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샘별곡 104]모처럼 착한 일, 무틋한 가을밤
최애시청最愛視聽 프로그램 <인간극장>을 본 후 소파에 느긋이 누워 ‘독서삼매경’에 빠지려는데, 신선들이 산다는 임실 운암 선거리仙居里에 사는 외우畏友 빙형氷兄의 전화다. 오늘 고구마를 캐려는데 와줄 수 있냐는 것. 불감청고소원. 잘하면 고구마 한 박스는 얻어올 수도 있겠다. 빙씨는 워낙 희성稀姓인지라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데, 고교 3학년때 같은 문과였으나, 3년 동안 한번도 같은 반이 아니어서 이름만 기억할 정도였다. 나의 졸문을 어디선가 읽은 후, 전화번호를 알아내어 불쑥 우거寓居를 방문한 이후 '격하게' 친해졌다. 같은 교문을 3년간 드나들었다고 이렇게 친해지는 건, 참 이상한 일이다. 졸업 47년만에 처음 만났는데, 어떤 부담도 없다. 역시 고교시절 동기동창이 친구로서는 ‘쵝오’인 듯하다. 알고 보니, 나보다 두 살 위, 빙형이라 부르는 까닭이다.https://cafe.daum.net/jrsix/h8dk/1323
차로 30여분 거리. '프로답게' 장화와 실장갑, 호미를 챙겨 9시 길을 나섰다. 10시부터 시작한 ‘고구마 캐기’는 오후 2시반쯤 끝이 났다. 이것 캐기도 쉬운 일이 아니다. 여자 다루듯 조심조심 뿌리 주변의 흙을 호미로 판 후 슬금슬금 잡아당겨야 한다. 이런 단순노동은 나의 주특기라고나 할까. 주특기인만큼 재밌다는 말을 친구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조금은 놀라는 눈치다. 호박고구마 두 고랑, 꿀고구마 두 고랑. 고구마잎만 먹는 고구마도 있다. 굵직굵직한 게 코끼리 다리같은 것도 있다. 아내가 고구마를 좋아하는데 잘 됐다. 꿀고구마는 얼마나 맛 있으면 이름을 그렇게 지었을까. 게다가 고구마가 아니고 고구마잎만 먹는 종자는 처음 봤다. 잎으로 김치도 담근단다. 하기야, 들깨도 잎만 먹는 종자가 따로 있으니.
점심은 빙형의 친구인 이모 박사가 인근 강진에서 추어탕을 샀다. 이박사도 교수로 정년퇴직한 후 여러 사업에 열정을 보이고 있는 에너저틱한 친구여서 사귈만했다. 농촌일이라는 건 혼자서 하면 너무 팍팍해 질리기 일쑤다. 말상대만 있어도 한결 가벼운데, 고등학교 친구가 하루종일 재능기부를 하니 신이 날뿐더러 부담스럽던 가을일을 던다고 생각하니 기분이 좋은 모양이다. 내처 오후 끝물인 고추를 따러 가자고 내가 더 채근을 했다. 빨간고추를 지금 따지 않으면 모두 물러터져 썩고말 일. 며칠을 밍그적거렸다고 한다. 300여주를 심었으니 그동안 탄저병 예방 등 농약은 얼마나 했을 것인가. 내년에는 대폭 줄일 생각이란다. 그러니 다른 무엇보다 농사일은 부부가 함께 동고동락을 해야 한다. 고랑에 비닐을 혼자서 씌우는 것은 가장 큰 고역이다. 반대편에서 잡아만 줘도 훨씬 수월할텐데, 그럴 때마다 ‘농촌지역 장기부재’의 아내가 그립곤 했다. 이런저런 수다를 떨면서 고구마를 캐고 고추를 따다보니 어느새 4시가 좀 넘었다. 아예 저녁까지 먹고 가란다. 이것도 불감청고소원. 오늘 착한 일 한 덕분에 두 끼도 벌었다. 흐흐. 게다가 선물로 받은 고구마 두 박스(한 박스는 남원의 서예가친구에게 주겠다했다).
빙형에 대해 조금만 더 말하자. 토목직으로 군산시청에서 정년퇴직한 후 고향에 아담한 집을 지었다. 지황을 재배하여 ‘경옥고瓊玉膏’(조선왕조실록에 여러 번 나오는 임금만 먹던 신비의 명약이다)를 직접 만들어 기회되는 대로 친구들에게 500g 한 병씩을 앵긴다. 더 필요해 구입을 원하면 시중가보다 50% 할인해 보내주기도 한다. 퇴직후 국립농수산대학(전주 소재) 전문과정인 약초과를 다니며 배운 노하우라고 한다. 지금은 가공학과를 다니고 있는데, 식초를 한창 만드는 중이다. 또한 면소재지에서 1주일에 한번 장구를 배우고, 노래교실에서 음치교정도 받고 있다. 빙형도 아내가 장기부재한 상태인데, 대단한 에너지이다. ‘제2의 삶’을 살면서 어느 노철학교수가 말한 “인생의 황금기는 65세에서 75세까지”라는 것을 100% 확신하고 있다. 문제는 옆지기와 늘 함께 할 수 없는 게 아쉽단다. 나 역시 그렇다. 아내가 최근 추석 황금연휴를 이용하여 3주 동안 유럽(스위스-프랑스-이탈리아) 3국을 처형과 함께 다녀왔는데, 명절인 만큼 아내의 부재가 더욱 더 커보였다. 용인 아내의 집에서 하루밤을 혼자 자다가 너무 쓸쓸해 내려와 버렸다. ‘아내가 없는 방은 너무 크다’는 어느 시인의 시구도 생각났다. 빙형도 자주 형수에게 조르지만 ‘택도 없는 소리’라는 메아리만 돌아오는 것같다. 남편들이 ‘삼식이(하루 세 끼 밥을 꼬박꼬박 챙겨먹는 넘)’라서 그럴까? 그것이 이유라면 얼마든지 외조外助할 자신도 있건만, 모를 일이다.
아무튼, 이런 재능기부는 얼마든지 해도 좋다. 지황 캘 때 불러주면 좋겠다. 흐흐. 모처럼 착한 일을 하고 오니, 몸이야 쬐깨 피곤할망정 무틋한 밤이다. 가을비가 촉촉이 내리는 저녁 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