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비화] 추사 김정희의 예서 대련 ‘산숭해심, 유천희해’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25.
김정희는 명문거족의 집안에서 태어나 조선 말기에 정치계와 학계 그리고 예술계에서 많은 활약을 한 천재였다. 그러나 노년에 들어 당쟁에 휘말리면서 집안이 기울고 자신도 제주도에서 10년 가까이 귀양살이를 했다. 이런 울분 어린 심정이 글씨에 반영되어 추세체라는 노호(怒虎)같은 필획이 생겨났다. 이 횡액(橫額)에서 대련인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산은 높고 바다는 깊다. 하늘에서 놀고 바다를 희롱한다)는 그의 장기인 예서를 기본으로 행서풍의 운필을 약간 곁들인 것으로 뛰어난 필력이 돋보인다. ‘노완만필(老阮漫筆)’이란 초서풍의 낙관이 적혀있고 ‘완당김정희인(阮堂金正喜印)’이라는 백문방인(白文方印)이 보인다.(호암미술관명품도록Ⅱ에서 발췌함)
추사 김정희의 예서 대련인 '산숭해심과 유천희해'
고서화 수집광인 임상종의 최후
일제 강점기 때 추사의 필혼(筆魂)이 깃든 예서 대련 ‘산숭해심 유천희해(山崇海深 遊天戱海)’를 소장했던 사람은 합천에 사는 임상종(林尙鍾)이다. 호가 해려인 임씨는 5천석지기의 부자였고, 한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서울에 사는 위창 오세창의 문하에 들어가 서화에 대한 감식안 키운 뒤 고향에 있는 논과 밭을 팔아 마음껏 고서화를 사 모았다. 그는 1910년 대 중반부터 재산은 거의 탕진하며 사 모은 결과 1924년경 그림 2천 폭과 글씨 3천 폭을 소장했다. 그 중에는 단원 김홍도, 겸재 정선, 현재 심사정, 추사 김정희와 같은 대가들의 작품뿐만 아니라 공민왕의 ‘호렵도’, ‘광개토대왕비탑본 ’ 등도 있어 당시 전형필․ 유복렬․ 손재형과 함께 고서화의 4대 수장가로 불리었다. 그의 수집벽은 돈이 떨어져도 멈추지 않았고 나중에는 남의 돈까지 꾸어 서화를 사 모았다. 하루는 친구가 임상종에게 따끔한 충고를 했다.
“여보게, 어쩌려고 빚까지 내어 그림을 사 모으나?”
그늘진 얼굴에 술잔을 든 임상종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내라고 아나. 그림만 쳐다보고 있으면….”
“사람에게는 분수가 있는 법이라네. 내 자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이제는 정신을 좀 차리게.”
“가진 것은 팔기가 싫고 남의 물건은 자꾸 탐이 나니 할 수 없지가 않는가?”
서화를 비롯한 고미술품은 팔지 않으면 돈이 되지 않는다. 그것도 그 물건을 가지고 싶어 안달 복걸하는 사람을 만나야 제 값을 받을 수 있다.
“허 허, 세상에는 기막힌 물건은 많고 가진 돈은 한정이 있으니, 언제나 밑지는 장사 아닌가?”
“땅 한 마지기를 팔아서 그림 한 폭을 사고 세간을 팔아 글씨 한 폭을 모은 것이 저 만큼 되었네. 저들을 모아도 밥이 생기거나 옷이 생기는 것은 아니고 도리어 재산만 줄어들지.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 어찌 모을 수 있는가? 돈이 원수일세. 돈만 있다면 모조리 쓸어 모을 수 있을 텐데.”
임상종은 친구의 충고를 무시하고 병적일 정도로 수집에 집착했고 한번 산 물건은 아무리 생활이 어려워도 팔지를 않았다. 하지만 여기저기서 빌린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나 경제적 어려움에 처하자 급기야 소장품을 담보로 맡기고 고리대금업을 하는 최상규(崔尙奎)에게 돈을 꿔다 썼다. 당시는 이자가 월 2할에 가까워 5달만 지나면 원금의 곱이 되었던 시절이라 남의 돈을 빌려쓰는 것은 사실 자살 행위나 다름없었다. 밑 빠진 항아리에 물 붓기 식으로 빚의 늪에 빠진 임상종은 더 이상 빚을 갚을 방법이 없자 급기야 파산선고를 했다. 그러자 개인으로써는 유래가 드물게 수집했던 3백여 폭의 고서화가 이자와 원금 대신으로 고스란히 최상규에게 넘어갔다. 욕심이 파멸을 부른 것이다. 죽음이 가까웠을 때 임상종의 손에는 손바닥만 한 서화 조차 남아 있지 않았고, 천추의 한을 품은 채 1940년 눈을 감았다. 임상종을 평가한다면 1920년대 일본인의 전유물이던 고서화를 경제적 이득을 따지지 않고 목숨처럼 아끼며 수집해 그들이 외국으로 반출되는 것을 막아 문화재 수호에 기여했다고 볼 수 있다.
임상종의 서화를 몽땅 차지한 최상규는 애당초 서화에 취미가 없었으나 서화를 이용해 집안을 갤러리처럼 고상하게 꾸민 뒤 그들을 비싼 값에 사 줄 사람을 집으로 초대했다. 장승업의 ‘어옹도’ 족자를 대청마루의 기둥에 걸었고, 대청과 안방 사이의 문지방 위에는 정선의 그림을 걸었다. 최씨의 집에 들린 이영섭과 원충희는 흥선대원군의 묵란도 병풍, 신사임당의 산수화접도화첩을 비롯해 눈이 번쩍 뜨일 만한 걸작들을 다수 보았는데, 그 때에 추사의‘산숭해심’과 ‘유천희해’도 함께 그곳에 있었다.
최상규가 장물로 잡은 고서화는 대부분 예산 군수를 지낸 원진희가 샀고, 일부는 6 ․25 전쟁을 겪으며 여러 사람에게 팔려나갔다. 예산에 공장이 있고 종로에서 백남상사라는 무역회사를 운영한 원진희는 사업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소장하던 고서화 236점을 1953년 경매를 통해 처분했다. 이 경매에서 ‘산숭해심’ 은 53만환에 제동산업을 경영하던 심상준이 낙찰을 받았고, 주목을 받은 ‘유천희해’는 121만환에 손재형이 낙찰을 받았다. 현재 유천희해’와 ‘산숭해심’은 모두 호암미술관을 거쳐 리움에 소장돼 있는데, 손재형의 소장품이 삼성의 이병철에게 양도된 사연은 대략 다음과 같다.
삼성으로 옮아간 손재형의 소장품들
전남 진도에서 갑부의 아들로 태어난 손재형은 조선 미전에서 특선으로 입상할 정도로 그림과 서예에서 특출한 자질을 보였고, 일제 때부터 고서화의 대 수장가였다. 재기가 발랄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그는 사랑방과 대청 벽에 고서화를 걸어 놓고 감상하던 풍류객이었다. 해방이 되자 조선서화동연회를 조직해 초대 회장이 되더니, 1947년에는 진도 중학교를 설립하고, 1950년 대 후반부터 정치가로 활약했다. 1958년 민의원에 당선된 손재형은 한국 예술원과 의원 활동을 병행하면서 자금이 쪼들리자 서화에 바쳤던 열정도 무색케 할 만큼 소장했던 국보급 서화들을 하나 둘씩 저당 잡히며 돈을 빌려 썼다. 팔기는 아깝고 돈은 써야 했으니 궁여지책으로 개성 사람인 이근태(李根泰)에게 고리대금을 빌려 쓴 것이다. 신용을 생명처럼 생각한 이근태는 손재형이 워낙 재력가로 소문나고 또 들고 온 고서화 모두가 국보급 미술품이라 남의 돈을 빌려다 주면서까지 의심하지 않았다. 그때 함께 저당 잡힌 고서화는 단원의 군선도, 겸재의 인왕제색도 등 모두가 현재 국보로 지정된 것들이고 손재형이 경매를 통해 낙찰 받는 ‘유천희해’도 함께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예나 지금이나 정치를 하려면 허튼 돈이 많이 들어간다. 돈에 쪼달린 손재형이 세한도를 비롯한 고서화가 한 뭉치나 껴안고 이근태를 찾아왔다.
“이 선생. 이 물건을 맡아 두고 돈을 좀 빌려주시오?”
“그렇게 하겠습니다. 의원님. 그런데 언제 찾아 갈 것입니까?”
“잠시 동안만 맡깁시다. 워낙 자금이 쪼들려서 그러오.”
“알겠습니다. 의원님.”
그런데 손재형은 첫 달부터 원금은 고사하고 이자까지 가져오지 않았다. 정치활동에 집착했던 그에게 권력은 그토록 달콤했던가? 이근태는 몇 달간의 이자를 자기 돈으로 대신 메꾸었다. 하지만 밑빠진 독에 물 붙기 식이었다. 몇 번이고 손재형을 찾아가 사정도 해 보았으나 워낙 바쁜 의원님이라 만나기조차 힘들었다. 궁지에 몰린 이근태는 남의 돈을 빌려다 남의 이자 돈을 갚는 지경에 몰렸고, 급기야 살던 집까지 날렸다. 그 역시 고서화를 좋아해 김정희의 작품과 정선․ 심사정․ 대원군 같은 거장들의 그림을 여러 점 소장한 대수장가였다. 하지만 그 그림들 역시 남의 이자 돈을 막는 볼모로 모두 팔려 나갔다. 그러나 정작 손재형은 묵묵부답이었다.
이자와 원금을 갚을 길 없자, 이근태는 손재형의 양해를 구한 뒤 그가 맡긴 고서화를 팔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 동안 갚지 못한 원금과 이자가 눈덩이처럼 불어나 아무리 팔아도 소용이 없었다. 국보 제 180호로 지정된 세한도는 개성 갑부인 손세기(孫世基)에게로 넘어갔고, 지금은 그 아들인 손창근(孫昌根)이 수장하다 2020년 국가에 기증되었다. 또 손재형이 소장해 이근태에게 저당 잡혔던 단원의 ‘군선도’와 김정희의 ‘竹爐之室(죽로지실)’, 일제 때 ‘경성부사’에 실렸던 정선의 ‘인왕제색도’ 등은 새롭게 고미술품을 수집한 이병철(李秉喆)에게로 넘겨져 호암 미술관을 거쳐 리움에 소장돼 있다. 그런데 심상준이 낙찰받아 소장했던 ‘산숭해심’이 어떤 사연으로 호암미술관이 소장하게 됐는지는 필자가 자료로 확인하지 못했다.
인왕제색도/겸재가 76세 때에 그린 그림으로, 비 갠 후의 인왕산을 절묘하게 묘사한 걸작이다. 손재형이 소장했다가 자금이 쪼들리자, 이병철에게 양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