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갈라 5,1-6; 루카 11,37-41 /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 2024.10.15
오늘은 10월 15일, 예수의 성녀 데레사 동정 학자 기념일입니다. 데레사 성녀가 수녀원에 입회할 16세기에 유럽은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여서, 왕정이 귀족 세력과의 경쟁관계 속에서 세력을 키워가고 루터로 인해 교회가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갈라진 혼란에다가, 남아메리카 대륙의 원주민을 정복함으로써 막대한 양의 은이 왕실로 유입되어 흥청망청 사치와 향락이 흘러 넘치는 분위기에서 극소수의 선각자들이 개인의 존엄성을 깨우치려던 인간 의식의 맹아기였습니다. 이 같은 문제의식에서 세르반테스가 ‘돈키호테’라는 작품을 쓴 때도 이 무렵이지요.
그런데도 가톨릭교회 내부의 분위기는 왕실의 호사스런 타락과 세상의 혼탁함에는 무관심한 채 그저 강화된 왕권에 힘입어 정복된 대륙에서 신자들을 늘리려는 교세 확장이 선교라고 생각하고 있었으며, 따라서 교회 쇄신의 모범이 되어야 할 수도원조차도 귀족화되어 있었습니다. 기부금을 내고 입회한 이들의 영향력이 수도원 분위기를 좌우하는가 하면, 귀족 입회자들은 하녀를 데리고 수도원으로 들어와서는 세속에서 귀족이 누리던 특권을 유지하려고 들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수도원을 개혁하기 전에 기강부터 바로잡기 위해서 데레사 성녀는 1562년에 규칙을 엄격하게 보완한 ‘맨발의 가르멜회’를 창설하였습니다. 그러자 기존의 회원들로부터 온갖 견제와 시샘이 시작되었습니다. 1579년에 교황청으로부터 승인을 받아 독립하기까지 18년 동안 데레사 성녀에게는 ‘영혼의 어둔 밤’이 지속되었습니다. 이 동안 데레사 성녀는 먼저 깊은 관상에서 우러나오는 기도로 시작하여 그 다음에 하느님의 신비 안에서 살아가는 삶과 활동으로 나아감으로써 궁극적으로는 기도와 활동으로 하느님과 합일하려는 신비 체험으로 교회를 쇄신하는 길이 세상을 복음화시키는 지름길이라는 하느님의 섭리를 깨달았습니다.
흔히 봉쇄수도원의 수도자에 대해서 세상을 멀리하려는 은둔자의 이미지로 바라보지만, 데레사 성녀는 ‘수도적 관상 생활과 사도적 활동의 조화와 일치’를 추구하였습니다. 십자가의 성 요한 사제가 데레사 성녀의 영적 여정과 투쟁에 동반해 준 것도 이 조화와 일치로 복음적 섭리와 교회적 신비를 벗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은총의 조건이었을 것입니다. 마흔 살에 이르러 하느님의 신비를 더욱 깊이 체험할 수 있었던 데레사 성녀는 기도와 활동이 조화와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는 목표를 세우고 이를 통한 영혼의 변화를 기록으로 남겨 놓았습니다.
후배 수도자들을 위해 기록해 놓은 영성 훈화라든가 주의 기도를 주해한 ‘완덕의 길’이라든가 또 신비체험에 이르는 인간의식의 일곱 단계를 기록해 놓은 ‘영혼의 성’ 같은 저술을 통해서 데레사 성녀는 당대는 물론 후대의 교회 그리스도인들이 하느님께 나아가기 위한 귀중한 지혜의 열쇠를 전해 주었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가르멜산에서 바알의 4백5십 명 거짓 예언자들과 대결하여 승리했던 엘리야 예언자의 영성으로 사회악을 대적하여 공동선으로 변화시키고 최고선에로 나아가기 위한 ‘관찰-판단-실천’의 지혜도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것이, 오늘날 가톨릭 사회교리의 방법론이 된 이 지혜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교부들에 의해 전면적으로 수용되고 난 후에, 이미 1622년에 시성된 데레사 성녀를 바오로 6세가 1970년에 교회학자로 선언한 이유입니다.
그리하여 데레사 성녀가 5백 년 전 스페인에서 몸과 마음으로 짊어져야 했던 십자가, 영혼의 어둠을 겪으면서 깨달은 진리, 엄청난 시대적 사회적 교회적 혼란 속에서 관상의 두레박으로 길어 올린 계시는 완덕에 이르는 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길은 통회하고 감사하며 찬미하는 관상의 기도로부터 시작해서, 자기 희생과 애덕의 실천과 통공으로 이루는 공동체의 관계를 바탕으로, 시대와 사회의 고통받는 이들과 연대하면서 사회악을 관찰하고 공동선을 판단하며 할 수 있는 사도직으로 지속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활동이었습니다.
사도 바오로도 말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을 위한 그분의 힘이 얼마나 엄청나게 큰지를 그분의 강한 능력의 활동으로 알게 되기를 빕니다. 또한 만물을 그리스도의 발 아래 굴복시키시고, 만물 위에 계신 그분을 교회에 머리로 주셨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 모든 면에서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그리스도로 충만해 있습니다.”(에페 1,19.22-23) 그리스도의 힘은 말씀의 힘이며 또한 성령의 능력이기도 합니다. 마치 교회사의 땅 속에 숨겨진 채 지하수처럼 흐르던 말씀의 힘과 성령의 능력이 15세기 스페인에서 대 데레사 성녀의 삶으로 분출된 것입니다.
그러니 5백 년 전에 성녀 대 데레사가 길어올린 계시의 샘물과, 또한 자신의 내적 투쟁에서 우러나온 내공과 수도회 개혁의 십자가로 검증된 영성을 시공을 초월해서 우리도 통공해야 합니다. 데레사 성녀의 내공과 영성은 우리도 받아들일 수 있도록 충분히 검증된 프레임과 패러다임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사회악을 관찰하고 그에 필요한 공동선이 무엇인지 판단하며 판단된 공동선 가운데에서 우리가 지속적으로 실천가능한 활동이 무엇인지를 살펴서 행동하는 사도직 원리입니다.
데레사 성녀가 선종한 후 일기장에서 발견된 메모가 있었습니다.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말지니…’로 시작되는 이 기도는 성녀의 전기에 수록되어 후세인들에게 남겨졌습니다. 독일의 한 본당에 파견되어 사도직을 수행하던 박경자 수녀(암브로시아·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는 독일 파견 당시 성녀의 기도문을 접하고 단숨에 매료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온 박 수녀는 김충희 수녀(호세아·영원한 도움의 성모 수도회)에게 아빌라의 성녀 데레사의 기도문에 곡을 붙여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김 수녀는 선율을 만들기 위해서 고민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저 하느님께서 불러 주시는 악상을 받아 적었을 뿐이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아무것도 너를’이라는 성가가 만들어졌습니다. 음반으로 발표할 계획은 없었는데, ‘아무것도 너를’은 수녀원 담장을 넘어 전국으로 퍼져 나갔습니다.<가톨릭신문, 2019.10.27 참조>
아무것도 너를
아무것도 너를 슬프게 하지 말며
아무것도 너를 혼란케 하지 말지니
모든 것은 다 지나가는 것 다 지나가는 것
오- 하느님은 불변하시니 인내함이 다 이기느니라
하느님을 소유한 사람은 모든 것을 소유한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네 소원이 무어뇨 네 두려움은 무엇이뇨
네 찾는 평화는 주님께만 있으리
주님 안에 숨은 영혼이 무얼 더 원하리
오- 사랑하고 사랑하여 주님께 모든 사랑 드리리
주님만을 바라는 사람은 모든 것을 차지할 것이니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