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5주일 가해] 요한 14,1-12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오늘 복음은 최후의 만찬을 마치신 예수님이 당신께서 겪으셔야할 수난과 죽음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신 부분에 이어지는 내용입니다. 동료의 배신으로 인한 혼란, 수제자인 베드로가 예수님과의 관계를 부정하게 될 정도로 가혹하게 닥쳐올 박해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 이런 것들로 인해 분위기는 어수선했고, 제자들의 마음은 여러 근심 걱정들로 가득차 무척 심란한 상황이었지요. 예수님은 제자들이 그런 암울한 상황에서 느끼는 불안함과 두려움을 당신에 대한 굳은 믿음의 힘으로 이겨내도록 이끄시고자 그들에게 오늘의 가르침을 주십니다.
먼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이 없도록 하여라. 하느님을 믿고 또 나를 믿어라.” ‘산란하다’라는 말은 ‘마음이 어수선하고 뒤숭숭하다’는 뜻입니다. 3년을 동고동락하던 ‘동료’중에 배신자가 나오고, 그 때문에 스승님께서 반대자들의 손에 붙잡혀 고초를 겪으시며, 그 과정에서 공동체가 혼비백산하여 뿔뿔이 흩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 ‘불안함’과 ‘두려움’에 빠질 게 아니라, 오히려 믿음이 굳건해 질 수 있는 계기로 삼으라는 것입니다. 불안함과 두려움으로는 아무 것도 해결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때문에 상황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야가 흐려지고, 몸과 마음이 위축되어 충분히 해낼 수 있는 일들도 지레짐작으로 포기해버리기 때문입니다. 비 온 뒤에 땅이 더 굳어집니다. 매서운 겨울 추위를 견뎌낸 봄동배추가 더 달고 맛있는 법입니다. 주님께서 당신을 따르는 이들에게 시련과 고통을 겪게 하시는 것은 그 과정을 통해 스스로 주님께 대한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면서, 무엇이 부족하고 어떤 부분이 잘못되었는지를 확인하며, 부족함을 채우고 잘못된 부분을 바로잡아 더 깊고 단단한 믿음을 지니도록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 주님을 굳게 믿는다면, 내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해 시련의 여정을 준비하신 그분 섭리를 신뢰한다면, 그분 섭리 안에서 훌쩍 자란 자신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런 주님의 섭리를 그저 머리로 ‘안다’고 해서, 믿음의 여정을 지속할 힘이 자동적으로 생기는게 아니지요. 먼 여행길을 떠나려면 자동차에 연료를 충분히 채워야 하듯, 머나먼 믿음의 길을 떠나려면 우리 마음 속에 연료를 충분히 채워야 합니다. 우리가 믿음의 길을 달릴 연료는 바로 ‘희망’, 보다 정확히 말하면 ‘하느님 나라’에 대한 참된 희망입니다. 그렇기에 주님께서는 우리보다 먼저 ‘하느님 나라’로 가시어, 그곳에 우리가 지낼 거처를 마련해주겠다고 하십니다. 이 세상에서 잠시 지낼 거처인 ‘집’을 마련하는 일에도 걱정하고 근심하는 우리들이기에, 그리고 그 거처를 마련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삶의 가장 큰 숙제를 끝냈다는 안도감과 성취감에 큰 기쁨을 느끼는 우리들이기에, 우리가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토록 머무를 거처를 당신께서 직접 마련해주시겠다는 주님의 약속은 우리에게 큰 힘과 희망이 됩니다. 그런데 그 약속 뒤에 이어지는 말씀이 우리를 갸웃거리게 만듭니다. 주님께서 가시는 ‘하느님 나라’가 어디인지, 그곳에 가려면 어느 ‘길’로 가야하는지를 우리가 ‘이미 다 알고 있다’고 하시니 어안이 벙벙해지는 겁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강조하신 것은 목적지가 아니라 ‘길’ 자체입니다. 주님 입장에서는 우리 신앙생활의 목적지가 ‘하느님 나라’로 이미 정해져있기에 굳이 목적지를 따로 언급하실 필요가 없지요. 그런데 우리는 그 나라를 눈으로 볼 수도, 그 나라가 어떤 곳인지를 제대로 알 수도 없습니다. 목적지를 제대로 볼 수도 없고 정확히 알지도 못하니 우리 입장에서는 ‘어떻게 거기에 갈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을 품는게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런 의구심을 품는건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목적을 이룰수 있다면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다는 세상의 관점에 물들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길’을 보여주시며 그 길만 따라가라고 하시는데도, ‘목적지’를 알려달라고 합니다. 일단 그 목적지가 어딘지를 파악한 후에 최대한 쉽고 편한 길로 가보겠다는 심산입니다. 그러나 구원에는 그런 길이 없습니다. 그저 꾸준히 그리고 충실히 주님 뜻을 실천하며 그분 뒤를 따라가는 것만이 하느님 나라에 다다르는 유일하고도 완전한 길입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은 우리에게 바로 그 ‘길’이 되어주고자 하시는 겁니다.
처음 가보는 산행길에서 먼저 올라간 이들이 나뭇가지에 묶어둔 표식은 큰 힘이 됩니다. 그 표식이 먼저 올라간 이들이 고생해가며 개척한 ‘길’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그 산의 정상이 어디에 있으며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더라도, 그 ‘길’만 열심히 따라가면 정상까지 안전하게 도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그 일을 하셨습니다. 우리가 유혹에 휘둘려 엉뚱한 곳에서 헤매지 않도록, 욕심에 눈이 멀어 벼랑인지도 모르고 가다 굴러떨어져 다치지 않도록, 당신 말씀과 가르침으로 우리 삶 곳곳에 사랑의 ‘이정표’를 남겨주셨습니다. 당신이 너무나 사랑하시는 우리를 위해 직접 하느님 나라로 가는 ‘길’이 되어 주신 겁니다. 그러니 우리는 그 길만 충실히 따라가면 됩니다. 주님의 뜻과 가르침에 맞는 것이라면 ‘예’하고 따르고, 그분 말씀과 뜻에 어긋나는 것이라면 ‘아니요’하고 단호하게 끊어내면 됩니다. 구원의 길은 어렵지만 복잡하지 않습니다. 힘들지만 단순한 길입니다. 거북이처럼 요령 피우지 않고 우직하게 주님의 길만 걷다보면 어느 새 ‘하느님 나라’에 다다르게 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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