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스런 과거와 우리는 어떻게 화해하나 굴종의 삶 피해 딸까지 죽인 흑인노예 아픈 기억을 이겨내야할 또다른 ‘운명’ “상처난 몸을 감싸안으며 정신적 승화” 육천만,또는 그 이상(에게 바침).
토니 모리슨의 소설 ‘빌러비드(Beloved):내 사랑하는 자’(1987)의 헌사다.
노예로 잡혀 미국대륙에 도착한 사람들과 중앙항로(Middle Passage·아프리카 서해안과 서인도제도를 잇는 항로)에서 죽어간 사람들까지 합하면 이를 웃돌지도 모르는 엄청난 수의 아프리카인은 바로 노예무역을 통해 자본을 축적하고,노예들의 노동을 통해 대규모 면화재배를 유지했던,그리고 이 면화를 사들여 면방직 공업을 발전시키면서 자본주의를 가속화시켜 나갔던 18,19세기 미국과 유럽의 원죄를 온몸으로 대신 지고 가야 했던 사람들이었다.
로마서 9장25절에서 따온 제목인 ‘내 사랑하는 자’는 ‘세드’라는 한 흑인여성의 이야기를 다룬다.남북전쟁이 끝나고 8년이 지난 1873년.이제 자유의 몸이 된 세드의 삶이 자폐적인 나날을 그 중심에 둔,그리고 그 ‘자유’ 속으로 끈질기고 무섭게 파고드는 과거의 기억을 둘레로 하는 하나의 원에 비유될 수 있다면 이 원의 완성을 위해 세드가 겪어내야 하는 기억의 역사가 바로 소설의 서사를 이룬다.
오하이오주 신시내티의 블루스토운가 124번지.동네사람들로부터 고립된 세드의 집에 폴 D가 찾아온다.폴 D는 노예시절,스위트 홈이라는 농장에서 세드와 함께 있던 노예였다.그의 출현은 세드의 시어머니 베이비 슉스가 세상을 떠난 이래로 외부와 단절되고,자신들의 과거와도 단절한 채 살고 있던 세드와 그의 딸 덴버의 삶에 새로운 전환점이 된다.이 지점은 세드에게 고통스러운 과거를 다시 기억하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세드의 등에 자라고 있는 한 그루 나무는 노예시절의 착취와 고통의 역사가 그녀의 몸에 화석처럼 그대로 각인되어 있음을 보여준다.‘나무’라 묘사되는 이 자국은 세드가 ‘학교선생(Schoolteacher)’이라 불리는 스위트 홈 농장의 새 주인으로부터 채찍으로 맞을 때 생긴 상처의 흉터다.이 나무의 잎과 가지를 더듬으면서 폴 D 역시 자신의,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과거를 떠올린다.
수탉에 대해서도 부끄러움을 느낄 만큼 몸과 정신의 미세한 부분까지도 소유당할 수밖에 없었던 그 참혹한 과거를.작품은 이렇게 두 사람의 축적된 고통이 만나는 순간에서 시작한다.
세드는 기억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되짚는다.아이에게 줄 젖을 ‘학교선생’과 그의 조카에게 강탈당하고 난 뒤의 타오르는 슬픔을,만삭의 몸을 이끌고 감행했던 여정을,벨벳을 사러 가던 소녀의 도움으로 덴버를 낳던 기억을.강간과도 같이 선명하게 그녀 육체에 각인된 경험은 자신의 몸조차 소유할 수 없었던 흑인 여성의 질곡의 역사의 한 부분이며 어머니로부터 딸에게로 무겁게 되풀이되는 역사다.
세드는 이러한 경험이 더이상 자신의 ‘흠 없는’ 딸을 해칠 수 없도록,아니 굴욕적인 예속의 역사를 끊어버릴 수 있도록 ‘벌써 기어 다니는(Crawling Already)’ 딸을 살해한다.딸에 대한 끔찍하게 진한 사랑 때문에,학교선생이든 누구든 그 아이를 소유하게 할 수 없도록 자신의 손으로 아이를 죽였던 처참한 과거가 세드의 삶을 움켜쥐고 있었던 것이다.
빌러비드라는 젊은 여성이 홀연히 나타나면서 과거라는 유령은 이제 손으로 만질 수 있게 세드앞에 다가선다.딸을 묻을 때 목사가 읽은 성경구절의 한 단어가 떠올라 세드는 딸아이의 묘비에 ‘BELOVED’라는 일곱 글자를 새기기로 하지 않았던가.
그 일곱 글자의 대가로 석공에게 10분 동안 몸을 제공하지 않았던가.20분이었다면 몇 글자를 더 새길 수 있었을 것이라는 후회를 홀로 삼켜오지 않았던가.
빌러비드는 살해당한 딸의 돌아온 모습이며 동시에 세드로부터 그 어머니로 이어지는 흑인 여성,아니 흑인 모두의 고통의 역사가 몸을 입어 환생한 것이었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경험은 노예로 살았던 흑인들의 공통의 경험이며 암울한 역사였다.역사가 몸을 입어 환생하였다는 것은 그들이 차라리 망각하려 했던 과거를 아프게 대면해야 함을 의미한다.인간일 수 없었던 자신들의 과거를 치욕스럽게 바라보는 일에서 벗어나 그 과거와 화해해야 함을 의미한다.
비록 그 역사를 그들에게 강제로 새겨 놓은 사람들은 백인들일지라도,그들의 육체에 세세하게 각인된 노예제도라는 잘못된 역사의 경험을 주체적으로 변모시켜야 하는 사람들은 바로 과거의 노예들,그리고 그들의 후손들인 것이다.이런 점에서 모리슨이 바라보는 노예제도는 과거의 역사이면서 동시에 아직 끝나지 않은,현실인,경험이다.
이러한 화해를 위한 세드의 여정은 빌러비드와의 독특한 관계를 포함한다. 빌러비드는 끊임없이 어머니의 사랑과 자신의 치유를 요구한다.세드와 빌러비드의 관계가 서로를 분리할 수 없을 만큼 밀착되는 만큼 세드는 점점 더 야위어가고 그녀의 진한 사랑을 자양분으로 삼듯 빌러비드는 점점 더 살이 오른다.빌러비드가 자양분으로 삼는 것은 세드의 역사만은 아니다.폴 D 역시 거부할 수 없는 빌러비드와의 관계를 피할 수 없는 짐처럼 느끼면서 빌러비드로 표현되는 자신들의 고통을 대면하게 된다.이들의 대면을 서술하는 부분은 세드 덴버 빌러비드의 목소리를 절묘하게 뒤섞으면서 이어진다.
이들은 처음엔 각각의 목소리로 자신들의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어느 순간에 이르면 이들의 목소리가 아름답게 뒤섞인다.특히 빌러비드의 이야기는 살해된 영아의 목소리인 동시에 중앙항로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수많은,성난 흑인의 목소리와 하나가 된다.
모리슨의 ‘내 사랑하는 자’는 노예제도라는 과거의 사실을 어떻게 바라볼 것이며 동시에 이 고통스런 실제 경험을 어떻게 언어로 풀어낼 것인가에 대한 탐구이기도 하다.그들의 고통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비로소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육체를 통해 과거와 화해한다.빌러비드를 받아들이듯 과거의 기억도 하나의 육체로 받아들인다.
작품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상처난 육체를 감싸안는다.백인=정신,흑인=육체로 이해되던 강요된 이분법을 부인하고 정신과 육체라는 부당한 이분법의 위계를 해체한다.육체에 새겨진 역사의 상처를 읽어내고 다시 씀으로써 모리슨은 자신과 공동체의 고통의 경험이 어떻게 언어를 입어 재현될 수 있는가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