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조사 배경 빠리의 Marechal Leclerc 기념관과 Jean Moulin 박물관에서는 현재 Accessoires et objets, temoignages de vies de femmes a Paris 1940-1944 (1940-1944년 동안의 빠리에서의 여성 생활을 증언하는 악세서리와 오브제) 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조사 목적 독일군 점령의 암울했던 시기의 빠리 여성들이 사용했던 악세서리와 오브제들이 어떤식으로 생활 속에 조화되며 생활화 되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조사 방법 2009년 8월 23일, 빠리의 Marechal Leclerc 기념관 - Jean Moulin 박물관을 직접 방문하여 전시회를 관람하였다.
조사하면서 느낀점이나 제언사항 이 시기의 프랑스인들의 모드와 관련된 삶과 문화, 지혜를 돌아보는 좋은 경험이었다. 독일군의 유태인 학살로 사라진 재능있고 유망한 유태인 출신의 모디스트 (모자 제조인)인 Fanny Berger를 발견하게 되는 기회가 되었다.
|
|
Accessoires et objets, temoignages de vies de femmes a Paris 1940-1944 전시회 개요
|
기간 : 2009년 5월 20일 - 2009년 11월 15일
전시기획 : Fabienne Falluel, Marie-Laure Gutton, Christine Levisse-Touze
Scenography : Jean-Jacques Raynaud
|
1995년 부터 Memorial Marechal Leclerc de Hauteclocque (Leclerc 원수 기념관) - Jean Moulin 박물관은 2차 세계 대전중의 빠리의 저항, 집단 수용소에의 강제 수용, 독일 점령으로 부터의 빠리 해방에 관련된 전시회들을 소개하고 있다. 처음으로, 빠리의 Galliera 박물관과 공동 참여로 Galliera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300여점의 오브제들로 구성된 이 전시회를 기획한다. 모자, 가방, 신발등의 오브제들은 능수 능란함과 멋부리기를 잘 조화시키는 암흑의 시기의 빠리를 잘 증언하는 오브제들이다. 이 악세서리들은 사진, 모드 잡지, 포스터, 샹송 음반과 시사 뉴스의 영상들과 함께 전시되어 있다. 이 악세서리들과 문헌들의 증거 자료들은 독일군 점령 시대의 역사적 상황을 잘 보여 준다.
|
|
Memorial Marechal Leclerc de Hauteclocque - Jean Moulin 박물관 외관 사진 | |
|
1940년에서 1944년까지, 빠리 여성들은 점령군과 비쉬 (Vichy) 정부에 의해 강요된 상황에 적응한다 : 가게 앞에서의 몇기간에 걸쳐 기다리기, 추위로 부터 몸을 보호하기, 빠리에서의 이동과 같은 제약등. 이 모든 것들에도 불구하고, 이 시기에 유일하게 난방이 된 장소였던 극장, 연극장등을 그 어느때 못지 않게 많은 사람들이 찾는다.
이 제약들에 맞서, 창의력을 늘리고 생산을 결핍, 부족 (나무로 연결하거나 웨지 힐의 신발창, 멜빵으로 만든 배낭)에 적응하는 제조원, 장인, 수공예자들처럼, 빠리 여성들은 재활용,대체, 익살과 같은 기술에서 그 재능을 한층 발휘한다. 대용품(인조 견사, 인조 양모), 익숙치 않은 재료들(신문 종이, 나무) 혹은 사용한 재료들(바퀴, 천과 가죽 조각등…)의 사용이 절대 필요했다.
악세서리는 기능과 사용에서 상징적 역할을 한다. Vichy 정부의 선전 활동 도구 (Petain의 초상화가 인쇄된 스카프)로, 또는 저항세력의 활동에서도 사용되었다 (팜플렛을 숨기기 위한 바닥과 칸막이가 이중으로 되어있는 가방). 이렇듯, 악세서리는 비극적 순간에서 빠리 해방의 기쁨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빠리 여성의 일상 생활을 함께한다.
|
|
▶ 1. 모드 현상들 |
전시회 첫 부분은 관중들에게 독일군 점령하의 유명 브랜드 생산과 빠리 여성들이 여성 잡지들에서 보고 직접 만든 오브제들을 통해 본 악세서리들의 큰 흐름을 총괄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
1. 실루엣의 변화 세계 2차 대전동안, 여성 실루엣의 구조주의적 형태와 기하학적 형태의 경향은 자주 기상천외하고 과도한 크기의 악세서리들과 함께하는데, 여기서 모자는 중요한 자리를 차지한다.
|
|
|
|
1939-1940년대의 실우엣 데생 |
|
1941-1942년대의 실루엣 데생 | |
1939년은 1938년의 콜렉션의 정신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독자적이며 로맨틱 스타일에 충실했다. 새로운 경향이라면 전쟁의 시작 초기부터 투피스의 도래이다. 보라빛 작은 부인용 모자와 멀티컬러의 짧은 장갑들은 군사복 스타일의 복장들에 명랑함을 가미하는데 일조한다. 이해의 겨울에는 빨간색과 검정이 인기있는주요 색상이었다.
1941년과 1942년의 여성 잡지들은 이 시기의 모드 경향을 ≪모든 모자는 스카프와 함께 ≫ (Mode du Jour지, 1941년 1월 30일) 혹은 독창적 아이디어의 대담한 단추 (L’Officiel지)로 묘사하고 있다. 과도기의 시기인 이 2년은, 중세의 스타일부터 노스탈직한 시각의 Belle Epoque 시기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인 무의식적인 추억들을 많이 되돌아 보는 듯하다.
1942년 가을 겨울 콜렉션부터 나타나는 과장됨은 눈여겨 볼 만하다. 뚜렷한 실루엣, 짧아진 치마 기장, 사다리꼴 모양의 큰 사이즈의 가방, 커다란 모자, 이 모든 것 들은 균형 비율을 혼란에 빠뜨린다. 1943년 5월 10일짜의 Marie-Claire지는 ≪ 최근의rue de la Paix (Paix 거리)의 이러한 새 아이디어들 ≫에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
|
1939-1940, 1941-1942, 1943-1944년대의 실루엣을 보여주는 데생들과 동시대의 악세서리들 | |
2. 모드 경향들 ≪ 스코틀랜드식이 유행이다. 지난 7월 14일자 잡지에서 당신은 스코틀랜드인들의 화려한 자태에 강한 인상을 받지 않았습니까? 그런거 같습니다, 왜냐면 빠리에서 킬트차림을 많이 보게 되니깐요... ≫ (1939년 10월호 Plaisir de France지). 1939년과 1940년에 프랑스군과 연합군의 존재는 모드 경향에 영향을 미친다. 이 밀리터리 영향은 특히 스코틀랜드 군사모인 Glengarry 혹은 알제리 원주민 보병대가 착용했던 붉은 셰샤 모자를 재해석한 모자들에서 특히 잘 나타난다. 게다가 이 알제리 원주민 보병대는 헤르메스의 1940년 카탈로그에 있는 Petits Soldats 스카프에서도 등장한다. 군인들은 보석상과 보석 세공인들에게도 감흥을 주는데, Boucheron의 브롯지에는 비행사, 알프스 전투기 조종사, 포병 혹은 기갑부대병의 이미지들을 볼 수 있다. 이와 병행해서, 영국 공군의 파란색은 악세서리와 재단사들에게 많은 어필을 한다. 이 군사 의복의 영향은 빠리 해방에서 다시 나타나는데, 특히 모자들에서 많이 나타난다. 1940년 2월호의 Marie-Claire지는 ≪ 스코틀랜드식은 모든것과 잘 어울린다. ≫라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전쟁동안의 스코틀랜드 체크 무늬의 성공을 잘 설명해 준다. 박진감 있는 모드 현상중 하나로는 몇몇 여성들은 독일 점령군을 자극하기 위해 연합군을 찬양하는 방도로 스코틀랜드 체크를 착용하기도 하였다. 파란색, 흰색, 빨간색의 삼색은 이 암훌한 시기에 널리 퍼진 또 다른 유행중의 하나이다. 프랑스를 상징하는 이 삼색은 악세서리 뿐만 아니라 의복에도 폭넓게 나타난다.
|
2_Ⅰ. 밀리터리 영향
|
|
|
|
Therese Peter 의 베레모 |
|
깃털로 장식한 모자 | |
2_Ⅱ. 스코틀랜드
|
|
Plaisir de France지, 1939년 10월호의 스코틀랜드 체크가 유행임을 보여주는 사진들
| |
|
|
|
스코틀랜드식 모자와 우산 |
|
스코틀랜드식 체크 무늬의 의복 데생 | |
2_Ⅲ. 프랑스 상징의 삼색 : 파랑, 빨강, 흰색
|
|
|
|
Leyrat 부인의 삼색 터번 착용의 초상화. 삼색이 주를 이루는 헤르메스 스카프
| |
|
|
|
- 라피아 야자수로 엮어 만든 신발과 종이 끈으로 엮어 만든 가방,1941-1942년 - 세라믹으로 만든 Tambourins 단추
| |
|
|
|
- Silhouettes지 1943년 7월호 표지 - 곤색바탕에 조명 램프들의 모티브가 인쇄된 드레스, 1939년 | |
3. 모자 제조인들 : 우아함과 기상천외함의 모자
|
|
시대적 제약에 맞서 순간적이며 매혹적 아이템인 모자를, 1941년 2월호의 Image de France지는 창조 정신과 여성을 창조자들처럼 구분하는 마지막 도피처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1939년의 Annuaire de la Chapellerie et de la Mode (모자제조와 모드 일람표)는 1900개가 넘는 장신구 제조인들이 있었음을 조사했는데, 이 숫치는 독일군 점령 시기에도 꾸준히 거의 같은 수로 존재했었다. 많은 모자 제조인들은 집이나 작은 그들의 가게에서 작업을 계속했다. 이들외에도, 162개의 모자제조인과 haute mode (high fashion)으로 분류된 25명의 디자이너들이 있었다. Rose Valois, Mme Agnes, Claude Saint-Cyr, Caroline Reboux, Albouy, Gilbert Orcel 그리고 자전거를 탈 때 아주 유용한 터번을 유행시킨 Paulette가 이들중에 속한다.
모자는 분명 독일군 점령기간 동안에 모드 악세서리들 중에서 가장 눈에 띄는 변화를 겪는다. 1940년과 1941년에 빠리 여성들은 작은 부인용 모자와 챙 없는 모자들은 착용하는데, 이마쪽으로 특히나 오른쪽으로 많이 기울여지게 착용한다. 1942년 여름부터는 모자 챙이 다시 되살아나고, 두건이 뒤집어 머리뒤쪽으로 세우는 두건. 모자의 볼륨은 점점 커지는데 1944년에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모자 제조인들은 ‘사용하는 텍스타일의 양을 줄인다’는 1942년의 오뜨 꾸띄르 (haute couture) 조직 위원회의 의무를 이행하지 않은 것 같다. 게다가 그들의 모자에 튤, 그물 장식끈, 오랑케꽃, 깃털, 천으로 된 꽃등을 장식한다. 이 장신구의 격함과 과장된 볼륨은 독일 점령군에 맞서는 존엄과 거만함의 비약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하지만 이들은 무엇보다도 무기력과 실망을 증언하고 있다.
|
|
|
모자 진열관 사진과 Figaro지의 Album de la Mode의 모자들 일루스트레이션, 1942-1943 겨울
| |
|
|
|
Rose Valois의 녹색 벨벳 터번, 1943년 |
|
튤로 장식한 모자 | |
|
|
|
|
- 빨간 프트러, 흰새과 회색의 줄무늬의 사틴 모자, 1943-1944년 - Catherinette 모자, 1944년 | |
4. 구두 제조와 가죽 제품 제조
|
|
|
|
Leandre와 Gresy의 샌들 데생, 1940 1944년. Leandre의 짧은 부츠, 1942년경
| |
|
|
|
Bally 샌들, 1940-1941년 |
|
Maniatis 샌들, 1942-1944년 | |
|
|
|
|
- Duvelleroy 핸드백, 1942년경. 페이즐넛 문양의 숄로 만든 핸드백. Duvelleroy 메종은 고객들에게 숄을 우아한 핸드백으로 변형하여 제안했었다. - Lilette 핸드백, 1942년경, 뱀피를 가죽에 붙여 만든 금장 장식의 잠금 핸드백 | |
5. 보석상, 보석 제조인
|
|
|
|
- Jean Schlumberger가 Elsa Schiaparelli를 위해 만든 곰 클립, 1939년 - Elsa Schiaparelli를 위해 고안한 Henry 보석들의 데생, 1942년
| |
|
|
|
- 하트 재떨이, Max Boinet, 1942년 - Jeanne Lanvin의이브닝 머리 장식, 1944년
| |
|
|
|
|
Jeanne Lanvin의 이브닝 드레스, 1942-1943년
드레스의 정면, 뒷면, 측면 사진
소매 바깥 부분과 허리 부분에서 보석 장식 처리된 롱 드레스
| |
|
|
|
- 꽃모양의 브로치들과 귀걸이의 모티브들, Boutique Lafargue, 1940-1945년 - Line Vautrin의 귀걸이에 연결되는 헤어 악세서리들, 1942-1943년
| |
|
|
|
- 흙을 구워 에나밀 처리한 금속테의 브로치들, Maison Mittler, 1944-1944년 에나밀 처리한 세라믹 단추들, Maison Mittler, 1944-1944년 - Ralco 여성용 시계 (1940년). 팬던트, 1942년 | |
6. 장인들의 수공예 제조 독일군 점령 시기 동안에도 장인들은 수공예 제조의 악세서리들을 계속 만들어낸다. 어떤 유명한 아티스트들 시대적 필연적 이유에 따라 혹은 본인의 의지에 따라 그들의 재능과 재치를 모드에 접목시킨다.
|
|
Dunand의 샌달, 1941년 보라색 타프타 소재, 나무로 조각한 신발창
| |
|
|
모자에 쓰이는 재료(나무의 대팻밥)를 준비하는 작업 모습과 당시의 모자 착용 자료 화면들
나무의 대팻밥으로 만든 Madame Agnes의 모자
| |
|
Nathalie Ehrenbourg-Mannati의 신발 원본 샘플들, 1942-1944년.유태인 출신의 유명한 텍스타일 디자이너인 Nathalie Ehrenbourg-Mannati는 1925년 빠리의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ecoratifs (국제 장식 미슬 전시 박람회)에도 출품했었다. 독일 점령하에서도 다행히 체포되지 않고 무사히 살아 남았다.
| |
|
Berry Pol Jean의 세라믹으로 만든 여러 모양의 단추들, 1942-1944년 | |
7. Home made ≪ 여성들 스타일의 원천은 무한하다. 사용한 의복에, 레이스, 장식줄, 리본등 다양한 배치를 조합할 수 있다. ≫ 1941년 10월 9일짜의 Mode du Jour지는 이렇게 그들의 구독자들도 능란함의 솜씨를 발휘하게 유도한다. 여성 잡지들은 ≪ 집에서 만들기 ≫라는 주제에 많은 기사들을 할애한다. 이 잡지들은 크로키, 패턴과 같은 유용한 정보를 독자들에게 제공한다.
이를 위해, 여성들은 이차적인 재료들을 사용하고, 끈과 침대 매트리스에 있는 밴드 또는 실내 장식의 장식줄을 재활용 하고, 장갑이나 가방을 만들기 위해 낡은 옷을 재단하곤 한다. 양모가 귀해져 주부들은 뜨개질해서 만든 낡은 옷들을 풀어서 재 사용하기도 하고, 퇴색한 란제리나 옷가지들을 가는 끈 모양으로 잘라서 실꾸리로 감아서 뜨게질로 실내용 슬리퍼, 목도리, 벙어리 장갑등을 만든다.
이 어려웠던 시기에 여성들은 또한 세련됨을 포기하지 않았는데 차림새를 미화하기 위해 여름용 장갑을 코바늘 뜨개로 만들기도 하고, 벨트, 단추, 모티브등을 자수를 놓고 만들며 보석, 장식품들을 펠트, 진주, 비즈등으로 만들기도 한다.
|
|
|
|
- 두개의 목도리로 만든 두건달린 망토, 1940년경. - 샌들, 1942-1943년. 붉은색의 벨벳과 레이온 타프타 리본과 나무 및창으로 만들어 졌다.
| |
|
|
|
코바늘 뜨게질로 만든 장갑, 1940년 |
|
가방, 1940 1944년 | |
|
|
이 진열장의 악세서리들은 만드는 법을 설명해 주는 기사가 실린 이 시기의 여성 잡지들과 함께 진열되어 있다.
| |
|
|
▶ 2. 일상 생활 |
시대적 제약에 직면해서, 창의력을 늘리고 생산을 경제적 결핍과 부족 (나무로 연결하거나 웨지 힐의 신발창, 멜빵으로 만든 배낭)에 적응하는 제조원, 장인 수공예자들처럼, 빠리 여성들은 재활용, 대체, 익살과 같은 기술에서 그 재능을 한층 발휘한다. 대용품 (인조 견사, 인조 양모), 익숙치 않은 재료들(신문 종이, 나무) 혹은 사용되었던 구재료들 (바퀴, 천과 가죽 조각등…)의 사용이 절실히 필요했다.
|
1. 제약들 1940년 6월 22일의 휴전 조약이후로, 프랑스는 징용 원자재에서 부터 식료품, 석탄, 기름, 양모, 가죽에 이르기까지 징용하는 독일의 공식 공급원이 된다. 1941년에 독일 점령군은 프랑스 비쉬 정부에게 육백만 켤레의 신발을 요구한다. 이 강요에 응하기 위해, 1940년 가을부터 다음과 같은 대책 마련이 준비되었다. 가죽 장인들은 각자 자신들의 보유고를 신고하며, 가죽으로 만든 구두는 1940년 11월 27일 부터는 판매 금지이며, 1941년 1월 3일 법령에 의한 신발을 사기 위한 구매 교환권의 창시. 신발 구매 교환권을 얻기 위해서는 각 개인들은 시에 가서 서신으로 요청 편지를 작성해야 했다. 이것은 나이와 직업 기준에 따라, 또한 1941년의 프랑스인에게 할당된 천만 켤레라는 제한된 숫자안에서 해결되었다. 이와 동시에 신발 제조인들은 라피아 야자수, 엮어서 만든 리본과 짚등으로 만든 허용된 양 안에서의 절제된 자재들을 사용한 ≪ Vente libre ≫ (자유 판매), ≪ Sans tickets ≫ (표 없이) 살 수 있는 모델들을 손님들에게 제안한다.
|
|
|
|
- 티켓없이 구매할 수 있는 ≪ Vente libre ≫ (자유 판매)라는 푯말이 적혀있는 신발가게 쇼윈도우 사진 - 1942년 1월 11일에 배포된 옷과 텍스타일 제품을 구매하기 위해 필요한 티켓
| |
1941년 7월의 의복 카드의 도입도 같은 맥락에서, 유사한 대응 조치들은 텍스타일 분야에서도 적용된다. 우아함과 스타일이 완전히 제한된 것은 아니지만, 빠리인들은 의복을 착용하기 위해 익살을 사용했어야만 한다. 재치와 함께, 어떤 악세서리들은 특히 Les Flacons de l’ivresse (취기의 향수병) 라는 Line Vautrin의 벨트와 헤르메스의 A la Gloire de la cuisine francaise (프랑스 요리의 승리를 위하여) 스카프는 일상의 어려움과 절제를 증명하고 있다.
|
|
|
|
- Moins de Ble = Moins de pain ! (밀이 적어지면, 빵도 적어진다.)라는 문구의 포스터. 저항세력들이 독일군에게 돌아가는 수확들을 불태우면서 주민들을 굶주리게 함을 비난하는 Vichy 정부의 선전용 팜플렛 용어를 인용한, 1943년 빠리 곳곳의 벽에 붙여졌던 포스터. - ≪ Vente libre ≫ (자유 판매) 티켓이 붙은 봉마르쉐 백화점의 남성용 구두, 1941-1942년.
| |
|
|
|
-헤르메스의 A la Gloire de la cuisine francaise (프랑스 요리의 승리를 위하여) 스카프, 1943년. -녹색 레이온 타프타와 흰색 바탕의 다색 꽃무늬가 프린트된 레이온 타프타 소재의 드레스, 1943-1944년. | |
2. 궁핍, 재치와 창의력 Marie-Claire지는 1943년 10월 1일짜에서 ≪ 요즘은, 창작력있는 여성이 우아한 여성이 ≫라고 한다. 이 시기의 여성은 제약과 결핍에 적응해야 했으며 재사용, 변형, 적응, 전환, 창작들에 유희하며 생활한다.
모든 재료들이 재활용 되어졌다. 빠리의 유명 모자 제조인인 Albouy는 1941년 여름, Paris-Soir지와 Comoedia지의 신문 종이로 만든 모자들을 선보인다. 1900년대 스타일을 딴 작은 밀집모자와 큰 챙의 모자들은 튤, 오랑케꽃, 리본, 깃털등으로 장식한다.
악세서리 자체를 변형하기도 하는데 이는 기능과 용도가 달라지기도 한다. 멜빵은 Jeanne Lanvin의 가방에서 끈으로 탈바꿈된다. 알프스 엽보병의 베레모는 약간의 주름을 가미한 바느질로 여성용의 우아한 모자로 변모한다.
란제리 부분에서는 이 시기에 실크로 만든 스타킹이 사라졌는데, 이를 그리워 하는 여성들의 익살과 재치는 몇몇 화장품들에서 발견할 수 있다. 엘지자베쓰 아덴의≪ Le fil 200 ≫ (200사)와 Bienaime의 ≪ Filpas ≫ (보폭 실)과 같은 로션 이름은 전자에 대한 그리움을 재치있게 보여주고 있다.
많은 창작물들의 특허는 독일 점령의 4년동안, Institut National de la Propriete Industrielle (산업 자원 국립 협회)에 등록되어졌다. 접히는 모자, 애교스러운 지팡이, 핸드백으로 변형되는 시장 바구니, 신발과 신발창등이 특허 등록되었었다. 독일의 SICDAM 회사는 프랑스에서 Smelflex의 이름으로, 이 회사의 Zierold 이름의 나무로 절단 된 신발창을 독일 특허로 착취한다. 여자용의 뒷 축 높은 구두는 세로 홈이 들어가는데, 이는 신발에 유연성을 더해 주었다. 유일한 불편함이라면, 이 세로 홈에 박히는 작은 돌맹이의 불편함은 아무도 피할 수 없었다.
|
|
|
|
- 베레모, 1943-1944년. - 끈달린 가방, 1939-1940년. - 토시를 변형해서 만든 가방, 1942년. - Jeanne Lanvin 가방, 1944년. 검정 가죽의 멜빵 세트를 핸드백 줄로 대용해 만든 모델.
- Guibert Freres의 ≪ Tric-trac ≫ 장갑, 1941년. 양가죽 조각과 코바늘 뜨게로 patchwork 작업한 장갑 | |
|
|
- Bienaime의 Filpas 로션 포스터, 1944년.
- 헤르메스의 ≪ Moto ≫ 핸드백, 1940년. - 나사로 만든 브롯지와 ≪ Recuperation ≫ (재활용) 상자, 1942-1944년. | |
|
- SMELFLEX 신발창의 문서 카탈로그, 1944년 1월. - SMELFLEX 신발창으로 만든 샌달의 원형, 1940 1944년. - 신발 원형, 1943년. | |
3. 새로운 재료들 일차적 재료를 비축하는 어려움에 부딪혀, 유명한 디자이너들도 주부들과 마찬가지로 새로운 소재를 사용하는데 있어 개혁적이다.
가죽의 부족함은 모드 관련의 악세서리의 제조에서 눈에 띄게 느낄 수 있다. 1940년 11월 27일부터 Vichy정부는 가죽으로 만드는 구두 제작을 법으로 금지한다. 1941년 부터 나무,코르크, 셀룰 로오스 아세테이트, 엮어 묶은 짚등으로 만들어진 신발창이 등장하며, 재구성한 가죽과 인조 가죽들이 구두와 가방을 만드는데 쓰여진다.
신발 제조인, 모자 제조인 혹은 가죽 세공자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여 가는 줄의 짚, 라피아 야자수, 판지, 가죽 띠. 야생 영양의 가죽 또는 나무과 같은 매우 놀라운 재료들을 자기것으로 소화해 내기에 이르른다. 어떤 재료들은 전통적인 사용법을 변형하기도한다. 일반적으론 모자에 사용되는 펠트가 가방, 벨트, 악세서리에 사용되기 시작한다.
미용실에서 수거한 머리카락처럼 강아지 털도 1942년 3월 25일 법령에 의해 장갑과 실내용 실리퍼를 만드는 인조 양모와 섞어 사용된다.
천연 재료의 사용에 병행하여, 셀룰로오스 아세테이트로 추출한 레이온과 인조 양모의 인조 섬유 생산이 발달한다. 수입하는 면과 양모의 부족함에 대처하여, 이들은 의복 산업에 폭넓게 사용되며. 모자와 목도리와 같은 다양한 악세서리를 생산 가능케 한다.
|
|
|
|
- 흰색 셀룰로이드 소재의 Denise Squeville 모자, 1941 1943년. - 짚으로 만든 Jeanne Lavin 터번, 1942-1943년.
| |
|
- Rayne의 샌달, 1943년경. 워싱처리한 녹색 텍스타일, 나무로 만든 창과 조각을 새기고 금장처리한 나무 굽
- Derby 구두, 1940-1944년. 밤색 가죽의 나무의 창에 고무로 이중 마감 처리.
| |
|
|
|
- 코르크 신발창과 이것으로 만든 샌들, 1940-1944년. - 나무로 된 뒷굽의 여름 샌들, 1942년 여름.
| |
|
- Elle지, 1941년 5월 21일, 41호. ≪ Leger comme un pavillon / c’est un chapeau en papier ≫ (나비처럼 가벼운 종이로 된 모자) 기사 사진. -검정 종이와 검정 튤의 Albouy 모자, 1941-1943년.
| |
|
|
|
- 파란색 레이온과 흰색 토끼털의 부츠, 1941-1944년, - 가방 (1942-1943년)과 코바늘과 영양 가죽으로 만든 Guibert Freres의 남성용 장갑 (1943년). - 잡동사니의 나무와 가죽으로 만든 핸드백, 1943년경. | |
4. 일상 생활
|
|
빠리 여성들은 가게 앞에서의 긴 줄로 서서 기다리기. 빠리에서 자전거나 지하철로 이동하기, 매번의 경고 사이렌이 울릴 때면 대피소로 피신하기, 그리고 이 시기에 유난했던 추위로 부터의 보호하기와 같은 새로운 어려움들에 처한다.
빵가게 앞에서 기다리는 사람들의 긴 줄, 1944년 8월.
|
|
사이렌이 울리자 지하철 안으로 대피한 빠리 시민들 모습, 1944년 4월.
|
1940년과 1941년 겨울에 두건 달린 망토는 아주 인기있는 아이템이다. 모자, 머플러, 장갑, 게트르 (다리용 토시)와 부츠는 옷차림을 완성하는 요소들이다. 소박하거나 화려한 다양한 종류의 모피들은 겨울 대비에 꼭 필요했으며 많은 악세서리의 소재가 되기도 한다.
|
|
|
|
강혹한 추위에 준비하는 여러 겨울 악세서리들의 데생
| |
주머니-목도리, 토시-가방과 같은 기발한 아이템들이 편안함과 우아함을 동시에 추구하며 다양하게 나타난다.
모드는 수시로 울리는 사이렌에 적응하는 빠리지엔들의 생활 리듬에도 적응을 한다. 1939년 겨울 부터, Schiaparelli, Piguet 와 같은 유명 디자이너들은 그들의 고객들에게 따뜻하고 편안한 ≪ tenues d’abri ≫ (대피복)을 선보인다. 이 대피복들은 램프와 손지갑을 달 수 있는 벨트와 긴 손잡이가 있는 가방과 큰 모피 신발들과 함께 사용되었다. 고객들의 일상적 요구에 답하면서, 가죽 제조 직공들은 가스용 마스크를 넣는 칸막이가 있는 큰 가방을 구상하기도 한다.
연료 제약으로 인해, 자동차들은 차고에 두고 자전거가 많이 이용된다. 이동할때면, 빠리 여성들은 바지치마와 치마밑에 바지를 입기 사이에서 고민했을 것이다, 그리고 가방은 큰 망태기같은 조절이 되는 끈으로 된 큰 가방들을 선택한다. 강한 바람에도 지탱하는 그물 헤어 네트와 터번과 평평하고 동시에 높은 신발창이 자전거를 타는 여성들에게 사랑받는다. 직접 자전거를 타지 않는 여성들은 자전거택시, 4륜 마차, 지하철을 이용한다.
|
|
빠리의 Rivoli 거리 풍경 사진, 1944년 8월 초
|
|
|
|
- Elsa Schiaparelli의 ≪ tenues d’abri ≫ (대피복), 1939년 - 방독 마스크와 케이스, 1939-1940년
| |
|
방독 마스크를 들고 있는 우아한 차림의 여성 그림이 새겨진 재떨이, Lancel, 1939-1940년
| |
5. 문화 생활
5_Ⅰ. 연극 공연장, 레스토랑, 극장가 물질적 제약과 두려움이 다수 사람들의 일상이라면, 소수의 사람들이지만 이들은 독일 점령의 현실에 게의치 않거나, 이를 부정한다. 어떤 집단들은 그들의 각기 다른 활동 영역에 따라 빠리지엔은 어떻게 의복을 갖추어 입어야하는지를 계속 탐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4년간의 독일 점령 시기 동안에 검정 롱 이브닝 드레스는 드물게 착용되었지만, 자선 파티나 공식 리셉션에서는 착용되었다.
|
|
Art de la Mode지, 1941년 1월호, n° 2657, ≪ Les spectacles de Paris ≫ (빠리의 공연들) 기사 사진.
| |
|
|
|
The Colony, 1939년. 수채화 그림 |
|
여우털 망토, 1940-1944년 | |
|
|
|
|
- Jean Dresses의 검정 드레스, 1943-1944년, - Comedie Francaise의 사이렌 경보시에 연극 관객들을 위해 준비된 대피소 지도. | |
5_Ⅱ. 경마장 경마장에서 모드를 소개, 발표하는 빠리의 전통을 다시 이어받아, 1940년 10월 12일 Auteuil 경마장 오픈에서는 많은 오뜨 쿠뛰르 (haute couture) 메종들의 모델들은 모드 잡지 사진촬영을 이곳에서 한다. 경마장에는 다양한 사회 계층의 사람들이 방문하는데, 이들은 아주 놀라운 즉, 마차, 합승 마차, 그리고 말이 끄는 2륜 마차의 교통 수단으로 이곳으로 왔다.
|
|
≪ Penurie d’essence ! ≫ (기름 부족)이라는 문구가 들어간 그림
| |
기름 부족과 결핍으로 자동차 경주 대회는 법으로 금지되는데, 그러나 1941년 7월 23일에 Paris-Soir에 의해 개최된 Journee de l’Elegance a bicyclette (자전거를 타는 우아함의 날)에 많은 빠리지엔들이 참석한다.
|
|
우아한 차림의 자전거 타는 여성들, 1942년 6월의 사진
| |
|
자전거 룩의 악세서리들 : 펠트 소재의 Irene 모자, 나무 밑창의 가죽 단화, 가방, 1942-1944년.
| |
|
- Jacques Heim의 앙상블, 1942년.
- Coralie 터번, 1944년. 베이지 저어지와 장미와 나뭇잎 장식.
- Di Mauro의 녹색과 흰색의 가죽샌들 원본 샘플.
| |
|
|
▶ 3. 정치 생활을 증언하는 악세서리 |
악세서리는 정치적 기능과 상징으로 의미있는 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Vichy 정부의 선전활동 도구 (Petain의 초상화가 프린트된 스카프)로 혹은 저항 세력들이 비빌 활동(이중 바닥과 칸막이의 가방)에 사용하기도 한다. 악세서리는 암울했던 순간부터 빠리 해방의 기쁨의 순간에 이르기까지 빠리지엔들의 일상을 함께한다.
1. 선전 활동에 쓰인 악세서리
|
|
- Colcombet 의 ≪ Portrait de Marechal ≫ 스카프, 1941년. - 헤르메스의 ≪ Le retour a la terre ≫ (땅으로 돌아가자) 스카프, 1941 1942년.
|
|
- L'Art de la Mode지 표지, 1941년 5월. ≪ Les carres de Marechal ≫ (사령관의 스카프들). - 도끼가 그려진 브로치. |
2. 유태인 박해와 재산의 착취
|
|
|
≪ entreprise juive ≫ (유태인 가게)라는 표지가 붙어 있는 당시의 가게 입구 사진, 1941-1944년.
| |
|
■ Fanny Berger |
|
|
모자 제조인인 Fanny Berger의 이야기는 유태인 박해와 처형중에서 가슴을 파고 드는 충격적인 실예이다. 그녀의 생애는 Catherine Bernstein의 영화 Assassinat d’une modiste (한 모자제조인의 살인, 2006년) 에서 다루어 지기도 했다. Odette Fanny Bernstein은 1901년 7월 2일 Neuilly에서 태어난다. 30세의 나이에 그녀는 첫 가게를 Richelieu 거리, 다음은 Wagram avenue에 오픈한다.
1932년에 그녀는 Fanny Berger라는 이름으로 사업 등록을 하는데 큰 성공을 거둔다. 1940년 9월 27일 법령에 따라, 유태인 출신이 주인인 영업 가게는 ≪ entreprise juive ≫ (유태인 가게)라는 표지를 의무적으로 가게 입구에 붙여야만 했다. 이 법령은 유태인들을 리스트에 올려 특별 관리하게 했다. Fanny Berger는 10월 4일에 이 리스트에 등록한다. 10월 3일에 Vichy정부는 57개항의 유태인 조항을 발표한다. 이로 유태인에 대한 제약이 더 많아지게 되었다. 1941년 4월 26일에는 Fanny Berger는 더이상 고객을 받을 수 없게 되고, 5월 28일에는 은행을 사용할 수 없게 된다. 1941년 7월 5일, 그녀의 자산 관리인인 Georges Nerot는 Fanny Berger 살롱을 처분하는데 이 가게는 그녀의 옛 직원이었던 Mlle Martin이 인수한다. 1942년 9월 19일에 Fanny Berger는 경계선을 넘어려다 체포된다. Moulins의 독일군 교도소에 감금되고 다음은 Beaune-la-Rolande 캠프에 이송되어 다시 1943년 6월 19일 Drancy로 이동된다. 7월 18일 수송대는 그녀를 독일로 이송한다. 3일후에 그녀는 독일 Auschwitz-Birkenau 유태인 몰살 캠프에 도착한다. Fanny Berger는 도착후 바로 이곳 가스실에서 죽어갔다. Fanny Berger의 작품들은 고통의 역사를 증언하는 오브제며 또한 나찌의 처형 캠프에서 희생된 이들의 삶과 추억이기도 하다.
|
|
천연 밀짚과 분홍 펠트로 만든 Fanny Berger의 모자들, 1940-1941년. | |
3. 대립과 저항을 상징하는 악세서리 악세서리는 Vichy 정부와 독일 점령군에 대항하는 행동 활동에 사용되기도 한다. 이중으로 된 바닥과 칸막이의 가방은 팜플렛과 가벼운 무기들을 그리고 여?가방은 무선 송신기를 숨기는데 사용되었다. 연합군의 비행기 조종사들은 목에 묶은 스카프를 절대 풀지 않았다고 한다. 영국 정보 기관에 의해 만든 이 스카프에는 프랑스 지도가 상세히 프린트되어 있는데, 이는 임무 수행중인 영토에 진입할때 유용하게 사용되었다. Chambre syndicale de la couture francaise (빠리 의상 조합)의 회장인 Lucien Lelong의 연설을 인용해 이 시기의 여성 잡지들은 독자들에게 계속해서 여성자신들을 신경써서 돌보고, 의상과 악세서리들을 시대적 상황에 적응하지만 절대 우아함을 잃지말라고 격려 자극한다. 빠리의 이미지와 국제적 명성의 프랑스 쿠뛰르 (couture)를 지키는 것이 여성 각자의 의무이기도 했다. 일상에서 독일군의 제약에도 불구하고, 빠리의 여성들은 프랑스 국기의 삼색을 의복과 악세서리 착용에서 보라는 듯이 과시하기도 한다.
|
|
지도가 인쇄된 스카프, 1940-1944년, 이중 바닥으로 된 가방 내부, 1940-1944년.
| |
|
도자기로 만든 두개의 가면으로 된 브로치, Maison Mittler, 1940년. 흑인 얼굴과 히틀러 얼굴 가면의 브로치. 단추, 1940-1944년. 흰 도자기위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꽃이 그려져 있는 단추.
| |
|
손수건, 1943년. 흰색 면의 손수건에 Espoir (희망)라는 글이 붉은색과 파란색으로 수놓여져 있다.
| |
4. 빠리의 해방 1944년 8월 25일 독일군은 연합군에 항복한다. 독일군이 떠나고 드골 장군의 말처럼 ≪ 모욕 받고, 부서지고, 괴롭힘을 당한 빠리는 해방되었다. ≫ 감격한 군중들은 환희로 가득하고 도처에 프랑스 국기의 색깔들로 메워진다. 개개인들은 저마다 국가적 자부심과 되찾은 자유를 상징하는 작은 악세서리들을 만든다. 텍스타일과 색을 칠한 나무의 꽃장식과 삼색 꽃 장식의 브로치는 재킷이나 블라우스에 위에 등장한다. 8월 26일의 샹젤리제에서의 승전 퍼레이드에서, 젊은 여성들은 프랑스, 미국, 영국, 소련 국기들로 장식된 군모를 착용한다. 거리의 행상인들은 연합군 색깔의 조그마한 장신구들과, Victoire (승리)의 v자가 쓰여진 축소 프랑스 지도의 엽서, Lorraine의 십자등을 판다. 어떤 제조인들은 이 오브제를 만들기 위해 Petain의 초상을 세긴 메달을 주조하기도 한다. 빠리 해방이후 몇달간은 악세서리들은 기념하는 데 익숙해진다. 빠리 여성들은 지프차, 비행기, 탱크 모양의 브로치와 프랑스 영토에서의 부대 상륙과 이동을 상기시키는 스카프, Lorraine의 십자나 닭으로 장식된 단추등을 착용한다. 독일군 점령시기의 새장안의 새와 대조되는 해방된 새는 Cartier와 Van Cleef & Arpels의 보석에서 볼 수 있는데, Jeanne Lanvin의 스카프에도 등장한다. 상징적이며 기념 악세서리는 추억의 오브제이기도 하다. Paris mon cœur, Paris sweet home, Souvenir de Paris 등의 여러 메시지들이 스카프, 손수건, 보석등에 나타난다.
|
|
|
|
- ≪ 상륙하는 짚차 ≫ 브로치, 1944년. - 탱크, 비행기 모양의 브로치, 1944년.
| |
|
|
|
- Jeanne Lanvin의 ≪ Liberte… Liberte cherie... ≫ (자유… 사랑스런 자유) 스카프, 1944년. 열린 새장과 새들의 모티브가 그려진 실크 스카프. - 영국, 프랑스, 미국 국기 모티브로 만든 빠리 해방을 축하하는 군모, 1944년 8월.
| |
|
- 연합군 국기들로 장식된 가죽 구두, Manoukian, 1944년. - 연합군 국기 장식의 샌들, Di Mauro, 1944년.
| |
|
- ≪ Souvenir de Paris ≫ 스카프, 1944-1945년. - ≪ Paris mon cœur, Paris Sweet Paris ≫ 스카프, 1944-1945년.
| |
|
|
|
- 프랑스 상징의 삼색으로 만들어진 브로치들과 꽃장식, 1944년. - 빠리 해방 이후 오페라에서 작은 장신구와 미국 국기를 파는 행상인 사진.
| |
|
|
|
- Cartier의 ≪ Oiseau au cage / Oiseau libere ≫ (새장 안의 새 / 풀려난 새) 브로치 데생, 1945년. - 프랑스 애국가의 가사말과 꽃부케, 국기가 자수놓여진 블라우스, 1944년.
| |
|
- ≪ Paris 1944년 8월 25일 ≫ 조각, 1944년. - Soir de Liberation (해방의 저녁), 수채화, Suzanne Gunther, 1944년.
| |
|
- FFI 완장들. - 영국 국기와 Welcome이 프린트된 손수건, 1944년.
| |
|
- ≪ Le jour de gloire est arrivee ≫ (영광의 날이 왔다) 스카프, 1944-1945년. - ≪ Les debarquements ≫ (상륙) 스카프, 1944년. 유럽 지도, 유럽국가들의 국기와 비행기로 장식된 스카프.
| |
|
- ≪ Les journaux d’opposition ≫ (반정부 신문들) 스카프, 1944-1945년. 연합군의 국기와 저항 성격의 일간지 제목들로 장식된 스카프. - ≪ Les journaux de resistance ≫ (저항 신문들) 스카프, 1944-1945년. 파란색과 붉은색 바탕에 일간지들이 프린트된 스카프.
| |
|
프랑스 국기들로 가득찬 ≪ Appel du 18 juin ≫ 스카프, 1945년.
| |
|
- Madeleine Collomb의 외출복, 미국에서 만든 재킷과 치마. - 이 차림의 Boulogne 숲의 Bagatelle에서 찍은 사진.
| |
당시의 시대 상황을 보여주는 시사지와 시사뉴스들의 전시회 영상 자료 사진들 |
|
|
항복한 모습의 독일군 장교들
| |
|
폭탄이 투하되고 있는 빠리의 야경과 기사
| |
|
빠리 해방에 기뻐하는 시민들 모습과 드골 장군
| |
전시회 사진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