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국교회가 잘못(?) 알고있는 성경...
또 다른 극단으로 가지는 말아야 한다.
아래의 글은 모(某) 기독교카페의 자료실에 올려진 내용입니다.
중간에 포기하지 마시고 끝까지 읽어주시기 바랍니다.^^
..............................................................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
윤석준 저 | 부흥과 개혁사
윤석준 목사는 건전한 개혁주의 신학에 입각하여 『한국 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101가지 성경 이야기』에서 바르고 풍성한 성경 해석을 전달한다. 이 책은 우리가 교회 속에서 발견할 수 있는 수많은 오해들, 성경 말씀이 언급되고 설교되고 있으나 틀리고 잘못된 것들, 교회 생활 속에서 굳어진 전통이 되어 버렸으나 성경의 진리가 아닌 것들을 이야기하며, 이런 문제들에 대해 ‘성경이 진실로 말씀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가?’를 답하고 있다.
1장 도입 : 고정 관념 깨기 - 보편적 오해들
1.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마 6:11) - 생활의 필요를 구하는 기도라는 통념에 대하여
2.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마 18:18~20) - 기도에 대한 본문이 아니다
3. “삼사 대까지 이르게 하거니와”(출 20:5) - 가계에 흐르는 저주가 성경적인가
4.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 4:13) - 믿는 자는 슈퍼맨?
5.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욥 8:7) - 사용할 수 있는 말씀인가
6. “주께서 의인을 악인과 함께”(창 18:23) - 아브라함은 소돔과 고모라를 위해 간구한 것인가
7. 빛과 소금 비유(마 5:13~16) - 교회의 역할은 부패 방지가 아니다
8.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요 4:24) - 어떻게 예배한다는 것인가
9. 고린도전서 ‘사랑장’(고전 13장) - 사랑이 최고의 은사인가
10. 가인과 아벨의 제물(창 4:3~5) - 무엇을 드렸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2장 인본주의적, 교육학/심리학적 해석들
11.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계 3:20) - 회심의 주권이 사람에게 있다고 말하게 만드는 악한 해석
12. 인본주의에 물든 오병이어(요 6:9~13) - 성경은 소년에게 관심이 없다
13. 열두 정탐꾼(민 13:25~33) - 긍정적인 보고? 부정적인 보고?
14. “오직 강하고 극히 담대하여”(수 1:7~9) - 적들에 대해 담력을 가져야 할까
15. 지붕을 뜯어내려 고침받은 중풍병자(막 2:1~12) - 아무도 친구의 믿음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
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요 3:14~21) - 사랑만 나타났을까 ?언약의 복과 저주?
17. 엘리야와 칠천 명(왕상 19:10, 14, 18) - 엘리야의 도덕화/심리화에 대한 반대
18.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막 5:25~34) - 초점은 그녀의 믿음인가
19.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히 11:1) - 소원을 이루기 위해 신념을 가져라?
20.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딤전 2:4) - 만인구원설에 대한 반대
3장 도덕적으로 읽어 본의를 훼손하는 예들
21. 사라와 하갈(창 21:8~11) - 본처와 첩의 갈등 이야기일까
22. 어머니를 선택한 룻(룻 1:1~18) - 룻은 착한 며느리의 표본일까
23. 사무엘의 출생(삼상 1:20) - 불임 여성이 자녀를 얻은 이야기인가
24.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 에스더를 신앙 여성의 모범으로 볼 수 있는가
25. 다윗과 요나단의 언약(삼상 18:3~4) - 두 친구의 우정 이야기인가
26. 다윗이 성전을 짓지 못한 이유(대상 22:8; 왕상 5:3) - 살인을 했기 때문에?
27. “내 왕위에 앉으리라”(왕상 1:11~14, 2장) - 솔로몬의 이야기를 정치적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28.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왕상 3:7~14) - 솔로몬은 지혜를 구했을까
29. 노인의 교도를 버린 르호보암(왕상 12:6~15) - 성경은 경로사상을 가르치는가
30. 벧세메스로 가는 소(삼상 6:12) - 소처럼?
4장 목회적 목적을 위해 왜곡하는 예들
31.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고전 4:1~2) - 직분자의 충성을 요구하는 본문인가
32. “죽도록 충성하라”(계 2:10) - 교회 봉사를 위해 사용하는 것이 합당한가
33. “그 평안이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니라”(마 10:13) - 빈 복이 다시 내게로 돌아온다?
34. 로데의 말에 반문한 사람들(행 12:15) - 기도해 놓고 믿지 않았다는 예에 쓸 수 있을까
35.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롬 10:10) - 문자적으로만 이해하면 안 되는 경우
36. “어떤 사람은 목사와 교사로 삼으셨으니”(엡 4:11) - ‘교사’는 누구인가
37. “안식일에 네 발을 금하여”(사 58:13) - 주일 성수의 근거가 될 수 있는가
38. “이름을 예수라 하라”(마 1:21) - 예수님이 민중의 지도자가 될 수 있는가
39. 바나바 세미나가 말하는 바나바(행 14:1, 4, 14) - 바나바는 평신도였나
40. “무슨 허물이든지 사함을 받으리라”(레 6:1~7) - 죄는 하나님께만 해결하면 끝나는가
41.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출 20:4) - 2계명의 의미와 한국 교회의 전반적 우상 숭배
42. “새 노래로 여호와께 노래하라”(시 96:1) - 열심히 새 찬양을 배워야 할까
5장 기도와 전도에 대하여
43. “새벽 아직도 밝기 전에”(막 1:35) - 새벽 기도의 창시자는 예수님?
44. “새벽에 하나님이 도우시리로다”(시 46:5) - 새벽 기도의 근거가 될 수 있을까
45. “중언부언하지 말라”(마 6:7) - 기도의 분량을 채워야 한다는 주장에 대하여
46. “너는 말씀을 전파하라”(딤후 4:2) - 전도에 대한 본문인가
47.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롬 1:16) - 전도할 때 부끄러워하지 마라?
48.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빌 1:18) -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
49.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눅 14:23) - 전도는 강제로 할 수 없는 노릇
50. “와서 보라!” 설교의 함정(요 1:39, 46) - 전도 방법론으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18. 열두 해를 혈루증으로 앓는 여인(막 5:25~34) 초점은 그녀인가?
여기까지 책을 성실하게 읽으신 분이라면 성경 본문을 대할 때 지나치게 인본주의적으로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는 약간의 경계심이 생겼으리라 생각합니다. 만약 우리가 성경을 '예수님중심'으로 보는데 조금 익숙해 진다면 인본주의적 해석을 하더라도 크게 지장이 없어 보이는 본문을 가지고도 충분히 그리스도 중심의 해석이 무엇인지 볼 수 있는 눈이 생기게 됩니다. 이것이야말로 성경을 보는 ’눈‘이 생긴 것이고 말씀을 깊이 있게 보는 것입니다.
이번에는 그런 종류의 본문을 한번 살펴보도록 합시다. 소위‘성경으로 성경을 해석’할때의 깊이란 얄팍한 인본주의적 해석으로서의 ‘나도 이 사람처럼’의 해석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을 이런 본문을 통해 경험해볼 수 있습니다. 이 본문, 즉 열 두해를 혈루증으로 앓던 여인에 대한 기사는 그냥 겉으로만 보아서는 인본주의적으로 해석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대부분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의 마지막 부분 즉 예수님이 그녀에게 말씀하신.“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에 주목합니다. 앞서 많은 본문들에서 보셨겠지만 이렇게 가 버리면 설교나 해석의 내용은 사실 뻔합니다. ‘우리도 이 여인처럼....’이겠지요.
사실 오늘날 설교자들의 본문 주해가 이런 방식으로 너무나 도식화되어 있기 때문에 저나 다른 많은 성도들이 본문이 어딘지를 보고 설교의 제목만 봐도 그 설교가 어떻게 펼쳐질지 너무 뻔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 본문같은 경우에도 그렇습니다.본문을 보고 제목을 보았는데, 그 제목이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와 관련되어 있다면 설교는 백퍼센트 여인의 믿음을 칭찬하면서, ‘우리도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갖자’는 설교입니다.혹은 같은 설교 내용인데 제목을 좀 더 극적으로 하기 위해서 ‘옷자락만 붙잡아도’ 라든가, ‘옷에만 손을 대어도 구원을 얻으리라’는 종류의 제목이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지만 제목을 뭐라 붙인들, 다 같은 맥락의 설교입니다.‘이 여인의 믿음을 따라 우리도.....’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성경을 구속사적으로 보는 데 조금 익숙해지고 ,인본주의적 해석을 피하게 된다면 이런 해석이 매우 못마땅해집니다. 성경의 주인공은 항상 예수님이며, 또 예수님이 되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주변에는 너무 위인전기식의 해석과 설교가 많습니다.제가 가장 혐오하는 성경읽기 중의 하나가 ‘인물 중심적 성경읽기’입니다.
주변 기독서점에보면 ‘인물별 성경공부’. ‘인물 중심적 성경공부’등과 같은 내용이 부지기수로 나와 있습니다.하지만 이것은 ‘설교의 주인공’을 ‘주 예수 그리스도’에서 사람으로 대치시켜 버립니다. 설교는 항상 우리 주님을 나타낼 수 있어야합니다.그런데 오늘날의 설교들을 보면 주님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고, 항상 사람이 주인공입니다.‘ 바울처럼 우리도......’ ‘다윗처럼 우리도....’, ‘아브라함처럼 우리도.....’ 온통 위인전기들의 천국입니다.
여기에 예수님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런 사라들을 가지고 설교할 수 있다면 아브라함 링컨이나 케네디 대통령을 주인공으로 해서 왜 설교를 못하겠습니까? 성경없이도 얼마든지 설교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경을 ‘예수 그리스도 중심적’으로 보려고 할때는 이본문과 같은 내용도 예수님이 어떻게 부각되어 있는지를 잘 살필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이 본문에서 예수님을 중심에 놓기 위해 먼저 한가지 질문으로 시작하도록 합시다.
‘왜 혈루증 여인이 손을 대었을때 예수님은 부정해지지 않았는가?’
이 질문이 앞으로의 모든 문제를 풀어 줄 핵심이 되는 열쇠입니다. 혈루증이라는 말은 ‘피’라는 단어와 ‘흐르다’라는 단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단어입니다. 원문에는 ‘혈루증’이라는 병명이 기록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그녀는 피의 흐름가운데 있었다’고 되어 있습니다. 즉 그녀의 병은 지속적으로 피가 나고 멈추지 않는 병을 의미합니다.오늘날 우리가 병명을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아마도 하혈을 멈출 수 없는 그런 병이지 싶습니다.오늘날 의학적인 표현을 빌리자면, ‘만성자궁출혈병’정도가 될 것입니다.
하혈이 언제나 일어나고, 그것도 시작하면 멈쳐지지가 않으니 이 여인은 대단히 힘든 삶을 살았음이 틀림없습니다.고통도 심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여인이 처해 있는 상황은 ‘병으로 말미암은 육체적인 고통’ 이상이었다는 것을 잘 인식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물론 병으로 말미암은 고통은 큰것이지만, 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는바에 의하면 이 여인은 병의 고통보다 훨씬 더 큰 어려움 가운데 있었습니다.그것은 바로 부정함이라는 것입니다. 레위기 15장에 보면 혈루증과 같은 종류의 병(여기서는 ‘유출병’즉 몸에서 뭔가가 흘러나오는 병)에 대한 규례가 나와 있습니다.
2절. 유출병,그러니까 몸에서 피나 진액 등이 흘러나오는 사람은 부정한 자입니다. 4절. 그이 눕는 상은 부정하고 앉았던 자리도 부정합니다. 5절. 심지어는 그 사람의 침상이 부정할 뿐 아니라 그로 인해 부정해진 그 침상에 접촉하는 자 그러니까 그 사람과 직접 접촉하지 않았어도 간접적으로라도 접촉하는 사람은 부정 해집니다. 6절. 유출병 있는 사람이 앉았던 자리에 앉는 사람도 부정해집니다. 7절. 당연히 유출병 있는 사람과 접촉하는 사람은 부정해집니다. 8절. 그녀의 침도 부정하며 9절. 그녀가 앉았던 안장도 부정하며 10절. 그녀의 몸에 닿았던 것은 다 부정합니다. 12절. 그녀가 그릇을 만지면 그릇은 깨뜨려야 합니다. 19절. 생리와 같은 피의 유출은 7일 동안 부정하게 됩니다. 25절을 보면 ‘생리의 시기 외에 이런 유출이 있는 여인은 유출하는 날 동안 계속해서 부정합니다.’
이 본문들을 보면 우리는 무엇을 알 수 있습니까? 부정기적으로 자주 하혈이 있고 그 하혈이 나오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았던 이 혈루증을 앓던 여인은 어떤 삶을 살았을까요? 그렇습니다. 그녀는 늘, 일평생을 부정하게 살아왔습니다. 그녀가 몸이 닿는 곳은 어디든, 그녀와 접촉하는 사람은 누구든 부정해졌습니다. 그녀는 사람들로부터 기피거리가 되는 여인이었습니다.
사람들에게 뿐아니라 그녀는 하나님앞에서 늘 부정한 여인, 불결한 여인이었습니다. 혈루증은 그런 병입니다. 혈루증은 단지 육체적으로만 고통스러운 병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부정함을 입은 병’이라는 것입니다.그러므로 이 여인이 지금 처해있는 상황은 ‘육체적으로 힘든’ 상황을 넘어서서 ‘하나님께 기피거리가 되고, 사람에게 기피거리가 되는 ’부정고 불결의 상황입니다.이 여인은 이런 상황을 하루도 빠짐없이 12년동안을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이 여인이 예수님의 소식을 듣고 무리 가운데 섞여 주님께로 다가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옷에 손을 댑니다. 상식적인 선에서 율법의 가르침을 따른다면 그리고 이 여인이 이제껏 살아오면서 겪어 왔던 수많은 경험들에 비추어 본다면 어떤일이 일어나야 하겠습니까?
너무나 당연하게도 (현대의 우리는 이 부분을 잘 지각하지 못합니다만)그녀가 손을 댄 예수님이 부정해져야합니다. 그녀는 이제껏 계속해서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손을 대기만 하면 부정해지는 삶을 12년 동안 살아왔습니다. 그러므로 당위성을 말하지면 지금상황에서는 예수님이 부정하게 되는 것이 마땅한 것입니다. 이것이 상식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 만큼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그녀가 깨끗해진 것입니다. 쉽게 말하자면 부정의 공식이 깨졌습니다!
사실 이런일은 불가능합니다. 구약성경을 잘 살펴보면 구약에는 전 율법을 관통하는 거룩에 대한 법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정한 것과 부정한 것이 접촉하면 항상 정한 것이 부정해진다는 법칙입니다. 율법의 정결법 아래에서 정한 것이 부정한 것과 접촉했을때, 부정한 것이 정해지는 법은 없습니다. 정결법에서는 항상 부정한 것과 접촉하면 정한 것이 부정해집니다.일반적인 생활에서도 항상 그렇지만, 이 내용을 가장 잘 알 수 있는 내용이 학개에 나옵니다. 학개 2장 12절이하 말씀입니다.
사람이 옷자락에 거룩한 고기를 쌌는데 그 옷자락이 만일 떡에나 국에나 포도주에나 기름에나 다른 식물에 닿았으면 그것이 성물이 되겠느냐 하라 학개가 물으매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아니니라 학개가 가로되 시체를 만져서 부정하여진 자가 만일 그것들 중에 하나를 만지면 그것이 부정하겠느냐 제사장들이 대답하여 가로되 부정하겠느니라
이에 학개가 대답하여 가로되 여호와의 말씀에 내 앞에서 이 백성이 그러하고 이 나라가 그러하고 그 손의 모든 일도 그러하고 그들이 거기서 드리는 것도 부정하니라 (12~14)
학개 선지자가 제사장에게 율법의 기초에 대해 묻습니다. ‘거룩한 고기가 다른 물건에 닿았으면, 거룩한 고기로 인해 그 물건이 정결해지겠느냐, 그 물건으로 인해 거룩한 고기가 부정해지겠느냐? 이것은 정결법의 기초가 되는 통상적인 질문입니다.당연히 답은 “거룩한 고기가 부정해진다’입니다.비록 그 고기가 성전에서 사용되는 거룩한 고기였는데도 그렇다는 말입니다. 선지자는 이어 두 번째 질문을 합니다. ‘시체를 만진자가 그 물건들을 만지면 부정해지겠느냐? 이 역시 당연한 질문입니다. 제사장들은 이구동성으로 대답합니다. 부정해집니다!
학개서는 이 질문을 ‘이스라엘 너희가 부정하므로 모든 것이 부정하다’는 말씀을 하기 위해서 사용했지만 여기에는 정결법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원리가 한가지 들어 있습니다. 이미 언급한대로 정과 부정이 만나면 항상 정이 부정해진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정결법의기본입니다. 그러므로 그녀가 접촉한 것은 무엇이든지 부정해질 수 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주님은 달랐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 수 있었을까요?
구약 성경에 보면, 모든 공식이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에 닿으면 부정해진다’는 것을 기본으로 하고 있지만, 그 반대인 것이 딱 한가지가 있습니다.(포괄적으로 말하면 여러 가지인데 원리상으로는 딱 한가지입니다)그것을 우리는 출애굽기 29장 37절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정결법에 비추어 볼때 놀라운 말씀입니다.
너는 이레동안 제단을 위하여 속죄하여 거룩하게 하라 그리하면 지극히 거룩한 제단이 되리니 제단에 접촉하는 모든 것이 거룩하리라.
구약 율법하에서는 정결한 것이 부정한 것에 닿으면 무조건 정결한 것이 부정해집니다. 하지만 딱 한가지,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제단만은 달랐습니다. 제단만은 모든 부정한 것이 이 단에 와서 접촉할 때 단이 부정해진 것이 아니라, 도리어 접촉한 그것이 거룩해졌습니다! 놀라운 사실입니다! 부정의 법칙이 깨지는 유일한 상황입니다. 정결법의 일반적인 방식으로라면 부정한 물건이 제단에 닿았을 때 제단이 부정해져야 하지만, 오직 이 단만은! 지극히 거룩해서 거꾸로 여기에 닿는 모든 것이 거룩해졌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알고 다시 말씀을 보면, 출애굽기 30장은 번제단 뿐만이 아니라, 성전 안의 다른 기물들도 이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너는 그것을 회막과 증거궤에 바르고 상과 그 모든 기구이며 등잔대와 그 기구이며 분향단과 및 번제단과 그 모든 기구와 물두멍과 그 받침에 발라 그것들을 지극히 거룩한 것으로 구별하라 이것에 접촉하는 것은 모두 거룩하리라(26~29절).
그러면 모든 정결법과 역행하는 이 물건들은 어떻게 이런 기능을 갖게 되었을까요? 출애굽기 29장에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제단’과 30장에서 역시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다른 기물’들은 어떤 공통점, 즉 무엇을 통해 이런 힘을 얻게 되었을까요? 가만히 잘 살펴보면 한 가지, 이 물건들에게 모든 것을 거룩하게 하는 힘을 부여하는 공통된 요소가 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것은 바로, 어린양의 피입니다.
출애굽기 29장에서도 단은 칠 일 동안 매일 수송아지 한 마리로 ‘단을 속죄’하는 속죄제를 드리도록 되어있습니다. 제단은 이것을 통해 접촉하는 것을 거룩하게 하는 힘을 얻었습니다. 30장에서도 회막, 증거궤, 상, 기구, 등잔대, 분향단, 물두멍의 등의 모든 기구들에는 어린양의 피가 발라졌습니다. 즉, 이 물건들이 다른 부정한 것들을 거룩하게 하는 힘을 갖게 된 것은 ‘어린 양의 피’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왜 예수님께 접촉한 혈루증 여인이 깨끗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어린양의 보혈의 본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제단과 성전 기물을 거룩하게 하신 어린 양이십니다. 그분이 속죄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닿는 혈루증 여인이 깨끗하게 되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바로 우리 주님이 이 모든 것을 깨끗하게 하는 어린양의 보혈의 본체시기 때문입니다. 그분이 바로 제단과 성전기물을 거룩하게 하신 어린양이십니다. 그분이 속죄의 근원이시기 때문에 그분께 닿은 혈루증 여인은 주님을 부정하게 만들 수 없었습니다.
모든 부정은 우리의 죄로부터 옵니다. 이 여인의 병 역시 그리고 모든 병이(그녀가 죄를 지어서 그랬다는 것이 아니고) 그 근원을 죄에 두고 있습니다. 인생의 모든 고통의 원인도 ,우리의 모든 더러움도 그 모든 원인이 죄에 있습니다.그런데 이 죄가 무엇을 통해서만 씻어지고 깨끗하게 될 수 있습니까? 어린양의 피를 통해서만입니다. 어린양의 대속의 피만이 우리의 모든 죄악을 씻어 줍니다.우리의 모든 부정으로부터 우리를 깨끗하게 하는 것은 바로 주님의 속죄의 효력뿐입니다.
우리는 정결법의 통용속에서 살아갑니다. 모든 것이 부정하고 정결한 것은 한시적이고 제한적이어서 항상 부정한 것과 접촉할 때 부정하게 될 수 밖에 없는 상황속에 있습니다. 하지만 저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정결함의 원천이 있으니 바로 주 예수 그리스도십니다. 혈루증을 낫게 한 예수님은 자신이 ‘모든 부정을 치료하는 정결의 근원’이심을 우리에게 알려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혈루증 여인의 이야기를 통해 ‘야! 저 여인의 믿음은 정말 대단하구나!를 깨달아서는 안됩니다.우리는 놀라우신 예수그리스도를 봐야합니다. 모든 부정을 정결하게 하시는 예수그리스도,우리를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하게 해 주시는 예수그리스도, 어린양의 보혈을 통해 우리를 구속하신 메시아! 그분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 그 · 러 · 나 >>>
이상의 글을 보면서 성경전체의 중심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라는 점을 강조해 준다는 의미에서는 훌륭하고 중요한 글이 될 수 있겠지만, 아무리 의도가 선하다 할지라도 성경해석의 또 다른 극단으로 치우쳐서는 안된다는 경계의 필요를 느꼈습니다.
물론 성경전체의 중심 인물이 예수 그리스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요 5:39, 개정)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
(눅 24:25-27, 개정) 『[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그러나 성경전체가 다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한다고 해서, 성경전체를 모두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촛점을 맞추어 해석하고 적용하려한다면 또 다른 잘못일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전체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맞지만, 성경전체가 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틀린 것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사건과 모든 인물들이 예수 그리스도와 관련되어 있다는 것은 맞지만 예수 그리스도와의 관련 속에서 그 사건과 인물만이 가지고 있는 또 다른 교훈과 진리도 내포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드러낸다는 정당한 이유만으로 그 이외의 것들을 다 묵살하고 오직 그것만을 살리기 위하여 다른 것들을 무시하거나 축소시킨다면 그것은 또 다른 극단의 잘못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사실 저만 해도 신학생시절 위에 나오는 글의 내용들과 같은 공감대를 형성하였고 그러한 시각으로 성경을 바라보고 해석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당시의 저의 성경해석 방법은 "성경 66권 속의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로 정리될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정도의 시점이 지나자 그러한 성경해석의 방법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리 추천할 만한 최선의 것도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한 방식의 성경해석과 적용은 전체적인 성경해석의 초보일 뿐이지, 성경해석의 완성이나 목표 그리고 반드시 추구해야만 할 유일하고도 정확한 성경해석의 방법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지요!^^
열두해를 혈루증을 앓던 여인의 이야기를 상기한 방식으로만 풀고 해석하며 적용한다면 그것은 그리 바람직한 것이 아니라고 봅니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 되심을 드러내는 것이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만이 본문의 핵심이라거나 그것만을 이야기하려는 본문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매우 편협한 성경해석이 될 수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과 더불어 주님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게 믿음으로 나아와 그녀의 문제를 해결받았던 그 여인의 믿음도 중요한 것이고, 그렇기에 성경은 "주님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그녀의 믿음이 그녀를 구원했다"는 전체적인 진리를 전달하기 원하는 것이지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주님되심만을 증거하기 위한 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적어도 성경의 진리를 올바로 알고 믿고 따라가기 원하는 그리스도인이라면 이상과 같은 균형잡힌 성경해석의 기초를 잘 다져가야 할 것이라고 봅니다.
"한국교회가 잘못 알고 있는 성경"이라는 이상의 글은 "또 다른 잘못을 야기시키는 편협한 글"이 될 수도 있음을 봅니다. 전체적으로 균형잡힌 건강한 성경해석의 길을 걸어가는 우리 한국교회 그리스도인들이 되었으면 참 좋겠다는 생각에 두서없이 이 글을 적어봅니다.^^
첫댓글 이병천목사님!!
귀한 말씀 감사드립니다
할렐루야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