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이야기] 고미술품과 분묘 도굴
글 : 제이풍수사
글 게시일 : 2023. 9. 8.
경주에 있는 진덕여왕릉(사적 24호)
1997년 8월, 경주에 있는 진덕여왕릉(사적 24호)이 도굴을 당해 나라가 시끄러웠다. 왕릉의 동북쪽 호석 하단부에 45도 각도로 길이 3미터 폭 1미터 정도의 흙이 파헤쳐졌다. 이 왕릉은 도심에서 외따로 떨어져 있고, 순찰도 하루에 두 차례 관리인이 육안으로 잠깐 둘러보는 수준에 그쳐 항상 도굴될 위험에 처해 있었다. 경주에는 시가 관리하는 왕릉이 36기나 되나, 이미 12기가 도굴되었고 나머지도 도굴 여부가 불확실한 상태이다. 도굴범들은 파낸 흙을 다시 제자리에 메우는 등 범행 흔적을 남기지 않기 때문에 전문가라도 모르기 십상이다.
1999년 3월 하순에는 고분에 매장되어 천 년의 세월을 보냈거나 혹은 사찰에 보관 중이던 국보․보물급 문화재를 도적질 해 암거래시킨 도굴범 일당이 쇠고랑을 찬 사건이 일어났다. 시가 1백억 원에 이른다는 거금도 놀랍지만 더욱 놀라운 일은 그들의 대담한 도굴 수법이다. 한적한 사찰만을 골라 불상 뒤쪽에 걸어 논 탱화를 수거(?)하기도 했고, 불상의 어깨 부분을 뜯어낸 다음 내부에 있던 불경까지 훔쳤다고 한다.
필자가 서산의 상왕산에 있는 개심사(開心寺)를 들렸을 때다. 대웅전 안을 들여다보니 불상 뒤쪽을 노란 베니어판으로 가려 놓았다. 고개가 갸우뚱거렸다.
“스님, 후불탱화는 어디로 가고 베니어판으로 가렸지요?”
“못된 자들이 침입해 대웅전 뒤쪽 벽을 헐고 훔쳐갔어요.”
스님은 산 중턱으로 도둑들이 도망치며 남긴 발자국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너무나 대담한 그들의 행동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 문화재 관리의 엄연한 현실이다.
오늘 날 수십억 원을 호가하는 희귀 문화재들은 대부분 일제 강점기와 6․ 25 이후 혼란한 정국을 틈타 전문 도굴꾼들이 땅 속에서 파낸 것들이다. 도굴꾼들은 전국을 누비며 무덤 속에 묻힌 부장품을 몰래 파낸 다음 돈 많은 수집가에게 팔아 넘겼다. 그래서 고고학자들은 우리나라가 ‘도굴꾼의 천국’이라고 개탄한다. 특히 영남 지방에 산재한 고분군은 2~3%만 온전할 뿐 나머지는 모두 도굴 피해를 보았다고 한다.
도굴범들이 분묘를 도굴할 때면 언제나 특수 제작된 3미터 짜리 쇠꼬챙이를 이용하는데, 전문가라면 그것을 땅 속에 찔러 보기만 해도 그 속에 무엇이 들었는지 귀신같이 알아맞힌다고 한다. 도자기가 들었다면 사각사각하고 소리가 날 것이며, 금속유물이 들었다면 쇠 긁는 소리가 드륵드륵 날 것이다. 그렇다면 유골만 들었다면 과연 어떤 소리가 날까?
여기서 도굴범에게 가장 난감한 문제는 이미 산등성이로 변한 산 속인데, 어디에 보물급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가 있는가 하는 점이다. 이 때에 풍수지리에 통달한 지관이 필요하다고 한다. 이번에 수배된 이모씨 역시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찾는데 일인자로 손꼽히며, 많은 도굴범들까지 그에게서 분묘 감식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동양의 지리관인 풍수지리가 도굴범의 앞잡이로 이용당하는 한심한 세상이다.
그렇다면 과연 풍수에 도통한 자라면 문화재가 매장된 분묘를 쉽게 찾을 수 있는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가 않다. 이는 풍수학을 모르는 사람들이 ‘아마 그렇겠지.’라고 추측한 결과에 불과하다. 전국에 산재한 역사 인물의 묘를 찾아 발 품을 아끼지 않았던 필자이다. 그런데 과연 몇 명이나 풍수적 명당에 자리를 잡았는지 그 숫자가 의문스럽다. 풍수적으로 본다면 분묘 찾기가 더욱 어려울 정도로 혈(穴)에 제대로 묘가 자리잡은 경우는 드물다. 그럼 왜 그런 얘기가 나돌까?
이것은 족보에 밝은 사람이 패철을 약간만 볼 줄 알아도 충분한 일이기 때문이다. 족보에는 조상의 묘가 어떤 산에 어떤 좌향(坐向)으로 놓아졌다는 기록이 나온다. 따라서 벼슬이 높아 매장 유물이 있을 법한 조상의 이름을 족보에서 빼낸 다음, 그 분의 묘가 있다는 산을 찾는다. 그 다음엔 청룡과 백호가 잘 감싼 산 능선을 찾고, 이어서 족보에 기록된 좌향에 맞는 자리를 패철로 찾는다. 이미 폐묘(廢墓)로 변해 초목으로 덮였더라도 패철만 이용하면 좌향을 기준으로 쉽게 찾을 수 있다. 결국 도굴의 주범은 풍수가 아니라 족보로 밝혀지는 셈이다.
강화도에 소재한 김취려 장군 묘
강화도에 소재한 김취려 장군 묘
강화도에 있는 김취려(金就礪, ?~1234) 장군의 묘도 어느 도굴꾼이 묘를 도굴한 다음 지석(誌石)을 흘렸기 때문에 세상에 드러났다. 김 장군은 거란족이 이름만 들어도 몸을 숨기던 맹장으로 제천까지 침입한 거란병을 물리쳤고, 그 때의 전승비가 지금도 박달재 고개에 서 있다. 묘지명(墓誌銘)에 ‘고종 갑오년(甲午年, 1234년) 7월 12일, 진강산(鎭江山) 대곡동(大谷洞) 서쪽 기슭에 예장하였다’라고 기록되었으니, 간 부은 도굴꾼이라면 한 번쯤은 군침을 흘렸을 법하지 않았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