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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황하는 길 혹은 무애의 길 / 윤범모
방황과 배회
제복의 시절이었다. 사회는 획일화를 최고로 치는 듯 수직 구조 등 직선을 선호했다. 그 직선의 길에 제복이 활개를 쳤다. 군사정권 시대여서 군복의 위상이 높았다. 1960~70년대 한국 사회는 특히 그랬다. 당시 교복을 입은 10대 시절이었지만 기이한 것도 많이 보았다. 우리 반 친구들은 겉으로는 모범생(?)처럼 보였지만, 엉뚱한 짓도 많이 했다.
하루는 하학길에 종로 2가 신신백화점 앞을 걸었다. 그곳은 서울 시내 중고등학생의 교복을 파는 곳이었다. 남학생은 가슴에 명찰을 붙여야 했다. 약속이나 한 듯 친구와 나는 이름표 가게에 들어갔다. 아저씨는 작은 쪽지를 건네주면서 이름을 쓰라고 했다. 친구와 나는 가벼운 웃음을 날리면서 각각 ‘이름’을 썼다. 우리는 서로의 이름(?)을 보고 놀랐다. 방황(彷徨) 그리고 배회(徘徊). 아저씨는 즉석에서 재봉틀을 돌려 이름표를 만들어 주었다. 친구와 나는 원래의 이름표를 떼고 새로운 이름표를 붙였다. 황금색 훈장 같았다. ‘방황과 배회’. 그랬다. 악동 시절의 우리는 그야말로 방황과 배회만이 유일한 돌파구 같았다. 아니, 한심했다. 방황과 배회. 제복의 시절은 그렇게 저물어 갔다.
배고파 찾아간 절
누구 말대로 질풍노도의 시절이라고까지 과장하기에는 쑥스럽다. 하지만 궤도 이탈은 악동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게 영웅이나 되는 것처럼 자연스러울 때도 많았다. ‘이유 없는 반항’이라는 말이 유행한 적도 있지만. 미지의 세계는 호기심과 더불어 나의 발걸음을 이끌었다.
잠자리는 기차역 대합실, 학교 교실, 교회, 공원 등 가릴 형편이 아니었다. 교실이나 교회는 도시 한복판 어디에 가도 있어 ‘잠입’하기 제일 좋았다. 하지만 교실이나 교회에서 자다 걸리면 으레 쫓겨나기 일쑤였다. 심한 경우는 매를 맞기도 했다. 그래도 낯선 곳을 떠도는 맛은 달콤했다. 미지에의 탐험(?), 나름 멋있었다. 이를 굳이 낭만 혹은 풍류라고 포장하고 싶지는 않지만. 우리 산천은 구석구석 참으로 많은 이야기와 볼거리를 가지고 있다. 특히 명산에는 명찰이 있다.
떠돌이 생활에서 절은 빠질 수 없는 ‘목적지’로 부상되었다. 제일 중요한 이유는 ‘절에 가면 최소한 밥은 얻어먹을 수 있다’라는 믿음 때문이다. 타향에서 굶주림이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믿음,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이 넉넉해졌다.
어떤 절은 밥도 먹여주고 포근한 잠도 재워 주었다. 또 어떤 때는 여러 날을 절에서 묵을 수도 있었다. 절에서 묵는 동안 불교책도 읽고, 스님들과 대화도 나눌 수 있었다. 절 생활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사천왕상의 그 험악한 모습이 싫었는데 서서히 친근하게 다가왔다. 결국 방랑벽은 절을 자주 찾게 했고, 불교와도 친하게 했다. 얼떨결에 굶주림을 해결하려고 찾아갔던 절이 휴식과 위안을 주는 포근한 집으로 바뀌었다.
탄허 스님 그리고 《육조단경》
나는 ‘지각생’으로 동국대 불교대학에 입학했다. 여학생들은 나보고 ‘아저씨’라고 불렀다. 기대보다 캠퍼스 생활은 지루했다. 식민지 시절 학문을 한 노교수들의 낡은 교육방식은 특히 그랬다. 대학 신문사에 들어가 학생기자를 하면서 캠퍼스 생활에 적응했다. 대학에 오기 전 친구의 화실에서 살았던 경험도 있어 불교미술사를 전공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국 미술사의 절반은 불교미술이기 때문에 불교라는 거대한 산맥을 통과하지 않고는 우리의 전통문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예술의 사회적 기능이나 역할이 날로 소중하게 안겨 오고 있던 때였다.
봄날 ‘내 인생의 책’을 만났다. 바로 《육조단경(六祖壇經)》이다. 아니, 내 인생의 최고 스승을 만나게 되었다. 바로 탄허 스님이었다. 당시 스님은 선학실수(禪學實修)라는 과목을 담당했다. 나는 매주 스님의 주옥같은 말씀에 빠져들어 갔다. 정말 동양 최고의 석학이라는 명성처럼 유불선을 다 꿰고 있는 스승이었다. 스님은 강의 시간에 백묵 하나만 가지고 칠판 가득 원문을 판서하고, 한 줄씩 해설했다. 단 1초도 거리낌 없는 사자후(獅子吼). 감히 우러러보는 것조차 불경스러울 정도였다. 스님이 직접 번역한 《육조단경》. 이 책은 중국 선맥(禪脈) 제6대 혜능의 일대기를 엮은 내용이다. 학생 시절의 나는 이 책의 진가를 몰랐고, 또 탄허 스님의 강의 내용조차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 불교 지식이 너무 없어 스님의 강의를 거의 다 놓치고 말았으니, 이는 참으로 억울하고 한탄스러운 일이었다.
나는 지금도 책상 위에 《육조단경》을 올려놓고 소중하게 보고 있다. 남종선과 북종선 사상. 돈오점수(頓悟漸修)의 논쟁. 처음에는 단박에 깨닫는다는 돈오의 경쾌함에 경도되었다가 언젠가부터는 점수의 자세도 중요하다고 느끼게 되었다. 다만 미술사 강의에서 남·북종 선사상을 남종화와 북종화의 사상적 배경으로 설명할 때, 수강생들의 밝은 표정은 나를 기쁘게 했다.
불교사상과 미술. 《금강경》에도 일렀듯이 형상이 있는 모든 것은 허망(虛妄)하다고 했다. 이미지는 사라진다는 진리. 그런데도 사찰은 오방색의 단청이나 불화 같은 화려한 조형물의 집산과 같다. 허망하다면서 왜 그렇게 온갖 조형물을 세워 놓았는가. 그렇다. 무명의 중생을 위한 방편, 바로 그 방편이리라. 깨달음의 세계로 인도하는 안내역으로 아름다움이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활용할 수 있지 않겠는가. 아름다움을 통한 깨달음으로 가는 길. 예술의 역할은 보다 비중을 높여야 할 것이다. 어린 시절 《육조단경》을 만났고, 이를 공부시킨 탄허 스님의 가르침은 평생 잊을 수 없는 행운 중의 행운이었다.
오대산 생활
방랑벽이 다시 도졌다. 동해안을 떠돌았다. 폴 발레리의 《해변의 묘지》를 읽고 남한의 해변 묘지를 찾아 나서기도 했다. 주문진 바닷가, 그 소나무 숲 아래의 공동묘지에서 시간을 흘려보냈다. 여기서 목숨을 스스로 마감한 한 청춘의 이야기를 음미했다. 동해의 겨울바람은 매섭기만 했다. 정말 그랬다. “바람이 인다. 살아야겠다.” 그 바람은 오대산으로 불었다. 나는 월정사 큰절에서 얼쩡거렸다. 며칠을 지내다 동관음암에 갔다. 숲속에 작은 법당과 너와집 한 채만이 고즈넉하게 자리했다. 젊은 스님 혼자 수행하고 있었다. 스님과 대화하다 아예 함께 살기로 했다.
강원도의 겨울은 매서웠다. 한밤중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 굉음이 들렸다. 비록 침엽수라 해도 잎에 쌓인 눈의 무게를 견딜 수 없어 넘어지는 거목의 절규였다. 설해목(雪害木). 가벼운 눈송이가 뭉쳐 백 년도 넘는 수령의 거목을 쓰러트리다니, 놀라운 산중 살림이었다. 4월이 와도 음지는 눈으로 쌓여 있다. 먹을 것은 바닥 나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양지를 찾아 더덕을 캐러 다녔다. 어떤 곳에 이르면 더덕 내음이 진동했다. 그래서 땅을 파면 엄청나게 큰 더덕이 나왔다. 겨우내 속세의 때를 묻히지 않고 살아서 그런가, 내 몸은 청정(?)했다. 물론 사회로 나온 이후에는 산에서 더덕 내음을 맡을 수 없었다. 그만큼 내 몸이 오염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추리 잎은 새봄을 알리는 녹색 신호등이다. 원추리 잎으로 국을 끓여 봄을 몸에 담았다.
스님은 오후불식(午後不食) 수행을 했다. 문제는 단둘이 사는 산중생활. 반찬이라야 묵은김치 하나뿐이었지만, 스님은 꼭 저녁 공양을 마련하여 내 앞에 밥상을 내밀었다. 나는 절대로 먹을 수 없다고 사양했지만 스님은 수행 방법이라면서 고집을 꺾지 않았다. 결국 나는 스님이 차려주는 밥상으로 저녁을 해결했고, 밥 먹는 동안 스님은 곁에서 기다렸다가 설거지까지 대신 해주었다. 실로 충격이었다. 이런 수행 방식이 있다니, 이런 하심(下心)의 실천이 존재하다니. 나는 매 순간 감동하면서 동관음암 생활에서 새로운 세계를 마주했다. 오대산에서의 한철은 금방 흘러갔다. 뒤에 나는 오대산 추억을 담아 에세이집 《아하! 절에 불상이 없네》를 출판하기도 했다.
동악과의 평생 인연
서울 사대문 안의 종합대학. 이 유서 깊은 동국대학교는 조계종단에서 운영하는 종립대학이다. 불교학을 비롯 인문학의 요람으로 명성을 빛내고 있다. 이런 동악에서 청춘 시절을 보냈고, 또 동악에서 많은 학자와 선후배를 만났다. 시 쓰는 젊은 문사와의 만남은 각별했다. 시동인에 참여했지만 나는 시를 제대로 쓰지 못하고 ‘말만 많았다.’ 지금은 시단의 말석을 차지하여 이따금 문학잡지에 시를 발표하기도 하고, 시집도 여러 권 발행하는 객기도 부리고 있지만. 이러한 객기의 모태는 물론 동악에서 얻은 부산물일 것이다.
동악에서 원효를 만날 수 있었다는 점 또한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정말 나에게 원효는 인생의 나침판이 되어 새벽별처럼 빛났다. 원효를 알려준 분은 이기영 교수이고, 그의 저서 《원효 사상》을 통해서였다. 이 저술은 감동적인 내용으로 가득 차 있다. 다른 교수들의 책은 고루한 한문 투의 문장이어서 매끄럽지 않았다. 하지만 《원효 사상》은 유럽 유학생 출신답게 문장부터 세련되었고, 원효라는 신라 대사상가의 학설을 이해하기 좋게 해설했다. 이 책은 내가 지금도 열독하는 책이다. 개인적으로는 같은 인도철학과의 서경수 교수와 가깝게 지냈다. 서 교수의 수상집 또한 울림을 주는 책이다. 서 교수는 가끔 오장동까지 나를 데리고 가 냉면을 사주었다. 불교와의 만남은 그렇게 날이 갈수록 깊어졌다.
동악은 내 인생의 상당 부분을 차지한 특수한 공간이다. 20대부터 70대에 이르기까지 줄기차게 관계를 맺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쩌면 동악과 관련하여 얻을 수 있는 직함은 거의 다 갖게 된 것 같다. 학생, 학위, 직원, 교수. 동대 입학부터 시작된 특별한 인연, 굳이 붓다와의 인연이라고 미화할 수 없겠지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셈이다. 학부부터 석·박사 과정을 마쳤고, 동대 신문사 기자로부터 편집국장 역할까지 그리고 사회에 나가 중앙일보사 기자 등을 거쳐 다시 모교로 돌아왔다. 황수영 교수의 총장 취임에 따른 보좌역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박물관 연구원(큐레이터)으로 총장 비서실 혹은 대학 홍보실 겸직, 게다가 강의까지 맡아 그야말로 정신없는 시절을 보냈다.
1983년 어느 날 한국일보 문화부장이 찾아왔다. 컬러판 윤전기를 수입했는데 사주의 하명에 따라 미술 연재를 추진한다고 했다. 1980년대의 미술평론가라 해봐야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로 적은 숫자였고, 그나마 신문 문장에 맞는 문장력 있는 이론가가 없어 문제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비록 신인이기는 하지만 ‘윤범모의 미술 연재’를 결정했다는 것이다. 매주 토요일 전면 연재를 부탁했다. 나는 어른(총장)을 모시고 있는 입장이어서 곤란하다고 거절했다. 하지만 문화부장은 그야말로 삼고초려의 정성을 보였다. 결국 그는 총장에게 거대한 선물(신문 지면)을 제공하면서 제자의 신문 연재에 대한 묵인을 얻어 냈다.
정말 고단한 1년의 세월이었다. 매주 겪는 집필의 고통도 적지 않았으나, 토요일 모임에서 총장과 동행할 때 마주치는 ‘독자들’은 연재 글에 대한 이야기로 인사를 대신했다. 칭찬이 쌓일수록 나의 불편함도 깊어졌다. 황 총장은 단 한 번도 나의 연재에 대하여 언급하지 않았다. 결국 나는 스승과의 결별을 결심해야 했다. 사표를 내고 유럽으로 떠났다. 배낭 하나 메고 오래간만에 잠자던 역마살을 더듬어 보았다. 기차에 의지해 말로만 듣던 여러 나라의 도시 탐방은 경이로움, 바로 그 자체였다.
중국 대륙과 실크로드 오지 여행
1988년 서울올림픽 개최 직전 나는 인생의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중국대륙 여행. 형식은 중앙일보사 파견 중국대륙 취재 여행이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지원으로 별 따기나 다름없는 행운이 떨어진 것이다. 중공이라고 호칭했던 당시의 중국은 한국과 적대관계였다. 수교는커녕 왕래조차 꿈꿀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홍콩에서 별지의 특별 비자를 받아 베이징행 비행기에 올랐다. 화가 박대성과 동행했다. 베이징을 돌고 나서 백두산으로 행선지를 잡았다. 연변에서 동포들과 만나 회포를 풀었다. 백두산 천지. 1988년 여름, 나는 천지와 마주할 수 있었다. 우리 조국의 상징적 산을 남의 나라, 그것도 막혀 있는 남의 나라 땅을 겨우 통과하여 천지에 오를 수 있었다.
여행 일정을 짜면서 나는 둔황을 가 보고 싶다고 했다. 관계자들은 둔황이 어디에 있느냐고 물었다. 그들에게 둔황은 정말 생소한 지명이었다. 나는 고비사막 한가운데의 막고굴 벽화가 있는, 미술사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이라고 대답했다. 동양미술사에서 비중 있게 다루는 둔황 벽화, 나는 둔황석굴을 꼭 보고 싶다고 염원했다. 하지만 당시 중국은 낙후 지역을 외국인 출입 금지 구역으로 통제하고 있었다. 어찌어찌하여 나는 서역의 우루무치부터 투루판 베제클릭 석굴사원을 거쳐 둔황 석굴사원까지 현장 답사를 갔다. 내 나그넷길은 실크로드를 따라 불교 유적지나 사찰 답사를 본격적으로 하는 행운의 길이기도 했다.
이 답사 여정은 예정과 달리 3개월로 기간이 연장되었고, 끝내 티베트 답사까지 이루어 냈다. 어쩌면 한국인 최초로 답사한 포탈라궁을 비롯, 티베트 문화의 현장을 확인하는 기회였다. 중국대륙 여행은 나의 인생 진로를 바꾸게 했다. 뉴욕 생활을 갑작스럽게 접으면서 오지 여행에 탐닉하기 시작했다. 나에게 맨해튼의 고층 빌딩 숲은 서서히 지워지면서 광활한 사막과 오지 그리고 역사의 현장이 유혹의 손길을 뻗었다. 중국 사원과 유적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실크로드 혹은 붓다 로드의 현장 답사. 고대 동서 교통로였던 카라코람 하이웨이를 몇 차례씩 넘나들었다.
간다라 현장에서 체득하는 동서문화의 만남은 경이로움, 그 자체였다. 알렉산더 대왕 이후 불교사상과 헬레니즘의 결합은 독특한 불교문화를 창출했다. 일반적으로 헬레니즘 문화는 세계화한 그리스 문화라고 집약한다. 그러니까 그리스 문화를 중심에 둔 문화로서 기원전 5세기 이후 국제화된 문화를 일컫는다. 간다라 문화는 인도 북부 즉 현재의 파키스탄의 라호르 지역 일대에서 창출된 문화를 말한다. 특히 불상 기원설과도 맞물려 불상 공부에서 간다라 불상은 하나의 교과서 같은 비중을 차지했다. 간다라 문화는 매력이 넘치는 2천 년 전의 ‘살아 있는 작품’이었다.
간다라 문화는 나에게 새로운 자극으로 다가왔다. 여태껏 중국 중심으로 불교 혹은 불교미술을 보아 왔다면, 간다라는 이를 초극하여 또 다른 세계로 이끌었기 때문이다. 그리스 혹은 헬레니즘 문화와 불교의 만남은 불교를 보는 나의 시각을 교정하게 했다. 라호르 박물관에서 본 〈고행상〉은 나에게 최고의 걸작으로 남아 있다. 왜 한국은 고행상이 없고, 깨달은 이후의 불보살상만 만들었는가. 역경의 고행상이 없는 나라. 참 이상했다. 아무튼 나의 발길은 인도로 향할 기회가 많아졌다. 물론 인도 불적 답사는 필수사항이었다. 갠지스강에서 특히 바라나시에서 생사 문제를 실감했다. 극심한 빈부 격차와 카스트라는 견고한 신분 체계가 실존하는 현실에서도, 인도가 보유한 방대한 문학과 사상의 깊이는 감당하기 버거울 만큼 매혹적이었다
나의 발걸음은 히말라야 서쪽 끝자락의 해발 4천~5천 미터의 고산지대를 넘나드는 카라코람 하이웨이로 이어졌다, 그 험난한 길에서 나는 역사와 풍광을 음미했다. 만년설을 끼고 고산을 넘는 여정, 훈자마을에서의 휴식, 히말라야의 절경은 또 다른 예술작품이었다. 1990년대의 나는 매년 실크로드 오지에서 한두 달씩 지냈다. 패망한 라다크 왕국의 빈터에서, 혹은 부탄과 같은 히말라야 기슭의 나라에서, 아니면 사마르칸트를 비롯 중앙아시아에서, 페르시아의 영광을 폐허의 도시로 남긴 페르세폴리스에서, 이스탄불에서, 로마에서, 나의 발걸음은 쉬지 않고 미지의 세계를 향했다. 그러면서도 나는 사막이 그렇게 좋았다. 작열하는 태양과 끝도 보이지 않는 광야가 좋았다. 사막은 아무것도 없어서 더 좋았다. 폐허가 더 좋았다. 허망의 가르침은 울림이 컸다.
강화 전등사 무설전 신축
강화도 전등사는 비교적 자주 가는 ‘나의 절’이다. 본격적으로 인연을 맺은 계기는 바로 2012년의 무설전 신축이었다. 회주 장윤 스님은 열린 정신으로 사찰을 운영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각계각층 인사들의 방문이 끊이지 않는다. 전등사는 관련법에 묶여 삽질 하나 제대로 하기 어려운 문화재 구역이다. 가람은 좁아 대중 집회를 열 공간조차 마련하기 어려웠다. 그래서 언덕 속을 파고 석굴처럼 지하 공간을 마련했다. 겉에서 보면 건물 같지 않지만 내부는 다목적 공간답게 시원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원래 전통 방식의 불사로 진행되던 공사를 중단하고 현대 감각에 맞는 새로운 불사를 단행했다. 장윤 스님의 원력 덕분에 조계종 사찰의 불사 전통과 비교하여 획기적인 기록을 수립하는 현장으로 바뀌었다. 현대 불사의 모델. 이를 위해 교수 자문단을 꾸려 무설전 공사를 추진했다. 그래서 내가 무설전 전체 기획을 맡았고, 불상은 김영원 교수(광화문의 세종대왕 동상 작가), 불화는 오원배 동대 교수, 실내 디자인은 이정교 홍대 교수가 참여했다. 우리는 수십 차례의 모임을 통하여 전통 사찰의 전통성을 존중하면서 현대 사회에 맞는 새로운 감각과 다목적 활용도를 모색했다. 원래 강당이라고 명명했던 전각 이름은 내가 ‘무설전(無說殿)’으로 하자고 제안했다. 불국사의 무설전 사례를 예시하면서 역설적 표현 방법을 염두에 둔 것이다.
불상은 브론즈 작업으로 영구성을 추구하되 보통의 불상과 달리 백색 도색으로 결정했다. 원래 불상은 깨달음의 상징인 방광을 전통적으로 금색 처리했다. 하지만 우리는 공간감을 살리면서 대중 친화적 요소를 강조하기 위해 위압적(?)인 황금색보다 친근한 백색을 선택했다. 불상의 모습도 전통성을 바탕에 두되 마을의 이웃처럼 친근한 풍모를 반영하고자 했다. 단순한 사각 좌대 위에 모신 불보살은 여느 사찰의 불단과 다른 이미지를 자아냈다. 본존상 뒤의 벽면은 감실처럼 약간 굽은 공간을 두고 불화로 장식했다. 오원배 화가는 시멘트 벽면을 고려하여 프레스코 벽화 기법으로 붓다의 세계를 조형적으로 풀어냈다. 어느 한 부분에는 실존 인물을 연상시키는 얼굴도 보인다.
또 다른 정성은 실내 건축 디자인이다. 다목적이라는 공간의 특성에 맞게 조립과 이동식 벽면 처리 등 가변성을 중요시했다. 특히 밖에서 신발을 벗지 않고도 진입할 수 있는 통로를 두었고, 벽면에는 현대 회화 작품을 걸어 작은 갤러리로 활용하게 했다. 무엇보다 공을 들인 부분은 천정이다. 연등은 앙증맞을 정도로 작고도 예쁘게 디자인하여 매립했다. 보통 사찰에서 법당의 천정을 가리고 있는 너절한 연등의 답답함을 없애기 위함이었다. 이 연등은 특허를 받을 정도로 독창성을 보였다. 무설전의 상징성은 매우 크다고 본다. 젊은 세대의 감각을 염두에 두고, 어떤 행사든 소화할 수 있는 다목적 기능에다 법당 기능까지 겸비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파 종정스님과의 인연
어느 날 아침 성파 종정스님께서 전화를 주셨다. “윤 교수 덕분에 내가 하버드대학에서 개인전을 열게 되었는데, 그래도 되겠는가?” 하버드대학 전시? 사연인즉 이렇다. 내가 기획한 가나아트센터의 〈불이〉 전시 때문이었다. 마침 서울에 온 하버드대 교수들이 〈불이〉 전시회를 관람했고, 특별실의 성파 스님 작품 앞에서 감동했단다. 작품은 옻칠 재료를 기본으로 하여 스님 특유의 선예(禪藝)를 가득 담은 대작들이었다. 옻칠이라는 재료도 낯설었겠지만, 화면에 담긴 내용 또한 범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관객들은 작가에 대하여 궁금해졌다. 이들 교수진은 종정스님의 작품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더 놀랐고, 총무원으로 발걸음을 향했다. 총무원의 주선으로 통도사 서운암까지 방문한 교수들은 하버드 전시를 제안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러니까 성파 스님께서 “윤 교수 덕분”이라고 말씀하신 내용은 내가 기획한 전시의 인연 때문이라는 말씀이다.
근래 성파 스님은 대규모의 개인전을 계속 열고 있다. 서울 예술의전당을 비롯하여 경기도박물관이나 경남도립미술관 등 전시 이력이 화려하게 쌓이고 있다. 일반 전업작가 이상의 활발한 전시 활동이기도 하다. 이와 같은 여세로 드디어 해외에서까지 주목하게 되었고, 그 결실 가운데 하나가 하버드대학 전시이다. 이 전시는 올가을 미국 현지에서 개최된다. 전시뿐만 아니라 명문 대학답게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하여 스님의 수행과 예술 활동을 입체적으로 연구 조명할 예정이다. 이 또한 초유의 사건으로 기록될 쾌거이기도 하다. 여태껏 한국 출신 미술가 혹은 수행승을 단독으로 연구하여 집중 조명한 사례가 없기 때문이다. 그것도 하버드대학의 프로젝트라니, 정말 쾌거가 아닐 수 없다. 선예(禪藝)의 국제 무대! 스님은 예술 포교의 일선에서 울림이 큰 활동을 펼치고 있는 것이리라.
나는 오랫동안 스님의 수행과 창작 활동을 눈여겨 보아왔다. 스님의 전통미술에 대한 재료와 기법의 종합적 관심사는 매우 소중하다. 전통의 창조적 계승이라는 점, 특히 사찰의 문화적 전통을 활용하여 현대 포교에 응용할 수 있다는 점 등에서 주목을 요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스님의 행적은 국가기록원 사업의 일환으로 정리된 바 있다. 나는 국립예술자료원 주관의 구술사 채록 프로젝트의 책임연구원이 되어 성파 스님의 구술사 사업을 진행했다(2013). 이 증언은 자료집으로 발행되고 영상으로 제작되었다. 이 구술사는 스님의 전통 지킴이로서 또 수행자로서의 면모를 실감할 수 있도록 중요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스님의 증언에 의하면, 선예의 계기는 단순했다. 원래 스님은 수행의 하나로 사경(寫經) 작업을 했다. 자연스럽게 국보로 다수 남아 있는 고려시대의 감지(紺紙) 사경에 대하여 궁금했다. 그래서 황수영 교수에게 감지가 무엇이냐고 문의했다. 처음에는 정확히 모르겠다는 대답이었는데, 몇 달 후 감지는 쪽물 염색의 종이를 의미한다는 전화가 왔다. 그래서 쪽이 뭐냐고 물었다. 하지만 쪽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는 거였다. 이에 스님은 절에서 쪽을 알 만한 할머니를 물색했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드디어 어렸을 때 친정에서 쪽을 심었다는 할머니를 만났고, 천신만고 끝에 쪽 씨앗을 입수하게 되었다. 씨를 심어 재배에 성공한 스님은 쪽 염색을 실행했다. 쪽 염색의 전통을 살리고자 스님은 천연염색 교육을 베풀면서, 나중에는 매년 봄이면 서운암 산자락에서 천연염색 축제를 열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은 천연염색이 일반화되었지만 스님의 쪽 탐색의 과정은 흥미롭다.
스님은 전통 닥지 만들기에도 일가를 이루었다. 전통 장인을 초대하여 기술을 습득하고 시설을 마련했다. 근래 스님은 닥지 100m 제작에 성공했다. 종이 한 장의 길이가 자그마치 100m! 가히 기네스북에 등재될 만한 경이로운 기록이다. 스님은 전통 종이 제지법 이외에 전통 도자기 제작법도 습득하여, 경내에 가마 시설을 두고 직접 도자기를 만들었다. 다양한 용기와 더불어 도자 불상을 제작하여 서운암 법당에 도자 삼천불상을 봉안했다. 이뿐만 아니라 해인사 팔만대장경의 목판을 도자판(陶磁版)으로 재료를 바꾸어 모시는 대대적인 불사도 진행했다. 16만 장의 도판(陶版) 대장경, 이 거대한 불사는 경내에 장경각을 신축하고 봉안하고 있다.
스님의 전통 보존과 수행은 옻칠 작업으로 회향하는 듯하다. 옻은 변색이나 부패 등을 막는 독특한 특성이 있다. 미술 재료로 이 이상의 재료는 세상에 없다. 스님은 옻을 이용하여 어떤 색깔이라도 표현할 수 있는 물감을 개발했다. 이런 옻칠 물감으로 다양한 제품이나 미술작품을 만든다. 목판 위에 옻칠 작업. 어느 날 스님은 나에게 질문했다.
“세상에서 가장 비싸게 팔리는 작품은 누구의 것인가?”
“대개 인기 화가로 반 고흐나 피카소의 작품을 듭니다.”
“그들 그림이 하룻밤 비 맞으면 어떻게 되는가?”
“쓰레기통으로 들어가야겠네요.”
“그래, 그렇다면 나는 일 년 내내 물속에 넣어도 변하지 않는 그림을 만들겠네.”
물속에 담아 놓아도 변하지 않는 그림. 바로 옻칠 작업의 장점이다. 현재 장경각 앞마당에 작은 연못을 파고 반구대 주제의 옻칠 작품은 몇 년째 수중 전시 중이다. 물속에서도 변하지 않는 그림, 이 획기적인 재료 개발은 이제 미술계는 물론 해외에까지 진가가 알려지는 중이다. 오랜 세월 스님의 작업 과정을 지켜보았던 나의 입장에서는 여간 흐뭇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스님의 선예 활동은 현대 사회에 부합되는 수행이자 예술 활동 그리고 포교 활동이기 때문이다.
아무리 훌륭한 법문이라도 일반 대중 특히 젊은 세대와 만나는 기회를 만들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나는 오래전부터 ‘예술 포교설’을 주장해 왔다. 예술이라는 그릇에 불법을 담아 전달해 주자는 취지다. 작가들에게 창작 기금을 주어 불교 주제의 작품을 제작하게 하여 불교예술의 중흥 시대를 재창출하자는 내용이다. 한류의 시대이지 않은가. 만약 영화 〈기생충〉이나 BTS 노래 같은 국제적인 인기 작품 하나만이라도 불교의 산물이라 한다면 굳이 포교라는 단어까지 꺼낼 필요도 없을 것이다.
무애당 원효 성사의 가르침
나는 여러 어른으로부터 아호를 받기도 했고, 불명을 받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내가 즐겨 사용하는 별명은 바로 무애당(無碍堂)이다. 다소 건방지고 격에 맞지 않기는 하다. 하지만 평생 마음속의 대스승인 원효 성사를 그리워했고, 그가 마지막 단계에서 베풀어 준 무애행이야말로 우리 시대 최고의 지향점이 아닐까 생각한다. 그래서 나는 수시로 ‘무애’를 꺼내 들면서 무애행을 만지고 있다. 하여 무애를 그리워하는 집, 무애당이다.
원효는 저잣거리에서 무애의 노래와 춤을 만들어 스스로 실연했다.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거리의 퍼포먼스였다. 이는 대사상가의 예술 활동이라고 주장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원효의 예술가적 측면을 연구해야 하고, 또 그의 예술가적 면모 또한 높게 평가할 가치가 있다고 믿는다. 거리낌 없는 삶. 이 얼마나 훌륭한가. 현실 삶 속에서는 비록 어려울지 몰라도 그런 세계를 그리고 있다는 점만으로도 멋지지 않을까. 예술이라는 그릇에 담은 무애 정신. 그래서 우리가 원효의 무애 정신을 두고두고 반추하면서 나날의 일상을 영위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
윤범모
동국대 미술사학과, 동 대학원 졸업(박사). 뉴욕대 예술행정학과 수학.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미술평론 등단(1982), 가천대 예술대 교수, 동국대 석좌교수,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등 역임. 주요 저서로 《한국 근대미술》 《한국미술론》 《평양미술기행》 《백년을 그리다》 《김복진 연구》 《현대미술관장의 수첩》 《미술의 전통과 시대정신》 등. 현재 광주비엔날레 대표이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