文 化 財 (4) 서울(1-4) 江東~松坡區 地域
江東區 地域
(01) 復元한 서울 岩寺洞 遺蹟 움집群
*서울 岩寺洞 遺蹟 -사적 제267호 -江東區 岩寺二洞
阿且山城을 마주보는 漢江邊에 있는 新石器時代遺蹟로, 3개의 文化層이 확인되었으며, BC4,000∼3,000년의
유적이다. 20餘基의 집터, 附隨施設과 돌무지시설이 드러났다. 집터는 바닥을 둥글거나 네모꼴로 팠으며
길이 5~6m, 깊이 70~100㎝정도이다. 집터 가운데에 돌을 두른 화덕자리가 보이고, 모서리에 4개의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만든 것으로 보인다. 漢江流域의 대표적인 新石器時代 最大의 遺蹟이며, 당시 생활모습을
살필 수 있는 遺物이 많이 출토되어, 新石器人의 文化를 추측할 수 있는 자료이다. (*且: 또 차 *隨: 따를 수)
(02) 움집 터[竪穴住居址] -사적 제267호 -江東區 岩寺二洞
움집터는 ‘竪穴住居址’라고도 하며, 일정한 규모의 地面을 30~100㎝ 정도의 깊이로 넓은 구덩이를 파고,
그 밑에 바닥시설을 한 뒤 기둥을 세우고 지붕을 덮은 住居形態로 先史時代의 대표적인 집터樣式이다.
(*竪: 세울 수 *穴: 구멍 혈)
松坡區 地域
(03) 서울 風納洞 土城 -史蹟 제11호 -松坡區 風納洞
漢城百濟期 漢江邊에 土築 平地城으로 원래는 둘레 3.5㎞의 土城이었으나, 漢江과 맞닿은 서쪽城壁이 流失되어
2.1km정도만 남아있다. 城壁基礎部는 너비 43m, 높이 11m가 넘는 대규모의 土城이다. 성벽의 中心部下端에
뻘 흙으로 다진 基礎안팎으로 진흙과 모래흙을 다진 板築技法으로 中心土壘를 쌓아가며, 일부에 植物有機體나
자갈로 土壘를 補强하는등 독특한 築城技術을 사용했다. 乙丑年(1925) 大洪水때 中國製 靑銅자루솥,
허리띠장식 등 上流層이 使用한 重要遺物이 多量 出土되었다. 2000년도 發掘調査등을 통해 漢城百濟時代
첫 都邑인 河南慰禮城일 가능성이 제기되고 계속된 발굴조사로 風納土城이 百濟 最初都城이며, 重要遺構와
數萬點의 遺物이 출토되어 百濟時代 최고의 王城遺蹟으로 확인되었다. (*壁: 벽 벽 *壘: 보루 루 *掘: 팔 굴)
(04) 百濟우물 造形物
2004년 아파트工事할 때 발굴된 漢城百濟期(BC 18~AD 475)우물을 再現한 造形物이다. 우물은 地盤에서
자갈층까지 깊게 파고 목재의 양끝을 凹凸형으로 다듬어 끼워 넣어 위에서 볼 때 ‘井字’形으로 한 변이 1.2m인
正四角形으로 높이 1.2m이다. 우물에서는 百濟人들이 사용하던 土器類, 木製두레박, 새끼줄 등 數十點의
遺物이 出土되어 國立文化財硏究所에 보관하고, 이 造形物은 2006년에 製作·設置했다.
(05) 서울 夢村土城 -사적 제297호 –松坡區 芳荑洞
漢江의 支流인 城內川남쪽에 있는 둘레 약 2.7㎞의 百濟前期의 土城이다. 自然地形을 이용해 진흙으로 城壁을
쌓고, 木柵을 세웠던 흔적도 확인되었다. 自然巖盤層을 急傾斜로 깎아 만들기도 했으며, 城을 둘러싼 물길인
垓子도 확인되었다. 문터와 집터, 貯藏用 구덩이가 확인되고, 동전무늬가 찍힌 瓷器조각과 土器類,
鐵製 武器類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瓷器조각은 中國 西晉(265∼316)代의 유물로 時代確認에 重要한 역할을 한다.
城의 위치·규모·출토유물로 보아 百濟初期 軍事的·文化的性格을 살필 수 있는 유적이며, 주변에 風納土城과
百濟 石村洞 古墳群들을 비롯한 百濟前期의 遺蹟이 있어 歷史的으로도 價値있는 곳이다. (*夢: 꿈 몽 *藏: 감출 장)
(06) 서울 夢村土城 垓子
垓子는 敵의 侵入을 막기 위해 城밖을 둘러 파서 만든 연못이다. (*垓: 지경 해)
(07) 서울 三田渡碑 -사적 제101호 -松坡區 蠶室洞
丙子胡亂때 淸에 敗해 굴욕적인 講和協定을 맺고, 淸太宗의 要求에 따라 그의 功德을 적은 비석이다.
朝鮮 仁祖 17년(1639)에 세운 비석으로 높이 3.95m, 폭 1.4m이며, 碑銘은 篆書로 ‘大淸皇帝功德碑’이다
朝鮮前期까지 朝鮮에 朝貢을 바쳐오던 女眞族이 後金을 건국하고, 세력을 확장해 淸으로 바꾼 女眞族이
朝鮮에게 臣下로서 禮를 갖출 것을 요구하자 兩國의 관계가 斷絶되었다. 仁祖 14년(1636) 淸 太宗은 10萬大軍을
이끌고 侵略하는 丙子胡亂을 일으켰다. 南漢山城에서 抗戰하던 仁祖가 결국 淸軍이 주둔하고 있는 三田渡에서
三拜九叩頭로 降伏하면서 屈辱的인 講和協定을 맺었다. 丙子胡亂後 淸太宗은 자신의 功德을 새긴 記念碑를
세우도록 朝鮮에 强要해 三田渡碑를 건립했다. 碑文은 李景奭이 짓고 글씨는 吳竣이 楷書로 썼으며, 碑銘은
呂爾徵이 썼다. 碑石앞면의 왼쪽에는 滿洲글자, 오른쪽에는 蒙古글자, 뒷면에는 漢字로 써서 滿洲語 및 蒙古語를
연구하는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松坡區 石村洞에 있던 碑石을 考證을 통해 2010년 3월 現在位置인 石村湖水
東湖 北東쪽 松坡大路 옆으로 移轉했다. (*銘: 새길 명 *篆: 전자 전 *叩: 두드릴 고 *屈: 굽힐 굴 *奭: 클 석
*竣: 마칠 준 *楷: 본보기 해)
(08) 三田渡의 受難, [三跪九叩頭] 浮彫
*三跪九叩頭: 중국 淸나라 때 皇帝에 대한 敬禮法으로, 跪는 무릎을 꿇는 것이고, 叩는 머리를 땅에 닿게
한다는 뜻으로, 무릎을 꿇고 양손을 땅에 댄 다음 머리가 땅에 닿을 때까지 숙이기를 3번, 이것을 한 단위로
3번 되풀이한다. (*跪: 꿇어앉을 궤)
(09) 石村洞 古墳群 第二號墳
*서울 石村洞 古墳群 -사적 제243호 -松坡區 石村洞
百濟初期에 만든 무덤으로 日帝때 처음 調査했다. 1호, 2호무덤은 住民들이 農地로 이용해 內部構造와 遺物은
정확히 알 수 없었으며, 3호무덤은 紀元前·後부터 나타나는 高句麗무덤형식인 基壇式돌무지무덤(積石塚)이다.
무덤은 높은 지형을 평평하게 하고, 밑 테두리에는 매우 크고 긴 돌을 두르고 自然石으로 層段을 이루면서 3단으로
쌓았는데, 옛高句麗地域인 滿洲 通溝에 있는 將軍塚보다 큰 것으로 밝혀졌다. 5호무덤은 완전하게 조사되지 않아
확실히 알 수 없으며, 무덤주변에는 무덤을 두르고 있는 돌을 2단으로 쌓았다. 이 무덤들은 可樂洞·芳荑洞무덤과
함께 初期百濟의 文化와 歷史를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塚: 무덤 총)
(10) 內圓外方形 積石塚 -서울 石村洞 古墳群
오래전에 墳口 噴口, 內部構造, 基壇部등이 파괴되어 흙이 덮이고 그 위에 民家가 들어서 原形을 밝힐 수 없으나
發掘調査로 基壇部의 西南모서리와 西·北쪽의 石築基壇一部를 찾아냈다. 基壇部의 石築部分을 바당으로
復原整備하니 안쪽은 지름 11.4m의 圓形을 이루고, 바깥쪽은 邊길이 16m의 方形이 되어 이 基壇部는
內圓外方形이 된다. 안쪽 圓形石築바닥에서는 績石 土壙墓 2基와 石棺墓 3基가 드러나 績石土壙墓와 石棺墓위에
績石塚이 築造된 것으로 보인다. 한편 日本古墳에는 上部가 平面圓形이며 下部가 평면인 上圓下方噴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 平面의 모양은 이 적석총의 基壇平面모양과 恰似하다. (*墳: 무덤 분 *壙: 뫼 구덩이 광)
(11) 芳荑洞古墳群 제7·8·9·10號墳
*서울 芳荑洞 古墳群 -사적 제270호 -松坡區 芳荑洞
서울 芳荑洞一帶에 있는 百濟前期(4세기초∼475)의 무덤들이다. 제1호무덤은 封土의 지름 12m, 높이 2.2m로
널길[羨道]과 널방[玄室]을 가진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다. 盜掘로 인해 남아 있는 遺物이 없었으나,
주민에 의해 3점의 土器가 收拾되었다. 4호무덤은 아치형天障의 窟式돌방무덤으로, 자연적으로 釉藥이 입혀진
灰靑色경질 굽다리접시(高杯)와 뚜껑을 비롯한 土器類와 鐵製類가 출토되었다. 6호무덤에서 나온 灰靑色硬質
굽다리접시의 경우 굽구멍[透窓]이 전형적인 新羅土器에서 볼 수 있는 형식이다. 이는 6세기이후 漢江流域이
新羅領土로 되었을 때 만든 新羅무덤일 가능성도 있다. 芳荑洞古墳群은 百濟의 首都가 漢城에 있을 때 만든
前期무덤으로 可樂洞·石村洞무덤과 함께 漢城百濟의 문화를 알 수 있는 유적이다.
(*荑: 벨 이 *羨: 무덤 길 연 *窟: 굴 굴 *釉: 광택 유 *杯: 잔 배)
- 文化財 (5) 서울(1-5) 南部·西部地域예 계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