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초반 군사정권이 국민들의 눈과 귀를 막을려고 프로축구와 프로야구를 출범시킨것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떻게 축구와 야구를 이용할려고 했는지는 모르시는 분들이 많은데
당시 군사정권이 생각하기에 상대적으로 경기시간이 길고 매일 할 수 있는 야구는 국내야구
즉 프로야구를 중점적으로 밀어주기로 하고 축구는 국내축구 즉 프로축구보다는 국민들의
폭발적인 관심과 흡인력이 있는 국가대표팀의 경기력 향상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 결과 프로야구는 대도시 연고지를 선점시켜주고 지역감정을 이용해서 흥행에 성공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축구는 프로축구 활성화 보다는 당시 국가적 행사인 86 아시안 게임과
88 올림픽 게임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도록 전폭적인 지원을 해 주고 그리고 국내에서 개최되던
대통령배 국제축구대회에 많은 해외팀들을 초청해서 대회를 열도록 지원해 주었습니다.
아래글을 보시면 80년대에도 축구인들이 연고지 정착을 위해 노력했으나 정부의 친야구정책으로
인해 실패를 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여기 알싸에 현대가 강원도 광역 연고 시절일때 팬이었던 쉬메릭15기님처럼
80년대에도 연고지 개념을 가지고 보신 분들이 소수이지만 충분히 있을거라고 생각됩니다.
저는 91년도부터 프로축구를 관심있게 봤었고 그 당시 프로축구에 관련된 정보를 알 수 있는 곳이
스포츠서울,일간스포츠,스포츠조선 이렇게 스포츠 신문 3곳이 전부였습니다.
이때는 정기적으로 사서 보지는 못해서 기억이 끊기는 부분이 있는데
제가 94년부터는 PC통신을 해서 스포츠 신문 3개의 프로축구 기사들을 전부 몇번이고 읽을 수 있어서
94년도 프로축구부터는 거의 모든걸 기억하고 있다고 자부합니다.
제가 기억에 남는게 94년 시즌 개막전 관련 스포츠 신문 뉴스에서 팀별로 연예인의 응원 메시지 코너가 있었는데
유공은 MC 박세민씨가 서울사람으로 자기는 유공 팬이라고 유공이 이번 시즌 우승하길 바란다는 기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95년에 월드컵 유치 때문에 축구 열기를 높인다고 평일 저녁 황금시간대에 차범근과 이윤철 MC가 나와서 진행하던
MBC 축구 프로그램이 있었습니다.
지금의 비바 K리그 같은 프로그램인데 당시 프로축구 하이라이트 그리고 독일 분데스리가 하이라이트
편집해서 보여줬는데 이 프로그램 녹화 테이프가 아직도 있습니가.
그리고 그 당시 녹화한 프로축구 경기들도 상당수 아직 있습니다.
시간이 된다면 파일로 바꾸어서 축동방에 올리고 싶네요.
아무튼 이때 방송에서 했던 축구해설자의 멘트들이나 관중들의 모습을 보면 지역 연고 개념이
없는 개막장 프로축구가 절대 아니었습니다.
당시 구단 유니폼 보면 전부 소매에 연고지를 표시하고 있었고 유랑극단처럼 타도시에서
경기는 했지만 자신의 연고지에서 뿌리내릴려는 노력 또한 계속하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서 LG,유공,일화가 동대문 운동장을 전부 사용하기 때문에
도리어 흥미가 감소한다고 이걸 해소할 방법으로
강북 동대문 운동장, 강남 잠실 종합 운동장, 강서 목동 구장 이렇게
서울내에서도 연고지를 배분해서 연고 개념을 강화하자는 얘기가 꾸준히 나왔었습니다.
그 당시 이렇게만 됐으면 지금 서울이 런던 부럽지 않은 축구도시가 됐을텐데 이게
서울 공동화 정책이라는 졸속행정으로 한순간에 날아가버린거죠.
아무튼 FC 서울의 연고 이전을 비판하더라도 96년 이전에 프로축구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그 당시
프로축구는 실업축구와 별반 다름 없고 그렇기 때문에 96년 연고 이전은 아무렇지도 않다고 주장하는
얘기는 안 나왔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싸커월드 2005년에 올라온 글이고 80년대 프로축구 연고지 개념이 정착하지 못한 이유입니다.
제목: 프로축구 연고지 이야기
작성자 : 윤유진
작성일 : 2005/03/01 01:08
서울의 세팀이 지방으로 연고지를 옮길 때 연고지정착이 안돼있었기 때문에 안양의 연고지과 상황이 다르다는고
주장하는데 이건 프로축구를 지켜보지 않은 뭘 모르는 주장입니다.
전 83년 프로축구 출범 원년부터 프로축구를 지켜본 사람이고 위 주장은 전혀 사실에 부합되지 않음을 밝힙니다.
프로축구가 출범할 때 연고지 없이 출범한 것은 아닙니다. 프로야구처럼 광역연고제를 채택했었고 단지 연고지에서
경기를 갖지 않고 유랑극단처럼 떠돌아 다녔을 뿐입니다. 할렐루야는 서울, 유공은 인천경기, 럭키금성은 충청, 국민은행은 호남, 포철은 대구경북, 대우는 부산경남 이렇게 프로팀들이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럼 왜 연고지를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연고지에서 경기를 갖지 않고 유랑극단처럼 전국을 떠돌아 다녔냐하면 바로 당시 체육정책을 담당하고 있던 행정명령 때문이지 당시 축구인들이 연고지개념에 대해 몰랐거나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당시 체육정책을 담당하던 곳이 문화공보부라는 부서였는데 바로 이들이 누구냐하면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자들입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MBC사장을 지낸 문모씨가 문공부장관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나중에 KBO총재자리를 역임하죠. 뭐 다들 아시겠지만 프로야구는 야구하는 명문고출신으로 학창시절에 고교야구에 빠져 야구팬으로 성장한 정치인,고위관료,언론인들이 야구인,야구협회를 무시하고 독자적으로 출범시킵니다.
그리고 이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당시 체육정책을 담당하던 문공부,청와대의 고위관료들이 프로축구가 연고지에서 경기를 갖지 못하도록 했다는 겁니다. 그 이유가 프로야구를 먼저 1년 시행해본 결과 연고지내에서의 경기가 지역감정을 자극한다는 것이였습니다. 그래서 프로축구는 연고지에서 경기하지 말라고 말도 안되는 허무맹랑한 행정명령을 내렸다는 겁니다. 그런데 웃기는 것은 그 행정명령이 프로축구에만 내려졌다는 것입니다. 프로야구는 연고지내에서의 경기가 계속 허락되었습니다. 뻔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들 프로야구를 출범시킨 야구팬들인 체육정책담당 고위관료, 공무원들의 야구밀어주기였죠. 즉 프로축구가 연고지에서 경기를 갖지못하고 떠돌아 다닐 때 프로야구는 연고지에서 경기를 하면서 연고지정착을 성공시킴으로써 프로야구가 경쟁스포츠인 프로축구를 누르고 안정적으로 인기스포츠로 정착하는데 도움을 주려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프로축구는 출범부터 야구계의 견제에 의해 출발부터 첫단추가 잘못 끼워졌던 것입니다. 그러니 연고지내에서 경기를 할 수 없었던 프로축구는 연고지정착에 실패해 출범초 1년반동안 활활 타오르던 열기를 이어나가지 못하고 프로야구에게 최고인기 프로스포츠의 자리를 빼앗기고 텅빈 경기장에서 경기를 갖는 신세로 떨어지게 됐습니다.
그러다가 80년대 말에서 가야 정부는 프로축구가 연고지내에서 경기를 갖는 것을 허락합니다. 왜냐하면 벌써 프로야구는 벌써 연고지 주민들에게 열화와 같은 성화를 받고 있는 연고지정착에 성공해 프로축구가 별로 위협적인 경쟁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판단이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프로축구는 연고지내에서 경기를 갖기 시작했는데 인천,경기지역을 연고지를 삼고있었던 유공은 인천에서, 강원지역을 연고지로 삼고있었던 현대는 주로 춘천,강릉에서 충청지역을 연고지로 삼고있었던 럭키금성은 대전에서, 대구경북를 연고지를 삼고있었던 포철은 대구에서, 부산경남을 연고지로 삼고있었던 대우는 부산에서 경기를 갖기 시작합니다. 그런데 이 대도시들은 벌써 프로야구가 시장을 장악한 상태였고 아무리 기를 써도 관중이 모이질 않았습니다. 그래서 다시 몇몇 팀들은 연고지내의 다른 도시에서 주로 경기를 갖기 시작했는데 럭키금성이 대전대신 청주, 포철이 대구대신 포항에서 경기를 주로 갖었습니다.
그리고 90년대초에 들어와 프로축구의 흥행을 위해 각 프로축구팀들이 연고지변경을 모색하기 시작했고 그래서 일화의 창단과 함께 유공과 엘지(럭키금성)은 서울로, 현대는 강원도에서 자신의 연고지역인 울산으로, 포철 역시 자신의 연고지역인 포항으로 아예 연고지를 옮기게 됩니다.
위에서 보듯이 서울 세팀이 지방으로 연고지를 옮긴 96년 전부터 프로축구팀들이 연고지 정착을 위해 노력을 했었고 그 가시적인 성과가 일어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서울에서도 일화,유공,엘지를 자신의 팀으로 인식하는 팬들이 대거 형성돼있었고 포항에서, 울산에서 연고의식이 벌써 형성돼있었어요.
그러니 96년 서울의 세팀이 연고지를 옮길 때는 연고지정착이 되지 않았을 때라 괜찮았다른 논리는 프로축구를 보지않은 자의 어불성설입니다. 서울 세팀의 연고지이전과 안양의 연고지 이전은 상황이 전혀 다르지 않습니다.
제목: 내가 소설이나 쓰는 한심한 사람인줄 아는가
작성자 : 윤유진
작성일 : 2005/03/01 03:58
MBC의 사장을 지낸 이모사장의 (당시는 사장이 아니라 이사급 간부) 아들이 내 절친한 친구다. 그의 부인, 즉 내 친구의 어머니와 나의 어머니가 같은 교회를 다녀서 친구사이였고 약사이셨던 그분은 숭곡국민학교 바로 옆에서 약국을 경영하고 있었고 약국과 집을 겸하고 있던 건물이 바로 내가 살던 집에서 몇발자국 떨어진 곳에 위치해 있어서 제집같이 들락거렸다.
그래서 MBC고위간부, 연예인들이 내 그 친구집에 자주 내왕했으면 프로야구단 MBC청룡을 운영하던 방송사가 어떻게 프로야구 출범에 깊이 관여했고 정부고위관리자들이 프로야구를 어떻게 하면 인기있게 만들려고 노력했는지 그의 집을 방문하면서 MBC고위관계자들의 회의를 우연히 엿들으면서 알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의 대화내용에서 프로야구를 살리기위해 프로축구의 견제가 필요하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었다.
삭제된 댓글 입니다.
그 얘기 적어놨는데요. 차붐을 빼고 그 프로그램 얘기를 못하죠.
정말 궁금한 게 96년도에 연고에 대한 개념이 제대로 사람들의 뇌리에 박혀 있었다면 왜 안양, 부천, 성남으로의 이전 시에는 패륜이라는 소리가 안 나왔을까요?? 그 당시 연고이전에 대한 비판이 그 시절에 있지 않았다는 건 그 때의 연고지정책이 제대로 시행되지 못했다는 증거가 아닐까요??
물론 지금 보다는 덜했겠죠.ㅎㅎ 근데 가장 큰 이유는 인터넷이 없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 이전이란게 99년이나 00년에 나왔으면 아마 난리 났을겁니다.
연고 이전을 시킨 주체가 연맹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저는 작금의 연고 이전 사태의 가장 큰 책임자는 연맹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당시 럭키금성팬들이 96년에 안양에 가서 항의했고 그리고 97년인가 안양경기장 보수 때문에 동대문 운동장에서 경기를 했을때 왔었을때 안양 서포터와 서울축구팬들 사이에 마찰도 있었습니다.
연고지 개념이 하루아침에 생기는것도 아닌데 그러한 것들이 생기고 형성되기 전에 연맹에 의해서 쫓겨난거죠. 그당시 2000년도 때처럼 시민운동이 활발하고 자유로웠던 시기도 아니었고 사람들이 모이고 규합하는데 한계가 따랐죠. 그시절에 연고지 의식에 대해서 어땟는지 저역시 정확하게 알지 못하지만 패륜소리가 안나왔다고 해서 그당시 연고의식이 없었다고 볼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단지 목소리를 낼 힘이 없었던 거죠.
참고로 조직적인 서포터즈 문화가 막 생기기 시작한게 95년즈음이었고 98년쯤에가서야 제대로된 조직적 응원이 보편화되었고 서포터즈들이 골대뒤에 앉는것이 정례화 된건 그보다 더 뒤의 일입니다. 팬들의 조직이 제대로 없었단건 당시 팬들은 이런 상황에대해 어쩔수없이 수긍할수밖에 없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그리고 정확히 말씀 드리면 당시 프로축구가 인기가 많이 떨어지니까 저도 당시 어디에 프로축구 보러 간다고 사람들에게 당당하게 말하지 못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좀 특이한 사람 취급 받는거 같기도 하고 무슨말인지 대충 이해가 가실 겁니다. 이런 상황에서 서포터스나 아니면 인터넷으로 사람들이 합쳐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그런것이라도 있었으면 좀 나았을텐데 이런것마저 없으니 연고 개념을 가진 사람들이라도 개별적으로 목소리를 내기가 어려웠던 거죠.
추가로 프로축구가 정말 대단하다고 할수있는것은 지금과같은 팬문화가 자발적으로 이뤄지고 조직되어서 여기까지 왔다는점입니다. 물론 90년대 당시에 후발주자였던 수원이나 전남의경우 다른양상이었을수 있지만 구단이 직접 연회비를 받고 조직적인 응원을 주도해나가는 농구나 야구의 서포터즈란 단어의 개념을 보면 완전히 축구와는 다른세상임을 느낄수있죠. 사실 지금도 프로축구보러 전국을 떠돌아다니는 저를보고 희귀종 취급하는사람들이 대다수입니다. 단순히 '축구장에 간다' 하나만으로 '광팬' 이 되버리는게 한국이니 말입니다.
문제는 이런 얘기는 서울팬만 관심있어하는듯..;;;