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십시오”
코헬 1,2-23; 콜로 3,1011; 루카 12,13-21 / 연중 제18주일; 2025.8.3
지난 5월 18일 프란치스코 교황에 이어 제267대 교황으로 선출된 레오 14세 교황은 즉위미사에서 이렇게 강론하였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저는 우리의 첫 번째 큰 소망을 하나 된 교회, 일치와 친교의 표징인 교회, 화해된 세상을 위한 누룩이 되는 교회로 삼고 싶습니다. ××× 이러한 선교 정신이 우리를 살아 숨 쉬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작은 울타리 안에만 갇혀 있지 말고, 세상에 대한 우월감을 느끼지도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차이를 지워버리는 것이 아니라 각 사람의 개인적 역사와 모든 민족의 사회적 종교적 문화의 가치를 존중하는 그러한 일치를 이루기 위해서, 하느님의 사랑을 모든 이에게 전하도록 부름 받았습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지금은 사랑을 위한 때입니다! 복음의 핵심은 우리를 모두 형제자매가 되게 하는 하느님의 사랑입니다. 저의 전임자이신 레오 13세의 말씀을 따라, 오늘 우리도 이렇게 물음을 던질 수 있습니다. 이 기준이 “세상 안에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면 온갖 분쟁이 종식되고 평화가 회복되지 않겠습니까?”(회칙 『새로운 사태』 Rerum Novarum 21항).
가톨릭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사회문제를 다룬 회칙을 반포한 레오 13세 교황의 노선을 계승하겠다고 자신의 교황 이름을 레오 14세로 지은 만큼 즉위 미사 강론에서도 레오 13세 교황의 말씀으로 맺었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레오 13세 이래 역대 교황들의 사회문제에 대해 발언한 가르침을 말합니다. 그래서 공식 명칭도 “The Social Teaching of Catholic Church”입니다. 그런데 이 명칭 문제에 관해서 논란이 있었습니다. 1995년에 서울대교구에서 처음으로 사회적 가르침을 교육하는 과정을 만들자는 논의를 할 때에도 격론에 가까운 논의가 있었습니다. 평신도들이 받아들이고 이해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사회적 가르침이 교회적 권위를 가져야 한다는 명분으로 결국 ‘사회교리학교’로 하기로 결론이 났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 가톨릭 사회교리로 불리어야 하는 데에는 더 근본적인 배경이 있습니다. 무릇 교리는 성경에 담긴 하느님 말씀이 각 시대의 언어로 표명되는 형식입니다. 성경이 증언하는 하느님과 교리가 가르치는 하느님은 완전히 같은 분이십니다. 신약성서가 정경화되는 작업은 서방 가톨릭교회와 동방 정교회가 현재의 성서 목록으로 합의한 508년 즉 6세기 경에야 완료되었으나, 성서에 기록된 계시 진리를 각 시대의 교회가 알아 듣는 과정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 왔습니다. 진리는 불변하지만 이를 표현하고 전달하는 교리는 각 시대마다 상황과 체험 그리고 깨달음이라는 변수를 통해서 형성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가톨릭 교리의 기준은 대신경과 사도신경의 두 신앙고백문에 확정되어 있습니다. 이는 고대 교회에서 복음에 관한 교부들의 가르침을 이어 받아 수 차례의 공의회를 거쳐 확정한 교리입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신앙고백문에는 예수님의 공생활 시절과 초대 교회 시절에 당연시되던 명제가 누락되어 있습니다. 바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 명제입니다.
이렇게 된 저간의 사정을 짐작해 보자면, 고대 교회 시대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이단 사상들이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예수 그리스도를 참 하느님이시요 참 인간으로 고백하는 데에 집중하다보니 그렇게 된 것 같습니다. 그러다가 근세 이래 산업혁명으로 가난한 이들이 대량으로 늘어나고 또 그들의 빈곤 정도가 극심해지다 보니, 이 빈익빈 부익부 사태에 대한 성찰이 깊어지면서 가난한 이들의 복음화를 대명제로 하는 사회교리가 새롭게 출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니 이는 그저 ‘가톨릭교회의 사회적 가르침’이라는 학술적 이름이 아니라 신앙고백에 추가되어 고백되어야 마땅한 ‘사회교리’라는 교회적 이름으로 불러야 하는 것입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라는 예수님의 선교 명령이 복음화 2천년 동안 잊혀지고 소홀히 되는 동안 ‘교회의 선교’는 신자들의 양적 증가 목표에 치우쳐왔고, 유럽에 토착화된 교회 모델을 옮겨 심는 데에 심혈을 기울였을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복음서들이 증언하는 ‘예수의 선교’는 ‘착한 사마리아인의 이웃 사랑’을 실천하여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는 ‘예수의 선교’를 계승하여 우리를 부활 신앙으로 살아있게 하는 메시지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다.”라는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 희생으로 인류에게 가르쳐 주신 부활의 진리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처럼 서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지키라고 당부하신 계명입니다. 우리가 이 계명에 따라 살아갈 때, 그분 안에서 부활할 수 있게 됩니다. 우리가 이미 받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의 은총은 이를 위해 주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서로 사랑하기 위한 가르침은 사회교리에서 최고선과 공동선의 가치로 요약되어 있습니다. 최고선의 가치는 자유와 평등, 정의와 평화입니다. 이를 바탕으로 실현되어야 할 공동선의 가치는 인간의 존엄성, 사회의 공동선, 재화의 보편 목적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보조성 그리고 연대성입니다.
이 가치들을 실현하기 위한 과정은 관찰 – 판단 - 실천의 3단계 방식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제1단계에서는 사람들이 서로 사랑하지 못하도록 가로막고 있는 사회악 현상에 대해 세상을 관찰합니다. 예수님께로부터 직접 복음을 선포받았고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신 그분의 행적을 목격한 바 있었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이 관찰의 단계에서 세상의 가난한 이들에게 필요한 공동선을 판단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말씀을 듣고 성찬을 나누며 가진 것을 공유함으로써 가난한 이들에게 나눔을 실천하는 일이었습니다.
이 관찰에 근거하여 공동선을 판단하게 되면, 비로소 예수님의 행적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세상의 사회악 현상이 사람들을 이기적으로 만들고 탐욕스럽게 하는 현실에 대한 관찰에서, 예수님께서는 수많은 비유로 하느님 나라의 진리를 판단할 수 있도록 가르치셨음을 기억하던 초대교회 신자들은 공동선이라는 빛이 비추이면 사회악이라는 어둠은 사라지는 이치를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신자들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을 행하는 십자가를 멀리 하지 말라는 가르침을 잊지 않고 있었고, 따라서 사정이 좋든 어렵든 가난한 이들과 서로 사랑하는 공동체를 이루고자 노력함으로써 로마제국의 박해를 이겨냈습니다. 이들의 이 용감한 실천이 역사 안에서 교회를 출현시켰습니다. 이 교회는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성령으로 현존하시는 역사적 실체였습니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을 할 뿐만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도 하게 될 것”(요한 14,12)이라고 말씀하신 예수님의 약속과 보증을 입증해 보임으로써, 현재 그리스도 신앙을 받아들인 신자들은 거의 전 세계에 퍼져 있습니다.
교우 여러분!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하느님 앞에서 충실하고 부유해지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믿는 이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난 사람들이니, 천상의 가치를 추구하라고 권고하였습니다. 코헬렛의 저자는 이러한 믿음과 실천이 아니고서는 모든 것이 헛되다고 갈파하였습니다.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해서 말씀드린 이 강론을 통해서 오늘 복음 환호송의 말씀대로, “마음이 가난한 이들은 하늘 나라를 차지하리라.”는 말씀이 여러분에게 축복하시는 하느님의 말씀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