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글을 써도 욕은 안 하시겠죠.
제 생각을 정리한 것이니 만큼 한번 읽고 판단해 주셨으면 합니다.
여순반란사건.
그 이해는 제주도에서 일어난 4.3사건(그러나 요즘 '제주항쟁'이라고 함)을 이해가 선행되어야 충분히 이해가 가시리라 생각하네요.
1948년 남한만의 단독정부 수립을 반대하여 일어난 민중(?)봉기이며, 미군정 초기 인민위원회와 경찰, 우익단체들간의 무장봉기로 촉발되어 제주도 일대와 한라산을 근거지로 49년까지 계속되어
당시 남한 단독정부의 총선이 5월 중순에 이뤄지는 것을 반대하여 온 제주도민들과 서북청년단 등 우익단체간의 테러들로 시작하여, 급기야 4월3일에는 제주도민들이 △미군철수 △단독정부 절대반대 △투옥옥중 인사석방 △이승만 매국도당 타도 △경찰테러집단 즉각 철수 등을 요구하며 봉기하였다. 그들이 가진 것이라곤 죽창이 전부였다. 그러나 토벌대(경찰병력과 군인)와 우익단체는 이들을 무차별 공격과 집단학살의 만행을 자행하여 토벌대의 보고서에 의하면 ☞폭도사살 8천명 등 민간사상자 3만 명이라는 보고서가 말해주듯 무차별적인 학살과 잔혹 행위가 이뤄진다.
그들은 결국 유격대화 되어 한라산일대에서 격렬히 항쟁하였으나, 숫적 열세와 지리적 고립 등으로 결국 49년 중반무렵 토벌이 되고 만다.
그 중간에 일어난 사건이 '여순반란사건'이다.
10월 20일 한라산으로 잔당토벌이란 명목 하에 동원된 14연대가 이를 반대하여 일으킨 사건이다.
이 두 사건은 같은 연장선상에 놓고 생각을 해야만 한다.
이들은 단지 불순한 의도로 그런 행동을 했겠나? 하는 역사 인식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단순히 한 상황만을 놓고 보면 그럴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해방 후 우리는 극도로 혼란한 시기에 있었으며, 북쪽에는 러시아가 남쪽에는 미군이 군정을 설치하여 나라의 모양새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그러나 당시 김구, 조만식, 김규식 등 상해임정 인물들은 미군정하의 남한만의 단독정부수립을 반대하고 나선다. 그러나 미군정을 등에 엎고 있던 이승만은 이를 양해하고 공포해 버린다.
이것은 민족의 분열을 초래하고, 민족통일정부의 반대와 함께 남한단독정부의 출범을 뜻하는 것으로 반민족적이고 반통일적인 인사들에 의해 제헌의회가 구성되고 만다.
이렇게 되어 남과 북이 이념적으로 단절된 체 지금까지도 서로 반목을 하며 평행선을 걷는 계기가 된다.
역사에는 '만약'이란 단어는 없다고 얘기를 한다. 그러나 만약 통일정부가 들어서고, 미군과 소련군이 물러간 상황에서 남과 북이 함께 통일을 지향하는 맘으로 조금만 더 준비를 했더라면, 지금에 와서 "통일비용이 많이 드네" "서로에 이념적으로 상충된다"는 단어는 없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리고 단지 대통령이 북쪽의 수도 평양을 방문했다고 "노벨 평화상"을 받는 아이러니는 없을 것이라 확신한다.
그래서 해.방.전.후.사.의.역.사.인.식.은 우리에게 다시는 역사에 누를 범하지 않도록 하는 "지침"이 되는 중요한 시기이며, 이를 올바르게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의 역사가 바로 서는 계기가 될 것이다.
……
지금껏 제 마음대로 써간 "해방전후사의 인식"이였는데 어땠는지 모르겠네요. 아까 얘기했듯이 욕은 안 하시겠죠?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마지막으로 제주항쟁 당시 억울하게 죽어간 민간인들과 순국자들의 명복을 빌며, 하루 빨리 명예회복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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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우리 역사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고 있는 여수순천 4.3사건 다들 아시죠?
조정래 작가의 태백산맥의 소재가 되었던...
반공이라는 사회적 분위기때문에 많이 왜곡되어 우리앞에
놓여져있는 사건이죠..
그래서 말인데..이 사건에 대해서 각기 다른 여러분의 관점에서 사건을 평가해주신다면 어떻게 평가하실건가요..
참고로..여수순천 사건을 간단히 적어놓을께요...
여수순천사건(麗水順天事件)
1948년 10월 20일, 전남 여수에 주둔하고 있던 국군(당시 국방군) 제14연대 일부가 일으킨 반란사건. 흔히 여순반란사건이라 약칭한다. 48년 대한민국의 건국이 눈앞에 다가오자 좌익세력은 온갖 수단으로 그것을 저지·방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48년 4월 3일, 공산분자들의 조직적이고도 대규모적인 공작으로, 제주도 일원에 폭동사건이 발생하였다. 물론 현지 주둔 국군 병력과 경찰이 합동으로 진압작전을 벌였으나 폭동의 규모에 비하여 병력이 열세여서, 시급한 증원 병력이 필요하였다. 이에 정부는 그 해 10월,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 병력 약 3,000명의 제주도 급파를 결정하였다. 한편 이 14연대에는 이미 공산당의 프락치가 침투되어 있었는데, 이보다 수일 전에 이 부대 소속 오동기(吳東起) 소령이 공산당 프락치임이 밝혀져 검거되었다. 그래서 또 다른 프락치와 반란 음모 관련자들의 색출을 위한 조사가 극비리에 진행되고 있었던 참이었다. 이에 자신들의 검거가 임박했음을 직감한 적색분자들과 관련자들은 극도의 불안과 절망에 빠지게 되었고, 어차피 음모가 노출된 이상 최후 수단을 택하게 되었다. 국군 제14연대가 여수항을 출발하기로 되어 있던 1948년 10월 20일을 하루 앞둔 19일 밤, 반란군의 총지휘자 김지회(金智會) 중위·이기종(李起鍾)·박기암(朴基岩) 등 주모자들은, 미리 포섭해 놓았던 행동대 약 40명을 은밀히 규합하여 새벽 2시경 병기고(兵器庫)를 장악한 후, 비상소집 나팔을 울려 달려 나온 병사들에게 “38선은 인민군에 의해 무너졌으며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다. 지리산에도 만여 명의 인민군이 포진하고 있다. 세상은 달라졌다. 살고 싶은 자는 궐기하여 반동분자를 처단하고 새 세상을 맞자. 불응하는 자는 인민의 이름으로 처단한다”하며, 호응하지 않은 병사들을 그 자리에서 사살하였다. 당시 연대장 박승훈(朴勝薰)은 연대부관의 긴급 연락을 받고 현장으로 달려가다가, 이미 사태수습이 불가능해졌음을 알고 그 길로 목포로 피신하여, 상부에 긴급보고하여 진압을 요청하였다. 1,000여 명의 반란군은 날이 밝기 전에 경찰서를 비롯한 여수의 주요 관공서를 장악하고, ‘인민 해방’을 부르짖으며, 인공기(人共旗)를 게양하였다. 날이 밝자 약 4만 명의 군중을 동원시켜 놓고, 새벽에 병사들을 협박·선동했던 방법과 동일한 수법으로 허위사실을 유포하면서 지지와 협조를 강요하였다. 10월 27일, 사건이 일어난 지 꼭 1주일 만에 토벌군의 손으로 반란이 진압되기까지, 반란군은 한때 순천·남원·광주까지 진출하며 무법천지를 확대시켰는데, 특히 순천에서는 여수 이상의 처참한 만행이 저질러졌다. 토벌군에게 쫓기는 반란군은 최후발악으로 수많은 양민을 무차별 학살하였으며, 그 중에서도 여수의 고소동(姑蘇洞)·능동(陵洞)·서교동(西橋洞) 등에서는 민가 2,000여 호가 불살라졌다. 1주일 동안 무고한 인명피해가 300여 명, 공공건물 및 민가 소실이 수천 호에 달하였다. 반란군 중 상당수는 토벌군에 투항하였으며, 지리산 쪽으로 도주하던 잔당들은 대부분 사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