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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를 지고가시는 예수님
눅 23:26-31
26 그들이 예수를 끌고 갈 때에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이 시골에서 오는 것을 붙들어 그에게 십자가를 지워 예수를 따르게 하더라
27 또 백성과 및 그를 위하여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여자의 큰 무리가 따라오는지라
28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29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30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31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눅 23:26-31 / [십자가에 못박히시다;마27:32-44,막15:21-32,요19:17-27] 예수를 사형에 처하려고 끌고 가던 그들은 시골에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강제로 예수의 십자가를 메고 뒤따르게 하였다. 27) 수많은 군중이 그 뒤를 따라갔다. 그 중에는 슬피 울며 따라가는 여자들도 있었다. 28) 그때 예수께서 여자들을 돌아보시고 말씀하셨다.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해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들을 위해 울라. 29) 아기를 갖지 못하는 여자와 아기를 낳아보지 못한 태와 젖을 먹여 보지 못한 유방이 행복하다고 할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다. 30) ㄱ) 그때 사람들은 산을 향하여 자기들 위에 무너지라고 하며 언덕을 향하여 자기들을 묻어 달라고 할 것이다. (ㄱ. 호10:8) 31) 푸른 나무 같은 내게도 이런 일을 하는데 말라버린 나무 같은 너희에게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
예수님을 끌고 가던 사람들이 구레네 사람 시몬을 붙들어 그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합니다. 예수님은 슬피 울며 따라오는 여인들에게 자신을 위해 울지 말고 그들과 자녀를 위해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두려운 멸망의 날이 이를 것이기 때문입니다.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26-29) 예수님을 끌고 가는 사람들은 한, 두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26절에 있는 ‘그들’로 표현된 사람들은 25절의 ‘그들’과 같은 사람으로 보입니다. 즉,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들과 백성들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마가복음 15장 16절에서는 로마의 군인들이 예수님을 끌고 간 것으로 분명히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시몬을 붙들어 강제로 십자가를 지라고 명령할 수 있는 것은 로마군인 밖에 없습니다.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가는 것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가르침을 생각나게 하고, 예수님의 제자들이 얼마나 무기력하고 비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지 알게 합니다. 예수님은 여인들을 예루살렘의 딸로 표현하면서 자신을 향한 그들의 슬픔을 그들 스스로와 자녀들에게 향하게 합니다. “나를 위해 울지 말라”는 예수님의 요청은 육체적인 죽음을 감정적으로 대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예루살렘을 보고 우신 적이 있으며(눅 19:41), 예루살렘이 멸망할 때, 여인들과 아이들의 비참한 상황에 대해 경고(눅 21:23)하셨기 때문입니다. 잉태하지 못하는 사람, 해산하지 못한 배, 먹이지 못한 젖은 모두 잉태하지 못한 수치스러운 여인들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재앙의 때에는 복과 기쁨의 원천이 오히려 슬픔이 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31) 30절 말씀에는 호세아 10장 8절 말씀이 인용됩니다. 또한, 이후에는 요한계시록 6장 16절에도 인용됩니다. 재앙이 임하는 그때, 사람들은 엄청난 재난을 당함으로 차라리 산사태에 깔려 순식간에 매장되는 것이 더 낫겠다고 말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처형당하는 시간은 푸른 나무로, 예루살렘이 멸망하는 시간은 마른 나무로 비교될 수 있습니다. 푸른 나무는 좋은 장작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시간을 두고 말린다면 더 좋은 장작이 될 수는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십자가 고통을 받았고, 이미 예언된 큰 환란(눅 21:23)의 시간이 다가오면(나무가 마르게 되면), 재앙과 고통, 멸망의 불이 모든 것을 삼키게 된다는 것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적 용 : 우리가 진정으로 울어야 할 대상과 사건은 무엇일까요?
만약 시몬이 십자가를 짊어지지 않았다면 그 십자가는 어쩔 수 없이 다시 예수님이 짊어지셔야 했을 것입니다. 그 순간 구레네 시몬은 성경에 등장하지 않는, 예수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 16:24) 만약 내가 짊어 져야 할 자기 십자가를 내가 짊어지지 않는다면 그 십자가는 주님이 지실지도 모릅니다. 그 순간 나는 주님과 관계없는 사람이 됩니다. 지금 내 옆에 놓여있는 것은 나의 것인 줄 알면서도 이제껏 외면하고 있던 나의 십자가는 아닙니까? “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자도 내게 합당하지 아니하니라”(마 10:38)
< 설 교 >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새문안교회 이수영 목사 주일설교, 2010-03-21
로마총독 빌라도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으신 예수님은 그가 달리실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시게 됐습니다. 이미 결박당하신채 이리저리 끌려 다니셨습니다. 잠도 주무시지 못하고 심문을 받으시며 많은 매를 맞으셨습니다. 기운이 다하여 더 이상 십자가를 지고 처형장까지 가실 수 없게 되신 예수님을 본 로마 병사들은 가까이에 있던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 하나를 붙들어 예수님 대신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했습니다(본문 26절). 구레네는 예수님 당시 이집트의 서쪽에 접해 있던 북아프리카의 로마제국 영토로서 오늘날의 리비아에 해당하는 지역의 이름이기도 하고 지중해 해안 가까이 있던 그 주된 도시의 이름이기도 했습니다. 여기에는 많은 유대인들이 와서 정착해 살고 있었습니다. 시몬은 아마도 구레네에 살고 있던 유대인으로서 유월절을 지내기 위해 예루살렘에 와 있었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 보면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서 달려 돌아가실 십자가를 예수님 대신 지고 가는 일이란 보통 영광스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바로 안 사람들이라면 서로 메겠다고 난리가 났을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막상 예수님과 삼년간 동고동락한 최측근 제자 열두 명은 다 흩어져 도망갔고 뜻하지 않게 구레네에서 온 시몬이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가는 독점적 영광을 누릴 기회를 얻은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결박을 당하신 채 로마 병사들에게 끌려 십자가의 길을 비틀거리며 걸어가고 계실 때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라가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들이 다 예수님의 죽음을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호기심 때문에 지켜보는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아니면 예수님에 대해 적대감을 갖고 그를 조롱하며 그가 죽는 것을 눈으로 똑똑히 확인하고자 쫓아가고 있는 사람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는 예수님이 받으시는 고난과 그가 당하실 십자가의 죽음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우는 큰 무리의 여인들도 있었습니다(본문 27절). 그 여인들이 가슴을 치며 슬피 운 것도 모두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메시야이신 이의 부당하고 억울한 고난과 죽음 때문이었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저 귀한 교훈과 놀라운 사랑의 이적을 많이 행한 한 고결한 인격자가 겪는 고초 때문에 가슴을 치며 슬피 운 여인들도 물론 있었을 것입니다. 아무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 마지막으로 던지신 말씀은 바로 그 여인들을 향한 것이었습니다. 이 말씀은 네 복음서 중에 오직 누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본문 28-31절입니다: “예수께서 돌이켜 그들을 향하여 이르시되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시니라.”
예수님께서는 그 여인들에게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셨습니다. 사실 냉정히 생각하면 예수님을 위해서는 울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는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오신 메시야이시며, 그가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길은 그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주신 사명을 완수하는 영광의 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는 장사되신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실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이 아니라 예수님을 따라오는 여인들이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머지않아 로마 군대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도 남지 않게 철저히 파괴될 것이고 참혹한 재앙이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닥쳐올 것을 주님께서는 알고 계셨습니다. 그때는 참된 믿음의 준비가 없는 사람에게는 도저히 견딜 수 없는 무서운 재앙의 날이 될 것임을 주님께서는 비통해하신 것입니다. 본문 29-31절을 다시 봅니다: “보라, 날이 이르면 사람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하리라. 그 때에 사람이 산들을 대하여 ‘우리 위에 무너지라.’ 하며 작은 산들을 대하여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머지않아 예루살렘에 닥칠 그 재앙의 날이 되면 사람들이 말하기를 “잉태하지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와 먹이지 못한 젖이 복이 있다.” 할 것이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원래 아이를 잉태하고 해산하고 그 아이에게 젖을 먹일 수 있는 것은 히브리 여인들에게 있어서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누리는 최대의 행복이었습니다. 그 반대는 그들에게는 저주받은 인생과 같게 여겨졌습니다. 그런데 머지않아 닥칠 재앙이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 피할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을 데리고 숨을 길도 없으며, 그 아이들을 먹일 수도 없고, 그 아이들이 겪을 고통을 참을 수도 없으며, 온 식구가 함께 그 재앙을 당하기가 너무나 고통스러울 것이기에 사람마다 “차라리 아이들이 없었더라면”이라고 탄식하며 아이 없는 사람들을 부러워할 만큼 비참한 상태에 놓이리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비참한 상황을 벗어나는 유일한 길은 가능한 한 빨리 죽는 것이라고 사람들은 생각하게 될 것이고, 그래서 크고 작은 산들을 향하여 호소하기를 “우리 위에 무너지라”,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는 것입니다. 무너져 내리는 산에 덮쳐 순식간에 목숨을 잃는 사람이 제일 행복한 사람으로 여겨질 만큼 그날의 재앙은 무서운 것이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끝에 하신 말씀 즉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신 말씀은 해석이 분분한 말씀입니다. 그러나 그 메시지는 분명하다고 봅니다. “푸른 나무”는 생명의 주가 되신 예수님 자신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그리고 “마른 나무”는 즉시 불에 타 없어질 나무 곧 예수님을 주님으로 믿고 따르지 않아 하나님으로부터 죄의 용서를 받지 못하고 심판의 불을 이기지 못할 모든 자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푸른 나무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에는 어떻게 되리요?” 하신 말씀의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자신은 죄 없는 하나님의 아들인데도 세상의 죄를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분노를 대신 담당하며 이런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고 있다면, 하물며 그를 믿지 않고 결과적으로 그를 십자가에 못 박는 편에 서는 모든 자들이 당할 고통은 극심하기 이를 데 없지 않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형장으로 가시며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시간에 하신 마지막 말씀이기에 더 간절하기 그지없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너희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 하신 뜻은 무엇이겠습니까? 그 여인들과 그들의 자녀들이 당할 재앙을 생각하며 슬퍼하고 탄식하라는 뜻이겠습니까? 그런 것이라면 굳이 미리 할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어차피 하게 될 것인데. 예수님의 말씀은 그런 재앙을 당할 것을 걱정하고 그 재앙을 피하도록 하라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는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고 주후 70년에 실제로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재앙을 피하라는 말씀은 무슨 뜻이겠습니까? 진짜 더 무서운 재앙은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가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길은 무엇이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시고 모든 이에게 죄의 용서와 구원과 영원히 복된 삶을 주시는 유일하신 주님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그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 믿음은 이 세상의 모든 재앙과 공포와 고난을 이길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 믿음을 갖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무서운 재앙을 피하라고 예수님께서는 애끓는 심정으로 마지막까지 말씀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예수님의 그 애끓는 심정으로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과연 우리에게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믿음과 고백이 있는가? 그리고 우리는 예수님의 그 애끓는 심정으로 세상 사람들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고 있는가? 구원의 복음 전도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직전까지도 애끓는 심정으로 행하신 일이라면 우리 또한 힘껏 행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의 가장 가까운 식구들, 친척들, 친구들이 그 무서운 재앙의 길에 서있는데 우리가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그들에게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전하지 않고 있어서 되겠습니까? 그들이 산들을 향하여 “무너져 나를 덮어 달라.” 절규하도록 내버려두어야 하겠습니까? 그들이 죽고 나면 더 이상 구원받을 길도 없고 기회도 없습니다. 예수님의 애끓는 심정으로 복음 들고 세상 모든 사람을 향해 나아가는 우리가 됩시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지고 가라
들어가는 말
미국에서 가석방된 92세의 노인이 출소하게 되자 감옥생활에서 받은 인간적인 대우를 잊을 수 없어 출소를 거부하다가, 결국 출소한 후에는 슬픔을 견디지 못하여 강물로 뛰어내려 죽었습니다.
이 사람의 삶은 어떤 의미를 갖는 것일까요?
그분은 92세가 되도록 감옥에서 살았습니다.
매우 심각한 죄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죄 문제를 생각했을 법한데, 그러나 그는 이 세상에서 자신이 감당해야 할 죄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여 죽음의 길을 택한 것입니다.
그에게 있어서 세상은 골고다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가신 골고다 언덕이었습니다.
1.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심으로 죄문제를 해결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늘 비인격적인 대우를 당하시면서 무거운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 언덕으로 사형지를 향해 걸어가십니다.
제자의 쓰라린 배신의 잔을 마셨습니다.
그토록 사랑하셨던 무리들의 차가운 등을 보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는 십자가를 지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십니다.
죄도 허물도 없으신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께서 극악한 사형수가 지는 십자가란 형틀을 지고 언덕길을 올라가십니다.
어떤 복음 성가의 가수는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주님 가신 길 십자가의 길
외롭고 무거웠던 길 골고다의 거친 언덕 길
지치신 주님의 모습
우리의 허물과 죄를 인하여 주님께서 이런 무서운 십자가 형틀을 지셔야 하셨습니다.
왜입니까?
우리는 이 아픈 십자가의 의미를 '아이삭 왓츠'의 찬송시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만 왕의 왕 예수께서 왜 고초 당했나
이 벌레 같은 날 위해 그 보혈 흘렸네(138장)
자기가 죄를 지었으면서도 지기 싫어하는 죄인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누구도 지기 싫어하는 죄의 십자가를 예수님께서는 지시기로 결심하셨습니다.
이것만이 죄 가운데 있는 인류를 구원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십자가를 지는 사람들은 죄인 중의 죄인입니다.
그러나 모두는 아닙니다.
예수님은 죄없으신 분이시지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여기 죄 없이 십자가를 진 또 한 사람을 만납니다.
그는 구레네 시몬이란 사람입니다.
2. 너도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좇으라(26절).
우리는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시고 갈보리 언덕을 오르는 그 길목에서 구레네 시몬을 만납니다.
그는 북아프리카 지역의 구레네 출신이었습니다.
구레네는 북아프리카의 애굽 서쪽에 점하고, 대유사(大流砂, Syrtis Major)의 동쪽에 있는 반도 구레나이가(Cyrenaica) 국의 수도였습니다.
희랍 식민지 중에서 가장 큰 지역입니다.
그곳에는 디아스포라의 많은 유대인들이 살았습니다.
시몬은 유월절을 지키려고 예루살렘으로 들어오던 중이었을 것입니다.
오순절 때 예루살렘 순례자(행 2:10)가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헬라어를 말하는 유대인의 회당에서 스데반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행 6:9)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수리아의 안디옥 교회의 회심자(행 11:20-)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또 교사와 선지자였던 루기오(행 13:1) 등은 모두 이 `구레네 사람'이었습니다
시몬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게 될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못했을 것입니다. 당시 법은 사형수가 그 십자가를 지고 사형 당할 장소까지 가야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상 밖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들은 예수의 십자가를 시몬에게 지우고 예수를 좇게 하였습니다(26절). 시몬이라는 구레네 사람에게 예수의 십자가를 지고 가도록 하였습니다. 그는 꿈에서조차 생각할 수 없었고, 예상할 수 없었던 십자가를 지게 되었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억지로 지고 골고다로 따라 갔습니다(마 27:32, 막 15:21, 눅 23:26).
▶ 성경에서 시몬은 9회 나옵니다.
Ⅰ. 베드로의 다른 이름
Ⅱ. 가나안인 시몬
Ⅲ.예수님의 형제인 시몬
Ⅳ. 문둥이 시몬(베다니 사람)예수께서 베다니 문둥이 시몬의 집에 계실 때에(마26:6).
Ⅴ. 바리새인 시몬: 예수님을 식사에 초대함
Ⅵ.구레네 시몬 :구레네 사람으로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막15:20)
Ⅶ.가룟 유다의 아버지(요6:71).
Ⅷ.마술사 시몬 - 빌립에게 세례(침례)를 받음: 시몬도 믿고 세례(침례)를 받은 후에 전심으로 빌립을 따라 다니며 그 나타나는 표적과 큰 능력을 보고 놀라니라 (행 8:13) -베드로에게 책망을 받음. 하나님의 선물을 돈 주고 살 줄로 생각
Ⅸ. 욥바의 피장(皮匠)- 베드로가 피장 시몬의 집에 우거
여기 시몬은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버지라 일컬어지는 그 구레네 시몬입니다.
이 사건을 통하여 그에게는 큰 인생의 전환점이 찾아온 듯합니다. 그는 이 사건을 전후하여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그의 생애에 영접하지 않았겠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그는 이 사건을 통하여 초대 교회에서 유명한 사람이 되어 각 복음서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마침 알렉산더와 루포의 아비인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서 와서 지나가는데 저희가 그를 억지로 같이 가게 하여 예수의 십자가를 지우고(막 15:21; 마 27:32; 눅 23:26).
"루포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이니라(롬 16:13)
로마교회의 루포가 구레네 시몬의 그 아들이라고 한다면, 그는 예수님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의 뒤를 따른 은혜를 현세에서도 받은 셈입니다.
죄 없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그 십자가는 형틀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없이 십자가를 지셨을 때, 우리의 죄가 용서함을 받았습니다.
시몬이 죄없이 십자가를 졌을 때, 예수님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습니다.
죄없이 십자가를 지고 있다면 그 십자가는 형틀이 아닙니다.
영광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십자가 사랑하리
내가 기쁘게 십자가 사랑하면
슬픔 마음이 위로 받네.
3. 자신의 죄를 인하여 울라(27-31)
많은 무리가 예수의 뒤를 따라갔습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 대한 연민으로 마음이 아팠습니다. 특히 여자의 무리가 그를 따라갔습니다(27절). 그들은 가슴을 치며 슬피 울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돌이켜 자기를 위하여 울지 말고 자신들을 위해 울라고 하셨습니다(28절).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William Arnot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구주에 대한 사랑은 자신의 죄악성을 깨닫는 의식과 비례한다.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높이는 그 자신의 겸손의 깊음과 같다. 마치 땅속으로 보이지 않게 파고든 뿌리가 하늘 높이 꽃피는 가지를 뻗치는 것과 같다."
■ 켄터기 루이빌의 Blanford란 부인은 2년 동안 다리 고통 속에서 지냈습니다. 서서 일하기 때문이려니 하고 통증을 참고 지냈습니다. 너무 심해서 병원에 갔습니다. 아랫배와 다리에 암덩어리가 잡혔습니다. 장과 임파선까지 암이 이미 번졌습니다. 6개월간 약물치료를 받은 후, 수술을 했지만 결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어느 날 혼수상태에 빠졌습니다. 환상을 보았습니다. 지붕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방마다 모든 것이 갖추어져 있는데 지붕이 없는 집이었습니다. 그 의미를 알고 싶어서 기도하던 중 한 의미를 깨달았습니다. "내게는 방마다 많은 것이 있는데, 나를 덮어 줄 지붕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없구나." 그녀는 병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지붕이 되시기를 기도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하나님 좋으실 대로!'하시기를 원하는 평화로운 마음이 밀려왔습니다. 의지와 노력을 포기하고 조용히 주님께 감사하면서 하루하루를 살기 시작했습니다. 약도 없이 오직 하나님만 의지한 채 살기를 2년 6개월 후, 의는 암덩어리가 깨끗하게 낳은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러 가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면서 웁니다. 동정의 대상으로 생각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저들을 죄에서 무방비 상태로 방치된 저들을 구원하시기 위한 지붕이 되시려고 십자가를 지고 가고 계십니다.
죽은 사람을 위하여 애곡하는 것은 유대인들의 관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듯 애곡하는 자들을 향하여 자신을 위하여 울지 말고 예루살렘을 위하여 애곡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왜냐하면 예수님께서 지금 가시는 죽음의 길은 사실 궁극적인 승리의 길이요 생명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에 반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는 예루살렘은 지금 영원한 심판과 멸망의 길을 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루살렘은 메시야를 거부하고 처형함으로써 하나님의 구원을 거부하고 자신의 파멸을 자초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예루살렘의 딸들아 나를 위하여 울지 말라."
1) 그들이 예수를 위해 울 필요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은 특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대적들에 대한 승리였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구원이며 우리를 위해 영생을 준비하시려 하심입니다. 그러나 자기들과 자녀들을 위해서는 울라고 하셨습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못하고 심판 아래 떨어질 예루살렘을 위해 울라하십니다. 그를 죽게 한 우리의 죄와 우리 자녀들의 죄를 위해서 우는 일이 옳습니다.
2) 그들이 그들 자신과 자녀를 위해 울어야 하는 특별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보라 너희 성읍에 슬픔의 날이 곧 오리라."
그날에 지붕되시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시지 못할 때, 쏟아질 유황불은 무서운 것입니다. 자기들과 자녀들을 위하여 울어야지요..
마무리하는 말
1.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갑시다
우리가 사는 세상은 골고다의 언덕과 같습니다.
누구도 십자가 지기를 싦어하는 골고다 언덕과 같아요.
그러나 예수님은 죄인들도 지기 싫어하는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를 입고 의롭다 함을 받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우리고 시몬처럼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야 합니다.
2. 무너진 예루살렘, 심판 아래 있는 우리의 도성을 생각하며 우는 신자가 됩시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영접하지 못한 사람들에게 무서운 심판을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찌기 예루살렘을 위해 우셨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들에게 예루살렘을 위해 울라고 하십니다.
예루살렘의 멸망이 참으로 끔찍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① 무자한 자가 되고 싶을 것입니다. 가족이 없는 자를 부러워하며 수태 못하는 이와 해산하지 못한 배가 복이 있다 할 것입니다.
② 산들에게 우리 위에 무너지라 작은 산들에게 우리를 덮으라 하리라(30절).
푸른 나무이신 그리스도에도 이같이 하거든 마른 나무인 유대인에게는 어떻게 되리요(31절).
그리스도는 푸른 나무이십니다. 그것도 아주 무성한 푸른 나무이십니다.
푸른 나무이신 예수님께서 당하신 혹독한 고난을 생각하면 마른 나무인 우리들에게 임하실 하나님의 심판이 얼마나 두려운 것인가를 절감하게 됩니다.
우리도 우리에게 주어진 십자가를 감사함으로 지고 주님을 따릅시다.
재수없게 나에게 이런 십자가가 주어졌다고 한탄하지 맙시다.
예수님께서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세차례 기도하였습니다.
이 쓴잔, 곧 십자가를 지지 않을 길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버지 하나님의 침묵을 받아 그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죄사함을 받았습니다.
사도 바울도 자신의 몸의 가시를 견디기 힘들어 기도했습니다.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응답을 받았을 때, 그는 그 십자가를 지고 갔습니다.
약할 때, 곧 강함을 주시는 은혜를 체험했습니다.
여러분이 지신 십자가는 무엇입니까?
주님께서는 아무든지 나를 따르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자기가 부인되는 지점은 예수님께서 사시는 지점입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심을 받는 사람에게 주어진 십자가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십자가입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그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