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저울을 자비의 저울로 눅 6:36~38
성도 여러분, 혹시 일요일 아침부터 꼬여버린 하루를 경험해 보신 적이 있으신가요? 아침부터 스웨터에 커피를 쏟고, 주변 사람들에게 참견을 당하고, 반갑게 건넨 악수를 거절당하고, 심지어 교회 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할 뻔한 그런 날 말입니다.
온갖 짜증으로 가득 찬 마음을 안고 성경 공부 소모임에 앉았는데, 그날따라 주제가 예수님의 말씀인 "판단하지 말라"였습니다.
한 중년 여성은 "내 눈의 들보를 뺀 다음에야 제대로 판단해야 한다"며 여전히 판단하는 쪽에 무게를 둡니다.
한 청년은 "진실한 사랑이란 죄를 눈감아주는 것"이라며 방임을 사랑이라 말합니다.
어르신 한 분은 이 구절을 세상 단체들이 오용하는 것에 분개하십니다.
결국 그 자리에 모인 누구도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어떻게 실천해야 할지 알지 못한 채 씁쓸하게 헤어지고 맙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중 이 "판단하지 말라"는 말씀만큼 우리를 답답하게 만드는 것도 없습니다. 무작정 죄를 눈감아줄 수도 없고, 그렇다고 남을 심판하자니 '판단의 죄'를 짓는 것 같아 괴롭습니다.
결국 우리는 이 말씀을 '지키기는 불가능한 말씀'이라 생각하며 마음 깊은 곳에 묻어두곤 합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에 담긴 진짜 의미를 깨닫고, 우리의 깨어진 관계와 상처받은 마음을 치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를 소망합니다.
본론 1: 유리한 저울로 판단하라 (무죄 추정의 원칙)
예수님이 말씀하신 "판단하지 말라"는 가르침은 하늘에서 갑자기 뚝 떨어진 말씀이 아닙니다. 이미 예수님 이전부터 유대 사상가들이 깊이 고민해 온 화두였습니다.
주전 120년경, 유대교의 위대한 랍비 '예호슈아 벤 페라키아'는 이런 지혜를 남겼습니다."각 사람을 유리한 저울로 판단하라.“
시장에서 물건을 팔 때 저울에 덤을 조금 더 얹어 주듯이, 타인의 행동을 바라볼 때 너그러운 마음으로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해 주라는 뜻입니다.
탈무드에는 이에 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습니다.한 일꾼이 주인집에서 3년 동안 성실히 일한 뒤 고향으로 돌아가며 품삯을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주인은 돈도, 곡식도, 가축도 없다며 단 한 푼도 주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일꾼은 깊이 낙심했지만, 주인을 원망하거나 고소하지 않고 묵묵히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주인은 약속한 품삯과 엄청난 선물을 마차에 싣고 일꾼의 집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내가 아무것도 없다고 했을 때 속으로 나를 원망하고 의심하지 않았나?“
일꾼은 대답했습니다."돈이 없다고 하셨을 때는 다른 곳에 투자하셨나 보다 했고, 곡식과 가축이 없다고 하셨을 때는 아직 십일조를 들이지 못해 쓸 수 없으신 줄 알았습니다.“
실제로 주인은 아들이 서원한 일 때문에 재산을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는 피치 못할 사정이 있었습니다.
일꾼은 주인의 기이한 행동 이면에 숨은 동기를 가장 선한 쪽으로 해석하는 '우호적 판단'을 했던 것입니다.
우리 삶에 이 원리를 적용해 보면 어떻습니까?
아침에 나를 참견하던 동료는 나를 괴롭히려는 것이 아니라 '진심으로 걱정해서'였을지 모릅니다.
내 악수를 거절하고 지나간 사람은 나를 무시해서가 아니라 '감기를 옮기기 싫어서'였거나 '극도로 낯을 가려서'였을지 모릅니다.
내 앞에 무례하게 끼어든 차량은 '화장실이 너무 급해서'였을지도 모릅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무슨 피치 못할 좋은 사정이 있겠지" 하고 일부러 더 좋게 생각(우호적 판단)해 주는 영적 습관이, 분노로 가득 찬 나 자신과 이 세상을 바꾸는 강력한 시작점이 됩니다.
본론 2: 섣부른 판단의 독성과 아픔
우리가 의식적으로 상대방의 입장에서 변명거리를 찾아주는 '우호적 판단'을 훈련해야 하는 이유는, 우리의 섣부른 판단이 너무나 많은 이들에게 깊은 상처를 주기 때문입니다.
유명한 목회자 찰스 스윈돌 목사님의 일화입니다.한 부부가 세미나에 참석했는데, 남편이 설교 시간마다 졸고 찡그리며 불성실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목사님은 속으로 '말과 행동이 다른 가짜 신앙인'이라며 그를 마음껏 비판하고 정죄했습니다.
하지만 세미나 마지막 날, 아내가 찾아와 눈물을 흘리며 전한 진실은 충격적이었습니다. 남편은 살날이 몇 주 남지 않은 말기 암 환자였던 것입니다. 극심한 고통과 약 기운 때문에 졸음을 이기지 못하면서도, 목사님의 설교를 너무나 듣고 싶어 해 마지막 소원으로 그 자리에 앉아 있었던 것입니다.
목사님은 자신의 판단이 완전히 틀렸음을 깨닫고 깊은 자책감에 빠졌습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는 모습만 보고 남을 너무 쉽게 '유죄'로 판단해 버립니다. 그러나 그 사람의 삶의 이면에는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눈물과 아픈 사정이 숨겨져 있습니다.
부부 관계를 연구하는 학자 가트맨은 관계를 망치는 요인 중 가장 최악의 독을 '경멸'이라고 말합니다.
비난은 상대방의 잘못된 행동을 지적하는 것이지만 ("당신은 이기적이야"), 경멸은 상대방의 존재 자체를 무시하고 심판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낙오자야, 네 안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없어").
우리가 이 부정적인 판단의 소용돌이에 빠지면, 서로를 향해 가장 최악의 시선을 던지게 되고 결국 모든 관계는 파탄에 이르게 됩니다.
본론 3: "판단(크리노)"의 진짜 의미와 자비의 부르심
예수님께서 "판단하지 말라"고 하셨을 때, 원어 성경의 '판단'은 헬라어로 크리노입니다. 이 단어는 사리를 구별하는 '분별'의 의미도 있지만, 법정에서 최종 선고를 내리는 '정죄(심판)'의 의미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잘못된 것을 보고도 눈감아주는 영적 장님이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행동의 옳고 그름은 '분별'하되, 그 사람의 인격과 존재 전체에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리는 '정죄'를 하지 말라고 경고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분노가 일어날 때 형제를 향해 "라카(바보)" 혹은 "미련한 놈"이라고 모욕하곤 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화풀이가 아닙니다. 상대방을 향해 "너는 가망이 없고 희망이 없는 인생이야"라고 내 마음대로 최종 평결을 내리는 교만입니다.
랍비 힐렐은 말했습니다."그 처지가 되기 전까지는 동료를 판단하지 말라.“
이웃이 무례하게 행동할 때, 그가 자라며 받았던 학대의 상처나 감당하기 힘든 우울증의 무게를 우리는 다 알지 못합니다. 타인의 숨은 동기와 마음의 중심을 온전히 아시는 분은 오직 창조주 하나님 한 분뿐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남을 심판하고 정죄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위와 재판장의 자리를 내가 찬탈하려는 무서운 교만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남을 판단할 수 없는 가장 결정적인 이유를 이렇게 폭로하십니다.
"판단하는 너나, 판단을 받는 이웃이나, 둘 다 내 눈 앞에는 자비가 필요한 똑같은 죄인이다.
"남을 정죄하는 내 속마음 역시 추악한 죄악과 독선으로 가득 차 있음을 우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하나님께 자비와 용서를 구하는 죄인이라면, 나 또한 이웃에게 자비를 베푸는 자가 되어야 마땅합니다.
결론: 자비의 저울을 손에 쥐십시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주님은 누가복음 6장을 통해 우리에게 명확한 길을 제시하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자비로우심같이 너희도 자비로운 자가 되라. 비판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비판을 받지 않을 것이요 정죄하지 말라 그리하면 너희가 정죄를 받지 않을 것이요 용서하라 그리하면 너희가 용서를 받을 것이요 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줄 것이니..." (눅 6:36~38)
예수님이 말씀하신 "판단하지 말라"는 것은 방관이 아닙니다.
"너도 똑같이 하나님의 자비 없이는 살 수 없는 죄인이면서, 마치 하나님이라도 된 것처럼 이웃의 인생에 최종 사형 선고를 내리지 말라"는 엄중한 경고이자 자비로의 초대입니다.
이번 한 주간, 삶의 자리에서 부정적인 판단의 유혹이 찾아올 때마다 의식적으로 '우호적 판단'의 저울을 꺼내 드시기를 바랍니다. "그 사람에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겠지" 하며 한 걸음 물러나 자비의 시선으로 바라보십시오.
그때 비로소 내 마음의 분노가 가라앉고, 깨어진 관계가 회복되며, 우리 삶에 하나님의 풍성한 자비가 임하게 될 줄을 믿습니다.
우리 모두가 정죄의 재판관이 아니라, 자비의 통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