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채동석동호회 단톡방에서]
[장영봉회장님제공]
1.감사함을 잊지 말자
2. ♡ "약속(約束)" ♡
3. 아름다움 이란?
________________
1.감사함을 잊지 말자
영국의 여왕이 나라에 큰 공을 세운 이들에게
영예의 십자 훈장을 수여할 때의 일이라고 합니다.
훈장을 받기 위해 모인 사람 중에는 전쟁 중에
큰 부상을 당해 팔과 다리를 모두 잃은 병사도 있었습니다.
훈장을 달아주던 여왕이 병사 앞에 섰습니다. 그 병사를 보는 순간 여왕은 눈물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나라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병사의 모습이 큰 감동으로 와닿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여왕은 훈장을 다는 것을 멈춘 채
뒤로 돌아서서 한참이나 눈물을 닦았습니다.
얼마 후 여왕을 통해 훈장을 목에 건 병사는 자신을 위해 눈물을 흘린 여왕을 위로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조국을 위해서라면 다시 한번
제 몸을 바쳐서 싸우겠습니다."
병사를 감동하게 한 것은 훈장이 아니라 여왕의 눈물이었던 것이었습니다.
훈장의 의미도 소중했겠지만, 자신의 희생을 고귀하게 받아주는 여왕의 눈물이 병사로 하여금 자신의 희생이 헛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해 주었습니다.
잘 자고 잘 먹고 열심히 일도 하며 하루를 시작하고 마무리합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잘 알지 못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평온한 일상을 계속 살아가는지...
나의 하루는 내가 잘 보내서 생긴 하루가 아니라 누군가의 노력으로 보내는 하루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 관련 명언 / 장 마시외
감사하는 것은 우리 마음 속에 있는 좋은 것을 기억하는 것이다.
2. 약속(約束)
숨을 쉬고 사는 수 많은 동물(動物) 중
인간(人間)만 "약속(約束)" 을 하고 산다고 합니다.
사람 다음 지능(知能)을 가졌다는 개나 원숭이도
미리 약속 하고 애인(愛人)을 만나러 가지 않습니다.
인간(人間)이 사는데 매우 중요(重要)한 두 가지 요소(要素)가 있는데,
"먹는 것(食)" 과 "믿는 것(信)".
먹는 것과 믿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중요(重要)할까요?
대부분(大部分)은 식(食)이라 생각할 것입니다.
그러나 공자(孔子)는 신(信)을 앞 세웠습니다.
믿음이 깨어지면 그 사회(社會)의 근간(根幹)이 흔들립니다.
우리는 약속(約束)을 지키고 세상(世上)을 떠난 한 "여가수(女歌手)" 의 이야기를 돌아보면서 믿음의 중요성(重要性)을 살펴 보겠습니다.
"이 애리수" 라는 가수(歌手)가 있었습니다. 1928년 단성사에서 "황성옛터" 를 처음 불렀습니다.
여러 곡(曲)을 히트 시키며 인기를 한 몸에 받은 미모(美貌)의 가수(歌手) 였습니다.
한참 인기(人氣) 절정(絶頂)에 있을 때 그녀는 갑자기 자취를 감추고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녀가 자취를 감추자 사망설(死亡說)까지 돌았습니다.
그러다가 그녀에 대한 기억(記憶)은 세상(世上)에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그 사연(事緣) 뒤에 숨어있는 내막은 "약속" 이라는 두 글자에 있었습니다.
그녀는 배00씨라는 연세대생과 사랑에 빠져서 결혼(結婚)을 약속 하고 시부모(媤父母) 앞에 섰는데 시댁(媤宅)에서는 가수라는 이유(理由)로 결혼(結婚)을 완강(頑强)하게 반대(反對)하였습니다.
자살소동(自殺騷動)까지 벌였지만 시댁의 고집(固執)을 꺾을 수는 없었습니다.
마침내 그녀는 시아버지와 굳은 "약속" 을 하고 나서야 결혼을 허락(許諾)받을 수 있었습니다.
가수라는 사실(事實)을 숨기고, 향후(向後) 가수(歌手) 활동(活動)을 하지 않겠다 는 약속이었습니다.
결혼 생활(生活) 2년 후에 그의 시아버지는 소천하셨습니다.
그 때 남편(男便)이 "아버지가 돌아 가셨으니 이제 가수활동을 해도 되지 않겠느냐?" 고 제안(提案)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애리수는 거절(拒絶)했습니다.
돌아가셨지만 "약속은 약속". 평생(平生) 평범(平凡)한 주부(主婦)로 살다가 98세(歲)가 되어서 그녀의 존재(存在)가 세상에 알려졌고, 그 이듬해 99세로 타계(他界)하였습니다.
그녀의 자녀(子女)들도 어머니가 가수였다 는 사실(事實)을 전혀 몰랐다고 합니다.
사람은 살아있을 때 어떤 감투를 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정신(精神)으로 살았느냐 가 더 중요하고 그에 따른 평가(平價)가 내려집니다.
인간(人間)만이 약속(約束)을 하고 삽니다.
그 약속이 지켜지지 않을 때 서로의 불신(不信)이 깊어지고 사회(社會)는 병(病)이 깊어집니다.
한국(韓國) 사람의 80%가 타인(他人)을 못 믿는다는 앙케이트 조사결과(調査結果) 가 나왔습니다.
OECD국가(國家) 중 최고(최고)의 수치(數値)라고 합니다.
내가 어려울 때 의지(依支)할 곳이 있는가? 의 물음에 OECD 국가중 한국 사람이 최하위(最下位)로 조사(調査) 되었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요?
많은 책임(責任)은 국가(國家)의 지도자층(指導者層)과 정치인(政治人) 들에게 있습니다.
높은 사람이 식언(食言)을 하면 모방(模倣) 심리현상 에 의해서 서민(庶民)들도 따라서 거짓말을 하면서 죄의식(罪意識)을 느끼지 않습 니다.
우리 나라 정치(政治)하는 사람들 거짓말을 밥 먹듯하는 인간(人間)들!
이제라도 정신차려 한 말에 책임(責任)을 지고 약속(約束)을 지켰으면 합니다.
🙏🙏🙏
오늘도
즐겁고 행복한
날 되십시요.!!
♡♡♡
3.아름다움 이란?
케냐 나이로비에
'존 다우'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죽고 나서
의붓 아버지의 심한 학대와 매질로
집을 뛰쳐나와 거지가 되었습니다.
소년은 다른 거지 아이들처럼
길거리에서 구걸을 했는데,
매일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지나가는 차가 신호를 받고 있거나
잠시 정차하는 차에 손을 내밀어
도와달라 애걸하는 것이었습니다.
어느날 '존 다우'는 여느날처럼
갓길에 주차되어 있는 차로 다가갔습니다.
사실 이러한 거지 소년들을
사람들이 골칫거리로 여기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대부분이 아이들을
좀도둑으로 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한 조각의 빵을 사기 위해
‘존 다우'는 그날도
차안으로 손을 쑥 내밀었습니다.
그 차에는 어떤 여성이
뒤 좌석에 타 있었습니다.
그녀는 휴대용 산소호흡기에 의지해
힘겹게 숨을 쉬고 있었습니다.
소년은 그녀의 모습에 멈칫하며 놀랐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왜 이런 걸 끼고 있어요?"
그러자 그녀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이게 없으면
숨을 쉴 수 없어 살아갈 수 없단다.
사실 수술을 받아야 하지만
나에게는 그럴 만한 돈이 없단다."
그러자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 내렸습니다.
이 여자는
'글래디스 카만데(Gladys Kamande)'라는 여성인데
남편의 심한 구타로 폐를 다쳤습니다.
소년은 거리에서
구걸하며 살아가는 자신보다
더 어려운 사람이
세상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이 여자에게
“제가 잠깐 기도를 해 드려도 될까요?"
하며 제의를 했습니다.
그리곤 여자의 손을 잡고
가슴 깊이 뜨거운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느님 제발 이분의 병을 낫게 해 주세요.”
기도하는 동안 소년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러내렸습니다.
그리곤 그간 구걸해
주머니 속 깊이 넣어둔
얼마되지 않은 자신의 전 재산인 돈을
그 여자의 손에 쥐어 주었습니다.
”아주 작은 돈이지만 수술비에 보태 쓰세요"
이 광경을 처음부터 계속 지켜보던
한 시민에 의해
사진과 사연이 SNS상에 공개 되었습니다.
이러한 이야기는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고
이 여자의 수술비가 무려
8천만$이 훨씬 넘게 모아졌습니다.
소년의 간절한 기도에 대한 하느님의 응답은
실로 대단한 결과를 가져다 주었고,
이 여자는
인도에서 무사히 수술을 잘 받아
건강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수술 후, 이 여자는
곧 바로 그 소년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소년은 그간
인터넷을 통하여 잘 알려지게 되어,
'니시'라는 아주 마음 좋은 어느 부유한 여자분이
이 소년을 아들로 입양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마음을 비우면 비로소 보이고,
비우고 나면
다시 무언가 채워진다 하였습니다.
재물이 부자인 사람은
근심이 한짐이요.
마음이 부자인 사람은
행복이 한짐이다.
천국과 지옥은 마음먹기에 달렸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韓山 모시 고을에서
=======================
● 오늘은 6.25 사변이 일어난지 75주년이 되는 날입니다.
그날의 아픈 기억을 되살리며 그당시
백척간두에 선 나라를 구한 영웅들의 영전에
삼가 옷깃을 여미고 추모의 향불을 사르면서...
여기에 우리 모두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감동적인 얘기 두편을 소개합니다.
제 1편 나를 쏘아라 !
6.25 때 우린 아무런 준비가 없었습니다.
학교는 전부 휴교하고, 학생들은 농사를 지으라고 농촌으로 보내졌습니다.
그래서 개전 초기 부터 속수무책으로 밀려나 낙동강까지 후퇴를 거듭했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낙동강 전투의 승리와 맥아더의 인천상륙
작전이 나라를 구했다고 알고 있는데, 실상은 조금 다릅니다.
낙동강 전선의 전투는 곧 영천, 포항, 다부동 전투입니다.
경북 칠곡군 왜관 읍에서 동북으로 좀 들어가면 학이 머무르는 산이라고 하는 해발 654m의 유학산(留鶴山)이 있습니다.
이 산정 근처에 '마이클 레스'미 중령과 우리의 김재명 소령이 이끄는 대대병력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이곳이 뚫리면 대구까지 뚫리는 개활지로서 부산까지 밀릴 수 있기 때문에 이 곳을 뺏기면 유엔군이 상륙한다 하더라도 병력이 기동할 수 없게 되어 바로 이 곳이 나라의 존망이 걸린 전투 지역이었습니다.
이 전장에 투입된 1사단 병력 8천5백 명 중 4천명이 전사하고 4천1백명이 부상당하고, 무사한 사람은 4백 명 밖에
안 되었던 격전이 벌어졌던 곳입니다. 또 이 곳에서 인민군 3개 사단과 우리 1개 사단이 궤멸되었다고 전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치고 빠지기를 일곱 번이나 거듭했으며, 유학산 정상이 점령당하면 완전히 뚫려 버리는 6.25전쟁 사상 최대의 격전지였습니다.
이때 미8군사령관이 다급하게 1사단장 백선엽을 찾아 이렇게 힐난했습니다.
“당신들은 당신 나라를 포기할 것이오 ? 유학산이 뚫려 포위되면 우리 '마이클 레스' 중령 전차부대가 다 죽는다.
우리는 이 상황에서 우리 부대를 뺄 수밖에 없소.
그리하면 당신 나라는 끝장이오.
우리도 이렇게 버티고 있는데 당신들이 어떻게 뚫릴 수 있는가 ?”
이 말을 들은 백선엽 장군은 잠시 시간을 달라고 말하고 현장으로 달려갔습니다.
현장에 가보니 김재명 소령이 맨몸으로 낙오병을 이끌고 내려오고 있었습니다. 내려와서는 백 장군에게 무릎 끓고 앉아서 ‘즉결처분 받겠다.’라고 말하며, 여기 지키느라 몇 번씩 탈환하고 밀리기를 반복해왔는데, 이틀간 물 한 모금 밥 한 끼 먹지 못했고 탄약도 없으니 이젠 별도리가 없다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백 장군은 ‘너희를 처벌하자는 것이 아니다. 물러서라’ 라고 말하며 학도병과 내려오는 군대 모두 합하여 6천명쯤 되는 이들에게 주먹밥을 나눠주며 이들 앞에서 마이크를 잡고 연단에 올라서서 외쳤습니다.
“장하다. 그간 고생이 많았다. 그러나 이곳이 뚫리면 그간의 우리의 전공도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우리나라는 끝장이다.
대한민국이 사라지는데 살아서 뭐하나.
난 여기서 죽겠다. 집안의 독자나 또는 돌볼 노부모가 계신 사람들은 돌아가라. 공격구호는 간단하다. ‘돌격 앞으로!’ 내가 제일 앞장서겠다.
만일 한 발짝이라도 뒤로 물러서면 나를 쏘아라 ! 그리고 내 시체를 밟고 넘어서 이곳만은 꼭 탈환해라. 구호는 ‘나를 쏘아라 !’ 이다.”
백장군의 이 말에 순간 분위기가 바뀌면서 김재명 소령도 자신이 제일 먼저 죽겠다며 앞장섰습니다.
이를 두고 '마이클 레스 중령'은 세계 전사 상 후퇴하던 군대가 다시 ‘돌격 앞으로’ 하는 경우는 없었을 것이라며 대한민국 군대를 신병(神兵) 즉, 하늘이 낸 병사(god's soldier)라는 표현을 썼습니다.
이렇게 해서
백선엽 장군이 배수진을 치고 유학산을 점령하고
적의 공격을 물리친 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엔군이 인천에 상륙하고
대 반격을 시작한 것입니다.
견리사의(見利思義) 견위수명(見危授命). ‘이로운 것을 보거든 옳은 것인지 생각하고, 나라가 위태로우면
내 생명을 던져라.’고 했습니다.
당시의 호국영령들은
이렇게 나라를 구해냈습니다.
그러나 정말 안타까운
현실에 우리들은 아연할 수 밖에 없습니다.
이렇게 눈물겹게 지킨 나라가 세계10위의 경제대국으로 발전한 조국에 살면서도...
국립묘지에 묻힌 구국영웅의 묘를 파묘해야 한다고 소란을 피우는
자들은 과연 어느 나라
사람들이란 말입니까?
제 2편 : 맥아더 장군과 고(故) 신동수(辛東秀) 일등병
6.25가 발발하자 일본에 머물고 있던 맥아더 장군이 전황 파악 차 비행기를 타고 급히 한국에 왔습니다.
북한군과 대치하고 있는 최전방 벙커를 지키고 있던 국군 말단 병사를 우연히 만나 이렇게 물었습니다.
맥아더 : "전세가 이렇게 밀리고 있는데 당신들은 왜 도망을 안 가고 있느냐?"
국군병사 : "후퇴하라는 명령은 없었습니다."
감동한 맥아더 : "지금 내가 들어줄 수 있는 소원을 하나 말하라. 들어 주겠다."
국군병사 : "충분한 실탄과 총을 지원해 주십시오."
자신을 이 벙커에서 빼달라는 대답을 예상했던 맥아더에게 이 한국군 병사의 뜻밖의 말은 충격적이고 감동이었습니다.
이 말단 병사의 말 한마디에 감동한 맥아더는 막사로 돌아와 즉시 이렇게 지시했다고 합니다.
"우리는 전력을 다해
이 나라 (대한민국)를 지켜주어야 한다."
그래서 이 말 한마디에 인천상륙작전은 재빠르게 속도전으로 바꿔 진행되었고, 수만 명의 미국 병사가 한국을 위해 전사해야만 했습니다.
그 목적이 무엇이건 간에 다른 나라가 한 나라를 위해 수만 명이 죽었다는 것은
미국 역사의 기록은 물론 한국 역사 상에도 전례가 없다고 합니다.
그래서 미국과 한국은 혈맹보다 더 진한 우정으로 맺어준 인연이 되게 한 게 바로 6.25전쟁 입니다.
그런데, 이 일화는 사실일까요?
사실입니다.
2006년 취재 기자 허영한이 취재한 내용입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학도병으로 6·25 전쟁에 참전해서 상처를 입어 다리까지 절단된 "고(故) 신동수(辛東秀)
일등병"
이야기입니다.
맥아더 : “병사! 다른 부대는 다 후퇴했는데, 자네는 왜 여기를 지키고 있는가?”
병사 : "저는 군인입니다. 상관의 명령 없이는 절대 후퇴하지 않는 게 군인입니다.
철수 명령이 있기 전까지 죽어도 여기서 죽고, 살아도 여기서 살 겁니다.”
1950년 6월 29일, 당시 스무 살의 한 일등병은 서울 영등포에 있던 진지(陣地)에서 맥아더 미 극동군 사령관과 이런 대화를 나눴습니다.
전쟁이 터진 지 나흘째, 이미 한강 이북은 인민군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습니다.
그곳은 남한의 부대가 마지막까지 버티던 한강 방어선이었고
맥아더 장군은 도쿄에서 날아와 전황을 돌아보던 참이었습니다.
“정말 훌륭한 군인이다. 내가 일본으로 건너가면 즉시 지원군을 보내 주겠다.”
이 군인에게 감동한 맥아더 장군은 그의 어깨를 툭툭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약속대로 맥아더 장군은, 곧바로 한국전 참전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관계자는,
“맥아더 장군이 당시 한국군 병사의 말에 감동을 받아 참전을 결심했다는 사실은 참전 장성 회고록 등 여러 문서에서 확인된다”고 말했습니다.
수십 년째 묻혀 있던
이 일등병의 존재가 최근 밝혀졌습니다.
신동수(辛東秀·77, 2006년 취재 당시 나이)옹입니다.
그를 찾아 충청북도 충주시 앙성면으로 향했습니다.
“이렇게 멀리 오게 해서 어쩌나. 다리가 이래서….”
그는 왼쪽 다리를 절었습니다. 양말에 가려졌지만, 한눈에도 의족(義足)임을 알 수 있었습니다.
기쁨인지, 고통인지 모를 옛 전투 이야기를 시작하자, 신 옹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낮아졌다 했습니다.
그가 속한 부대는 백골 부대 18연대 1대대 3중대였습니다.
6월 29일 이들은 영등포구 양화동의 인공폭포공원 인근에 진지를 편성해 놓고 있었습니다.
다른 대대는 물론 같은 대대 다른 중대도 후퇴해 버린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사흘째 굶고 있던 그때였습니다.
“4명이 지프에서 내리더라고. 처음에는 소련군인 줄 알고 쏘아 죽이려고 벙커에서 쫓아 나갔어요.
하지만 정모의 마크가 소련군 것과 다른데.
통역이 그분이 사령관이라고 했어요.”
하지만 그때만 해도 사령관이 뭐인지도 몰랐다고 합니다.
대화가 끝난 후 맥아더 장군은 그에게 연막탄 2개와 대공 표지판을 선물로 줬습니다.
그리곤 곧 그는 잊어 버렸다고 합니다.
노량진과 영등포까지 진격한 인민군의 총포가 시시각각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 머릿속에는 오로지 적을 무찌르고, 나라를 지켜야 한다는 마음뿐이었으니까요.”라고 말했습니다.
맥아더 장군이 돌아간 이후에도 그는 사흘을 더 버텼습니다.
“결국 후퇴 명령을 받았습니다.
중대원들에게 명령을 전달하며 미친 듯이 돌아다니고 있었죠.
갑자기 다리가 오그라들더니 펴지질 않더라고요.
그러고도 150m를 뛰었어요. 살기 위해 아무 집이나 찾아가 부뚜막 아궁이에 숨었는데,
착한 주인이 온몸을 닦아주고 빨간 헝겊을 찢어서 군 치료소에 데리고 가주더군요.”
하지만 3개월이 지나도록 총탄에 맞은 다리를 치료받지 못했습니다.
무릎에선 구더기까지 나왔습니다. 결국 다리를 절단했습니다.
다리를 절며 절며 찾아간 강원도 춘천.
하지만 남동생은 형을 찾으러 가겠다며 인민군에 합류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못 만난 세월이 무려 56년이 됐습니다.
당시 부대원 100여 명 중 살아남은 사람은 7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7일 동안의 처절한 혈전 덕분에 인민군의 서울 함락은 늦어졌고,
지연전을 위한 재편성, 유엔군의 조기 전선 투입이 이뤄졌다고 합니다.
그의 잘린 다리가 나라를 구한 것입니다.
“6월 25일만 가까워져 오면 내가 묻어준 동료들,
내 앞에서 죽어간 동료들이 떠올라요. 군번도 없이 죽어간 전우들이 얼마나 많은데요. 어떻게 지킨 나라인데.
지금 우리 젊은이들이 그걸 알고 있나요?”
그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배어 있었습니다.
이 나라의 공산화를 막고 자유가 있는 세상에 살라고 산화하신 미군과
참전 16개국 군인들, 순국 장병들 용사님들이시여...!
또한 그의 후손들에게 존경과 감사를 드립니다.
호국보훈의 달을 맞아 국가를 위해 헌신하고 희생하신 분들의 숭고한 희생을 기리고 유족들이 자긍심을 가질 수 있도록 우리가 모두 보훈 가족에 대한 존경과 감사의 마음을 가슴 깊이
간직하시기를 바랍니다.
# 여기저기서 발췌한 것을 제가 묶어서 정리해봤습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