어 아량이 넓은 사람으로 변화됩니다. 그러면 나도, 너도, 그리고 우리도 구원됩니다. 그리고 주님의 몸인 교회가 그렇게 용서받은 사람들로 가득 찬다면, 교회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미 이곳에서 시작되는 은혜의 장소가 될 것입니다. 그곳은 아량의 넓은 요셉 같은 사람들이 있는 복된 곳이 될 것이지만, 만일 그렇지 못하다면 그곳은 주님으로부터 용서는 받았지만, 주변의 형제자매들을 용서하지 못하는 오늘 복음에 등장한 종들이 있는 그렇고 그런 곳에 머물 것입니다.
주님은 이미 약 5조 원이 되는 빚을 탕감해 주셨습니다. 이제 선택은 여러분에게 달렸습니다. 5조 원 탕감받은 은총에 힘입어 내 형제자매의 빚 800만 원을 탕감해 줄 것인지, 아니면 단돈 800만 원을 받기 위해 5조 원짜리 탕감을 무를 것인지 잘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우리를 온전히 용서하신 주님의 무한하신 은혜로 말씀드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