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는 부패로 망하고 진보는 분열로 망한다.'
이말에 반발하는 사람은 보기 어려울 만큼 보수와 부패가 그렇듯이 진보의 분열 또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고 있다. 보수에겐 항용 물적 토대가 있게 마련이고, 이 물적 토대는 보수를 부패로 이끌면서 보수들을 집결시키는 구심력으로 작용한다. 물적 토대가 없는 진보는 부패의 여지는 없는 대신 같은 이념을 매개로 뭉친다.
따라서 진보는 일상적으로 다를 진보의 이념을 검중하면서 자기와 같은가, 아니가를 확인하는 경향을 갖는다. 자유주의자들, 개인주의자들은 자신의 세계관으로 남의 이념이나 생활방식을 저울질하지 않는 반면,진보주의자들이 자신의 세계관으로 다른 사람의 이념과 생활방식을 저울질하는 것도 이 경향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 사회의 진보는 진보의 양에 비해 그 폭이 무척 넓다는 점에 있다. 쉽게 말해,진보세력은 많지 않은데 그 폭이 워낙 넓어서 진보끼리도 진보가 구심력보다는 원심력으로 작용할 수 있다는 것이다.어려움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보수에게서 공익개념을 찾을 수 없는 한국 사회의 현실은 진보에게 공익을 목표로 하는'진정한 보수'까지 그 안에 담도록 요구한다.
실제로 한국의 자칭 보수들은 공익 추구보다 사익 추구의 집단에 가깝고 보수할 것이라곤 오직 기득권뿐이라는 점에서 진보에게 요구된 폭은 그만큼 넓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런데 한국의 보수가 태생적으로 공익과 무관하여 관심조차 없다면, 사회민주주의조차 '개량주의'라고 간단히 규정하는 일부 진보에게서 알 수 있듯이 공익을 전제하는 공화국 이념 정도는 가볍게 보는 경향이 있다.
이 점에 대한 성찰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공익을 목표로 한 건전한 진보/진정한 보수 사이의 경쟁관계에 익숙하지 못한 탓에, 진보의 틀이나 규정에 갇혀 사회변화 세력끼리 서로 다투어 극복 대상인 사익 추구 세력에게 어부지리를 주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고 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의 말처럼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세계를 해석하는 데 있지 않고 세계를 변화시키는 데 있다면'진보는 '진보의 선명성'을 주장하기보다는 이 사회의 변화를 궁극적으로 바라는 모든 세력을 감싸안는 '불편함'을 즐겁게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극복 대상인 수구 기득권 세력이 헤게모니를 장악한 땅에서 공익 추구를 전제하는 경쟁 대상끼리는 서로 연합해야 마땅하지 않은가.
프랑스 대선이 자크 시라크 현 대통령이 극우 국민전선당의 장마리 르펜을 82대 18의 압도적인 차이로 승리하면서 막을 내렸다. 르펜자신 30%들표를 목표로 했던 만큼 시라크이 당선은 100% 예상된 일이었지만, 르펜은 1차 투표에서 브뤼노 메그레 등과 함께 얻은 극우파 총득표율도 얻지 못했다.
좌우를 뛰어넘은 반극우 공화주의 연합전선의 승리였다고 할 수 있다. 또는 앵똘레랑스 세력에 대한 똘레랑스 세력의 승리라고도 말할수 있다. 본디'지지투표'의 성격을 갖는 1차 투표에 비해 '반대투표' 성격을 갖는 2차 투표에서 시라크는 우파 지향의 유권자보다 좌파 지향의 유권자에게서 더 많은 표를 얻었다.
좌파 지향 유권자들의 표는 실상 시라크를 지지한 표가 아니라 르펜에게 반대한 표였다. 따라서 82%의 막대한 득표율로 당선했다고 하더라도 시라크의 승리는 시라크 개인이나 우파의 승리가 아니라 르펜에 반대한 프랑스 공화주의의 승리였다.
르펜에 반대하여 거리로 뛰쳐나온 프랑스 청년들은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다. 좌파가 오랫동안 집권해 온 나라에서 급진적 경향을 가질 수도 있는 청년들이 거리에서 고작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던 점은,극우-수구 헤게모니가 여전히 작동하는 한국 사회에서 사회민주주의를 뛰어 넘겠다는포부를 갖고 있는 우리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우리는 헌법 제 1조에 '민주공화국'을갖고 있지만 프랑스공화국이 사회구성원들의 사회투쟁의 열매로 획득한 것인데 반해, 우리는 그냥 얻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오늘날도 프랑스에선 공화주의에 관련된 토론이 벌어지고 있는데 우리는 공화주의를 이미 획득했다고 여겨서인지 이에 대한 논의조차 찾기 어렵다. 하지만 인류 역사상 수천년 동안 지속된 봉건적 신분질서 체제의 유제가 헌번 제1조에 '민주공화국'을 천명했다고 자동적으로 없어지는 것은 아닐 터이다.
한국 사회에 합리적 보수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던 점은 진보세력에게 합리적 보수와 경쟁하는 경험을 갖지 못하게 했다. 우리는 부정당하거나 부정하는 일에 익숙하다. 군사독재자들에게서 물리적 탄압을 받아온 이래 나와 타자의 관계를 서로 부정하는 관계로만 설정했고 서로 인정하는 속에서 경쟁하는 관계 설정은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와 다른 타자는 모두 부정의 대상, 즉 극복 대상으로 여기게끔 타성과 습속이 자리잡았을 수 있다. 가령 우리들에게 르펜 극복을 위해 '공화국을 지키자!'고 외쳤던 프랑스의 좌파 청년들은 개량주의자들이고 현실 추수주의자들이었을까?
사회 곳곳에 극우-수구 세력이 헤게모니와 물적 토대를 움켜 쥐고 있는 한국 사회에서 우리는 혹시 헌법 제1조가 보장하고 있는 공화주의에 대해 천착하지도 않은 채 사회민주주의를 뛰어넘자고 외치면서 이 사람이나 저 사람이나 신자유주의자라는 점에서 똑같다면서 부정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적어도 경쟁 대상과 극복 대상을 구분할 줄은 알아야 하다.
홍세화의 악역을 맡은 자의 슬픔 中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