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1
6월14일[연중 제10주간 수요일]
--------------------------------
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묵상글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
**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zP-3oMNPIac
(임재혁 스테파노 신부님 집전)
=====================
[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하느님 사랑의 보고(寶庫), 율법과 예언서!>
정직하고 사리 분별이 뚜렷한 사람을 만나면 덕담 삼아 ‘법 없이도 살 사람’이라고 칭찬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겨우겨우 평균에 머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해도 해도 너무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래서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 규칙이요 율법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사실 무인도에서 혼자 살아간다면 법이란 것은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거기서는 혼자기에 내가 무엇을 하든 어떻게 처신하든 문제 될 것이 없겠습니다. 또한 모두가 착하고 언제나 한 마음이라면 법이 없어도 살아갈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너 나 할 것 없이 부족한 인간들이 모이고 모여 공동체가 형성되면서 상황은 달라집니다. 서로의 관점이 다르고, 서로 추구하는 바도 다릅니다. 또한 인간은 대체로 자기중심적입니다. 자기 의지대로 관철하고 싶습니다. 내 뜻대로 밀고 나가고 싶습니다.
그러다 보니 의견 대립이나 충돌, 그로 인한 상처는 불을 보듯이 뻔합니다. 자연스럽게 하나둘 법 조항이 만들어졌고, 세월이 흐르면서 수많은 율법 조항들이 모여 두꺼운 율법서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율법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경건하고 건강한 공동체를 건설하라고, 우애롭고 평화롭게 살아가라고 건네주신 보배로운 선물입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구원으로 인도하는 삶의 길잡이이기도 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뜻이 율법 조항 속에 스며들어있고 하느님의 사랑이 글자 한자 한자 속에 숨겨져 있습니다. 또한 예언서 역시 위대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통해 하느님의 뜻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하는 중요한 구실을 해왔습니다.
율법은 모세에 의해서 장엄하게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은 시나이 산 위에서 그 율법을 목숨처럼 준수하겠다고 굳게 맹세했습니다. 한편 여러 예언자들은 자기 시대에 하느님의 뜻을 생생한 말로 백성들 앞에 선포하였습니다.
너무나 의미 있고 소중한 율법과 예언자들의 말씀이었기에 백성들은 그냥 흘려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 글자 한 글자 정성껏 기록하여 후손들에게도 똑같은 구속력을 지니도록 전했습니다. 이제 율법과 예언서는 계약의 백성들에게 생활의 활력이 되었으며 내적인 규범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분명히 하느님으로부터 왔으며 오랜 세월에 걸쳐 하느님의 뜻을 반영해오던 율법과 예언서였습니다. 이런 연유로 예수님께서는 강한 어조로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율법과 예언서를 보내주신 분은 하느님 아버지이신데, 그 아버지께서 파견하신 아들 예수님이 어떻게 그것들을 폐지할 수 있겠습니까?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왔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하느님의 뜻과 백성들을 향한 애정이 담겨있는 율법과 예언서들은 예수님을 통해 더욱 보완되고 성장하고 결국 완성되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그간의 율법과 예언서는 하느님의 소중한 계시가 담겨있는 말씀이지만 아직 결정적인 것은 아니며 또한 하느님의 뜻이 그 안에 표현되어 있기는 하지만 아직 완전한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율법과 예언서를 비롯한 구약성경들은 예수님의 도래를 통해 시작된 새로운 시대 아무 가치 없는 자료, 사문서로 전락하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율법과 예언서는 아직도 유효하지만, 그것은 예수님을 통해서 비로소 완성됩니다.
곧 다가올 예수님의 공생활과 죽음과 부활을 통해 율법과 예언서는 완벽하게 완성됩니다. 이것이 실현될 때 모든 것은 성취될 것이고 완성될 것입니다.
=====================
[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nWrYMVNTm9E
++++++++++++++++++
<행복하면 죄 짓지 못한다>
계명을 지킴은 구원의 길입니다. 계명은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지켜질 수 있습니다. 그 계명은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하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게 되면 어떻게 될까요? 행복합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아주 작은 계명이라도 어기지 말고 지키라고 합니다. 눈빛 하나까지 사랑이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됩니다. 그런데 빛과 소금이 되려면 행복해야 합니다. 오늘 복음이 행복 선언에서 비롯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그리스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자존감만큼 행복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가 되어가는 도정에 있습니다.
왜 행복하면 죄를 짓지 못할까요? 모든 죄는 ‘불만’으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불만족하니까 만족하지 못하는 탓을 남에게 하고 허락되지 않은 것으로 그 불만족을 채우려 합니다. 그것이 죄가 됩니다. 결국 그 죄는 양심의 가책을 일으키고 더 큰 죄의 나락으로 떨어뜨립니다.
그렇다면 불만족은 어디서 나올까요? 사랑 받지 못해서 나옵니다. 불만족은 더 바랄 수 있는 존재인데 그만큼 채워지지 않는 것에서 생기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내면의 뱀은 자꾸 인정받지 못하는 자신을 세상 것으로 채우라고 명령합니다. 돈과 명예와 쾌락으로. 하지만 그 과정에서 나는 모기가 되고 내 주위의 사람들이 다 떠나 버립니다.
우리는 사실 무엇을 더 갖지 못해서 불만이기보다는 그것을 가져서 더 높은 수준의 존재가 될 수 있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불만입니다. 그러니 가장 높은 존재가 되면 그러한 불만이 사라지고 그러면 죄를 짓지 않게 됩니다. 그리고 자신처럼 믿지 못하는 이들에게 연민이 느껴져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됩니다.
영화 ‘시민 케인’(1941)의 줄거리입니다. 영화는 막대한 부를 지닌 신문왕 찰스 포스터 케인의 사망 소식으로 시작됩니다. 그는 죽으며 “로즈버드”(Rosebud)란 마지막 유언을 합니다. 케인을 이해하기 위해 기자 제리 톰슨은 로즈버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찾고자 합니다.
케인은 가난한 시골에서 태어나 눈사람을 만들고 썰매를 타고 노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러다 어머니는 엄청난 금광을 발견하여 큰 부자가 됩니다. 어머니는 무식하고 아이만 학대하는 아버지 옆에서는 아이를 올바로 키울 수 없다고 보고 아이를 부유한 은행가에게 보냅니다. 아이가 성인이 되면 자기 유산을 물려주기로 합니다. 아이는 반항하지만, 어머니의 결정은 꺾을 수 없습니다.
성인이 된 케인은 막대한 부로 다른 사업을 할 수 있음에도 작은 신문사를 인수하여 몇 년간 많은 적자를 냅니다. 하지만 그는 겁내지 않습니다. 나중에야 언론을 통해 자신을 인정받으려는 노력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공격적 스타일 경영으로 결국엔 뉴욕의 모든 언론을 장악합니다. 여기서 케인의 신문에 대한 집착은 누군가가 자신의 목소리를 들어주지 않았던 것에 대한 불만을 상징합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성이 차지 않습니다. 그는 정치에 도전하기로 합니다. 그래서 대통령의 조카인 에밀리 노튼과 결혼합니다. 이로써 선거에서 그의 당선이 유력했지만, 그는 젊은 가수 수잔과 불륜을 저지릅니다. 그렇게 이혼 당하고 선거에서 낙마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동안 함께 했던 언론사 친구들도 다 떠나갑니다. 여기서 권력에 대한 집착은 아무 힘 없이 남의 집에서 살아야 했던 상황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케인은 수잔과 결혼하고 그녀를 위해 오페라 하우스를 지어줍니다. 그녀는 가수지만 노래를 썩 잘하지 못합니다. 오직 케인만 그녀의 노래를 좋아합니다. 하지만 수잔은 자기 능력으로 사람들을 만족 시키지 못하는 것에 좌절하여 자살 시도를 합니다. 케인은 자신이 이렇게까지 해주는 데 죽으려고 한 것을 이해할 수 없습니다. 여기서 자신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 한 여인에 대한 집착은 나만을 사랑해줄 단 한 사람도 없었음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케인은 부와 권력을 이용하여 거대한 부동산 소유주가 되고 자신만의 성을 건설합니다. 그 성에서 수잔과 단둘이 삽니다. 젊은 수잔은 그 무료함을 견딜 수 없어 케인을 떠납니다. 케인은 이제 아무것도 남지 않았습니다. 그저 눈 내리는 풍경이 있는 구슬을 떨어뜨리며 ‘로즈버드’만을 외칠 뿐입니다. 여기서 부동산과 커다란 집에 대한 집착은 자신만의 세상을 구축할 시간이 없었던 것에 대한 불만의 상징입니다.
기자는 여기까지 케인의 삶을 취재하고 모든 것을 가졌지만 또 모든 것을 잃은 케인에게 로즈버드가 어떤 의미인지 찾아내지 못합니다. 영화는 마지막으로 케인의 예술품들을 감정하는 사람들이 쓸모없는 것들을 태워버리는데 케인이 어렸을 적 타던 썰매에 ‘로즈버드’라는 이름이 적혀 있는 것을 보여줍니다.
케인이 평생 그리워했던 것은 어린 시절에 잃어버린 부모의 사랑과 따뜻함이었습니다. 부모는 케인을 더 큰 부자로 만들려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쏟아주어야 할 의무를 하지 않았습니다. 케인은 그 공허감에 많은 것으로 자신을 채우려 했지만, 결국 세상 어떤 것으로도 그것을 채울 수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 자신을 사랑하는 많은 사람에게 상처를 입히고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런 모든 죄는 부모에게 인정받았으면 없었을 것들이었습니다.
돈을 바라고 쾌락을 바라고 명예를 바라는 마음은 그것을 통해 궁극적으로 자기 존재 가치를 인정받으려는 노력입니다. 아무리 그런 것들을 많이 가져도 충분히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끼면 영원히 배고플 수밖에 없고 그러면 타락의 길로 들어섭니다. 반칙을 써서 불만을 채우려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죄이고 이것이 사랑을 할 수 없는 존재가 되게 만듭니다.
결국 죄를 이기는 길은 나의 존재 가치를 높이는 일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나를 사랑해주는 사랑만이 채워줄 수 있습니다. 나의 존재 가치는 ‘믿음’입니다. 자존감은 믿음입니다. 믿음은 사랑에서 생깁니다. 부모의 사랑은 자녀가 귀한 존재임을 믿게 만듭니다. 사랑 받은 아이는 세상 것들을 통해 인정받으려 할 필요가 없어집니다. 죄에서 멀어집니다.
개 밥그릇이 안 되려면 누군가 보물에 맞는 가치를 쳐 주어야 합니다. 하느님은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 가치가 하느님이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성체를 영하고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러면 불만족이 사라지고 그러면 죄를 짓지 않고 완전한 사랑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죄를 없애시는 분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희망할 수 있는 최고의 존재가 되었음을 믿게 하십니다. 그러면 불만이 없어지고 행복합니다. 그 행복이 아주 작은 계명까지도 지키게 할 것입니다. 죄는 행복하지 않기에 짓는 것입니다.
=====================
[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캠핑을 하러 가면 가져가는 물건들이 있습니다. ‘침대, 텐트, 의자, 침랑’은 개인 소지품이라 꼭 챙겨야 합니다. 물건을 꺼내는 것보다 물건을 다시 제자리에 넣는 것이 더 어렵습니다. 성격이 급해서인지 누군가 도와주지 않으면 시간도 많이 걸리고, 주머니에 잘 들어가지 않습니다. 성격이 꼼꼼하고, 차분한 신부님들은 혼자서도 쉽게 물건을 제자리에 넣는 것을 봅니다. 주머니를 좀 넉넉하거나, 크게 만들면 좋겠는데 대부분의 물건은 주머니가 딱 맞게 만들어져있습니다. 억지로 힘으로 넣으려고 하면 지퍼가 고장 나거나, 주머니가 찢어지곤 합니다. 물건은 어찌하면 다시 넣을 수 있지만 사람의 감정은 더 예민하기 때문에 늘 주의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입에서 나간 말을 다시 담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욱’하는 성격 때문에 말실수를 한 적도 몇 번 있습니다. 사제생활 32년을 하면서도 ‘마음 다스림’은 늘 숙제로 남습니다. 채워지지 않는 욕심 때문에, 비우지 못하는 욕심 때문에 오늘도 마음에는 풍파가 일어납니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몇 가지 자격을 취득했습니다. 첫 번째는 ‘Social Security Number(SSN)’을 받았습니다. 한국의 주민등록증과 비슷합니다. 요구되는 서류를 준비하고, 간단한 면접을 하면 우편으로 배송됩니다. 두 번째는 ‘운전면허증’을 받았습니다. 뉴욕은 한국의 운전면허증을 인정하지 않기에 필기시험과 실기시험을 모두 통과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자유롭게 지내기 위해서는 ‘영주권’이 필요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영주권을 원하지만 요구조건이 충족되어야 합니다. 비자가 만료되고 영주권을 취득하지 못하면 생활에 어려움이 있습니다. 해외에 나갈 수 없고, 안정적인 직장에 취업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신앙생활에는 ‘SSN’도 필요 없습니다. ‘운전면허증’도 필요 없습니다. ‘영주권’도 필요 없습니다. 성령의 이끄심에 의탁하면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신앙생활을 잘하는 방법을 전해 주십니다. 우리는 부족하고, 나약하므로 교회를 통해서 신앙생활을 합니다. 교회는 오랜 역사와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신앙생활을 위한 많은 법과 규칙을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이 법과 규칙을 잘 지켜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법과 규칙은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들을 드러내는 수단입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것은 하느님 나라입니다. 하느님 나라는 자비를 베풀고, 옳은 일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들에게 주어집니다. 하느님 나라는 ‘여성, 죄인, 병자, 이방인’에게도 똑같이 주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과 멀어지게 하는 모든 장벽을 허물고 싶어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것이 모든 율법과 계명을 완성하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다면 율법과 계명은 울리는 징과 같습니다. 사랑이 있어야 율법과 계명은 우리를 하느님께로 인도하는 길이 될 수 있습니다.
=====================
[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17-19: 새로운 정신과 옛 율법
율법과 예언서를 만드신 하느님의 아드님께서는 율법과 예언서를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 그래서 그분은 십자가를 통하여 이 모든 것을 완성하셨다. 그분은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어졌다.”(요한 19, 30)라고 하심으로써 모두 이루셨다. 그리고 파스카 신비로 율법을 완성하셨다. 예수님께서 완성하신 이 모든 것들은 아무리 작은 계명이라도 잘 보존하며 열심히 성실하게 가르쳐 하늘나라의 영광을 잃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한다. 작은 계명도 하늘나라를 담고 있다. 그러므로 말만이 아니라 행동이 중요하다. 가르치려고만 할 것이 아니라, 우리가 가르치려는 것을 행하여야 한다.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18절)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지는 때, 그때에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해주실 것이고 그렇게 되면 옛것은 사라질 것이다. 그러므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질 때까지는 율법에서 가장 작다고 여겨지는 것조차도 영적인 상징으로 가득 차 있음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으리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예언자들을 통해서 하신 말씀이신데 어떻게 실제로 행하지 않으실 수 있었겠는가? 그분은 당연히 율법의 가장 작은 것까지도 지키셨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는 하느님의 계명을 잘못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들은 주님의 계명을 가르치지만 지키지는 않는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무서운 경고를 담고 있다. 계명들 가운데 작은 것 하나라도 소홀히 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하느님과 반대되는 법을 만들어 낸 자로 심판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이다. 하느님의 뜻을, 그분의 말씀을 충실히 지키고 실천하는 우리가 되어야 한다.
법이란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공동 약속이다. 그리고 그것은 최선의 것은 아니다. 법은 사회를 유지하는 최소한의 요구라고 할 수 있다. 적어도 그것을 어기게 되면 불편해지는 것이 사회의 모습이다. 우리는 법의 테두리 안에서만 자유롭다. 그러기에 법은 인간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인간이 법 때문에 있는 것이 아니다. 많은 경우에 우리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율법주의에 매여, 본의 아니게 다른 사람을 판단하기도 하고 그 때문에 마음의 죄를 짓는 경우가 많다. 어떻게 보면 내가 스스로 만들어 놓은 율법에 나의 이웃을 대입시키고 판단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는 경우가 있다는 말이다. 좀 더 하느님의 눈으로 성서의 정신을 따라 인간을 생각하고 하도록 노력하여야 하겠다. 율법주의에 떨어지는 일이 없도록!
=====================
[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예수님과 율법>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마태 5,17-19)
이 말씀을 겉으로만 보면, 예수님이 율법주의자로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주의자가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이루기 위해서 모든 것을 바치신 분입니다. 반면에 바리사이들 같은 율법주의자들은 ‘아버지의 뜻’은 생각하지 않고 율법만 중요하게 생각한 자들입니다. 그리고 율법주의자들은 많은 경우에 율법만 중요하게 생각하다가 ‘아버지의 뜻’을 거스르는 쪽으로 갔습니다. 여기서 ‘율법, 예언서들, 계명들’이라는 말은, 그 안에 들어 있는 ‘아버지의 뜻’을 가리키는 말이고,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신앙생활’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합니다. ‘완성’이라는 말은 ‘완전한 실천’을 뜻하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신앙생활에 부족한 점들이 너무나도 많아서 그것을 완전하게 하려고 오신 분입니다. 대표적인 예가 “원수를 사랑하여라.”라는 계명입니다.
“너희가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한다면 무슨 상을 받겠느냐? 그것은 세리들도 하지 않느냐? 그리고 너희가 자기 형제들에게만 인사한다면, 너희가 남보다 잘하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그런 것은 다른 민족 사람들도 하지 않느냐? 그러므로 하늘의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마태 5,46-48)
하느님은 ‘모든 사람’을 똑같이 사랑하시는 분입니다. 그 사랑이 바로 ‘완전한 사랑’이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사는 것이 ‘완전한 신앙생활’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는 이들만 사랑하는 것은 불완전한 사랑인데, 사실은 죄인들이 짓는 죄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은, “아버지의 사랑이 완전한 것처럼”이고,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너희도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입니다. 원수 같은 사람도 사랑하는 것, 그것이 바로 완전한 사랑을 실천하는 방법이고, 신앙생활을 완성하는 방법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 ‘간음해서는 안 된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도둑질해서는 안 된다. 탐내서는 안 된다.’는 계명과 그 밖의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그것들은 모두 이 한 마디 곧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로 요약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8-10)
여기서 “아무에게도 빚을 지지 마십시오. 그러나 서로 사랑하는 것은 예외입니다.”라는 말은, 사랑이란, 아무리 많이 해도 늘 부족하다는 뜻입니다. (자기 마음대로 이만큼 했으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십계명을 언급한 것은, 계명 실천은 ‘사랑으로’ 해야 하고, 사랑이 없는 실천은 실천이 아니라는 것을 강조한 것입니다. 또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라는 말은, 사랑은 곧 선이고, 사랑의 완성은 ‘선의 완성’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완전한 사랑을 실천해야 신앙생활이 완성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말씀에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말씀은, 모든 사람이 구원받기를 바라시는 ‘아버지의 뜻과 사랑’은 영원하다는 뜻입니다. (영원하다는 것은, 영원히 변하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인간들의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너무 쉽게 변하고 오락가락하지만, 하느님의 사랑은 영원히 변함이 없습니다. <그것을 믿고, 끝까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는 말은, 인간들이 자기들 마음대로 계명들을 큰 것과 작은 것으로 분류해서 큰 것만 중시하고 작은 것은 무시하는 것을 꾸짖으시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의 뜻은, “계명들 가운데에서 작은 것은 없다.”입니다.>
실제 현실에서, 인간들이 어떤 계명을 무시하고 안 지키는 것은, 그 계명을 ‘작은 계명’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 아니라 ‘지키기 싫은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실제로는 지키기 싫어서 안 지키면서도 ‘작은 계명’이라서 그런다고 계명 탓을 하는 것입니다. (그런 태도도 위선입니다.)
“하늘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못 들어간다.”라는 뜻입니다. 계명들을 자기 마음대로 분류하고 무시하는 것은 하느님을 모독하는 죄를 짓는 일이고, 그래서 그렇게 하는 자들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늘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라는 말씀은, “하늘나라에 들어갈 것이다.”라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 강조하시는 것은, 모든 계명들을 세세하게 다 잘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정성’으로 지켜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이든지 ‘이웃 사랑’이든지 ‘가족에 대한 사랑’이든지 ‘모든 사랑’은 ‘정성’으로 드러납니다. 사랑이 부족하면 정성도 부족하게 되고, 참으로 사랑하면 온 정성을 다 쏟게 되는 것이 실제 상황입니다. <전례를 거행할 때가 좋은 예인데, 하느님을 사랑하는 사람은 온갖 정성을 다해서 거행합니다. 아무런 정성도 없이 그냥 대충 거행하는 것은, 사랑 없이 억지로 한다는 것을 스스로 드러내는 일이 될 뿐입니다.>
=====================
《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예수님께서는 유다인들이 철저하게 지키던 율법을 거스르는, 조금은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 주시기도 하였습니다. 안식일에 밀 이삭을 뜯어 먹는 제자들을 감싸시는가 하면(12,1-8 참조), 당신도 안식일에 손이 오그라든 사람을 고쳐 주시며(12,9-14 참조) 스스럼없이 일하시는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거룩한 율법을 업신여긴다는 오해를 살 수 있는 행동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오해를 없애시고자 오늘 복음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하느님의 뜻이 담겨 있다는 유다인들의 기본적인 사상을 받아들이십니다. 하느님께서 몸소 모세에게 건네주신 계명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하시고 또 존중하신 것입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거부하거나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십니다.
그분께서는 오히려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완성하다’로 옮긴 그리스 말 동사 ‘플레로오’는 ‘충만하게 채우다’는 뜻으로 마태오 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 성취 도식에도 즐겨 사용됩니다(1,22; 2,15.17.23 참조). ‘예언서의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그리된 것이다.’는 구절로, 예수님에 관한 일련의 사건들이 구약에 예고된 약속을 실현하고 완성한다는 점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께서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는 말씀은 당신을 통하여 구약의 계명이 완전하고 충만하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는 무엇보다도 율법이 지닌 진정한 의미와 그 근본적인 취지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드러내기도 합니다. 바리사이를 비롯한 유다인들은 율법의 외적인 규정을 지키는 데만 치중하였을 뿐, 그 안에 담긴 하느님의 뜻을 찾는 데에는 관심을 크게 두지 않습니다. 이제 예수님께서는 율법에 대한 그릇된 이해를 바로잡고 그것이 담고 있는 하느님의 충만한 뜻을 밝혀 주고자 하십니다. 그분께서 어떻게 율법을 완성하시는지, 우리는 내일 복음에서 한 가지 예를 보게 될 것입니다.
=====================
[제주교구 한재호 루카 신부님]
‘아우토반’이라는 이름을 알고 계십니까? 독일의 고속 도로 이름입니다. 우연히 이 도로에서 운전한 적이 있었습니다. 길이 잘 닦여 있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운전자들이 추월선과 주행선을 확실하게 지키기 때문에 안전하게 100킬로미터 이상의 속도로 운전할 수 있었습니다.
다른 기회에 이집트에 갔습니다. 땅이 넓은 곳이라, 독일만큼은 아니지만 고속 도로가 어느 정도 잘 닦여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곳의 운전자들은 차선을 잘 지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고속 도로임에도 무단 횡단을 하는 이들까지도 있었습니다. 그래서 평균 60킬로미터 정도밖에 달릴 수 없었지만 신경을 곤두세워야 하였습니다.
두 나라의 운전 상황이 서로 다른 이유는 무엇일까요? 도로 사정이 약간 다르기는 합니다만, 무엇보다도 사람들이 도로 규칙을 얼마나 잘 지키느냐 하는 것입니다. 도로 규칙은 사람들의 안전을 지켜 줍니다. 그리고 그 규칙 자체는 누구에게나 공평합니다.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니 힘이 있는 사람이라도 그것을 지켜야만 하고, 힘이 없는 사람도 당당하게 운전을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정녕 예수님께서는 율법 안에 사랑을 담아 그 법을 완성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 주시어 율법 안에서도 참된 자유를 누리게 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율법을 더 이상 우리를 옭아매는 덫이 아니라 온전하고 자유롭게 하느님 나라에 이르도록 도와주는 징검다리로 삼게 해 주셨습니다. 유다인이든 이민족이든, 종이든 자유인이든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말입니다.
=====================
[서울대교구 이기양 요셉 신부님]
<저는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사람이 앞뒤가 다르다.”라는 말 들어보셨는지요? 사람들은 앞뒤가 다른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지요. 누구나 처음과 끝이 한결같은 사람을 좋아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을 들으면 예수님께서 하시는 말씀이 평소의 말씀과 앞뒤가 좀 다른 것 같은 의구심이 듭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7-18)
오늘 예수님께서는 굉장한 율법주의자처럼 말씀하고 계시지요. 예수님의 평상시 언행과 비교하면 좀 혼란스럽습니다.
평소에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들을 아주 엄하게 나무라셨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율법 파괴자, 율법을 지키지 않는 사람으로 몰아붙이며 비난했지요. 예를 들어서 음식을 먹기 전에는 반드시 손을 씻어야 하는 율법이 있었으나 예수님의 제자들은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기도 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 몇 사람이 예수님께 몰려왔다가, 그분의 제자 몇 사람이 더러운 손으로, 곧 씻지 않은 손으로 음식을 먹는 것을 보았다.… 그래서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어째서 선생님의 제자들은 조상들의 전통을 따르지 않고, 더러운 손으로 음식을 먹습니까?”(마르 7,1-5)
또 병을 고쳐서는 안 되는 안식일에 환자들을 치유하여 율법 학자들과 계속해서 마찰을 일으키셨던 분이 예수님이시지요.
“다른 안식일에 예수님께서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그곳에 오른손이 오그라든 사람이 있었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고발할 구실을 찾으려고, 그분께서 안식일에 병을 고쳐 주시는지 지켜보고 있었다.”(루카 6,6-7)
이러한 감정의 앙금이 계속 증폭되어서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로 몰아 결국 사형선고까지 받게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처형되신 직접적인 계기가 바로 율법 파괴에 있었던 것이지요. 일반적으로 우리는 복음을 통해서 예수님을 율법을 건너뛰신 분으로 여겨왔는데 오늘은 의외로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마태 5,18)라고 하시며 아주 엄격하게 율법을 강조하고 계십니다.
율법에 대해서 율법 학자들보다도 더 큰 애착을 갖고 계시는 듯한 모습입니다. 어떤 때는 율법의 파괴자로, 어떤 때는 율법의 옹호자로 비춰지는 예수님의 이러한 모습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오늘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율법에 대한 지식과 율법이 만들어진 배경 등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유다인들에게는 율법의 근간이 되는 다음 네 가지 기본이 있었습니다. 첫째는 우리가 잘 아는 ‘십계명’이고, 둘째로는 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를 모은 ‘모세오경’이 있었으며, 셋째는 ‘예언서들’, 마지막 네 번째로 ‘구전율법서’가 있었으니 흔히 알려진 탈무드 같은 내용이 이에 해당이 됩니다.
율법을 실제 생활에 맞게 풀이해 놓은 것이 네 번째 ‘구전율법서’인데 이 네 가지를 다 유다인들은 율법이라고 생각했었지요. 이 네 가지 중에 십계명, 모세오경, 예언서들은 율법을 포괄적으로 설명하고 있으나 네 번째 구전율법서는 율법 학자들이 율법을 생활에 적용시키기 위해서 세분화시키고 구체화한 것으로 수천 개의 규칙과 세부 사항들이 꼼꼼하게 나열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평소에 무시하셨던 율법은 바로 이 네 번째 구전율법서의 내용들이었습니다. 인간들이 해석하고 만들어 놓은 부분으로 율법 학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이 신자들의 삶을 좀 더 구체화하기 위해서 스스로 만들어낸 율법서였지요.
그런데 구전율법서는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예를 들면 안식일은 분명 하느님과 사람을 위한 날임에도 불구하고 구전 율법서에 의하면 안식일은 거룩하게 지내야 하고, 거룩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일을 해서는 안 되며, 죽어가는 사람을 고치는 행위도 일에 해당하므로 하면 안 된다고 구체화한 것입니다.
하느님을 거룩히 모시기 위해서 죽어가는 사람을 외면해야 하는 심각한 모순이 생겨난 것이지요. 이러한 율법을 잘 지키는 것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굳게 믿었던 율법 학자들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환자들을 치유하고 죽어 가는 사람을 살려내시는 것을 보고 왜 거룩한 안식일에 해서는 안 되는 일을 하여 하느님을 욕보이느냐고 분개하고 공박을 했던 것입니다. 이에 안타까우셨던 예수님께서는 참 율법은 하느님 사랑과 인간 사랑에 있음을 수시로 지적하고 가르치셨습니다. 물론 야단도 많이 치셨지요.
한 율법 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 물었습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마르 12.28)
예수님께서 대답하셨지요.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둘째는 이것이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이보다 더 큰 계명은 없다.”(마르 12,30-31)
참된 율법의 골자를 다시 한 번 가르쳐 주신 대목입니다. 율법 학자들은 안식일에는 그 어떤 일도 해서는 안 된다는 등의 세부 조항에 스스로 걸려 넘어졌고 예수님께서는 죽어가는 사람을 살리지 말라는 율법이 어디에 있느냐고 온몸으로 반문하셨지요. 율법을 없애러 온 것이 아니라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바로 이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평소 하시던 당신의 언행과 앞뒤가 맞지 않는 모순의 말씀이 아니라 참된 율법의 정신을 분명하게 말씀하신 것이며, 율법의 정신을 왜곡하고 있는 세부 조항들이 잘못된 것임을 다시 한번 확인해 주신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율법의 완성임은 말할 것도 없지요.
그렇다면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 사랑을 드러내 보여주는 것이 이웃 사랑입니다.
“누가 ‘나는 하느님을 사랑한다.’ 하면서 자기 형제를 미워하면, 그는 거짓말쟁이입니다. 눈에 보이는 자기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사람이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랑할 수는 없습니다.”(1요한 4,20)
이웃을 사랑하지 않고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요.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 이웃 사랑입니다. 이웃을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점을 보는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좋은 점만 보입니다. 반대로 미워하는 사람은 나쁜 점만 보이지요.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 감싸주는 것입니다.
이성계와 무학대사 간에 오고 간 이야기를 모두들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두 분이 꽤 친하게 지내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이성계가 무학대사를 찾아가 이렇게 제안을 하였지요.
“대사님, 우리 한 번 허심탄회하게 농담을 하십시다.”
무학대사가 웃으면서 동의를 하였습니다. 이성계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보기에 무학대사가 돼지로 보입니다, 그려.”
무학대사가 응답하였습니다.
“제 눈에는 대왕께서 부처로 보입니다.”
그러자 이성계가 정색을 하며 말했습니다.
“아니, 농담을 하자니까요.”
무학대사가 대답했지요.
“돼지의 눈에는 돼지만 보이고, 중 눈에는 부처만 보인답니다.”
마음 속에 담고 있는 것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는 것입니다. 이웃의 좋은 점을 보고 감싸주고 칭찬해 주는 마음이 하느님을 닮은 마음이지요. 남을 험담하고 또 나쁜 것만 찾아내는 사람은 하느님과 거리가 먼 사람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만 보는 것입니다.
과거에 내가 사랑했던 사람, 또 미워했던 사람을 한 번 떠올려 보십시오. 사랑했던 사람은 좋은 것만 떠오르지요. 말 그대로 곰보도 보조개로 보입니다. 미워했던 사람은 나쁜 것만 기억되지요. 아무리 잘해도 나쁘게만 보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오늘 “율법과 예언서를 완성하러 오셨다”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율법의 완성, 또 우리 신자의 완성이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한 마디로 ‘사랑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옆 사람을 한 번 쳐다보십시오. 어떻게 보이십니까? 저는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으로 보입니다.
=====================
[글라렛선교수도회 김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마태오 복음 5장 17절)
이해를 돕기 위해 간단히 율법에 관해 공부해 보자. 율법은 신명기의 정신인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큰 계명을 근거로 해서 만들어졌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율법 조항들은 모세오경(창세기, 탈출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 여기저기서 613가지나 된다. 이것이 바로 유대인들이 가장 큰 법으로 목숨처럼 지키고자 했던 율법이다.
613 조항이라는 말이 유대인들에게 사용하게 된 것은 3세기경에 심을라이(SIMLAI)라는 유대인 랍비가 모세오경에서 하나하나 골라내고 분류하여 성문화 한 다음부터이다.
그는 이 율법 조항들을 일일이 찾아내어 “무엇을 하라”는 조항들 248개와 “무엇을 하지 말라”는 조항들 365개로 분류한다.
따라서 율법의 가지 많은 조항들은 사실 그 내용상 두 개의 계명 즉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계명을 지키는 구체적인 방법들이라 여겨지는 것들을 법으로 만들어낸 것이다.
--------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폐지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오셨다고 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이 율법의 파괴자라며 핍박의 그 이유를 찾으려 했다. 그래서 성서를 읽고 있는 우리 역시 율법을 부정적인 의미로만 바라보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서 율법학자나 바리사이들을 책망하신 내용은 무엇인가? 그것은 간단히 말해서 하느님과 사람을 위해 만든 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하느님을 잘못 이해하게 하고 사람을 살리는 법이 아닌 죽이는 법으로 이해하려는 잘못된 해석에 있었다.
율법을 악용해서 사람들에게 온갖 짐을 지우고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려는, 그래서 결과적으로 반율법적인 정신을 사람들에게 강요하는 데에 있었다.
사람을 사랑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 온갖 소외를 양산해내고 있는 뒤틀린 종교심에 있었다. 그분께서 말씀하신 완성이란 율법 정신을 제대로 살리고, 잘못 만들어진 것을 바로 잡는다는 의미이다.
오늘날 우리 역시 온갖 종류의 법 테두리 안에서 살고 있다. 옳은 법도 있고 잘못 만들어진 법도 있으리라.
옳게 법의 정신을 이해하고 실천하려는 이들도 있고, 자신의 이기심을 위해 악용하면서 악랄한 죄를 만들어내는 세력과 개인들은 늘 존재해왔다. 바로 잡을 것은 바로 잡아야 한다. 약자라는 이유로 고통 받는 이들을 위해서, 법은 완성으로 나아가야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좀 더 나은 미래를 위해서 법은 양심 있는 이들을 통해 발전해 나아가야 한다. 모든 법에는 타당한 존재 이유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다름 아닌 옳음을 위함이다. 예수님의 논리는 아주 간단했다.
악이 아닌 선이 중심이 되는 세상이어야 한다는 것을 우리는 늘 명심해야만 한다.
=====================
[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는 것이, 힘이 되려면 확실히 알아야 하고 아는 것을 제대로 사용할 때 힘이 됩니다. 실천이 없으면 아는 것이 오히려 병이 됩니다. 많이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는 것을 하나라도 열매 맺을 수 있도록 하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머리를 크게 하기보다 가슴을 키워야 하고 손발에서 열매를 맛볼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기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라고 하셨습니다. 완성한다는 것은 부족함을 완전하게 충만히 채운다는 의미입니다.
율법과 예언서의 근본정신이 사랑인데 그 부족한 사랑을 예수님께서 친히 당신의 가르침과 삶과 죽음을 통하여 완성하신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언행일치의 삶을 사셨습니다. 사랑하는 일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로마 13,10) 그리고 율법을 듣는 이가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이가 아니라, 율법을 지키고 실천하는 이라야 의롭게 될 것입니다.(로마 2,13)
예수님께서는 율법의 “계명을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나라에서 큰 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을 살고 또 가르침으로써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자기 주변도 정리 못 하면서 어떻게 큰사람이 될 수 있겠습니까? 큰 사람처럼 보이려 하지 말고 정말 큰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남을 위한 작은 배려는 결코 작은 것이 아닙니다.
큰 사랑을 모아서 하려는 사람은 결코 사랑을 행하지 못할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행복에 우리의 행복을 거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완성을 이루시는 예수님을 바라보며 그 삶을 잘 따라 살 수 있길 희망합니다. 사랑한다고 말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사랑을 위해서 무엇을 했는가가 더 중요합니다.
마지막 날 주님께서는 '세상에서 얼마나 많은 일을 하고 업적을 쌓았느냐?'를 묻지 않으시고 '얼마나 사랑하며 살았느냐?'를 물으실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을 주님의 사랑으로 충만히 채워주시길 기도합니다. 무엇을 하든지 억지로 마지못해서 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알아서 지킬 것을 지키는, 근본을 고수하는 기쁨 안에 머물기를 희망하며…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
[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성녀 헬레나의 아들이며, 313년 밀라노 칙령을 통해 로마에 가톨릭을 공식 승인했던 황제가 있습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입니다. 어머니의 열성적인 신앙에 아들인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가톨릭을 승인했고 드디어 로마의 긴 박해 시대를 끝맺을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세례를 받았을까요? 만약 받았다면 언제 받았을까요?
그는 어머니 헬레나 성녀의 적극적인 권유에도 세례를 받지 않았다고 합니다. 임종이 가까워졌을 때 겨우 세례받았는데, 세례를 계속 미뤘던 이유를 이렇게 말했습니다.
“세례를 받고 나면 신자답게 살아야 하므로, 죄악에 빠질 자유를 잃는다.”
이렇게 늦게 세례받는 것이 유행이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실컷 죄를 짓고 죽기 직전에 회개하고 세례받으면 가장 깨끗한 상태로 구원에 이르게 될까요?
주님을 멀리할수록 영혼은 병들게 됩니다. 육체의 병이 생기면 치료받아야 하지요. 또 혹시 모를 병의 위협에 대비하고자 예방접종도 합니다. 그런데 육체의 병이 생기기 전까지 건강에 전혀 신경 쓰지 않고 함부로 몸을 굴리다가, 병에 걸린 다음에 치료받으면 된다고 생각하면 어떨까요? 영혼의 병도 마찬가지입니다. 영혼의 병도 치료해야 하고 또 병에 걸리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예방접종도 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세례입니다. 하지만 병이 생긴 뒤에 치료받겠다고 합니다. 과연 지혜로운 사람이라고 할 수 있을까요?
지금을 사는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실컷 놀면서 하고 싶은 것 다 하다가 나중에 힘 빠지면 신앙생활을 하겠다고 합니다. 점점 영혼이 병들어 가고 있는데도 전혀 신경 쓰지 않습니다. 후회의 삶을 살 수밖에 없습니다. 영혼이 건강해야 주님 안에서 더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스스로 망치는 삶을 살아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율법을 완성하는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바로 사랑의 계명입니다. 율법은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지요. 자유와 해방의 법을 율법이라고 말하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 율법의 기본 정신인 사랑 안에서 진정으로 건강하고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셨습니다. 그래서 율법을 철저하게 지키라고 하십니다.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라고 약속해주셨습니다. 사랑의 율법은 지금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만을 쫓다가 먼 훗날 힘 빠져서 아무것도 하지 못할 때, 회개하고 “자비를.”라고 눈물을 흘리면서 후회해서는 안 됩니다. 지금 주님 안에서 영적으로 건강할 수 있는 삶, 영적으로 기쁨의 삶을 살 수 있는 사랑의 율법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비로소 큰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
[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목숨을 바쳐>
마태오 5,17-19 (예수님과 율법)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한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 계명들 가운데에서 가장 작은 것 하나라도 어기고 또 사람들을 그렇게 가르치는 자는 하늘 나라에서 가장 작은 자라고 불릴 것이다. 그러나 스스로 지키고 또 그렇게 가르치는 이는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고 불릴 것이다.”
<목숨을 바쳐>
목숨을 바쳐
믿고
목숨을 바쳐
바라고
목숨을 바쳐
사랑하고
목숨을 바쳐
화해하고
목숨을 바쳐
깨끗하고
목숨을 바쳐
진실하고
목숨을 바쳐
의롭고
목숨을 바쳐
자비롭고
목숨을 바쳐
평화롭고
목숨을 바쳐
거룩하고
목숨을 바쳐
따르고
목숨을 바쳐
하나 되고
=====================
[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는 권고로 충분한 사랑꾼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성 프란치스코의 수도 규칙의 첫 마디는 다음과 같습니다. “작은 형제들의 수도 규칙과 생활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복음을 실행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수도회 수도자들이 이 말을 듣고 이상하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작은 형제들만 복음을 실행하는 사람이냐? 우리도 복음을 실행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할 것입니다.
그렇지요. 수도자란 가난과 정결과 순종으로 대표되는
복음의 권고를 살기로 약속한 사람들이지요.
주님께서는 복음에서 많은 권고를 하셨습니다. 그 많은 복음의 권고를 한마디로 요약하면 사랑하라는 것이요, 두 마디로 요약하면 하느님을 만유 위에 사랑하고 이웃을 제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이요, 세 마디로 요약하면 가난의 사랑과 정결의 사랑과 순종의 사랑을 살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어쨌거나 수도자라면 누구나 복음적 권고를 살기로 공적으로 약속한 사람들이고, 그것을 자기 수도회의 수도 규칙에 따라 살겠다고 약속한 사람들이지요.
그런 것인데 프란치스코가 작은 형제들의 수도 규칙과 생활을 복음을 실행하는 것이라고 굳이 못 박은 것은 복음보다 수도 규칙에 매일까 봐 그런 거지요.
사실 복음을 제대로 그러니까 완전하게 실행하면 수도 규칙이 따로 필요 없다고 생각한 것이 프란치스코입니다.
그렇습니다. 복음보다 더 완전한 것이 없습니다. 수도 규칙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해도 복음보다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복음을 놔두고 수도 규칙에 매일 수 있고, 복음을 단순하게 실천하면 되는데 수많은 규칙을 만들고는 거미줄에 걸린 나방처럼 그 규칙들에 얽매여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하느님의 말씀을 놔두고 인간의 전통에 매인다고 질타하신 것과 같은 잘못을 범하는 셈입니다.
수도 규칙이 나쁜 것은 분명 아니고 분명 좋은 목적을 가지고 있지만 인간이 하느님을 가리는 우상이 되듯이 수도 규칙이 복음을 대신하는 우상이 되고 그래서 나쁜 것이 될 수는 있습니다.
복음 대신 수도 규칙에 얽매이는 것, 이것이 우리 시대의 율법주의인데, 예수님께서 없애려고 하신 것은 율법이 아니라 율법주의입니다.
무슨 주의이든 주의란 그것을 최고로 여기는 것이듯
율법주의는 율법 지상주의 곧 율법이 최고라는 주의지요.
그런데 주님은 복음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사랑이라고 가르치셨고, 그래서 모든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며, 우리는 복음의 권고를 사는 것이 규칙을 사는 것의 완성이라고, 권고가 법보다 가벼운 것 같아도 더 완전한 것이라고 믿습니다.
법으로 강제해야만 사는 우리입니까? 권고로도 충분한 사랑꾼들이 아닙니까?
오늘부터 한 주간, 저는 모 수도회 피정 지도를 합니다. 그래서 한 주간 강론은 수도자를 위한 강론임을 염두에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곳 피정의 집이 실내에서는 전화 수신이 차단됩니다. 그래서 제가 전화를 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연락하실 일이 있으시면 이메일로 연락 주세요. 제 이메일은 lkofm@hanmail.net입니다. 앞의 i가 아니고 L의 소문자입니다.
=====================
[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사랑은 율법의 완성>
-사랑이 답이다-
“주님, 당신의 행로를 가르쳐 주시고,
당신의 진리로 저를 이끄소서.”(시편25;4.5)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만민의 공통언어가 사랑의 순수한 마음입니다. 공통적 좋은 반응을 일으키는 제 시詩들도 한결같이 사랑이 주제입니다. 미국에 있는 신심깊은 조카를 통해 조카 친구가 만들어 주는 시화詩畫들이 참 반갑고 마음에 듭니다. 어제도 수도원 입구 빨간 넝쿨장미 아치형 입구 공간에 위치한 시가 참 좋아 많은 이들과 나누었습니다.
-“사랑합니다!”
감동에 벅차 당신을
안을 때마다
주님을 안 듯
주님의
살아 있는 보물을
살아 있는 소우주를
살아 있는 성경을
살아 있는 성인을
안 듯 당신을 안는다
가슴 벅차오는 기쁨이요 행복이다-2023.6.11
사실 이 시는 제 체험적 고백입니다. 긴 면담성사후 감동에 젖어 형제자매님들이 너무 장하고 고맙고 사랑스러울 때 사죄경과 더불어 강복을 드린후 이 시의 마음으로 안아드립니다. 이 시화를 받은 다섯 분 도반의 감사 답신입니다.
1. “아, 멋진 말씀을! 넝쿨 장미 성전입구 사진을 편집까지, 너무 감동입니다. 말씀만 보아도 행복인데 정성들인 사진으로 만들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액자로 만들어 간직하고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 "예수님 품인듯, 따뜻하고 힘차게 안아 주시는 신부님께서 갑자기 확 제 앞에 계신듯 하네요. 감사드려요. 신부님, 좋은 하루 되시길요."
3. "사랑합니다 신부님! 감사합니다 신부님! 고맙습니다 신부님!"
4. "아멘, 신부님, 멋지고 아름다운 예수님께 대한 사랑고백이십니다. 감동입니다."
5. "어제 인용하신 이 시도 참으로 감동입니다."
또 “사랑합니다!” 시작되는 시 2편이 생각납니다.
수도원 십자로 중앙의 예수 성심상 앞을 지날 때 마다 바치는 행복기도(예닮기도)중 첫연입니다.
-“주님
사랑합니다
참회합니다
믿습니다
찬미합니다
감사합니다
기뻐합니다
차고 넘치는 행복이옵니다
이 행복으로 살아갑니다”-2018.10.16
다음 시를 쓸 때의 장면이 생생합니다. 저에게 시는 짜내어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은총처럼 발견되어 줍는 선물입니다. 그때는 고풍의 돌집 성당 입구에 있었던 물앵두나무 빨간 열매들이었습니다. 순수한 사랑을 상징하는 빨간 앵두열매들입니다.
-“사랑합니다!”
마침내
빨간 열매로
사랑을 고백하는 앵두나무
초록빌 나뭇잎들
믿음 사이로
수줍게 살며시 얼굴들 내밀고
사랑을 고백하는
빨간 앵두 열매들
부끄러워 빨갛게 물들었네”-1996.5.30
어제 월모임을 하고 간 코이노니아 자매회 공동 카톡란에 제가 올린 격려글입니다.
-“성부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사랑의 압축인 성호경보다 더 좋은 기도는 없습니다. 사랑의 예수님과 일치됨으로 변질되지 않고 참소금으로 참빛으로 참행복의 진복팔단을 살 수 있음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어제 오늘 복음을 요약하는 성호경입니다. 사랑의 기도, 사랑의 회개입니다. 한결같은 끊임없는 기도, 끊임없는 회개가 평생 변질되지 않는 참소금, 참빛의 주님 사랑으로 살게 합니다.-
바로 이런 사랑이 오늘 복음에 대한 답입니다. 예수님의 복음 말씀이 참 엄중합니다. 당대의 제자들은 물론 오늘의 우리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하늘과 땅이 없어지기 전에는, 모든 것이 이루어질 때까지 율법에서 한 자 획도 없어지지 않을 것이다.”
율법의 어떠한 세부사항도 하느님 사랑의 표현이기에 소홀히 다루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하느님 사랑이 얼마나 절대적인지 마음에 와 닿습니다. 여기서 진실로는 히브리말 “아멘!”을 음역한 것입니다. 하느님께 대한 절대적 신뢰와 사랑을 고백하는 말마디 “아멘”입니다. 율법 하나하나가 하느님 사랑이 알알이 맺힌 빨간 앵두열매들과 같으니 어느 하나 작은 것 포기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사랑에는 크고 작은 것이 없으니 모든 율법이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참으로 주님과의 일치가 깊어질 때 이런 사랑은 그대로 율법의 완성이 됩니다. 어느 율법하나 다치지 않고 사랑의 완성을 이룹니다. “완성하다”로 옮긴 그리스말 동사 “플레로오”는 “충만하게 채우다”는 뜻으로 마태복음서에 자주 등장하는 예언성취 도식에 즐겨 사용하는 말마디입니다.
텅빈 충만, 바로 하느님의 아가페 사랑입니다. 바로 산상설교 마태복음 5장에서 7장까지가 구체적으로 율법의 완성이 사랑임을 입증합니다. 바로 이런 진리를 깊이 깨달은 사랑의 사도, 성령의 사도 바오로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고백입니다. 성령이 사랑입니다. 성령충만, 사랑충만입니다. 무지와 허무에 대한 궁극의 답입니다.
“우리의 자격은 하느님에게서 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성령의 직분은 얼마다 더 영광스럽겠습니까? 의로움으로 이끄는 직분은 더욱더 영광이 넘칠 것입니다.”
성령의 직분을 지닌 새 계약의 일꾼으로, 사랑의 성령의 일꾼으로 사는 것입니다. 이래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인 충만한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이렇게 살 때 어느 하나 율법도 다치지 않고 완성하여 하늘 나라에서 큰사람이라 불릴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 사랑은 분별의 잣대입니다. 사랑이 답입니다. 사랑밖엔 길이 없습니다.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우리 모두 성령충만한 삶에, 날로 주님 사랑을 닮아 가게 합니다.
"의인에게는 빛이 솟아오르고, 마음 바른 이에게는 기쁨이 솟나이다."(시편97,11) 아멘.
=====================
[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내가 율법이나 예언서들을 폐지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마라.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5,17)
<완성하자!>
오늘 복음(마태5,17-19)은 '예수님과 율법에 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시며 '주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의 구세주이신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런데 이런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에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은 예수님을 그렇게 바라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인성(人性) 안에만 갇혀 있었습니다. 율법 그 자체 안에 갇혀 있었고, 율법이라는 문자 안에 갇혀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이 '율법의 파괴자'로 보였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 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 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2코린3,6)
그렇습니다. 문자가 사람을 죽입니다. 문자 안에 갇혀있었던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많은 사람들을 죽였고 예수님을 죽였습니다. 그러나 성령 그 자체이신 예수님께서는 많은 사람들을 살리셨습니다.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
율법이나 계명들과 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것들이 많습니다.
'이러한 것들을 지켰느냐? 지키지 않았느냐?'
'기도를 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미사에 참례했느냐? 참례하지 않았느냐?'
문자에 갇혀 있었던 율법 학자들이나 바리사이들에게는 이것이 매우 중요한 물음이었고, 그리고 '그 결과가 심판과 판단의 중요한 근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에게는 그러한 물음도 중요하지만, 마땅히 해야 할 것의 '본질'이 더 중요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나의 삶으로 본질을 완성했느냐? 안했느냐?'가 더 중요했습니다.
하느님의 자녀로서 지켜야 할 율법과 계명의 본질은 '사랑'입니다. '지금 여기에서 생각과 말과 행위로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
[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www.youtube.com/watch?v=AMiPOLq30GA
=====================
[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마태 5, 17)
관점과 해석이
중요한
우리들 삶입니다.
철저한
자기 폐쇄성에서
벗어나는 것이
건강한 신앙인의
참된 모습입니다.
하느님을 향한
건강한 지향성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는
마음의
첫시작입니다.
마음의 시작은
어떻게
살 것인가를
가르쳐주는
만남의
뜨거움입니다.
우리가
더욱 힘 주어
할 일은
율법과 예언서의
비판이 아니라
우리자신의 참된
회개와 실천이
동반되는 삶입니다.
이 모든 사랑을
완성하러 오신
예수님 본래의
정신으로
돌아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더 나은 삶을
만들 수 있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참된 양심의
완성은
모순을 고쳐
나가는
신앙적 인격의
바람직한
자기쇄신입니다.
이렇듯 종교는
인격의 족쇄가
아닌 정신의
참된 자유입니다.
올바른
신앙인의 삶이
그만큼
중요합니다.
거룩함의 열망과
실천이 진정한
행복의 완성입니다.
얼마만큼 우리의
인격으로
실천해 나가느냐가
그만큼 중요합니다.
하느님 사랑의
위대한 힘을
믿는 우리들입니다.
하느님을 닮은
우리들이 스스로
사랑이 되고
스스로 실천이
되는 것이
완성입니다.
살만한 세상은
아름다운 완성으로
가득합니다.
극단적인
폐지가 아닌
본질적인
일상의 완성이
우리 인격의
완성입니다.
일상의 폐지가 아닌
일상의 아름다운
완성을 위한
예수님의 새날이
밝았습니다.
참된 사랑이
참된 자유이며
마음의 완성임을
믿습니다.
=====================
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묵상글 나눔합니다■
[이름,본명,지역(본당),축일,연령,연락처]를 문자로 보내주세요.
010-3284-9295 | 카톡ID jijivev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