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직 부장판사들이 법원 내부 전산망에 잇따라 박상옥(59·사법연수원 11기) 대법관 후보자의 자진사퇴를 촉구하는 글을 올렸다. 앞서 평판사인 박노수(49·31기) 서울중앙지법 판사가 지난 16일 비슷한 취지의 글을 올렸다.
정영진(57·14기) 의정부지법 부장판사는 21일 법원 내부 전산망인 코트넷에 "박 후보자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대법관은커녕 일반 평판사로도 법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분"라며 "박 후보자가 대법관이 되는 경우 사법부 신뢰가 어떻게 될 것인지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나 사법부 구성원들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라는 내용의 글을 게재했다.
정 부장판사는 "대법관의 기본 덕목 중 하나가 사법권 독립 수호 의지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인데 검사로서 권력의 외압을 떨쳐내고 법과 양심에 따라 사건처리를 하지 않은 의혹을 받고 있는 박 후보자에게 그런 의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상적 인지기능을 가진 사람 중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판사들은) 정치인들이 야합해 박 후보자에 대한 대법관 인준안을 통과시키려 할 경우 사법부 구성원들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판사회의 개최를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수렴, 대법원장께 전달해 사법부 차원의 적절한 대응을 하도록 하거나 국회에 직접 일선 법관들의 의견서를 전달하는 것은 어떠한지 등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해 주시기 바란다"고 촉구했다.
박노수(49·31기) 서울중앙지법 판사와 문수생(48·사법연수원 26기) 부천지원 부장판사도 각각 지난 16일과 20일 박 후보자 임명에 반대하는 취지의 글을 법원 내부 전산망에 올렸다.
아래는 정 부장판사의 글 전문.
사법권 독립 후진국 오명을 벗으려면
1. 세계경제포럼, 세계은행과 같은 세계적 경제 기구나 연구소들의 기본적 관심 분야는 경제 문제인데 이들이 경제 관련 각국의 경쟁력이나 기업환경 순위를 언급하면서 빼놓지 않는 것이 사법부 관련 부분이다. 그런데 세계경제포럼이 2014. 9. 3. 발표한 '2014-2015 세계 경쟁력 보고서'에 의하면 한국의 사법권독립 순위는 아프리카 후진국보다 못하다. 한국 사법부가 왜 이런 꼴이 되었을까? 사법부는 물론 온 국민이 함께 고민해 볼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세계경제포럼 등이 사법권독립에 주목하는 것은 왜일까? 그것은 특정 국가나 기업에 투자하거나 거래를 하다가 법적 문제가 발생할 경우 권리구제를 제대로 받을 수 있는지와 관련하여 사법권독립이 큰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세계경제 포럼 등의 평가에서 사법권독립 후진국으로 낙인찍힌 나라는 거래 우선순위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 어느 때보다 한국 경제가 어려운 현 시점에 세계경제포럼과 같은 범세계적 기구가 한국에 대하여 계속, 사법권독립 후진국으로, 부정적 평가를 내놓는 경우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 경제는 더욱 어려워질 수도 있다. 따라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도 사법권독립에 대한 국제적 신인도를 높이기 위하여 범국민적 노력이 요청되는 때이다.
2. 대법관의 기본 덕목 중의 하나가 사법권 독립 수호 의지임을 부인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런데 준사법기관인 검사로서 권력의 외압을 떨쳐내고 법과 양심에 따라 사건처리를 하지 않은 의혹을 받고 있는 박 모 대법관후보자에게 사법권 독립 수호 의지를 기대할 수 있을까? 정상적 인지기능을 가진 사람 중에 그렇다고 답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 후보자는 사법부 내외에서 촉구되고 있는 수많은 사퇴압박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꿋꿋하게 버티고 있다. 왜 그럴까? 국회인사청문회가 제 기능을 못하기 때문이다. 청문회 과정에서 부적격 사유가 밝혀졌으면 그 후보자는 국회 표결에서 걸러져야 한다. 그러나 지금 한국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아무리 심한 결격자라도 정치적 역학관계에 따라 무난히 국회 표결을 통과한다. 박 후보자는 바로 이런 현실에 기대어 국회 본회의 표결만 학수고대하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박 후보자가 사법권독립을 수호할 만한 분인지는 아직 충분히 해명되지 못했다. 제 기능을 하지 못하고 있는 국회인사청문회 의원들에게만 맡겨 둘 수 없다. 주권자인 국민들이 직접 나서야 한다. 그래서 한국 국민들이 사법권독립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는지 세계만방에 알려야 한다. 이것만이 한국이 사법권독립 후진국 오명을 벗을 수 있는 길이다.
3. 위에서 잠시 언급한 것처럼 박 후보자 관련 논란의 핵심은 준사법기관인 검사로서 권력의 외압을 떨쳐내고 법과 양심에 따라 사건처리를 하지 못한 의혹을 받고 있는 분이 사법권독립을 지켜야 할 대법관 자격이 있는가이다.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하여 잘 모르시는 분들은 범법행위를 한 형사피의자가 범행을 자백하도록 수사기관이 고문하여 그 피의자를 숨지도록 한 사건으로 오해할 수 있는데, 이 사건은 형사피의자 신분으로 수사를 받은 것이 아니라 선배의 행방에 대하여 추궁 받다가 고문당해 숨진 한 불쌍한 대학생에 대한 사건이란 것을 알아야 한다. 아무 죄도 없는 어린 대학생 한 명이, 선배의 소재에 대하여 답변을 제대로 안한다는 이유로 여러 명의 경찰관들에 의해 강제로 머리가 욕조 물에 처박혀 발버둥 치다가 죽은 사건이다. 이런 사건을 철저하게 수사하고, 사건의 전모를 은폐하려 한 범죄자들의 실체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공익의 대변자인 검사의 기본 책무였을 텐데 박 후보자는 이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이 사건에 대한 수사 담당 검사였던 박 후보자는 초임 검사도 아니었다. 일각에서 말석 검사론을 펼치지만 검사의 지위에 대하여 최소한의 이해가 있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할 수 없다. 박 후보자 본인도 자신이 말석 검사여서 책임이 없다는 입장표명을 한 적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시대 상황 운운하지만 당시는 유신시대도 아니고, 소신대로 법집행을 하였다 하여 판사나 검사가 큰 고초를 겪는 시대도 아니었다. 필자는 당시 배석판사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때는 배석판사도 구속영장발부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필자가 시국사건 구속영장 기각도 하고, 시국사건 즉결심판 피의자들에 대하여 선처를 하기도 하였으나 이로 인하여 인사상 불이익을 받은 바 없다.
박 후보자가 외압에 굴하지 않고 엄정하게 수사하였다면 큰일이라도 났을 것처럼 동정론을 펼치는 것은 당시 법원, 검찰 상황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다. 당시 박종철군 사체에 대하여 부검을 지휘한 최 모 부장검사나 그 지시를 이행한 안 모 검사가 이로 인하여 큰 고초를 겪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런 종류의 사건을 법대로 처리한 검사가 받았을 최대의 불이익은 승진에서 후순위로 밀리거나 한직으로 도는 정도였다.
4. 지난주에 코트넷에 올라온 박노수 판사의 글을 못 보신 분들은 위 글을 정독하여 박 후보자와 같은 분이 대법관이 되는 경우 한국 사법부에 대한 국제적 평가가 어떻게 될 것인지, 정쟁 외에 국익에는 별 관심이 없어 보이는 정치인들이 야합하여 박 후보자에 대한 대법관 인준 안을 통과시키려 할 경우 사법부 구성원들이 어떻게 대처하여야 할 것인지, 판사회의 개최를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전국 법관들의 의견을 수렴하여 대법원장께 전달하여 사법부 차원의 적절한 대응을 하시도록 하거나 국회에 직접 일선 법관들의 의견서를 전달하는 것은 어떠한지 등에 대하여 의견을 표명해 주시기 바란다.
5. 박 후보자에 대한 필자의 평가는 대법관은커녕 일반 평판사로도 법원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 분이라는 것이다. 그 이유는 얼마 전 신임법관 임명식에서 대법원장께서 "거부할 수 없는 재판의 엄청난 힘과 영향력을 생각할 때 그 권한을 행사하는 법관이 신(神)의 역할이라도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인간이기를 기대하는 국민의 마음은 당연하다"고 하신 말씀을 박 후보자에게 적용하여 보면 명백해진다. 박 후보자의 과거 행적이나 이번 인사청문회 과정을 통하여 밝혀진 내용, 청문회에서 박 후보자가 한 언사, 태도, 지금까지의 행보 등을 볼 때 어느 국민이 박 후보자에게서 "신(神)의 역할이라도 대신할 수 있을 정도의 완벽한 인간"상을 발견할 수 있을까?
6. 지금 대법관 업무부담을 줄이고자 상고법원안이 제출되어 있는 것은 대법관들이 지금보다 더 대법관 역할을 충실하게 수행하도록 하려는 것일 것이다. 그런데 줄어든 대법관업무부담 환경에서, 박 후보자와 같이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던 분이 대법관이 되어 지금까지보다 더, 한국 사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대법원 판결에 관여하는 것을 국민들이 용납할 수 있을까? 대법관 업무부담 감소 노력이 조금이라도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대법관들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조직이나 고위공무원은 권한축소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박 후보자가 대법관이 되는 경우 사법부 신뢰가 어떻게 될 것인지 뻔히 예상됨에도 불구하고 대법원이나 사법부 구성원들이 수수방관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된다. 대법원장께서 제청한 분이라는 점에서 대법원 입장이 난처할 수는 있으나 이는 대법관 제청 당시 박 후보자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 수사검사였음을 밝히지 않았기 때문일 뿐 대법원 책임이 아니다. 인사검증 과정에서 허위답변을 했다가 낙마한 송 모 전 청와대교육문화수석의 사례에서 보듯이 검증 과정에서 오류는 있는 것이다. 송 모 수석의 경우도 본인의 사퇴로 마무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