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 수원교구 오늘의 말씀
1)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살레시오회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요한 복음사가는 주님 부재시 제자들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반대로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실 순간의 모습도 동시에 소개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신후 부활하셨다는 소식이 제자단에 전해졌지만, 아직도 제자들은 긴가민가했습니다. 그저 누군가가 헛것을 봤겠지? 누군가가 만든 헛소문이겠지? 생각했습니다.
마음 깊은 곳에서는 이제 새로운 왕국에서의 물 좋은 자리에 대한 희망도 사라져버렸으니, 앞으로 살아갈 길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마음 저변의 표현을 베드로 사도가 대표해서 던졌습니다.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다른 제자들도 동조해서 함께 밤 배를 탔습니다. 그러나 그 날따라 단 한 마리도 잡지 못했습니다. 고기잡이라는 것이 참으로 희한하더군요. 잔뜩 챙겨서 낚시를 떠날 때는 얼굴에 화색이 만연합니다. 발걸음도 얼마나 가벼운지 모릅니다.
그러나 허탕치고 돌아오는 발걸음은 얼마나 무거운지? 돌아 나오는 길은 또 얼마나 멀고 가파른지? 꽝치고 호숫가로 나오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랬습니다. 우중충, 망연자실...
주님 부재시 우리들의 모습은 언제나 그러합니다. 인생의 가장 크고 중요한 의미가 사라져버렸으니, 우리네 삶에서 기대할 것이 그리 없습니다. 삶의 방향, 중심, 지주가 사라져버렸으니, 낙담과 절망, 무의미가 전부입니다.
반면에 주님께서 제자들 가운데 현존하시니, 그 얼마나 충만하고 화사한지 모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하셔서 던졌더니,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고기가 많이 잡혔습니다.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 인생 여정에 현존하시니 즉시 상황은 급반전됩니다. 어둡고 음산하고 우중충했던 분위기는 즉시 밝고 화사한 분위기로 변화됩니다. 항상 목마르고 배고프고, 결핍 투성이였던 우리네 나날이었는데, 주님께서 함께 하시니, 즉시 풍성하고 충만한 모습으로 변화됩니다.
2)전삼용 요셉 신부님, 조원동주교좌 주임신부님
자녀를 낳는 게 양식인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난다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을 통해 우리는 부모에게 효도하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알아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나를 위해 살과 피를 내어주신 분은 영광을 받아야 하는 사실을 인정하지 못하면 그리스도께서도 우리의 양식이 되어주시기 위해 돌아가셨다가 부활해야 함도 인정하지 못하게 되어 결국 부활하신 예수님을 보아도 눈이 가려 알아볼 수 없습니다.
누구나 예상하는 것만 보이는데, 눈에 보이는 부모의 얼굴에서 영광을 보지 못하면 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광을 믿는 것은 더 불가능하기 때문입니다.
이것과 연결해서 오늘은 생명을 경시하고 자녀를 낳기를 거부하는 사람들은 예수님을 만날 수 없음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부모는 자녀를 낳은 사람들입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만날 때도 자녀를 낳을 때입니다. 그제야 부모가 자신을 낳을 때의 바로 그 부모를 알아보게 됩니다. 부모를 공경하는 것보다 부모의 영광을 보는 더 완전한 방법은 나도 부모가 되는 것입니다. 그래야 부모는 영광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어져 그리스도의 부활도 믿어집니다.
유튜브에 “‘동물과 감정 나눠요’… 심리 치유 효과 ‘주목’”이란 짧은 동영상이 있습니다. 학교 아이들에게 동물들과 친해지는 시간을 갖게 했더니, 생명 존중감 8%, 인성 8.2%, 자아존중감 13.2% 상승했다는 결론입니다.
사람이 반려동물의 눈을 바라보면 출산과 수유 시 분비되는 어머니 호르몬인 ‘옥시토신’이 분비된다고 합니다. 동물을 사랑하며 어머니가 되는 것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러면 비로소 어머니가 보이게 됩니다.
어머니가 보이면 어떻게 될까요? ‘자존감’이 상승합니다. ‘아, 어머니가 나를 이렇게 사랑하셨구나!’라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사랑받아 존귀한 존재라는 느낌, 이것이 자존감입니다. 자존감이 높아지면 다른 생명도 존중할 줄 알게 되고 인성도 좋아질 수밖에 없습니다.
영화 ‘우리들의 행복한 시간’에서 엄마를 지독히 미워하는 여자 주인공이 엄마보다 더 심한 사형수를 사랑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그 사형수를 살리기 위해 어머니와 화해하려 합니다. 혼자는 어머니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도 죽어가는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어머니가 됩니다. 그때 어머니의 참모습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김희아 씨도 마찬가지입니다. 얼굴에 모반이 크게 있다고 어머니는 김희아 씨를 버렸습니다. 김희아 씨는 딸을 낳고 어머니를 보았다고 합니다. 딸의 모습에서 자기를 그렇게 바라보며 가슴 아파했을 어머니의 모습이 보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머니께 낳아주셔서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부모가 되어야 부모 마음을 알게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부활한 예수님을 알아보는 가장 완전한 방법입니다. 예수님은 아버지와 함께 인간을 하느님 자녀로 만들기 위해 수난 하실 수밖에 없으셨고 부활의 영광에 드실 수 있으셨습니다.
우리나라는 자녀를 잘 낳지 않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어쨌건 이런 마음이 지배하는 곳에서는 부활 체험이 그만큼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생명의 창조를 사랑하지 않는 인간에게 인간을 창조하신 하느님이 보일 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느님께서 당신을 보여주셔도 알아볼 수 없습니다. 사실 생명을 사랑하지 못하는 이에게 보여주셔야 어차피 알아보지도 못하기에 당신을 감추십니다.
온라인 미디어 굿 타임스는 중국에서 사고를 당해 뒷다리를 잃은 한 어미 개의 안타까운 사연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는 기차역 근처 거리를 떠돌다가 그만 사고로 뒷다리를 잃고 말았습니다. 주민들은 강아지가 기찻길을 돌아다니다가 기차에 치여 뒷다리가 잘려 나간 것이라고 했습니다.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강아지는 뒷다리가 없어 움직이기 힘든 상황에서 기적과 같은 삶을 보여줬습니다. 살아난 강아지는 새끼들을 건강하게 출산해 어미 개가 되었고, 새끼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남은 두 다리로 씩씩하게 살아갔습니다.
새끼들이 젖을 떼자 열심히 구걸해서 새끼들을 먹이며 엄마로서 최선을 다했습니다. 어미 개와 강아지들에게 또 한 번의 기적이 찾아왔습니다. 역에서 근무하는 직원이 어미 개와 새끼들을 모두 입양하기로 한 것입니다.
강아지들의 울타리가 되어준 직원은 “어미 개는 엄청난 모성애를 보여줬다. 음식을 주면 절대 자신이 먼저 먹지 않고 새끼들을 먼저 먹이고 나서 남은 것만 먹었다.”라며 “사람보다 낫다.”라고 전했습니다.
왜 역무원은 그 유기견과 새끼들을 키우려 했을까요? 당연히 어미의 사랑에 감동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을 이해하는 주인을 잘 따를 것도 알았습니다. 하느님도 마찬가지입니다. 자비를 가진 이에게 자비를 보이십니다.
이처럼 자녀를 낳을 줄 아는 사람은 생명에 대해 소중함과 창조의 이유를 볼 수 있기에 창조자 하느님을 알아볼 줄 알게 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처럼 하느님 자녀를 낳는 일을 하는 베드로를 부르셔서 함께 하느님 자녀를 상징하는 물고기를 드십니다.
자녀를 먹는다는 말이 웃기지만, 물고기 ‘153’은 히브리어로 ‘하느님의 자녀들’이란 뜻이고, 예수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선교하시고는 “내 양식은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고, 그분의 일을 완수하는 것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자녀를 낳는 일이 양식인 사람은 주님을 만납니다.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빛으로 빛을 봅니다. 생명에 대한 자비를 가진 이들만 모든 생명의 창조자를 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는 첫 명령을 이렇게 내리신 것입니다. “자식을 많이 낳고 번성하여 땅을 가득 채우고 지배하여라.”(창세 1,28)
3)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왕곡 주임신부님
복음: 요한 21,1-14: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져 보아라.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다. 베드로와 토마스, 나타나엘,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는데, 베드로가 “나는 고기를 잡으러 가네.”(3절) 하자 모두 함께 고기를 잡으러 갔다. 그러나 그들은 밤에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아침이 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앞에 나타나셨다.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못 잡았습니다.”(5절)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6절) 제자들은 스승님을 뵙고, 그분의 말씀대로 그물을 던져 고기를 잔뜩 잡았다.
이때,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제자가 그분을 알아보고,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하고 말하였다(7절). 그 말을 듣고 베드로는 그분께로 달려갔다. 다른 제자들이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8절).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9절). 제자들의 아침을 준비해주신 것이다. 여기에는 깊은 의미가 있다. 물고기의 모습은 바로 예수님의 모습이다. 물고기가 음식이 되기 위해서는 물 밖으로 나와야 하며, 죽어야 하고 불에 구워져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느님의 아들로서 인간들에게 구원의 원천이 되기 위하여, 당신의 신성을 버리시고, 물 밖으로 나오셨고 돌아가시고(십자가형) 영광을 받으셨고(성령의 불꽃) 우리를 구원하셨다. 이제는 우리의 삶도 이러해야 한다. 나의 고집으로부터 나의 선입견에서 과감히 벗어나(물 밖으로 나옴), 하느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나 자신이 죽는 삶(죽음)으로 부활의 기쁨을 체험하는 삶(성령의 불로 타오름)이 되어 다른 사람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삶이(“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되어야 한다.
고기가 물속에 있으면서는 음식이 될 수 없다. 밖으로 나와야 한다. 우리 자신 항상 나의 편견이나 아집에서 하느님을 향해 끊임없이 탈출하는 삶이 필요하다. 여기에 우리의 삶의 근본적인 변화와 하느님 안에 기쁨이 있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10절) 다음으로 153마리는 물고기의 종류가 또한 그만큼 된다는 것으로 모든 종류를 포함한다는 의미이고, 고기가 그토록 많이 잡혔는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는 것은 교회라는 그물은 아무리 많은 나라의 백성들이 들어와도 그 모두를 받아들일 만큼 충분하다는 것이다. 이 그물을 베드로가 끌어올렸다는 것은 그의 역할로서, 백성들을 모아 사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기능을 가리키고 있다.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12절) 하신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잔치를 벌이신다.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13절)
물에서 나와 인간의 음식이 되는 고기처럼, 하느님이신 아드님이 사람이 되시어 인간 구원의 빵이 되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우리도 같은 삶으로 끊임없이 물 밖으로 나와 죽으며 성령으로 충만한 삶이 되어 다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되는, 그래서 그분께 영광을 드리는 삶을, 그분을 닮는 삶을 살아야 한다.
4)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인천가톨릭대학교 성김대건 주임신부님
중학생 때 시험 보기 10일 전에 계획을 세우곤 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남았다는 생각과 함께 늑장을 부리며 공부를 계획대로 하지 않았지요. 이제 시험을 3일 앞에 두고는 다시 계획을 세웁니다. 촉박하기는 하지만 이대로만 하면 충분히 좋은 성적을 맞을 것만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 역시 성공을 거두지 못합니다. 친구들의 유혹과 이럴 때일수록 더 놀고만 싶은 것은 왜일까요? 결국 벼락치기입니다. 그리고 스스로 벼락치기 스타일이라며 합리화합니다.
결과는 당연히 만족스럽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니, 공부를 안 해서 그런 것인데도 열심히 해도 성적이 잘 나오지 않는다며 투덜거렸던 것 같습니다. 계획을 통해 결과에 쉽게 나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계획만 세우고 멈춰있다면 좋은 결과는 당연히 없습니다.
하느님 나라를 지향하는 우리 신앙인도 계획은 가득합니다. 문제는 아직 시간이 많다면서 아무것도 실천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날과 그때를 모르면서도 계속 뒤로 미루고 있을 뿐입니다.
그렇다면 학창 시절의 시험처럼 하느님 나라로 들어가는 그 시험에도 벼락치기가 가능할까요? 마지막 순간에 큰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지만, 이 역시도 평소에 사랑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이야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계획은 중요합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실천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바라는 점이 바로 이 실천이었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은 예수님께서 돌아가신 뒤 예수님과 함께했던 그 모든 것을 뒤로 하고 부르심 받기 전의 생활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과 함께할 때는 계획이 있었지요. 하느님 나라에서 주님의 양옆에 앉는 것이 계획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 그 자리에 앉게 해달라고 부탁도 했었고, 예수님께 충성을 맹세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계획이 수포가 된 것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허망하게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는 그들은 아무런 힘도 발휘하지 못합니다. 어부 출신이 많은 제자단이었지만, 밤새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모습이 바로 그것입니다. 그러나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고 그대로 하자,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잡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계속해서 사랑의 실천을 이야기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듯, 우리 역시 사랑해야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포기했을 때는 아무런 결과도 얻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사랑해야 하는 우리입니다. 그래야 가장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의 명언: 자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은 그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을 다 가진다고 하더라도 만족하지 못할 것이다(소크라테스).
5)김혜선 아녜스 - 출처 : 바오로딸콘텐츠, 묵상-말씀이 시가 되어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오릴 수가 없었다.“ (요한 21,6)
고기를 잡는 일에는
전문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주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배 오른쪽에 그물을 던졌네.
그들의 수확량은
그물이 찢어질 지경이었고
그들은 머리를 숙였네.
세상에서
아무리 뛰어난 이라도
주님의 말씀을
능가할 수는 없다네.
6)김경진베드로 신부님 - 의정부교구 한마음청소년수련원
베드로의 처참한 심정과 절망에 머물러 봅니다.
축처진 어깨와 발걸음
그리고 슬픔에 잠겨있는 눈망울에서
삶의 의미와 존재 이유를 상실한 한 인간을 바라봅니다.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절망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했습니다.
절망은 자기 자신과 주님의 끈이 끊어진 데서 비롯합니다.
이는 엄마의 품을 떠나
외딴 섬에 홀로 있는 아이의 상태와 같습니다.
내 마음의 상태가 아직도 어둔 밤이면
그날 밤처럼 우리는 아무것도 잡지 못할 것입니다.
오늘도 절망과 실의에 빠진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보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의 말씀대로 하면
우리는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고기를 낚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물을 끌어 올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성령의 열매를 끌어올릴 수 없었던 것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한 것이 아니라
내가 하고 싶은 대로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복음 말씀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주셨다.>
✠ 요한이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21,1-14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티베리아스 호숫가에서
다시 제자들에게 당신 자신을 드러내셨는데, 이렇게 드러내셨다.
2 시몬 베드로와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
갈릴래아 카나 출신 나타나엘과 제베대오의 아들들,
그리고 그분의 다른 두 제자가 함께 있었다.
3 시몬 베드로가 그들에게 “나는 고기 잡으러 가네.” 하고 말하자,
그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소.” 하였다.
그들이 밖으로 나가 배를 탔지만 그날 밤에는 아무것도 잡지 못하였다.
4 어느덧 아침이 될 무렵, 예수님께서 물가에 서 계셨다.
그러나 제자들은 그분이 예수님이신 줄을 알지 못하였다.
5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얘들아, 무얼 좀 잡았느냐?” 하시자,
그들이 대답하였다. “못 잡았습니다.”
6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그물을 배 오른쪽에 던져라. 그러면 고기가 잡힐 것이다.”
그래서 제자들이 그물을 던졌더니,
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 그물을 끌어 올릴 수가 없었다.
7 예수님께서 사랑하신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주님이십니다.” 하고 말하였다.
주님이시라는 말을 듣자,
옷을 벗고 있던 베드로는 겉옷을 두르고 호수로 뛰어들었다.
8 다른 제자들은 그 작은 배로 고기가 든 그물을 끌고 왔다.
그들은 뭍에서 백 미터쯤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던 것이다.
9 그들이 뭍에 내려서 보니, 숯불이 있고 그 위에 물고기가 놓여 있고 빵도 있었다.
10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방금 잡은 고기를 몇 마리 가져오너라.”
11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배에 올라 그물을 뭍으로 끌어 올렸다.
그 안에는 큰 고기가 백쉰세 마리나 가득 들어 있었다.
고기가 그토록 많은데도 그물이 찢어지지 않았다.
1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와서 아침을 먹어라.” 하고 말씀하셨다.
제자들 가운데에는 “누구십니까?” 하고 감히 묻는 사람이 없었다.
그분이 주님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3 예수님께서는 다가가셔서 빵을 들어 그들에게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주셨다.
1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뒤에
세 번째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