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시: 2023, 12, 28, 목요일, 맑음, 종로구, 와룡동,
창덕궁 후원 관람을 마치고 "왕의 숲이 건네는 따스한 위안" 이라는 "창경궁"<昌慶宮>으로 갑니다 ~
보물 제 818 호 "통명전"<通明殿>은 왕의 침전<寢殿>으로 궁궐의 가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구요 ~
사적 제 123 호로 지정된 이 궁궐에서 장조, 정조, 순조, 헌종등,, 여러 왕들이 태어났으며 ~
조선 5 대 궁궐가운데 다른 궁궐은 모두 남향<南向>이지만,, 이 궁궐만은 풍수지리설에 의해 동향<東向>이라고 합니다 ~
"창경궁" 은 세종이 상왕으로 물러난 태종의 거처를 마련하기 위해 지은 "수강궁" <壽康宮>이었는데 ~
그후 1483 년 "수강궁" 자리에 별궁인 창경궁을 건립했으며,, 정문인 보물 제 384 호 "홍화문"<弘化門>입니다 ~
보물 제 816 호 "옥천교"<玉川橋>는 "홍화문" "명정문" 사이에 위치한 다리로 1484 년에 세웠다 하구요 ~
국보 제 226 호 "명정전"<明政殿>은 "창경궁" 의 정전으로 신하들이 세해 인사를 할때와 국가의 큰 행사를 치르거나 ~
외국 사신을 맞이하던 장소로 이용하었고,, 1484 년에 지어져 임진왜란때 불에 탄 것을 1616 년에 다시 지었다고 합니다 ~
정면 월대 앞으로는 봉황을 조각한 면석을 놓은 "어계" 가 있고 그 앞으로 어도<御道>가 명정문까지 뻗어있구요 ~
어도의 좌,우<左,右>에는 문무백관이 조하<朝賀>때 품계에 맞춰 늘어섰던 "품계석"<品階石>이 놓여 있다고 합니다 ~
내전 안쪽에는 "어좌"<御坐>를 만들고,, 뒤쪽에는 "일월오악병풍"<日月五岳屛風>이 둘러쳐져 있구요 ~
명정전 뒤 회랑은 숭문당과 침전으로 가는 통로인데. 복도와 회랑의 차이는, 복도는 천장이 있고, 양 옆이 벽이나 창문이지만..?
회랑은 한쪽에만 벽이나 창문이 있고,, 한쪽은 막힘없이 탁 트인 차이라네요..?
"숭문당"<崇文堂>은 임금이 신하들과 경연을 열어 정사와 학문을 토론하던 곳으로 1830 년에 다시 세웠고 ~
"함인정"<涵仁亭>은 문,무 과거에 급제한 신하들을 접견하던 곳으로 "세상이 임금의 어짊과 의로움에 흠뻑젖는다" 는 뜻이랍니다 ~
1909 년 일제는 창경궁 전각을 헐고,, 그 자리에 동물원과 식물원을 만들어 개방했는데 ~
궁궐이 갖는 위엄과 국가의 위상을 짓밟으려는 의도로,, 1910 년 국권을 빼앗고 식민지를 완성하자 ~
1911 년 4 월 "창경궁" 을 "창경원"<昌慶苑>으로 이름을 바꾼후 일본의 국화인 벚나무 수천그루를 식재했다는 겁니다 ~
일제의 "민족 혼"<民族 魂>말살기도는 궁궐을 유원지와 동물들을 보려는 인파의 구경거리로 삼아 조롱을 했으니..?
1983 년 과천 서울대공원으로 동물들을 보내고 1984 년 복원공사를 시작해 현재의 이름과 모습을 되찾았다고 합니다 ~
18 세기에 심은 "살아 천년 죽어 천년" 이라는 "주목"<朱木>인데,, 2023 년 고사<故死>돼 방부처리후 자리를 지키고 있구요..?
강한 향기를 지닌 "향나무" 는 19 세기 초에 심은듯 하고,, 창경궁 벚나무가 사라진 자리에는 소나무가 차지했다고 합니다 ~
보물 제 851 호 "관천대"<觀天臺>는 1688 년,, 화강석 축조물 위에 "소간의"<小簡儀>를 설치하고 "천문" 을 관측했으며 ~
당대에는 "소간의대" 또는 별을 관측하는 대라 하여 "첨성대" 라고도 알려졌는데 지금은 소간의는 없어진채 돌대만 남아다네요 ~
곧게 위로 향하지 못하고 용트림하듯 옆으로 뒤틀린 "회화나무" 의 수령은 약 3백년,, 1762 년<영조 38> 윤 5 월 13 일 ~
영조는 사도세자를 서인으로 폐하고 "문정전"<文政殿>앞 에서 세자를 뒤주에 가두었는데,, 윤 5, 21일 양력 7 월 무더위속 ~
쌀 뒤주에 갇혔던 "사도세자" 는 끝내 "훙서"<薨逝>했는데.. 훙서란? 왕족이나 귀족이 죽었을때 높여 부르는 말이고 ~
부모님이 돌아 가시면 "천붕"<天崩> "하늘이 무너진다" / 반대로 자식이 먼저 죽으면 "참척"<慘慽> "참혹한 슬픔" 이라고 한다네요 ~
세상 어떤 부모가 자식을 잃고 애간장이 끊어지지 않겠는가,, 그런 고통스런 슬픔을 실행한 임금이 있었으니,, 조선의 최장수 임금 영조가 ~
아들 사도를 뒤주속에 가두어 죽인 "임오화변"<壬午禍變>이 바로 그것인데,, 전해지는 기록을 보면 세자가 좁은 뒤주에 갇혀 ~
허기와 기갈에 시달리던 여드레 동안 이 비정한 아버지가 어떤 마음의 고통을 느꼈는지에 대해 아무런 언급이 없으며 ~
다만 세자의 비행을 신고한 생모 영빈 이씨의 불가피한 상황과 아버지의 냉혹한 처결만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
한데 이 비극적인 사건 이후 뒤늦게 자신이 저지른 짓을 깨달은 영조는 죽은 아들에게 "사도"<思悼>즉 "애달프게 생각한다" 는 시호를 내렸고 ~
구중궁궐 안에서 벌어진 잔혹한 현실은 "사도" 의 비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의 "한중록"<恨中錄>을 통해 세인들에게 권력의 비정함이 알려졌다는겁니다 ~
뒤주에 갇힌 사도세자 뒤주형은 몽골에서 아사형<餓死刑> 즉 굶겨 죽이는 형벌로 뒤주에 가둔채 벌판에서 참혹한 최후를 맞게한다는 거죠..?
"회화나무" 는 예로부터 선비의 학문과 곧은 절개를 상징하는 "학자수"<學者樹>라 하여 선비가 살던 집이나 무덤 주위에 즐겨 심었다고 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