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네상스와 성경(Ⅵ)
라파엘로 작품(아테네 학당)
라파엘로는 르네상스 시대에 레오나르도 다 빈치, 미켈란젤로와 더불어 삼대 거장 중 한 사람이다. 그의 작품 중 <아테네 학당>이 유명하다. 이는 철학과 관계되는 그림으로 54명이 등장한다.
그림의 중앙에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좌우 대칭을 이루고 있다. 왼쪽의 플라톤은 오른손이 하늘을 향함은 그의 이데아론을 상징하며, 오른쪽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손이 아래로 향함은 실제의 철학을 의미한다. 전체 그림에서 나타내는 의미는 지식은 가르침을 통해서, 학습의 배움에서, 토론을 통해서 이루어진다. 계단은 그 다양한 방식을 통해서 지식으로 나아가는 여정을 표현하고 있다.
플라톤 좌측에 소크라테스가 토론하고 있는 장면이며, 그 옆에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자리하고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그 영향을 받은 사람이다. 아테네 학당의 작품이 54명이 등장하지만,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중심인물인 것처럼 ‘사도행전’도 12 사도의 행적을 일일이 나타낸 책이 아니라 사도의 대표적인 인물 베드로와 바오로의 행적이라 할 수 있다. 13장을 경계로 전반부는 베드로, 후반부는 바오로의 행적이다. 사도행전은 초대교회의 역사를 기록한 책 즉 신약의 역사서라 할 수 있다.
계단 중앙에 디오게네스의 견유학파 있다. 이들은 자연과 일치하는 삶을 주장하는 사람들이다. 제논 스토아학파가 있다. 스토아의 건축 양식은 천정과 기둥으로 되어 있다, 천정은 빛을 막아주며, 기둥은 공기의 흐름을 자유롭게 한다. 제논이 가르쳤던 장소가 스토아였기에 스토아학파라고 불린다.
에피쿠로스의 쾌락주의자이다. 그들은 개인의 행복과 마음의 안정을 추구하는 이들이다. 아베로스는 이슬람 철학자로 그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여러 책을 아랍어로 번역하여 중세 유럽에 소개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는 그리스도교 신학에도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그리스도교 역사에서 위대한 두 신학자는 아우구스티노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이다. 아우구스티노스는 플라톤의 철학을, 토마스 아퀴나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을 자신의 신학 사상으로 받아들였다.
그 외에도 계단에는 수학자 피타고라스, 파르메니데스의 엘리아 학파, 헤라클레이토스의 이오니오 학파, 천동설의 프톨레마이오스, 기하학의 유클리드 등이 등장하고 있다. 또 에피쿠로스학파와 스토아학파 철학자들이 바오로 대담하는 장면도 나온다. 아테네의 상황을 서술하면서 두 학파를 소개하고 있다. (사도 17, 18)
‘아테네 학당’의 그림은 르네상스 시대의 정신, 당시 상황을 매우 사실적으로 소개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작품은 지식이 가르침과 학습, 토론을 통해서 전달됨을 계단으로 표현하고 있다.
르네상스와 문학
르네상스의 문학은 이탈리아의 페트라르카(1304-1374)를 꼽을 수 있다. 그는 고전 문헌학의 아버지이며 인문주의자로 최초의 르네상스 인간이라 불린다. 문헌학은 다양한 판본이나 사본을 비교 분석한다. 이는 원본이 없을 때 오리지널 텍스트 원문에 가장 가까운 본문을 재구성하는 작업이다. 중세를 거치면서 수도원이나 도서관에서 고대 판본이나 필사본이 보존되었다.
고대 로마 재생 운동, 이탈리아 재생 운동은 고전을 지역 언어로 저술하는 것이었다. 당시에는 공용어인 라틴어로 번역되었다. 가톨릭교회의 언어, 불가타 성경의 언어가 라틴어였다. 이것을 각 지역 언어로 번역했다. 이때 성경도 문헌학적인 방법으로 적용되어 번역하였다. 그의 라틴어 작품으로는 <아프리카>, <나의 비밀>, <소중한 생활>, <종교적 여가> 등이 있으며, 이탈리아어 작품으로 <칸초니에레>의 시집이 있다.
토마스 모어(1478-1535)는 영국의 인문주의자로 법률가, 사상가, 저술가, 정치가이며 가톨릭교회의 성인이다. 또한 그는 헨리 8세의 이혼을 반대한 사람으로 국왕을 비판하고 가톨릭교회를 옹호한 사람이다.
그의 대표작은 라틴어의 <유토피아>(1516)이다. 그는 작품에서 절대 왕정의 시대를 살면서도 공화국의 이상 국가를 제시했다. 당시의 이상형에 관한 모든 철학과 사상적 논의를 한 데 모았다. 그는 이상 국가 시민의 의식주와 경제활동, 정치, 사회 등을 그림을 그리듯 묘사했다.
중세기의 문학적 언어와 교회의 공식 언어가 라틴어였다. 라틴어로 번역된 불가타 성경이 전례 안에서 낭독되었다. 가톨릭교회 안에서 지역 언어로 미사를 지내게 된 것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1962-1965) 이후였다. 그 영향은 르네상스 시대를 거치면서 문학 작가들이 지역 언어를 사용한 데서 비롯되었다.
2024. 10. 14. 앞산밑북카페 송창현 신부 강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