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6월 24일 개봉한 〈연평해전〉은 2002년 6월에 있었던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7월 9일 현재 이 영화는 관객 수 기준으로 국내 영화 1위를 기록하고 있다. |
영화에 대한 평도 좋다. 현재 개봉한 국내외 영화 중 평점이 가장 높다. 〈연평해전〉을 본 사람들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 남긴 평점은 평균 9.29점이다. 각종 예매 사이트에서도 평균 9점 이상을 기록하고 있다.
영화 〈연평해전〉은 ‘제2연평해전’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제2연평해전’은 2002년 6월 29일 오전 10시쯤 서해 연평도 인근의 북방한계선(NLL)을 남하한 북한 경비정이 우리 해군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에 85mm 함포 사격을 기습적으로 하면서 발발한 해상 전투다.
이 전투 과정에서 집중 포격을 당한 참수리 357호의 승무원 30명 중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 등 6명이 전사하고, 19명이 다쳤다. 참수리 357호는 침몰했다.
해전 당일은 한국과 터키가 월드컵 3·4위전을 치르는 날이었다. 온 나라가 축제 분위기였단 얘기다. 그 과정에서 우리 영토를 지키다 산화한 해군 장병들의 영웅담은 조명을 받지 못하다가 최근 개봉한 영화 〈연평해전〉을 통해 뒤늦게 ‘부활’한 셈이다.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의 절반은 20대다. 이들은 ▲‘제2연평해전’ 당시 우리 군 지휘부의 안이한 대응 ▲전투 다음 날 김대중 대통령의 방일과 월드컵 결승전 관람 등에 대해 처음 알았다는 반응을 보였다. 그래서인지 포털 사이트 네이버엔 영화 〈연평해전〉과 관련해 “몰랐다” “눈물이 멈추지 않았다” “잊지 않겠다” “분노한다”는 취지의 영화평이 많다.
이 영화가 흥행하자 언론은 ▲김대중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 ▲대통령의 전사자 영결식 불참 등을 지적했다.
그러자 김대중 전 대통령의 부인 이희호(李姬鎬) 여사가 이사장으로 있는 ‘김대중평화센터’가 “최근 〈연평해전〉 상영을 계기로 당시 상황에 대해 잘못 이해된 언론보도에 대해 명확한 사실 관계를 밝힌다”면서 보도자료를 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김대중 정부는 적절한 대응을 했고, 북한은 무력 도발에 대해 우리 정부에 공개 사과했다’는 것이다. 과연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이 사실일까.
金大中 정부, 海戰 직후에도 ‘햇볕정책’ 강조
김대중평화센터는 앞서 언급한 보도자료에서 ‘제2연평해전’ 당시 김대중 정부의 소극적인 대응에 대한 비판을 반박했다.
〈당일 김대중 대통령은 즉각 국가안전보장회의(NSC)를 소집하고, ‘강력한 대북 비난 성명’과 ‘확전 방지’ 및 ‘냉정한 대응’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 사건을 다룰 판문점 장성급 회담 소집을 북한에 요구했다. (중략) 이와 별도로 NSC는 북한에 공개 사과, 책임자 처벌, 재발 방지 보장을 요구했다.〉
2002년 6월 29일, 김대중 대통령은 전투 개시 후 3시간30분이 지난, 오후 1시30분쯤 NSC를 열었다. NSC 회의 결과는 “이번 사태와 관련한 모든 책임은 서해 NLL을 침범한 북한 측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북한에 대해 사과와 재발 방지를 촉구하는 등 단호히 대응하기로 했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를 발표하던 임성준(任晟準) 당시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은 “햇볕정책은 계속 유지되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3년 전 교전 사태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햇볕정책을 유지했다”고 답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임 수석은 다음 날 또 “3년 전 연평해전이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남북관계를 증진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을 펴 나갔고, 그 결과 1년 후에 남북정상회담이 있었다. 굳건한 안보태세의 토대 위에서 대북정책을 펴 나간다는 데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통일부 역시 해전 당일 오후 “민간 차원의 남북교류 협력은 예정대로 추진하기로 했다”면서 금강산 관광과 우리 측 민간단체의 방북과 대북지원을 계속 추진하겠다고 밝혔다.
김대중 대통령도 7월 2일 “전쟁을 하지 않는 한 한반도에서 평화를 증진시키려는 노력을 계속해야 한다”며 햇볕정책 기조를 유지하겠다는 뜻을 분명하게 밝혔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김대중 정부가 북한에 ▲공식 사과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 등 납득할 만한 조치를 취하라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김대중 정부가 북한의 유의미한 조치를 이끌어내기 위해선 실행 여부를 떠나 ‘대북 지원 중지’ ‘금강산 관광 중단’ 등을 남북관계의 ‘지렛대’로 삼았어야 했다. 실제 그런 노력도 해야 했다. 하지만 김대중 정부는 애초부터 이를 포기한 채 말로만 사과를 요구했다. 오히려 ‘햇볕정책’ 기조 유지 등 ‘유화’ 제스처를 강조했다. 상반된 두 개의 메시지를 동시에 북에 전달한 셈이다. 북한은 김대중 정부의 의도를 금세 알아챘을 것이다.
우리 해군 장병 25명이 죽거나 다친 전투 다음 날인 6월 30일 강원도 속초항에서 금강산 관광객 515명을 태운 쾌속선 설봉호가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처럼 떠난 것 역시 ‘연평해전’을 크게 문제 삼지 않겠다는 또 하나의 상징적 메시지로 북한은 받아들였을 것이다.
“대통령 日本行은 지금도 이해 안 돼”
‘제2연평해전’ 다음 날인, 2002년 6월 30일 월드컵 결승전 관람 등을 위해 일본에 간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도쿄 하네다 공항에 마중 나온 가와구치 요리코 일본 외무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
《연합뉴스》 보도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오전 일본으로 출국하면서 “공동개최국의 대통령으로서 월드컵의 성공적인 마무리를 위해 결승전이 열리는 일본으로 간다”면서 “일본의 총리 등 지도자들과 대화를 갖고, 월드컵으로 한 단계 높아진 한·일관계의 유지·발전에 대해서도 논의하고자 한다”고 말했다. 이에 따르면 김대중 대통령은 이른바 ‘월드컵 외교’에 더 가치를 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방일 첫날인 2002년 6월 30일 저녁 김대중 대통령은 월드컵 결승전을 관람했다. 이튿날인 7월 1일엔 고이즈미 준이치로(小泉純一郞) 일본 총리와 정상회담을 했다.
7월 1일 《연합뉴스》는 김대중 대통령과 고이즈미 일본 총리가 ▲스포츠·청소년 교류 확대 ▲역사공동연구위원회 운영 ▲한일 FTA ▲한일 고위경제협의회 운영 ▲경제 분야 협력기반 공고화 방안 등을 논의했다고 보도했다. 이 안건들이 ‘제2연평해전’과 그 후속 대응보다 더 중요하고 시급한 것이었을까. ‘제2연평해전’ 전사자 유족들은 김대중 대통령을 다음과 같이 비판했다.
〈고(故) 박동혁 병장의 아버지 박남준씨는 “부상당한 아들의 면회를 기다리며 TV를 보니 대통령이 일본에서 박수를 치고 있었다”며 “(출국한) 성남비행장에서 국군수도병원까지 몇 분도 걸리지 않는데…”라고 말했다. 윤영하 소령의 아버지 윤두호(68)씨는 “서해에서 전투가 벌어진 이후에 대통령이 출국한 것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다른 나라 같았으면 외국에 있던 대통령도 급히 귀국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 2010년 5월 25일자 《동아일보》
6월 29일자 《문화일보》에 따르면 제2연평해전 당시 국군수도병원 군의관으로 박동혁 병장 등 부상자들을 치료했던 강원대 의대 이봉기 심장내과 교수도 “당시 군 통수권자인 김대중 전 대통령은 월드컵 폐막식 참석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면서 “나라를 위해 싸우다 죽은 고귀한 희생이 자칫 ‘개죽음’이 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 같은 군인으로서 너무나 비참했고 국가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고 말했다.
그러나 김대중평화센터 측은 이와 관련해 “당시 상황을 잘 알지 못한 데서 오는 오해”라며 반박했다. 다음은 7월 6일, 《한겨레》가 보도한 기사 중 일부다.
〈당시 청와대 공보기획비서관을 맡았던 최경환 김대중평화센터 공보실장은 5일 ‘한겨레’와의 통화에서 “한·일 정상들은 당시 공동 개최한 월드컵 개·폐막식에 교차로 참석하기로 돼 있었던 데다, 이를 계기로 한·일 정상회담도 예정돼 있었기에 방일 일정을 취소할 수는 없었다”고 말했다. 또 국제적 이목이 쏠려 있는 월드컵 폐막식에 김 전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다면, 국제사회에 한반도의 안보 상황에 대해 지나치게 부정적인 인상을 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했다고 덧붙였다.〉
金大中센터, “당시 총리들 영결식 보냈다” 거짓 주장
김대중평화센터는 김대중 당시 대통령이 2002년 7월 1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이한동 총리를 보냈다고 주장했지만, 이 총리는 이날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
〈(김대중 대통령은) 북한과의 전투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영결식이나 장례식에 참석하지 않는 관례에 따라 영결식에는 참석하지 않았지만, 당시 총리들(이한동 총리, 장상 총리서리, 장대환 총리서리, 김석수 총리)을 전사자들의 영결식장에 참석하도록 했다. 대통령이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는 관례는 당포함 사건(1967년 1월)이 발생했던 박정희 정부 때와 강릉 무장공비 사건(1996년 9월)이 발생한 김영삼 정부 시절에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른 부분이 많다. 이한동(李漢東) 당시 국무총리는 ‘제2연평해전’ 전사자(윤영하 소령, 조천형·황도현·서후원 중사)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 김동신 국방부장관도 가지 않았다. 이남신(李南信) 합동참모본부 의장도 없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한국일보》의 기사다.
〈서해교전 전사장병 합동영결식에 이한동(李漢東) 국무총리와 김동신(金東信) 국방장관을 비롯한 국무위원, 정치인들이 전혀 참석지 않아 유족들의 분노를 샀다. 영결식에 모습을 드러낸 정부·군 최고위직은 장정길 해군참모총장이었으며, 이 밖에 일반 조문객 중에서는 전두환(全斗煥) 전 대통령과 손학규(孫鶴圭) 경기지사, 예비역 군 장성 정도만 눈에 띄었다. 고(故) 황도현 중사의 친구 이재민(25)씨 등 유족과 친지들은 “이번 희생의 책임을 나눠서 져야 하는 정부 인사들이 어떻게 한 사람도 얼굴을 비치지 않을 수 있느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 2002년 7월 2일자
같은 날, 《연합뉴스》에 따르면 이한동 당시 총리 측은 ‘영결식 불참 비판’에 대해 다음과 같이 해명했다.
‘張裳 총리서리’도 영결식 간 적 없어
‘제2연평해전’ 당시 전사한 윤영하 소령, 한상국 상사, 조천형ㆍ황도현ㆍ서후원 중사, 박동혁 병장.(왼쪽부터) |
국방부도 “영결식이 해군장이어서 장례위원장인 해군참모총장의 상관은 참석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주장했다.(그러나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사건 당시 이수성(李壽成) 총리와 이양호(李養鎬) 국방부장관은 야전군사령부장(葬)으로 치른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했었다.)
‘장상(張裳) 총리서리’는 재임 기간으로 봤을 때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총리서리’ 자격으로 간 일이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2년 7월 11일 자신의 아들들이 개입한 권력형 비리, 북한의 무력 도발 등으로 인해 등 돌린 민심을 수습하려고, 개각을 하면서 장상 당시 이화여대 총장을 총리서리로 지명했다.
장상 총리서리는 ▲위장 전입 및 땅 투기 ▲학력 위조 ▲아들의 국적 등 각종 의혹 때문에 국회의 임명 동의를 받지 못하고, 재임 20일 만인 2002년 7월 31일 총리서리직에서 물러났다. 따라서 8월 11일에 있었던 한상국 상사의 영결식 때는 장대환(張大煥) 당시 총리서리가 참석했다.
북한과의 전투 과정에서 숨진 전사자들의 영결식이나 장례식에 대통령은 참석하지 않는 게 관례였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떨어진다. 나라를 지키다 목숨을 잃은 장병들의 넋을 기리는 데 국군 통수권자가 불참하는 게 관례라고 하는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얘기다. 김대중평화센터가 주장하는 것처럼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은 정말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정희 대통령의 경우부터 살펴보기로 한다. 동해 북방한계선 인근에서 명태잡이 어선의 월경을 감시하던 당포함(56함)이 북한 동굴 포대의 공격을 받아 침몰한 날은 1967년 1월 19일이다. 사건 직후, 박정희 당시 대통령은 국가안보회의를 소집하고, 대응책을 논의했다. 이튿날 아침에도 국무회의에서 ‘모종의 대책’을 협의했다. 23일엔 부인 육영수 여사와 함께 서울 대방동 해군병원을 찾아 당포함 함장 등 10명을 1시간 동안 위로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같은 달 25일엔 이후락 비서실장을 시켜 경남 진해 해군병원에 입원한 당포함 전상자를 위문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당포함 전사자의 영결식은 1월 27일 오후 2시 진해 해군 신병훈련소 연병장에서 해군장으로 치렀다. 당시 이 자리엔 김성은(金聖恩) 국방부장관, 박동묘(朴東昴) 농림부장관, 장창국(張昌國) 합참의장, 김영관(金榮寬) 해군참모총장과 해군 장병 5000여 명, 유족과 진해 시민 6000여 명이 모여 전사자들의 명복을 빌었다. 이날 박정희 대통령은 도정 청취 차원에서 경북을 방문한 다음 충북 청주로 이동해 충북지사로부터 도정 관련 브리핑을 받았다.
金泳三 대통령 때는 직접 조문
김영삼 대통령 재임 때인 1996년 9월 18일, 새벽 강원도 강릉시 강동면의 해안도로를 달리던 택시 기사는 거동 수상자들과 해안에 좌초한 선박을 발견하고 이를 경찰에 신고했다. 군 당국이 확인한 결과 이 선박은 북한의 잠수함이었다. 이에 따라 우리 군은 49일 동안 육지에 상륙한 무장간첩을 추적해 총 15명 중 1명은 생포, 13명은 사살했다. 나머지 무장간첩 1명은 도주했다. 소탕작전 과정에서 전사한 우리 군 장병은 총 14명이다.
이 중 이병희 상사, 강정영 병장, 송관종 상병(사후 1계급 추서, 이하 동일)의 영결식을 1996년 9월 25일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에서 진행했다. 당시 이 자리엔 이수성 총리, 이양호 국방부장관, 김영귀 국회 국방위원장, 윤용남 육군참모총장 등을 비롯해 1000여 명이 참석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이보다 이틀 전인 9월 23일 합동분향소를 직접 찾아 유족들을 위로했다.
같은 해 11월 7일엔 오영안 준장, 서형원 소령, 강민성 병장 영결식이 서울 강서구 등촌동 국군수도병원에서 있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그 전날 저녁에 분향소를 찾아 세 전사자 영정에 헌화했다. 10월 12일, 11월 15일에 영결식을 치른 전사자들과 관련해선 김영삼 대통령이 조문했다거나, 영결식에 참석했다는 내용을 전하는 기사는 없었다.
앞서 살핀 내용을 요약하면 박정희 전 대통령은 영결식에만 불참했을 뿐 당포함 사건 관련 부상병들을 여러 차례 위문하고, 금일봉을 전달했다. 김영삼 전 대통령의 경우엔 이수성 총리 등이 대통령을 대신해서 영결식에 참석토록 했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전후 맥락을 무시한 채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도 영결식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이유를 내세우면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건 관례에 따른 것”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김영삼 정부 당시 3년 동안 청와대 의전비서관과 의전수석을 지낸 김석우 21세기국가발전연구원 원장도 “그런 관례는 처음 듣는다”면서 “책임 회피성 발언이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결국 해당 보도자료를 작성한 박한수 김대중평화센터 기획실장에게 관례 유무에 대해 물었다. 다음은 그의 말이다.
“그전 대통령들은 다 (전사자 영결식에) 참석하셨답니까? 당포함 사건이나 강릉 무장공비 사건 때 대통령들이 영결식에 참석했느냐고요. 김영삼 대통령, 참석하셨나요? 안 했죠? 그런 게 관례가 되는 것 아닌가요? 우리 대통령은 거기 참석해야 되고, YS 대통령은 참석 안 해도 되고. 그런 법은 없잖아요?”
—그 두 건만을 놓고, 관례였다고 얘기할 수 있습니까.
“그럼 뭐라고 해야 하죠? 제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제가 찾은 건 2건인데….”
—이번에 보도자료를 작성하면서 그 근거를 찾았다는 얘기입니까.
“네, 네.”
박 실장 발언에 따르면 김대중평화센터가 박정희, 김영삼 전 대통령이 재임 시절 북한 도발에 의해 사망한 장병 영결식에 가지 않았단 사실을 확인한 건 최근이다. 따라서 당시 김대중 대통령이 ‘관례’에 따라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았다고 얘기하는 건 앞뒤가 맞지 않는다.
北韓, “제2연평해전은 우연한 충돌… 南北 쌍방의 책임”
‘제2연평해전’ 당시 해군 2함대 소속 참수리급 고속정 357호는 북한 경비정의 집중 포격을 받고 침몰했다가 53일 만에 인양됐다. 선체의 탄흔들은 당시 전투가 치열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다. |
〈2002년 7월 20일 북한이 남북 대화를 제의하자, 김대중 정부는 서해도발 사건의 공개적인 사과, 재발 방지 약속, 책임자 처벌 등을 요구했고, 북한은 7월 25일 남한의 통일부장관 앞으로 전통문을 보내 공개 사과했다. 북한이 우리 정부에 공개적으로 사과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다.〉
실제 북한은 2002년 7월 25일 “얼마전 서해 해상에서 우발적으로 발생한 무력 충돌 사건에 대해 유감스럽게 생각하면서 북남 쌍방은 앞으로 이러한 사건이 재발되지 않도록 공동의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간주한다”는 내용의 전화통지문을 우리 정부에 보냈다.
북한은 전통문에서 “우연히 서로 싸운 것”이라면서 우리 측에 책임을 전가했지만, ‘제2연평해전’은 북한의 치밀한 사전 계획과 그에 따른 선제 집중 포격 때문에 시작된 전투다. 북한이 계획적 도발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당시 군 지휘부도 사전에 첩보를 통해 알고 있었다.
제2연평해전 직전 대북통신감청부대는 ‘해상 도발 계획’이 담긴 북한군 교신 기록을 감청하고, 이를 토대로 북한군의 결정적 도발 정보를 수차례 보고했지만, 당시 군 수뇌부는 이를 묵살했다. ‘제2연평해전’ 이후 북한의 도발 관련 첩보를 보고한 감청부대장 한철용(韓哲鏞) 소장은 오히려 ‘정보 지원 부족’을 이유로 징계를 받고, 군복을 벗었다. (《월간조선》 2012년 7월호 참조)
북한의 계획적 도발임을 알면서도, 우리 정부는 ‘우발적 충돌’이란 표현이 담긴 북한의 전통문을 즉각 ‘사과’라고 인정했다.
김형기(金炯基) 당시 통일부 차관은 전통문 수령 후 긴급 기자회견을 갖고 “북측이 이번 전통문에서 서해 사태에 대해 사과를 표시한 것으로 간주한다”면서 “이를 계기로 헝클어진 남북대화를 장관급 회담부터 다시 복원해 나갈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긍정적인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당초 김대중 대통령이 북한에 요구한 ‘책임자 처벌’과 ‘재발 방지 보장’에 대해선 일언반구(一言半句)도 없었지만, 김대중 정부는 “대단히 긍정적”이라고 호평했다.
한편 북한의 전통문 내용을 ‘사과’로 해석할 수 있다고 해도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은 사실과 다르다. 김영삼 정부는 북한으로부터 이보다 더 높은 수위의 ‘사과’를 받은 일이 있기 때문이다.
1996년 9월,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북한은 인민무력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정상적 훈련 중 좌초됐으며 잠수함과 승조원을 무조건 송환할 것”을 요구했다. 하지만 3개월 뒤인 12월엔 조선중앙통신 등 매체를 통해 “막심한 인명피해를 초래한 잠수함 사건에 대하여 ‘깊은 유감’을 표시한다”고 밝혔다.
왜 金大中 대통령의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 불참’만 비판받을까?
종합하면 김대중평화센터의 주장 중 상당 부분은 사실과 다르거나 근거가 빈약하다. 그래서였을까. 결국엔 전임 대통령들을 끌어들여 김대중 전 대통령이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걸 ‘관례’였다고 주장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 당포함 사건 때 전사한 장병들의 영결식에 불참한 것, 김영삼 전 대통령이 강릉 잠수함 침투 사건 당시 교전 중 사망한 군인들의 영결식에 가지 않은 것 역시 비판 받을 만하다. 그러나 두 전임 대통령 사례를 든다고 해도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영결식 불참을 정당화할 순 없다. 김대중 대통령은 두 전임 대통령이 한 다른 일조차 전혀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김대중평화센터는 이런 식으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두둔하기 전에, 국민들이 ‘전사자 영결식’에 불참한 두 전임 대통령에 대해선 별다른 지적을 하지 않는지, ‘제2연평해전 전사자 영결식’에 가지 않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겐 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는지부터 곰곰이 생각해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