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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욱의 미술 토크』 Ⅴ
- ①고딕 미술, ②르네상스 미술, ③바로크 미술, ④로코코 미술, ⑤신고전주의 미술
◆ 『서정욱의 미술 토크』 Ⅴ···목차
59. 높게, 더 높게 고딕 미술 -신에게 더 가까이 … 하늘로 치솟은 성당 첨탑
60. 신에게 가까이, 더 높게, 고딕 미술 II - 첨두아치·플라잉 버트레스·스테인드글라스
61. 천재를 만든 르네상스 - 인간 중심으로…생각이 바뀌자 천재들이 쏟아졌다
62. 시대의 변화가 만든 바로크 미술 - 극적이거나… 섬세하거나… 묘하거나…
63. 우아한 여성의 시대 로코코 미술 - 유행은 짧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64. 18세기의 유행 신고전주의미술- 18세기 말 英 상류층은 왜 앞다퉈 로마에 갔을까?
59.높게, 더 높게 고딕 미술 -신에게 더 가까이 … 하늘로 치솟은 성당 첨탑
12~15세기 서유럽 건축양식 - 대부분 프랑스에서 시작
까마득히 높고 크기도 어마어마 - 이탈리아 ‘고딕’이라 비하하기도
당시 세계관 나타난 ‘전쟁의 나무’ - ‘신만이 인간 폭력 치유’ 표현
신에게 다가가려는 절실함 - 고딕 성당 탄생한 이유였다
당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전쟁의 나무’. 필자 제공
12~15세기에 서유럽에는 첨탑을 지닌 까마득히 높은 성당들이 많이 지어졌다. 대부분 보셨을 것이다. 어마어마한 성당들이다. 크기도 그렇고, 높이도 그렇고, 조각들의 정교함도 그렇고, 성스러움도 그렇고, 스테인드글라스를 뚫고 들어오는 눈부신 색의 빛을 보면 감탄을 하든 기도를 하든 뭐든 하게 된다. 마음이 움직여지는 성당 건축물이다.
역사가들은 이런 아름다운 성당에 이름을 붙여 주었다. 고딕 성당이다. 그런데 이름이 좀 이상하다. 고딕이라면 고트족의 예술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런 성당들은 대부분 프랑스에서 시작된 것이다.
고트족하고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그런데 고딕이라니요? 한마디로 비하한 것이다. 고트족이 만든 것처럼. 야만적이고 천박하다는 것이다. 고트족은 옛 유럽의 야만족이다. 로마 문명을 멸망시킨 것도 그들이다.
아니 이렇게 멋지고 훌륭한 건축물을 비하하다니. 그런데? 그 사람들도 그렇게 말한 이유는 있지 않을까? 이 아름다운 성당들을 보며 ‘고딕이다’라고 말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부터 볼까? 그들은 이탈리아 사람들이다. 15세기 르네상스를 일으킨 이들이다.
어두웠던 중세를 뒤로 보내며 사상, 문화, 예술, 건축에서 큰 발전을 이룬 때가 르네상스이다. 바로 그 르네상스를 이룬 이탈리아인들이 이런 성당들을 비하한 것이다. 고딕이라고 부르면서 말이다. 혹시 시기심에서 그런 걸까? 아주 없다고는 볼 수 없다.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
이탈리아는 로마의 후손이고 그 입장에서 보면 프랑스는 야만인 출신이다. 야만인들이 로마를 멸망시켰다. 르네상스 역시 무너진 그리스 로마 문명을 재건하겠다는 의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듣지도 보지도 못하던 특이한 방식으로 지어진 성당들을 고운 눈으로 볼 수만은 없었겠지. 그런데 그들이 성당을 평가절하한 이유는 그것 말고도 있다.
아름다움을 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늘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그래서 이상적 비율을 중시했다. 하지만 이 성당들은 그렇지가 않다. 이상적 비율과는 거리가 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볼까?
때는 12세기이다. 당시 사회상을 풍자적으로 표현한 그림이 한 장 있다. 전체를 보면, 나무가 있고 그 위에 사람들이 매달려 앉아 있거나 서 있다. 나무 제일 위를 보면 황금색 갑옷을 입은 사람과 검은색 갑옷을 입은 사람이 칼을 휘두르고 있다. 싸우는 것이다.
황금색 갑옷을 입은 사람 손에는 둥근 황금 덩어리가 들려 있다. 그것을 놓고 싸우는 것이다. 둘 다 왕관을 썼다. 왕들이다. 바로 아래를 보면, 파란색 망토를 두른 주교와 붉은색 망토를 두른 주교가 싸우고 있다. 지팡이까지 휘두른다.
그 아래를 볼까? 또 싸우고 있다. 부유층들이다. 그 밑에도 싸운다. 성직자들이다. 한 사람은 술병까지 들었다. 또 그 밑에는 군인들이 싸운다. 파란 군인이 회색 군인을 찌르고 있다. 그 아래서는 농부들이 싸우고, 그 옆에는 기사들이 싸우고, 마지막으로 여자들끼리도 싸운다. 온통 싸운다.
여기까지의 설명은 이렇다. 당시 사회는 여러 계층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에게는 갈등이 있다. 이득을 위해서라면 싸움을 마다하지 않는다.
노트르담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림 윗부분을 보자. 가운데 하나님이 계신다. 그 옆으로는 붉은색 천사들이 늘어서 있다. 그 아래로 흰옷을 입은 천사가 양쪽으로 보이죠? 나쁜 천사들이다. 머리에 뿔이 났다. 이 천사들이 사람들을 꾀어내어 싸우게 하는 것이다.
싸우지 않는 방법이 단 하나 있긴 있다. 하나님에게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하나님만이 인간의 폭력을 치유할 수 있다. 이것이 당시 사람들의 세계관이었다. 왕도 주교도 귀족도 기사도 농부도 이 생각은 같았다.
그러니 어떻게 해야 할까? 높이 높이 성당을 세워야죠. 그래야 조금이라도 하나님에게 가까이 갈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첨탑 고딕 성당의 기본적 탄생 배경이다. 이렇다 보니 그리스 건축처럼 이상적 비율을 따질 겨를이나 있었을까? 높이 올리는 것조차 벅찬데 말이다.
이것이 르네상스인들이 고딕이라며 평가절하했던 이유 중 하나이다. 그리고 중세의 기술로는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성당이 올라갈 수 있었던 이유이다. 하나님께 다가가려는 절실함이 고딕 성당을 탄생시킨 것이다.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59.높게, 더 높게 고딕 미술 -신에게 더 가까이 … 하늘로 치솟은 성당 첨탑 / 국방일보 ,2021. 3. 9.
60.신에게 가까이, 더 높게, 고딕 미술 II
-첨두아치·플라잉 버트레스·스테인드글라스,신앙심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아이디어
기존에 쓰던 로마식 둥근 아치 대신 높이 건물에 유리한 첨두아치 고안
버팀벽 적용해 뼈대 없는 단점 보안...색유리 조각으로 성스러운 공간 연출
생트 샤펠 성당 스테인드 글라스.
쾰른 대성당 내부. 필자 제공
고딕 성당을 살펴볼까? 쾰른 대성당이다. 실내의 천장이 꽤 높다. 43m쯤 된다. 경이롭다. 어떻게 가능했을까? 이것은 석조건물이다. 뼈대가 없다. 단지 돌을 쌓아서 올리는 방식이다. 모르타르가 있긴 하지만 접착력이 거의 없다. 수평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미끄러져 버린다. 돌들은 중력으로 버텨야 한다.
그렇다 치더라도 높이만 올리는 것이라면 피라미드처럼 넓게 쌓으면 된다. 하지만 내부 공간을 만들어야 한다. 그러니 양 옆의 벽을 일자로 쌓아야 한다. 일자로 쌓더라도 두껍게 하면 43m쯤은 올릴 수 있다.
하지만 벽은 얇아야 한다. 두꺼우면 빛이 들어오지 않기 때문이다. 고딕 성당은 하나님과 인간을 이어주는 중간장소이다. 그러므로 빛이 많이 들어와야 한다. 그래야 천국의 입구처럼 보일 수 있다. 까다로운 조건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이제 이 경이로운 건물을 어떻게 올릴 수 있었는지 알아볼까? 중세인들이 첫 번째로 낸 아이디어는 끝이 뾰족한 아치이다. 첨두아치라고 한다. 기존의 둥근 아치는 로마식 아치이다. 콜로세움 모양으로 만들어져 있다.
두 아치를 놓고 머릿속으로 그려 보자. 어느 아치가 높이 올리는 데 유리할까? 첨두아치겠죠. 둥근 아치는 옆으로 퍼지는 힘이 강해 보인다. 그에 반해 첨두아치는 비교적 아래로 힘을 내려보낸다. 높이 올리는 데는 훨씬 유리하다.
고딕 성당을 한번 세워보자. 먼저 바닥을 잘 다져야 한다. 10m 정도는 다져야죠. 이것은 중력을 이용한 것이다. 수평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그 위에 첨두아치 기둥을 세운다. 혼자 서 있을 수 있을까? 어느 정도까지는 버티겠지만 올리다 보면 한계에 다다를 것이다. 무너지겠죠?
중세인들은 두 번째 아이디어를 내며 이것을 해결했다. 버팀벽이다. 그들은 첨두아치를 세울 때 벽을 올리다가 밖으로 밀려날 만한 부분에 다다르면 버팀장치를 덧댔다. 물론 정확한 위치를 잡아야 한다. 그게 관건이다. 그렇게 잘만 올리면 혼자서 서 있을 수 있는 높은 건물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두 가지 큰 아이디어가 나왔다. 첨두아치와 버팀장치. 버팀장치를 플라잉 버트레스라고 한다. 이제 가운데 천장이 높은 공간이 나왔죠? 그곳이 예배당이다.
이제 첨탑만 올려놓으면 된다. 첨두아치와 플라잉 버트레스로 버티고는 있지만 안전하지는 않다. 첨탑은 가능한 한 가벼워야 한다. 고딕인들은 그 아이디어도 냈다. 그럼 성당이 다 완성되었을까? 아니다. 빛을 만들어야 한다. 얇은 벽들 사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가득 채워야 한다.
빛들이 쏟아져 들어 온다. 스테인드글라스는 색유리를 조각으로 만든 다음 이어 붙여 그림을 완성하는 방식이다. 내용은 성경이나 성인들의 이야기이다. 그런 성스러움이 하늘의 빛을 받아 색색으로 반짝이니 누구든 이 공간에 들어오면 신앙심이 깊어질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도 진흙과 나무집밖에 모르던 중세인들이 이런 어마어마한 석조건축물을 본다는 것 자체가 기적 같은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고딕 성당은 하늘에 다가가려는 신앙심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아이디어로 완성된 것이다.
시대적 배경도 살펴볼까? 고딕 성당들이 여기저기서 세워지던 후기 중세에는 도시들이 발달하고 있었다. 농촌을 떠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며 수공업과 상업이 발전하기 시작했던 때이다. 그런데 도시의 땅들은 대부분 귀족이나 교회 소유였다. 시민들은 그들의 땅에서 살면서 세금을 내야 했다.
생각해 보죠. 외부인들의 발길이 많아지면 좋을까? 나쁠까? 당연히 좋겠죠. 유동인구가 많아지면 땅값이 올라간다. 땅 소유주인 귀족이나 교회 입장에서는 너무 반가운 일이죠. 시민들 역시 다르지 않다. 외부인이 많아지면 장사도 잘되고, 숙박업도 잘되니 나쁠 것은 하나도 없다. 한마디로 도시가 성장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도시마다 큰 성당을 짓는 게 하나의 꿈이었다. 당시의 외부인이란 지금 같은 관광객은 아니었다. 대부분 성지순례자들이었다. 그들은 뜻깊은 성지들을 돌며 신앙심도 다지고 수양도 하고 성찰도 하는 사람들이다. 그들을 유치하기 위해서는 더 상징적인 성당이 필요했다.
자연스레 높이 경쟁을 하게 된 것이죠. 부작용도 생겼겠죠? 중간에 무너지는 일도 많았다. 사실 고딕 성당이라는 것 자체가 안정적인 건축물이 아니다. 유럽에 가서 고딕 성당을 보면 많은 곳이 지금도 보수 공사 중일 것이다. 그러지 않으면 고딕 성당은 버티기가 어렵다.
그리고 자세히 보면 강철 와이어를 둘렀다거나 부분적으로 보강벽을 세운 곳도 발견할 것이다. 앞으로도 그래야 하겠죠. 고딕은 그리스나 로마의 건축물과는 다르다.
로마나 그리스를 이어받은 르네상스 건축물과도 다르다. 독특한 시대에 생겨난 매우 독특한 건축물이다. 그래서 고딕 성당에는 그만의 특별하고도 묘한 감동이 있다.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0.신에게 가까이, 더 높게, 고딕 미술 II - 첨두아치·플라잉 버트레스·스테인드글라스… 신앙심이 만들어낸 기적 같은 아이디어 / 국방일보 ,2021. 3. 16.
61.천재를 만든 르네상스 - 인간 중심으로…생각이 바뀌자 천재들이 쏟아졌다
종교 중심 중세 한계 봉착…새로운 사고로 전환 - 자유로운 분위기 힘입어 창의적 미술 꽃피워
마사초 원근법 첫 사용…얀 반 에이크 유화 틀 완성
다빈치·미켈란젤로·라파엘로 등 동시대 천재 탄생-예술가 지원에 적극 나선 메디치 가문도 큰 공로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 ‘천지창조’ 중 ‘아담의 창조’.
원근법을 그림에 처음 사용한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
중세 화가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루첼라이의 성모’. 원근법을 이용하지 않아 평면적으로 보인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가 돔을 완성한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널리 알려진 작품 ‘모나리자’ ‘아담의 창조’ ‘시스티나의 성모’의 작가는 각각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그리고 라파엘로이다. 세 사람 모두 천재라는 수식어를 갖는 특별한 화가들이다. 그런데 이 화가들은 거의 같은 시기에 활동했다.
다빈치는 1452년생이다. 그를 기준으로 미켈란젤로는 23살 어렸고, 라파엘로는 31살 어렸다. 하지만, 이 세 화가는 서로 라이벌 관계를 유지하며 경쟁적으로 수준 높은 예술 작품들을 끊임없이 탄생시켰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역사적인 천재 화가들이 같은 시기에 같은 공간에 존재했던 걸까? 혹시 어떤 사회적 분위기가 이런 천재들을 동시에 만들어냈던 것은 아닐까?
사람들은 문화와 예술의 큰 발전을 이루었고, 다양한 분야의 천재들을 배출했던 이 시기를 르네상스 시대라고 말한다. 그리고 지금도 어떤 부흥이나 부활을 의미할 때 르네상스라는 말을 빌려 쓰기도 한다. 그렇다면, 어떤 시대적 배경이 르네상스를 만들었고, 그런 특별한 예술가와 작품들을 탄생시켰던 것일까?
그 큰 이유는 사고의 전환에서 찾을 수 있다. 모든 것의 중심에 종교가 있었던 중세시대가 한계를 드러내면서, 차차 사람들은 인간 중심의 새로운 사고를 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상상력과 자신감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그 자신감은 새로운 발명과 발전으로 이어진다. 특히, 당시 발명된 활자 인쇄는 사람들의 지식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
미술 분야에서의 혁신도 눈부셨다. 중세 화가 두초 디부오닌세냐의 ‘루첼라이의 성모’와 르네상스 화가 마사초의 ‘성 삼위일체’를 비교해보면 금방 알 수 있다. 한눈에도 마사초의 그림이 훨씬 입체적으로 보인다. 지금으로선 특별할 것이 없지만, 당시 사람들은 깜짝 놀랐다고 한다.
지금은 당연하지만 르네상스 전까지는 원근법을 중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사초는 처음으로 원근법을 이용해 그림을 그린 화가이다. 그리고 이 작품이 그 첫 번째이다.
중세 그림 치마부에의 ‘십자가상’과 르네상스 얀 반 에이크의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도 비교해보면 차이가 확 난다. 사실감에서 난다. ‘십자가상’은 목판에 템페라로 그린 것이고 ‘붉은 터번을 두른 남자’는 목판에 유화로 그린 것이다.
바로 이 유화 덕분에 르네상스 화가들은 한층 발전된 회화를 선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유화는 마르는 시간이 있어 수정에 편리함이 있고, 색이 맑고 투명해 더 사실적인 묘사를 하는 데 큰 이점이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유화의 틀을 완성한 사람이 얀 반 에이크이다.
‘르네상스인’이라는 말은 못하는 것이 없는 사람을 비유하는 말이다. 르네상스 화가는 단지 화가만이 아니었다. 화가이며, 철학자, 그리고 과학자, 수학자, 해부학자, 건축가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빼놓고라도 미켈란젤로 또한 조각으로 시작해 그림, 문학, 신학, 건축 등 못 하는 것이 없었다.
당시 교황은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맘에 들자, 예배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했고, 전쟁이 나자 미켈란젤로는 군대의 요새 설계까지 맡았다.
르네상스의 분위기는 무척 자유로웠다. 중세에서 벗어난 사람들의 자신감은 어떠한 상상도 할 수 있었고, 어떠한 실험도 가능했다. 다빈치는 기마상을 의뢰받고는 도나텔로의 ‘가타멜라타 기마상’을 뛰어넘는 작품을 완성하기 위해 말을 해부한다.
말뿐만이 아니다. 그는 정확한 사람의 동감을 표현하기 위해 30구 이상의 인체를 해부하기도 한다. 그런 지식적 바탕이 결국 불후의 명작 ‘모나리자’를 탄생시켰던 것이다. 이렇듯 르네상스는 인간 중심의 창의적인 미술이 시작되던 시기였다.
미켈란젤로의 시스티나 성당 천장화를 보자. 세계 최대의 벽화이며, 르네상스 명작 중 명작으로 손꼽히는 작품이다. 로마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 면적은 약 991㎡(300평)가 조금 넘고, 등장 인물은 300명이 넘는다.
1508년, 33세의 미켈란젤로는 첫 작업에 착수한다. 특이한 점은 이 큰 그림을, 미켈란젤로가 혼자서 그리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관행적으로, 다른 화가들은 조수들과 함께 작업했었다. 물론 이유는 조수들의 실력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이다.
작업 기간 내내 미켈란젤로는 목과 허리의 고통을 호소하면서도 혼자 그리기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다. 그렇게 4년이 지난 1512년, ‘천지창조’라 알려진 천장화는 황홀할 만큼 멋진 자태를 드러낸다. 사람들은 눈을 점점 크게 뜨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도 있다. 미켈란젤로는 처음부터 이 작업을 하고 싶지 않아 했다. 사실 조각가 출신인 미켈란젤로는 늘 ‘회화는 조각만 못하다’고 역설하며 다녔다. 더군다나 그는 그림을 그려 본 경험도 많지 않았다. 또 라이벌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의식한 부담도 있었다.
그의 심정은 편지에 잘 나타나 있다. “이건 정말 내가 할 일이 아니다. 시간 낭비다. 신께서 도우시기를….” 그의 고통스러운 마음이 느껴진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최고의 작품 ‘천지창조’를 창조했고, 후세 사람들에게 명작을 볼 수 있는 기쁨을 안겨주었다.
처음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은 교황 율리우스 2세다. 그는 미켈란젤로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실력에 관한 믿음만큼은 확고했다. 그래서 끝까지 미켈란젤로가 그려야 한다고 고집했다.
그런데 혹시 이런 궁금증이 생기지 않는가? 미켈란젤로도 신인 작가 시절이 있었을 텐데 도대체 어떤 과정을 통해 교황의 신임까지 받는 유명작가가 될 수 있었던 것일까? 혹시 소속사가 있었던 것일까?
비슷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있었다.
15세기 피렌체의 대부호였던 그 사람들은 끊임없이 유망한 신인 작가들을 발굴해 기회를 주었고, 재정적 후원과 관심을 아끼지 않았다. 미켈란젤로 역시 그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들의 이름은 ‘메디치 가문’이다.
1400년대의 피렌체는 유럽 문화의 꽃이었으며, 활발한 무역의 중심지였다. 그러다 보니 많은 돈이 도시에서 움직이게 되었고, 권문세가들은 그런 피렌체의 권력을 잡기 위해 보이지 않는 세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한 가문이 메디치 가문이다.
메디치 가문 역시 무역업과 은행업으로 막대한 부를 쌓으며, 피렌체 권력의 중심에 서기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러던 중 메디치가의 조반니 디 비치와 그의 장남 코시모 메디치는 새로운 생각을 한다. 꼭 힘을 통한 세력 확장만이 아니라 철학자, 과학자, 예술가들을 지원하여 그들의 지식과 예술품을 통해 가문의 명성을 높임과 동시에 피렌체의 중심에 서려는 계획이었다.
그때 조반니 디 비치는 산타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돔을 주목한다. 1296년 착공된 이 성당은 돔을 완성하지 못해 100년 이상이나 흉물처럼 피렌체 중심에 방치돼 있었다. 늘 눈에 어른거리는 미완의 성당은 피렌체 시민들에겐 골칫거리이자 소망이었다. 메디치가는 이 성당을 완성하기로 결정한다.
그 무렵 메디치가의 눈에 띈 사람이 있었다. 건축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이다. 그는 큰 재능이 있었음에도 성격이 괴팍해 사람들이 꺼리는 인물이었다. 하지만 메디치가는 브루넬레스키와 이 프로젝트를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반신반의하던 성당 측도 메디치가를 믿고, 검증되지 않은 이 건축가에게 숙원사업을 맡긴다. 메디치가는 가문의 미래를 위해 위험한 도전을 선택했던 것이다.
1420년 필리포 브루넬레스키는 자신도 처음 생각해낸 방식으로 돔 공사를 시작한다. 그것은 고대 판테온 건축방식을 기초로 한 것이었다. 피렌체 시민들도 처음 보는 건축방식이 워낙 신기해 언제나 현장으로 몰려들었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의 시간 14년이 흘러 1434년, 돔은 그 아름다운 위용을 드러낸다. 시민들은 열광했고, 메디치가의 위상은 단번에 올라갔다. 곧바로 메디치가가 운영했던 모든 사업은 유럽 전체로 확장된다. 교회의 신임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 후로도 메디치가는 지식인과 예술인을 지원하기 위해 막대한 자금을 사용했다. 미켈란젤로뿐만 아니라 레오나르도 다빈치, 도나텔로, 보티첼리 등 도움을 받지 않은 예술가가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결과 메디치가는 더 큰 부와 권력을 얻게 되었으며, 르네상스를 꽃피운 큰 공로자가 되었다. 사진=필자 제공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1.천재를 만든 르네상스 - 인간 중심으로…생각이 바뀌자 천재들이 쏟아졌다 / 국방일보 ,2021. 3. 23.
62.시대의 변화가 만든 바로크 미술 - 극적이거나… 섬세하거나… 묘하거나…
종교개혁 겪은 로마 세력 재결집 위해 강렬한 종교화 원하고
신교 지배한 네덜란드 중산층 그림시장 첫 형성...렘브란트·페르메이르 인기
천재라 불리는 벨라스케스 스토리 있는 그림 상상 자극
카라바조의 ‘그리스도의 매장’.
페르메이르의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벨라스케스의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조르주 드 라투르의 ‘작은 등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이탈리아 화가 카라바조가 그린 ‘그리스도의 매장’의 첫인상은 매우 강렬하다. 각 인물의 표정, 포즈, 그리고 비치는 빛. 그 모든 것이 마치 무대의 한 장면처럼 극적이다. 그의 다른 그림 ‘의심하는 도마’도 다르지 않다. 예수의 부활을 의심하는 세 남자의 이마는 있는 대로 찌푸려져 있고 시선은 과도하게 집중되어 있다.
그리고 아무리 궁금하다 하더라도 저렇게 손가락을 찔러넣어 보았을까? 게다가 화면이 너무 사실적이다. 조금도 미화되지 않았다. 어떤가? 무척 인상적이긴 하지만, 과장된 느낌이 들지 않는가? 미술사에서는 이런 스타일이 등장했던 17세기를 바로크 시대라고 한다.
그리고 ‘일그러진 진주’라는 뜻의 ‘페롤라 바로카(peola barroca)’에서 유래된 ‘바로크’라는 말은 종종 너무 지나쳐서 가치가 없다는 뜻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왜 과장되었던 것일까? 그리고 바로크 미술 작품들은 그런 것뿐일까? 아니다. 사실 바로크 시대는 그리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17세기 유럽에서는 지역마다 여러 사건들이 있었고, 그로 인해 다양한 미술이 동시에 등장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로마의 경우는 종교개혁이 큰 사건이었다. 교황청 입장에서 보면 있어서는 안 되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권위에 상처를 입은 가톨릭은 자신들의 세력을 다시 결집해야 했다.
그래서 전보다 더욱 극적인 종교화들이 필요했다. 그렇다 보니 강렬한 종교화를 잘 그리던 카라바조의 인기가 높았다. 그는 매우 거친 성격이었고, 상습폭행 전과에 살인까지 저지른 인물이었지만, 뛰어난 실력 덕분에 사제들로부터 용서도 많이 받은 화가다.
바로크시대 네덜란드에서 그려지던 스타일은 다르다. 렘브란트의 ‘니콜라스 툴프 박사의 해부학 강의’ ‘포목상 조합의 이사들’은 모두 단체 초상화이다. 종교화가 아니다. 독립 국가인 네덜란드는 신교가 지배하고 있었고, 교회의 사치를 방지하기 위해 종교화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화가들은 이제 일반인에게 주문받아 그림을 그리거나 멋진 풍경을 그린 후 팔아야 했다. 새로운 문화도 생겼다. 중산층 시민들이 그림을 구입해 자신의 집을 장식하는 것의 유행이다. 당연히 화가들은 주문받은 단체초상화, 정물화 등을 많이 그리게 된다. 네덜란드에 그림시장이라는 것이 처음으로 생겨난다.
이때 인기를 끌던 화가 중 한 사람이 페르메이르이다. 대표작으로 ‘진주 귀고리를 한 소녀’ ‘우유를 따르는 여인’이 있다. 평범한 주제를 다루면서도 그 표현이 너무 섬세해 깊은 감동을 주는 페르메이르는 사생활이 거의 알려지지 않은 신비의 작가이다.
특히 그의 작품을 자세히 보면, 카메라로 촬영한 것처럼 정확한 거리감이 나타나 있고, 빛의 번짐 현상까지 그려져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래서 학자들은 그가 카메라의 전신인 카메라 옵스큐라를 이용해 그림을 그린 것으로 추측한다.
바로크시대 프랑스에서 유명한 화가로는 조르주 드 라투르를 꼽을 수 있다. 그는 바로크시대의 유행을 따랐다기보다는 독특한 자신만의 스타일을 추구했던 것으로 높이 평가된다. 대표작 ‘작은 등불 앞의 막달라 마리아’ ‘목수 성 요셉’을 보면, 등불이나 촛불 하나를 이용해 그려진 공통점이 있다.
그는 이 방식을 자주 이용했다. 그런데 특이한 것은 작품이 강렬하기보다는 부드러워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하나의 조명을 쓰면 카라바조의 경우처럼 강렬해 보이기 마련인데 그의 그림은 반대이다. 섬세하고 포근하다. 그런 면에서 사람들은 더욱 매력을 느낀다.
바로크시대 스페인에서는 종교화와 궁정 초상화들이 많이 그려졌다. 대표 화가로는 바로크의 천재라 불리는 벨라스케스를 빼놓을 수 없다. 벨라스케스의 작품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 한 점만 보면 그가 왜 천재로 불리는지 이해가 단번에 된다.
회화의 기술적인 부분에 빈틈이 없다. 하지만 기술적인 것은 그의 실력 중 일부이다. 그는 모델의 정확한 감정을 읽어내는 재주가 있었다. 그리고 관계, 상황, 분위기, 태도까지 모조리 표현한다. 그래서 사람들을 탄복시킨다. 그리고 또 한 가지가 있다. 한 점의 그림 속에 스토리를 집어넣는 특별한 능력이다.
작품 ‘마르다와 마리아의 집에 있는 그리스도’에서의 묘한 분위기가 읽히는가? 전경에는 젊은 여인과 노파가 나온다. 젊은 여인은 화면을 응시한다. 그래서 우리와 눈이 마주친다. 마주하다 보면 그녀의 불편함이 느껴진다.
도움을 요청하는 것인가? 그녀 뒤에 바싹 붙은 노파의 손가락은 그녀를 찌르고 있다. 눈을 마주치지 않는 노파의 태도와 음산함이 겹쳐지며 우리의 또 다른 상상은 자극된다. 그런데 오른편 사각형은 액자인가? 아니면 벽이 뚫려 옆방이 보이는 것인가?
이렇게 벨라스케스는 한 장의 작품을 그려 놓고는 작품의 앞뒤 상황을 우리에게 숙제로 준다. 바로크시대에 이런 화가는 없었다. 그래서 그가 천재인 것이다.
어떤 학자들은 ‘바로크’를 역사상 가장 화려하고 뛰어난 작품들이 탄생한 시기라고 말을 한다. 한 가지로만 이어지던 르네상스의 기준이 한계를 보이면서 나타난 다양한 시도들이, 새로운 기준들을 만들어 냈던 시기가 바로크이다.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2.시대의 변화가 만든 바로크 미술 - 극적이거나… 섬세하거나… 묘하거나… / 국방일보 ,2021. 3. 30.
63.우아한 여성의 시대 로코코 미술 - 유행은 짧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루이14세 죽은 뒤 자유 만끽하게 된 귀족들 - 저택 꾸밀 장식품에서 시작된 미술
달콤하고 감미로운 ‘키테라 섬의 순례’ 대표작 - 저택 자랑하고 싶은 욕망 ‘살롱문화’ 이어져
현대에도 장식성 재해석 여러분야서 응용
‘키테라 섬의 순례’.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강력한 왕권을 누렸다. 그는 세상에서 가장 화려하다는 베르사유 궁전을 짓고는 그곳에서 권력과 사치의 극치를 보여주었다. 루이 14세의 일상들은 모든 대신이 참여해야 하는 국가행사 수준이었다. 당연히 주변 사람들은 지쳤을 것이다.
그러던 1715년 9월 1일 루이 14세는 “짐은 이제 죽는다. 그러나 국가는 영원하리라”라는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난다. 그의 곁에서 숨죽이며 살 수밖에 없었던 귀족들에게는 이제 자유의 시간이 찾아온 것이다.
신이 난 귀족들은 하나둘 베르사유를 떠나게 되었고, 못 다한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멋진 저택과 그 집을 꾸밀 상큼한 장식품들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미술이 있다. ‘로카이유(Rocaille)’라는 조개 장식에서 유래된 이 미술이 바로 ‘로코코(Rococo)’다. 유행했던 시간은 길지 않다. 루이 14세가 죽고 시작되어 루이 15세 시대에 끝난다.
1720년 와토가 그린 ‘제르생의 간판’이다. 와토는 로코코를 대표하는 화가이고, 제르생은 갤러리를 운영하던 와토의 친구로 알려져 있다. 귀족들이 자신의 집을 장식할 작품을 고르고 있는 풍경이다. 왼편에는 배송할 작품을 포장하고 있는 점원들이 보이고, 한 귀족 부부는 궁금했던지 그 장면을 지켜보고 있다.
오른편에는 무릎까지 꿇고 꼼꼼하게 그림을 살펴보는 부부가 보이고 테이블에서는 또 다른 손님에게 그림을 설명하는 주인이 보인다. 상점 뒤로는 수많은 그림이 벽을 메우고 있다.
일반적으로 로코코는 이렇게 설명된다. 1700년대 초부터 1760년대에 걸쳐 프랑스에서 유행한 장식성이 강한 미술이다. 느낌은 밝고, 섬세하고, 경쾌하고, 부드럽고, 가볍고, 즐겁고, 화려하고, 달콤하고, 아름답고, 감미롭고, 우아하다. 설명조차 꾸밈말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퐁파두르 부인의 초상’.
로코코의 대표작으로 종종 설명되는 장앙투안 와토의 ‘키테라 섬의 순례’다. 꿈결 같은 그림의 장소는 키테라 섬이다. 키테라 섬은 사랑의 여신 아프로디테와 에로스가 사는 곳이다. 말이 필요 없는 사랑의 성지이다. 이곳에 오면 이상형을 만날 수 있고 완벽한 사랑을 이룰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랑을 찾는 남녀들이 배를 타고 와서 순례하는 중이다. 화면 오른편에는 아프로디테상이 보이고, 왼편 배 위에는 에로스가 날아다닌다. 열심히 사랑의 화살을 쏴주는 중이다. 화면에는 많은 쌍쌍이 보이는데 한창 구애하는 커플도 있고, 사랑을 이루고 떠나는 커플도 보인다. 꿈결 같고, 달콤하고, 감미롭고, 그런 것이 느껴지는가?
‘제르생의 간판’.
‘로코코’가 만들어낸 또 다른 것이 있다. ‘살롱문화’다. 귀족 부인들은 자신이 꾸민 멋진 저택을 자랑하고 싶어졌다. 그래서 사람들을 집으로 초대해 즐기는 모임을 만들게 된다. 일종의 고급 사교 모임이다. 많은 귀족은 그 모임에 초대받고 싶어 했고, 그들은 모여서 문학·예술·과학·정치를 주제로 세련된 대화를 즐겼다.
처음으로 살롱을 연 사람은 랑부예 후작 부인 카트린 드 비본으로 알려져 있고, 퐁파두르 후작 부인이 특히 유명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로코코를 ‘우아한 여성의 시대’라 말하기도 한다.
‘로코코적이다’ ‘로코코 풍이다’라는 말이 있다. 사람들은 로코코의 장식성을 재해석해 지금도 여러 분야에서 응용한다. 로코코가 유행한 기간은 길지 않았지만, 그 스타일만큼은 영원히 이어질 것이다.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3.우아한 여성의 시대 로코코 미술 - 유행은 짧았지만 스타일은 영원하다 / 국방일보 ,2021. 4. 6.
64.18세기의 유행 신고전주의- 18세기 말 英 상류층은 왜 앞다퉈 로마에 갔을까?
로코코 향략적 문화에 대한 반발 - 고대 그리스·로마 아름다움에 심취
이상·교훈적이며 사사로운 감정 배제 - 로마 견학 필수…미술품 등 수집 열풍
고전 모방하되 빠르게 새로운 것 추구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 필자 제공
‘찰스 존 크라울의 초상’.
‘찰스 존 크라울의 초상’.
세상에는 유행이라는 것이 있다. 유행어가 있고, 유행하는 헤어스타일, 패션도 있다. 사실 유행이라는 것이 별것 아닌 것 같아 보이지만 정작 유행에 앞서가는 사람들을 보면 좋아 보이고 멋있어 보이고 그러다 보니 나도 모르게 슬그머니 따라가게 된다.
특히 SNS가 발달한 요즈음 유행이 만들어지고 퍼져가는 속도가 대단하다. 게다가 몇몇 사람들은 시대의 유행을 미리 읽어 큰 성공을 거두기도 한다.
오늘은 18세기 말 유럽에서 유행했던 미술에 관한 이야기이다. 18세기 초 프랑스에는 로코코 문화가 크게 유행하고 있었다. 루이 14세가 죽자 절대왕권에서 기를 펴지 못하던 귀족들이 해방된 마음에 가볍고 즐겁고 감미롭고 우아한 취향을 즐겼던 것이 로코코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그것도 시들해졌다.
서서히 사람들 눈에 비친 로코코는 아무런 가치도 없는 무의미한 향락적 문화 정도로 변해갔다. 그러면서 다음 유행으로 생겨났던 것이 신고전주의이다. 신고전주의란 용어 그대로 고전을 따라가자는 주의이다. 여기서 고전이란 고대 그리스와 로마 문화를 말하는 것이고 고전주의 앞에 ‘신’ 자가 붙은 것은 르네상스의 고전주의와 구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스 미술을 한마디로 말하자면 인간의 이상을 추구한 미술이라고 할 수 있다. 로코코의 향락적 문화로 인해 허무해진 사람들의 눈에 비친 고전의 이상적 아름다움. 그것은 무척이나 신선하게 다가왔다. 사람들은 서서히 그리스와 로마 문화에 심취해 갔다.
때맞춰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한순간 땅속에 묻혔던 고대도시 폼페이의 유적이 발굴되며 2000년 가까이 감춰졌던 그리스와 로마의 유물들이 생생하게 눈앞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더욱더 그리스 로마 문화에 빠져들었다.
먼저 역사화들이 등장한다. 신고전주의 화가로 불리는 자크 다비드의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가 대표작이다. 소재는 당연히 로마 건국사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작품에 등장하는 사람은 한 가족이다. 왼편 세 젊은이는 아들들, 가운데 중년 남자는 아버지, 오른편 세 여인은 왼편부터 어머니, 딸, 며느리다. 어머니가 안고 있는 아이는 손자이다.
이들은 지금 의식을 치르는 중이다. 세 아들은 로마를 대표해 전쟁에 나가기로 했고 아버지는 아들들에게 검을 주며 승리를 기원한다. 여인들이 저리도 슬퍼하는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다. 로마는 알바왕국과 계속 싸우고 있었는데 길어지자 합의를 한다.
양측의 피해가 점점 커지니 오히려 대표군인을 뽑아 최후에 한사람이 남을 때까지 전투를 벌이자고, 그리고 결과에 승복하자고. 결과적으로 보통 전투가 아니다. 지면 무조건 죽는다. 게다가 한 가지가 더 있다. 싸움의 상대는 이 집안의 사돈이었다.
그러니 부모 입장에서는 아들이 죽든 사돈 청년이 죽든 죽는다. 딸 입장에서는 오빠가 죽든 약혼자가 죽든, 죽는다. 며느리 입장에서는 남편이 죽든 오빠가 죽든 죽는다. 안타까운 경우다.
그런데 그림의 네 남자에게는 주저함이 없다. 어떤 감정도 없다. 애국심은 무엇보다도 우선이고, 그 앞에서 흔들린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이야기다. 이것이 신고전주의 스타일이다. 이상을 추구하고, 교훈적이고, 사사로운 감정은 배제한다. 그리고 정돈되어야 한다.
‘소크라테스의 죽음’은 그리스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는 장면이다. 그는 아테네 정부로부터 고소를 당했다. 젊은이들에게 나쁜 사상을 가르쳤다는 이유에서다. 잘못을 인정하고 반성하면 살려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독배를 마시기로 한다. 옳은 일을 했으니까.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제자들을 가르친다. 이런 회화들이 신고전주의 시대 관객들을 감동시켰다.
영국에서는 ‘그랜드 투어’라는 것이 유행한다. 그랜드 투어란 상류사회 자제들의 고급필수교육 마무리 단계로 하인과 가정교사를 대동해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는 것이다. 여행 기간은 몇 달에서 몇 년까지 걸렸다. 특히 그들은 여행 중 이탈리아에 들러 고대의 문화를 견학하고 고대 기념품을 구입하며, 상류사회의 필수 고급문화인 신고전주의를 익혀야 했다.
또 특별한 그림들이 유행했다. 귀족들이 고대 그리스 로마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배경 앞에 서서 우아한 포즈를 취하고 그리는 초상화이다. 이런 그림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상류층으로서 구색이 맞았다.
화가 폼페오 바토니의 작품 ‘찰스 존 크라울의 초상’을 보면 주인공은 로마 귀족처럼 우아한 포즈를 잡고 있는데 표정 또한 온화하다. 배경의 건축물은 로마풍이고, 그리스풍 조각상들이 테이블 위에 보인다.
폼페오 바토니는 그때 고대기념초상화 전문화가로서 꽤 유명세를 얻고 있었다. 그리고 귀족들과 부유층들은 고대 그리스 로마시대의 미술품이나 기념품, 그리고 그 시대를 배경으로 그려진 미술품들을 사 모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거의 신고전주의 열풍이 불었다.
사람들에게는 모방심리가 있다. 그래서 새로운 어떤 것이 좋아 보이면 따라 하게 되고, 그래서 유행이 시작된다는 것이다. 미술에도 그런 경향이 아주 없지는 않다. 하지만 좋은 예술가라면 결코 모방하지는 않는다. 빠르게 새로운 것을 추구한다. 그래서 작품 감상은 지루할 틈이 없다.
[출처] : 서정욱아트앤콘텐츠 대표 : <서정욱의 미술 토크> - 62.시대의 변화가 만든 바로크 미술 - 극적이거나… 섬세하거나… 묘하거나… / 국방일보 ,2021. 4. 13.
[출처] 『서정욱의 미술 토크』 Ⅴ - ①고딕 미술, ②르네상스 미술, ③바로크 미술, ④로코코 미술, ⑤신고전주의 미술|작성자 ohyh4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