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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5. 겟세마니 피정의 집
강원도 인제군 소양강 변에 위치한 겟세마니 피정의 집은,
1991년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소속 선교사
조선희 필립보(Philip J. Crosbie)신부가 설립하였다.
조선희 신부는 1915년 호주에서 태어나 1939년 수품 후,
1940년 우리나라에 입국하여 58년 동안 복음을 실천하는 삶을 살았다.
홍천본당 주임신부로 재직하던 중,
6·25 전쟁이 일어나자 안전한 곳으로 피신하지 않고
교우들과 성당을 지키다가 공산군에게 피랍되었다.
‘죽음의 행진’과 3년간의 포로 생활을 통해
수많은 순교자들과 함께 고난의 길을 걸었던 조 신부는,
주님의 은총으로 생환하여 다시 한국에 돌아온 후에도
변함없이 선교사로 신앙을 전하며 일생을 온전히 헌신하였다.
특별히 가난하고 고통받는 모든 이웃에게 모자람 없는 참사랑을 실천하였다.
일선 사목에서 물러난 뒤에는 6·25 전쟁이 벌어진 38선 위에
세상의 평화와 죄인들의 회개를 위해 기도하는 피정의 집을 세워,
신자들을 지도하고 함께 기도하며 생활화였다.
1998년 노령으로 더 이상 활동이 어렵게 되자
“제 영혼의 반은 한국에 놔두고 갑니다.” 라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본국으로 돌아가 2005년 3월 24일 주님의 품에 안겼다.
126. 곰실공소
죽림동 본당의 모체
우리나라의 신앙 전래가 외국 선교사의 전교 없이,
스스로 신앙 교리를 찾아 그 가르침대로 살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 특징이듯이,
춘천 지역 또한 교회의 정착이 그와 같은 길을 걸었다.
이 경우 역시 천부적인 종교심성을 지닌
한 젊은이의 자발적인 신심과 열정이
훌륭한 신앙 공동체를 이루었으니
그 공로자인 청년의 이름은 엄주언 마르티노(말딩)였다.
127. 춘천주교관
주교관은 춘천교구장 주교의 거처이자
선교사들이 교구 일을 돕거나 기거하는 거점으로
강원도 지역을 담당하던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가 158년 건립하였다.
이 건물은 당시의 전형적인 외국인 선교회풍으로 지었는데,
유별나게 서향으로 세운 것은
햇빛이 아쉬운 아일랜드 풍습의 영향으로 보인다.
6.25 전쟁이 끝난 뒤, 포격으로 피해가 많았던 춘천에
아일랜드풍으로 세워진 건물로서, 현재까지 보존이 잘 되어
건축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춘천교구 신앙 교육의 요람인 교육원은
58년 주교관이 지어진 후 건축이 시작되어 이듬해에
주교관과 같은 분위기로 지어졌다.
교육원은 당시 교구장인 구 토마스 주교의 뜻에 따라,
전쟁으로 피폐해진 이들에게 신앙을 심기 위한
전교 수녀 양성을 위한 수련소로 사용되었다.
1969년 수녀회의 서울 이전 후에는
춘천에 거주지가 없는 학생 기숙사로 활용되었다.
이후 이곳은 신앙재교육을 위한 공간으로 쓰였다.
2019년 2월 등록문화재(제 743호)로 지정되었다.
128. 죽림동 순교성지
6·25 전쟁 때 피살 당한 성직자들의 묘소 보존
강원도 지방에 천주교가 전래된 지 80여 년 동안,
상주하는 신부 없이도 교인 수는 소리 없이 늘어 천여 명에 이르렀다.
그러다가 1888년 서울에서
조선 대목구장 뮈텔(Mutel) 민 주교에 의해 파견된
파리 외방전교회 르 메르(Le Merre, 李類斯) 신부가 주임으로 부임하면서
풍수원이 본당이 되었으니
신태보의 피난 이후 무려 87년만의 일이었다.
그 후 곰실 본당은 춘천 시내로 진출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기울여
1928년 현 죽림동 성당 아래 땅을 사서 춘천 본당을 설립하였습니다.
죽림동 주교좌성당의 뒤뜰에는 교구 순교자 묘역이 있는데,
이곳은 춘천교구에서 활동하다가 선종한 사제들이 잠든 곳인 동시에
신앙을 증언하고 목자로서의 소명을 다하기 위해 애쓰다가 희생된
순교자들이 함께 모셔진 곳이다.
이 묘역에는 한국 전쟁 중 희생당한 성 골롬반 외방 선교회
고 안토니오 신부, 라 파트리치오 신부, 진 야고보 신부의 유해가
안장되어 있고, 북한 지역에서 순교하여 유해를 모실 수 없었던
백응만 다마소, 김교명 베네딕토, 이광재 티모테오,
손 프란치스코 신부의 가묘가 조성되어 있다.
아울러 '죽음의 행진' 속에서도 살아남아
교황 사절과 춘천교구장으로 교구의 초석을 놓은
구인란 토마스 주교의 묘도 함께 있다.
오늘은 주일로 이곳 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를 드렸다.
30분 전에 들어가서 미사준비하는 모습과
직접 전례봉사자들이 봉사하는 모습을 유심히 보았다.
먼저 마이크마다 음량 측정기를 들고가 일일이 체크하는 모습,
해설자. 독서자들이 마이크 테스트하는 모습
화답송 연습을 하는 모습 등 거룩한 미사를 위해
철저히 준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주교좌 성당치고 규모는 작았지만 미사진행은 거룩했다.
129. 소양로성당
소양로(昭陽路) 성당은 춘천교구 소속 본당으로
1949년 1월 죽림동(竹林洞) 본당으로부터 분리·설립되었으며,
주보는 성 파트리치오(Patricius)이다.
1949년 1월에 소양로 본당이 설립됨과 동시에 초대 주임으로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의 콜리어(A. Collier, 고) 안토니오 신부가 부임하였는데,
설립 당시 신자수는 약 250명이었고,
이때 발산 공소와 금산 공소가 소양로 본당 관할이 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콜리어 신부는
교구장 퀸란(T. Quinlan, 具仁蘭) 몬시뇰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본당에 남아 신자들을 돌보고 부상자들을 치료하다가
복사 김 가브리엘과 함께 생포되어 6월 27일 인민군에 의해 사살되고 말았다.
이로써 콜리어 신부는 성 골롬반 외방선교회 소속 선교사 가운데
한국 전쟁의 첫 희생자가 되었다.
집사 겸 복사인 김 가브리엘과 밧줄에 묶여 끌려가던 콜리어 신부는
“가브리엘, 자네는 처자식이 있으니 꼭 살아야 하네.
저들이 총을 쏘기 시작하면 재빨리 쓰러지게.
내가 쓰러지면서 자네를 덮치겠네.”라고 말했다.
예상대로 인민군 병사는 경고 한 마디 없이 총을 난사했다.
그때 김 가브리엘은 목과 어깨에 총상을 입었지만 자신을 끌어안고 쓰러진
콜리어 신부 덕분에 목숨을 건져 훗날 그 상황을 생생히 증언했다.
130. 광암이벽묘터
한국교회 창설 주역 중 한 명인 이벽(세례자 요한, 1754-1785)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천주교 신자이자 초기 신앙공동체를 구성한 인물이다.
이벽은 이승훈을 베이징에서 세례를 받아오게 했으며,
그 역시 1784년 겨울 자신의 집에서 이승훈으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이것은 조선 최초의 천주교 세례식으로,
이벽의 집은 한국 천주교회 역사상 처음 세례식이 집전된 역사적 장소이다.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천주교 신자가 있는 가정에서는 자기 집안에 불행을 가지고 올지도 모를
이 종교를 버리게 하기 위해 갖가지 방법을 썼다.
이벽의 아버지도 이벽을 배교시키기 위해 나섰다.
이에 이벽은 자신의 신앙을 감추었고 그 후로는 외부와 모든 연락을 끊은 채 살았다.
그는 가정의 박해속에 살다가 1785년(또는 1786년) 33세를 일기로 요절하였다.
생가터
131. 포천순교성지
홍인과 그의 부친 홍교만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2014년 8월 16일
광화문 광장에서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복자품에 올랐다.
이를 계기로 춘천교구는 같은 해 9월 홍인 레오의 순교터를 순교성지로 선포했다.
포천 성당은 순교터인 한내천변에 부지를 마련해
2015년 복자 홍인 레오의 순교 정신을 기리는 순교현양비를 건립해
축복식을 갖고 포천 순교성지를 조성했다.
구 포천성당
포천 성당 경내에 들어서면 사제관 앞 언덕을 둔중하게 두른 거대한 축대 위에
지붕은 온데간데 없고 벽체만 을씨년스럽게 서있는 석조건물 ‘성 가브리엘 성당’이 있다.
1955년 경 당시 육군 6군단 군단장이었던 이한림(가브리엘) 장군이
군의 원조를 받아 지은 고딕 양식이 가미된 장방형 평면의 강당형 석조 건물이다.
1950년대엔 유난히 석조 건물을 많이 지었는데 포천 성당은
군부대가 직접 세운 것 중 유일하게 남아 있는 성당이다.
1990년 사업에 실패한 전직 경찰 출신이 성당 안 제의실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을 자다가 불을 내는 바람에 벽체만 남긴 채
지붕이며 제대, 성물이 모두 소실되어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불이 난 뒤 지역 신자들이 건물 붕괴를 우려해 성당을 헐어 새로 짓자고 했지만
문화재의 가치가 크다고 판단한 춘천교구장 장익 주교와 포천 성당 신부,
학자들의 주장으로 등록문화재 목록에 올랐고,
2006년 9월 19일 등록문화재 제271호로 지정되었다.
비록 성당안 구조물은 모두 소실됐지만 서쪽 벽에 뚜렷하게 남은 감실과
제의 때 신부들이 감실을 오르내리던 계단은 신자들을 숙연하게 만든다.
제대가 놓여 있던 제단이 두개의 층으로 구분된 것도 흥미롭다.
132. 신암리성당
의정부 지역 신앙의 뿌리가 된 교우촌
신암리는 지금은 농촌이지만 예전에는 산림이 울창했던 곳으로,
조선 말기에 천주교 신자들이 박해를 피해 모여들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신암리에 개성 본당 관할 공소가 설립된 것은 1909년이다.
이때 개성 본당의 주임 신부는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르 장드르(Le Gendre, 崔昌根)였고,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신암리로 와서 판공성사를 베풀고 미사를 집전하였다.
133. 갈곡리성당
박해를 피해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를 굽던 교우촌
의정부에서 서북쪽으로 20km, 문산에서 동쪽으로 12km 지점에 있는 갈곡리(葛谷里) 공소는
옛날에는 칡이 많던 곳이었는지 칡의 계곡(갈곡 : 葛谷)으로 불리었고
순수 우리말로 칡울(칡의 마을)이라 하여 공소 이름도 원래는 ‘칠울 공소’라고 불렸다.
이 마을이야말로 파주 지방 천주교 신앙의 요람이다.
홍천과 인근 풍수원에서 박해를 피해 처음에는 칠울에서 남동쪽 6km 떨어져 있는
‘우골’(현 우고리, 우묵하게 들어간 골짜기)이라는 곳에 정착하여 살다가
5년째 되던 해인 1896년 김근배 바오로, 김연배 프란치스코, 박 베드로 가족이
이곳 칠울로 이주 정착하게 된다.
이로써 구한말 갈곡리와 신암리(경기도 양주시 남면 신암리) 일대에 박해를 피해
집단으로 공동체를 이루며 옹기그릇을 만들어 생계를 유지하던 교우촌이 형성되었다.
갈곡리 성당에 도착해 보니 자매님 5명과 형제 1명이
장아찌를 용기에 담고 있었다.
성지를 둘러보고 성당에 들어가 기도하고 순례도장을 찍은 후
일하고 계신 자매님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성지개발 기금을 마련하기 위해 장아찌를 담궈서 판매하고 있다한다.
우리를 보고 어디서 왔느냐고 물어 제주에서 왔다고 말하자,
제주 어느 본당이냐고 물어 본당을 말하자
김대건 신부님 표착성지에 갔을 때 들렸다고 하시며
형제님이 우리에게 강복을 주시겠다고 했다.
알고보니 본당 신부님이셨다.
우리는 만원짜리 장아찌를 종류별로 1개씩
(고추잎, 고추, 무말랭이, 깻잎 장아찌) 구입하고
10만원을 드렸다. 성지개발기금에 보태시라고~
내일 서울일정이 빡빡해 성지 한 곳을 더 방문하기위해
출발할 때 시간을 보니 4시 20분이었다.
방문지가 참회와속죄성당이라 혹시 일찍 문을 닫을 수 있다는
느낌이 들어 서둘러 출발했다.
참회와속죄성당에 도착하니 5분전 5시였다.
전화벨이 울려서 보니 여주대자의 전화였다.
통화할 시간이 없어 성당입구로 들어서자 직원분이 사무실에서
막 나와서 문을 닫느냐고 묻자 그렇다고 했다.
5분만 기다려 달라고 말하자 그러겠다고 해서
성전에 들러 잠시 기도하고 사진을 찍고 순례도장도 찍었다.
여유있게 외관을 보고나서 대자에게 전화했다.
대자부부가 오늘 우리가 다녀온 소양로 성당에 왔다고 한다.
방명록을 작성하려고 보니 우리 부부의 이름이 있어
너무 기뻐서 전화를 했다고 한다.
2차 여행때 여주 도전리 대자집에서 하루 묵으면서
성지순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눌 때 관심을 갖기에
제주에와서 책자 2권을 사서 보내면서 틈틈이 시간이 날 때
가까운 곳에서부터 순례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부부 모두 직장을 갖고 있어 주말에 가까운 곳부터 시작했다고 한다.
원주교구를 시작으로 오늘 춘천교구를 돌고 있는 모양이다.
대자 라파엘 부부에게 주님의 은총이 함께하시길 빌어본다.
134. 참회와속죄의성당
북한 지역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하고 공경하는 순례지로 선포되었다.
참회와 속죄의 성당과 민족화해센터는 한반도의 평화와 일치를 위해 기도하고
교육하는 장(場)을 마련하자는 김수환추기경의 제안으로
1990년경부터 건립이 준비되었고,
성당은 2008년에, 센터는 2014년에 완공되었다.
성당의 이름은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해
우리 자신의 참회와 속죄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의정부 교구장 이기헌 베드로 주교는 2018년 6월 25일 이 성당을,
북녁의 순교자들을 위해 기도하는 ‘북한 지역의 순교자기념 순례지’로 선포하였다.
오늘 숙소는 파주 딸집으로 정했었는데 1주일 전부터
딸과 손녀 그리고 사위까지 지독한 독감에 걸려 고생하고 있다.
혹여 우리부부에게 전염될까 걱정하여 근처에 숙소를 정하고
저녁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두 돌이 채 안된 손녀가 얼마 전 유아원에 입학해서 다니는데
그곳에서 바이러스를 옮겨온 것 같다고 했다.
딸 가족이 5시 미사 후인 6시에 식당에서 만나기로 했기에
먼저 숙소에 짐을 풀고 식당(도보 5분)으로 가려고 체크인하려는데
아내의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알았다.
내비로 주차장까지 작동했기에 차를 중심으로 전화를 걸어보면서
샅샅이 찾아보았지만 찿지 못했다.
6시가 넘자 딸이 전화가 와서 상황을 설명하고 기다리라고 했다.
얼마전 나도 운전석과 조수석 사이에서 찾은 일이 있기에
그곳을 집중적으로 찾아보니 희미하게 핸드폰같은 것이 있었다.
손을 넣어도 들어가지 않고 손가락 끝으로 집으려하면 미끌어내렸다.
내 것은 핸드폰 케이스가 있지만 아내는 없어서 아주 얇았기 때문이다.
겨우 꺼내고 호텔룸에서 찾고 있는 아내에게 전화를 하고 식당으로 향했다.
오늘 낮에 죽림동주교좌 성당에서 미사드릴 때,
무음으로 한 것을 풀지않아
전화를 걸어도 울리지 않은 것이었다.
우리 부부의 식성에 맞추어 해물과 갈비찜을 시켰다.
나는 해물을 주로 먹으며 사위와 소주를 주고 받으며 이야기를 나누었다.
맛있게 먹는데 입에 묵직한 것이 혀에 걸렸다.
꺼내보니 치아였는데 임플란트한 것이 빠진것으로 알았다..
제주에 와서 치과에 가니 임플란트가 아니라 씌웠던 이가 부러진 것이란다.
이가 빠진 후에도 시킨 음식을 맛있게 먹고 딸 가족과 헤어지고 숙소로 향했다.
오늘 하루도 여러가지 에피소드가 일어난 순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