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말씀의 향기♣ No3522
6월15일[연중 제10주간 목요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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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주님! 하루의 양식이 될 이 강론을 받아보는 모든 이들을 축복하시고 주님의 뜻대로 살게 하시며 은총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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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pbc방송미사**
https://m.youtube.com/watch?v=KHdS8WOR_m0
(이성규 대건안드레아 신부님 집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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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레시오회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우리가 생활 중에 가끔 겪는 일입니다. 환대와 친절이 아니라 냉대와 불친절로 인한 모욕감을 느낄 때가 있습니다. 특히 요즘 호칭부터 주의해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객님’ 아니면 ‘선생님’ 하면 될 것을 가지고 ‘아버님’ ‘어르신’ ‘할아버지’ 이쪽으로 오세요,"라고 하니, 마음속으로부터 불길이 솟아오릅니다. ‘지가 나를 언제 봤다고 아버님이야?’ ‘내가 아직 이렇게 팔팔한데 어르신이라니’, 하는 마음에 분노가 치밀어오르기도 합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서비스 빵점에 맛도 별로인 음식점에 들어갈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어떻게 반응하나요? ‘쯧쯧쯧쯧, 음식 맛이라고는...보아하니 곧 문 닫겠군.’ 힘든 존재로 인한 괴로움도 만만치 않습니다.
나를 지속적으로 힘들게 하는 존재를 향해 어떤 사람들은 이런 마음까지 먹습니다. ‘저 사람이 팍 꼬꾸라졌으면’ 더 나아가서 이런 악담까지 서슴지 않습니다. ‘귀신은 뭐하나 저 사람 빨리 안 데려가고.’
그런데 이런 우리를 향해 주님께서는 그래서는 안된다고 간곡히 타이르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노라니, 제 가슴이 철렁 내려앉습니다. 그간 얼마나 많이 누군가를 향해 성을 냈는지 모릅니다. 그간 셀 수도 없이 마음속으로 누군가를 향해 바보 멍청이라고 외쳤는데, 불붙는 지옥이라니 이거 어떡하면 좋습니까?
새 포도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기존의 관행이나 사고방식을 완전히 뒤집어놓으셨습니다. 그간의 유다 관습에 따르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해져야 했습니다. 짐승의 목숨을 해친 사람은 살아있는 짐승으로 되갚아야 했습니다. 동족의 팔을 부러트린 사람은 자신의 팔도 부러트리게 해야 했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동태복수법이 자연스럽게 적용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게 무슨 소리냐며 사랑의 율법을 선포하십니다. 죽음에는 죽음, 행위에 상응하는 보상과 처벌의 균형은 더이상 예수님 앞에 유지될 수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안하신 사랑의 율법에 따르면 마음속에 있는 생각 자체가 이미 처벌과 심판의 대상입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시하며 배척하는 마음, 그것은 이미 살인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사람은 누구나 다 살인자인 것입니다.
미움과 분노, 대립과 불목이 있는 공동체는 하느님께 예배를 드리는 데 합당치 않습니다. 그런 상태에서 드리는 전례는 공허하고 무의미한 것으로 전락합니다. 힘겹지만, 다시 한번 원수 사랑이라는 그 힘겨운 과제를 새롭게 시작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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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전삼용 요셉 신부님]
(강론 동영상)
https://youtu.be/aJb1awKnm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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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가 하고 싶은 말: “너도 날 무시해?”>
넷플릭스 ‘성난 사람들’(BEEF)은 분노가 왜 생기는 것일까? 또 분노는 꼭 나쁜 것일까? 등을 생각하게 만드는 드라마입니다. 재미교포 대니 조는 모든 일이 잘 안 풀리는 도급업자입니다. 대니 조 자신은 돈도 없고 미래도 보이지 않으며 부모님은 친척에게 사기를 당해 한국으로 돌아가 일하게 되었고 하나밖에 없는 동생 폴은 게임과 코인에 빠져있습니다. 대니는 죽고 싶은 심정입니다.
어느 날 대니가 대형 할인점에서 계속 반품을 반복하다 영수증이 없어 반품이 안 되자 되는 일이 없다며 짜증을 내고 화를 냅니다. 그러던 중 주차장에서 흰색 벤츠와 시비가 붙습니다. 상대 벤츠는 위협을 가하고 도망을 칩니다. 가뜩이나 화가 나 있던 대니는 시비를 건 차에 보복하려 부촌의 정원을 엉망으로 만들며 쫓습니다.
벤츠에 탔던 사람은 중국계 사업가인 에이미입니다. 그녀는 가난하게 자랐지만 부유한 일본계 도예가 남편을 만나 열심히 살고 있습니다. 그녀는 세상 물정을 모르는 남편 대신 평생 일을 하고 온갖 간섭하는 시어머니와 자신보다 돈이 더 많은 갑질하는 이들에게 짓눌려 삽니다. 남편은 아내의 스트레스 사정을 들어주지 않고 그저 긍정적인 태도를 가지라며 아내를 어리석은 사람 취급합니다. 이렇게 스트레스가 최고조에 달했을 때 대니와 주차장에서 시비가 붙은 것입니다.
둘은 티격태격하며 서로를 죽일 듯이 미워합니다. 그런데 결말에는 화가 난 사람만이 화가 난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는 식으로 갑니다. 두 사람은 크게 다치고 외딴곳에 떨어져 협력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에 놓입니다. 둘은 마치 땅처럼 낮아지고 겸손해집니다. 결국 아무 것도 아닌 존재임을 느낍니다. 둘은 살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습니다. 탈진 상태에서 둘은 “내가 누구지?”라고 할 정도로 서로 구분하지 못하는 사이가 됩니다. 내가 상대의 감정을 알아주고 상대가 나의 감정을 알아줌으로써 사랑이 싹트게 된 것입니다. 화는 아직 잃을 것이 남았기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이 드라마는 이들의 분노가 언제 생겨난 것인지를 묻습니다. 분명 둘이 주차장에서 마주쳤을 때 생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그저 이미 분노에 가득 차 있었는데 그것을 터뜨린 계기가 되었을 뿐입니다. 사람들은 여러 방법으로 분노를 조절하라 말합니다. 그렇지만 정작 왜 분노가 생기는지는 말해주지 않습니다. 분노는 내가 행복해야 할 존재인데 행복하지 않은 것에 대한 감정입니다. 다시 말해 분노 안에는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뜻이 들어있습니다.
어느 유명한 실험이 있습니다. 원숭이 두 마리에게 오이를 줍니다. 원숭이들은 잘 먹습니다. 그런데 한 원숭이에겐 오이를 주고 다른 원숭이에겐 포도를 줍니다. 원숭이는 오이보다 포도를 열 배는 더 좋아한다고 합니다. 그동안 잘 먹던 원숭이는 분노합니다. 오이를 주는 사람에게 집어던집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
오늘 복음에서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재판에 넘겨진다는 말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말처럼 살인자로 여기겠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이웃에게 화를 내고 살인까지 하게 되는 데는 결국 내면 안에 있는 불만족 때문입니다. 그 불만족은 낮아진 자존감에서 비롯됩니다. 열등감 자체가 화입니다. 자존감은 사랑으로 생깁니다. 소중한 존재임을 믿게 되기 때문입니다.
연세대학교 권수영 교수에게 어떤 자매가 찾아왔습니다. 다섯 살짜리 아이에게 이유 없이 화가 난다는 것입니다. 음식을 차려주면 자꾸 흘린다는 것입니다. 권 교수는 그 자매에게 이유 없는 분노는 없다고 말합니다. 어릴 적 혹시 그와 비슷한 상처가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것을 기억해 냈습니다. 어머니는 어린 시절 밥 먹는 시간이 그리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녀는 우유를 흘렸다가 엄마에게 따귀를 맞고 코피를 흘렸던 기억을 떠올리고는 펑펑 울었습니다.
오늘 복음도 “행복하여라, 마음이 가난한 사람들! 하늘 나라가 그들의 것이다”라는 산상설교의 연속 선상에 있습니다. 행복하다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행복하여지려면 그리스도처럼 되라고 하십니다. 나의 정체성이 그리스도라면 화가 날 일이 없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믿음만이 우리를 살인의 감정에서 벗어나게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고 그리스도로 삽니다. 살아도 주님을 위해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해 죽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내가 누군지 알아?”, “너도 날 무시해?”라는 분노는 나오지 않습니다. 물 위를 걷는 사람이 모터 보트나 수상 스키를 타는 사람을 보고 화가 날 일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자존감을 지녔습니다. 내가 죽고 그리스도가 되었다는 믿음만이 진정 우리를 분노에서, 그리고 이웃에게 악한 일을 벌이지 않게 되는 유일한 길임을 잊지 맙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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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교구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가톨릭 평화신문 미주지사)]
오늘은 6월 15일입니다. 23년 전 남한의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평양에서 ‘남북 정상회담’ 후 ‘공동선언’을 선포한 날입니다. 저는 당시 접경지역인 ‘적성’ 성당의 본당신부로 있었습니다. 공동선언 발표 이후 남과 북은 ‘해빙기’를 가졌습니다. 남한의 예술인들이 북한에서 공연하였고, 북한의 예술인들이 남한에서 공연하였습니다. 올림픽에서는 선수들이 ‘한반도기’를 들고 공동으로 입장하기도 하였습니다.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은 남북공동선언의 열매였습니다. 남과 북의 화해와 협력의 공로를 인정받아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을 받았습니다. 4년 전에는 미국의 트럼프 대통령과 북한의 김정은 국방위원장의 만남이 ‘하노이’에서 있었습니다. 아쉽게도 북한과 미국의 만남은 ‘공동선언’이 없이 결열 되었지만 북한과 미국의 ‘공동선언’이 있었다면 새로운 시대를 살고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북한에 미국의 대사관이 입주하고, 미국에 북한의 대사관이 입주하였다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북한이 핵무기를 전부 폐기하고, 미국이 대북경제제재를 해제하였으면 좋았을 거라 생각합니다.
예전의 기억입니다. 왼쪽 손목이 부어서 잘 가는 침술원엘 갔습니다. 원장님은 부은 손목을 치료하지 않으시고 오른손에 침을 놓으셨습니다. 신기한 것은 반대편에 침을 놓는데도 왼쪽 손목이 편해지는 것입니다. 원장님은 얼음찜질하거나, 감자를 썰어서 손목에 붙여 놓으라고 하셨습니다. 지금 부은 손목에 침을 놓으면 오히려 더 부을 수 있다고 합니다. 왼쪽 손목은 시간이 지나 부은 것이 가라앉으면 침을 놓는 것이 좋다고 하십니다. 저는 원장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감정도 비슷하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화가 나 있을 때는 잠시 멈추는 것이 좋았습니다. 화가 나서 결정하는 것들 때문에 때로 일을 그르치기도 했습니다. 화가 나 있는 상대방에게 좋은 이야기를 해도 결과는 신통치 않을 때가 있었습니다. 화가 난 감정을 추스르면서 시간을 가지고 생각하면 좋은 방법이 떠오를 때가 많았습니다. 화가 난 상대방도 시간을 가지고 기다리면 오히려 미안하다고 말할 때가 있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것도 필요하겠지만 상대방의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려주는 것도 현명한 방법 같습니다.
우리는 그런 모습을 요한복음 8장에서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죄를 지은 여인을 예수님께 데려왔습니다. 손에는 돌이 있었습니다. 그런 죄를 지은 사람은 율법에 따르면 돌로 쳐서 벌하게 되어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떨고 있는 여인을 보셨습니다. 감정에 휩싸여 눈에는 핏발이 서 있는 사람들을 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리에 앉아서 글을 쓰셨습니다. 글을 쓰면 마음이 정리되기 때문입니다. 벌을 주어야 한다는 분노를 가졌던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씩 누그러졌습니다. 떨고 있던 여인도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돌을 들고 있는 사람들에게 이야기하십니다. ‘여러분 중에 죄가 없는 사람이 저 여인에게 돌을 던지시오.’ 그리고 여인에게도 이야기하십니다. ‘나도 그대의 죄를 묻지 않겠습니다. 그러니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십시오.’ 우리는 내비게이션, 인공위성, 기상관측 기구를 통해서 원하는 곳을 쉽게 갈 수 있고, 1주일 혹은 한 달가량의 날씨도 예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지혜롭다 할 수 없습니다. 정말 지혜로운 것은 사람의 마음을 아는 것입니다. 사람의 마음은 내비게이션으로 찾아갈 수 없습니다. 사람의 마음은 인공위성으로 예측하기도 어렵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율법 학자와 바리사이파처럼 겉모습만 하느님을 따라서는 안 된다고 하십니다. 신앙인은 세상 사람들보다 더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세상 사람들보다 더 나누며, 사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참된 지혜는 며칠 앞의 날씨를 예측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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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교구 조욱현 토마스 신부님]
복음: 마태 5,20-26: 살인하지 말라
예수님의 말씀은 살인뿐 아니라 이웃에게 분노하는 것까지 금하신다. 즉 다른 사람에 대하여 적대시하거나 분노를 품어서도 안 된다고 하신다. 그러기에 그리스도인은 율법학자나 바리사이파 사람들보다 더 옳게 살지 못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라고 하시는 것이다. 분노는 살인의 원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인간을 해하는 것은 분노에서 생긴다. 이유 없이 성내는 사람은 누구든지 생각으로 사람을 해치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이유 없이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22절) 하셨다.
자기 형제에게 “바보”, “멍청이”라고 부르는 우리의 혀를 잘 길들여야 한다. 사람의 혀를 아무도 길들일 수 없다면 우리는 그것을 길들여 주실 하느님께로 피신해야 한다. 말이나 소, 낙타, 코끼리, 사자를 길들이려면 사람이 필요하다. 이처럼 인간이 길들려면 하느님이 필요하다. 하느님의 말씀 안에서 모든 변화가 이루어질 수 있다. 분노를 버리라는 말씀은 주님께서 형제들 사이의 사랑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하시는지 알려준다. 그러기에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고 그와 화해하지 않는다면, 하느님께서 그의 예물을 받지 않으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이다. 하느님께서 카인의 제물을 받지 않으신 이유는 그가 아벨을 사랑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미워했기 때문임을 알고 있다.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할 때”(23절) 라는 말은 주님께서 마땅히 당신이 받으셔야 할 영광은 제쳐 놓으시고 이웃을 향한 사랑으로 우리를 초대하신다. 이것은 형제와 화해와 사랑이 가장 좋은 예물이라는 것을 알려주시는 것이다. “너를 고소한 자와 타협하여라.”(25절) 우리를 고소하는 자는 육체의 욕망과 악덕에 맞서시는 성령이시다. 바오로 사도는 “육이 욕망하는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바라시는 것은 육을 거스릅니다.”(갈라 5,17) 그러므로 우리의 현세의 삶이라는 여행에서 그분과 함께 늘 살아가고 모든 일에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그분과의 영원한 친교와 평화를 누리게 될 것이다.
언제나 하느님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며,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올바른 관계를 맺고 살아가도록 노력하여야 한다. 이웃과의 불목은 그 이웃이 가지고 있는 하느님의 모습 때문에 그를 창조하신 하느님과도 불목한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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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송영진 모세 신부님]
<위선자가 되지 마라.>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마태 5,20ㄴ-22)
신앙생활은 ‘온 마음’을 다 바쳐서 하는 생활입니다. <‘온 마음’을 다 바치면, 저절로 ‘온 삶’을 바치게 됩니다.> 위선자들은 겉으로는 잘하는 것으로 보여도 마음은 그렇지 않은 자들입니다. 겉모습만 보면, 정말로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으로 보이긴 합니다. 우리는 그 마음속을 알 수 없으니, 위선자인지 아닌지 판단하지 못하지만, 사람의 마음속을 보시는 하느님께서는 그 사람이 위선자라는 것을 아십니다. <진짜 심각한 문제는 내가 위선자인지 아닌지 나 자신도 판단하지 못할 때가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늘 겸손하게 양심성찰을 해야 합니다. 누구든지 “나는 잘하고 있다.”라고 자만하게 되면 바로 위선자가 되어버립니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는 말씀은, “위선자가 되지 마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위선자들은 실제로 사람을 죽이지만 않으면 “살인하지 마라.”라는 계명을 지킨 것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께서는 분노, 증오, 모욕, 저주 같은 정신적인 살인도 살인이라고 가르치십니다. <마음속에 있는 그런 감정이 살인의 뿌리가 되니까 억제하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그런 감정 자체도 살인이라는 가르침입니다.> 우리는 ‘위선이라는 것’에 대해서 좀 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라고 비판한 일이 있습니다.
“케파가 안티오키아에 왔을 때 나는 그를 정면으로 반대하였습니다. 그가 단죄받을 일을 하였기 때문입니다. 야고보가 보낸 사람들이 오기 전에는 다른 민족들과 함께 음식을 먹더니, 그들이 오자 할례 받은 자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몸을 사리며 다른 민족들과 거리를 두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나머지 유다인들도 그와 함께 위선을 저지르고, 바르나바까지도 그들과 함께 위선에 빠졌습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이 복음의 진리에 따라 올바른 길을 걷지 않은 것을 보고, 모든 사람 앞에서 케파에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은 유다인이면서도 유다인으로 살지 않고 이민족처럼 살면서, 어떻게 이민족들에게는 유다인처럼 살라고 강요할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갈라 2,11-14)(‘케파’는 베드로 사도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베드로 사도에게 한 말은, “당신은 평소에 이방인처럼 살고 있으면서, 유대인들의 관습을 잘 지키는 척 하는가?”라는 뜻이고, ‘위선자’라고 비판하는 말입니다. 아마도 베드로 사도는 불필요한 오해와 갈등을 피하려고 그랬던 것 같은데,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인 행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일은, 누구든지, 자신이 의식하지도 못하는 사이에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러면 베드로 사도를 위선자라고 공개적으로 비판했던 바오로 사도 자신은 “나는 위선자가 아니다.”라고 했을까? 사실 바오로 사도는 자기도 위선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늘 의식했고, 조심했고,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썼습니다.(로마 7,15-25)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 말씀은, “형제를 용서하여라.”라는 가르침이 아니라, “형제에게 용서를 청하여라.”라는 가르침입니다. 여기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이라는 말씀은, 마음에 상처를 입어서 화가 나 있는 사람은 ‘내가’ 아니라 ‘그 형제’라는 것을 나타내고, 그 상황에서 용서를 청해야 할 사람은 ‘그 형제’가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을 나타냅니다. 우리는 형제를(다른 사람을) 용서하는 일만 생각하고, 형제에게서 용서를 받는 것은 생각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나의 화만 생각하고, 형제의 화는 생각하지 못합니다. 형제가 어떤 ‘미운 짓’을 해서 내가 그를 미워하게 되었다는 것만 생각하고, 나의 ‘미운 짓’ 때문에 형제가 나를 미워하고 있다는 것은 생각하지 못합니다. <왜 항상 ‘나를’ 용서하는 위치에만 두고 있는가? ‘내가’ 형제의 용서를 받아야 할 일이 정말로 하나도 없는가?>
예수님께서는 두 사람 사이에 생긴 갈등의 원인이 어느 쪽에 있는지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즉 누구의 잘못이 더 크냐에 대해서는 말씀하시지 않았습니다. 용서를 청해서 받고, 그래서 화해하는 일부터 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원인을 따지고 잘못을 바로잡는 일이 중요하긴 합니다. 그러나 우선 먼저 화해부터 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나는 잘못한 것이 없다. 그러니 내가 먼저 가서 용서를 청할 수는 없다. 그 형제가 화가 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문제일 뿐이다.”라고 말하는 것은 위선자들의 모습입니다. 위선자가 아닌 사람들은, 형제의 잘못을 생각하기 전에 먼저 자신의 잘못을 생각하고, 그래서 먼저 가서 먼저 용서를 청합니다. <이게 말로는 쉬운데, 현실 상황에서는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옳고 그름에 관한 판단 문제도 걸려 있고, 명예나 자존심과도 관계가 있고, 때로는 신념과도 관련되기 때문입니다. 어떻든 위선자가 되지 않으려면 “나는 잘못한 것이 하나도 없다.”라는 생각부터 버려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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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인천교구 정천 사도 요한 신부님]
어제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율법을 완성하러 오신 분으로서 율법 안에 담긴 충만한 의미를 드러내려는 의지를 드러내셨습니다. 그 의지는 이어지는 단락에서 곧바로 실현됩니다. 마태오 복음 5장 21-48절에는 ‘~라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는 식의 정형화된 문구(대당 명제)로 시작하는 여섯 가지 가르침이 나열됩니다. 기존의 규정을 새롭게 풀이하며 하느님께서 처음 의도하신 참뜻을 밝혀 주시는 예수님의 권위 있는 모습을 조명하는 단락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이 전하는 그 첫 번째 가르침은 “살인해서는 안 된다.”(탈출 20,13; 신명 5,17)는 계명을 다룹니다. 그리고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라는 표현은 사형으로 그 죄를 엄하게 다스리는 율법의 규정(탈출 21,12; 레위 24,17 참조)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 계명과 관련하여 예수님께서는 그 뿌리를 보게 하십니다. 살인에 이르게 하는 분노나 화를 원천적으로 잘 조절하고 다스릴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욕설을 내뱉거나 분노를 표출하는 행위들이 살인죄처럼 심판의 대상이 된다고 가르치십니다. 지나친 풀이처럼 들릴 수도 있지만, 이 행위들이 근본적으로 살인과 같은 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강한 어조로 지적하신 것입니다. 결국 예수님께서는 내면의 상태를 더 중요하게 여기십니다. 사람의 행동은 언제나 그 마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입니다. 분노로 가득 찬 마음은 언제든지 악한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기에, 그 마음을 잘 다스리고 형제와 화해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게 합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평온한 감정만 지니며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때로는 형제나 이웃의 잘못에 화가 치밀기도 하고 분노가 끓어오를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감정 상태를 그대로 내버려 두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늘 그들과 화해하고 용서하기를 바라십니다. ‘불붙는 지옥’이란 어쩌면 화해(和解)의 여지를 전혀 두지 않는 사람의 고집스러운 마음 상태를 일컫는지도 모릅니다. 우리 마음이 ‘화해’(火海), 곧 불바다의 마음이 되지 않도록 잘 관리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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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분도회 왜관수도원 이성근 사바 신부님]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그러고는 모세가 하느님께 받은 십계명 가운데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보기로 드십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짐승과 풀과 곡식을 음식으로 주셨지만, 인간의 생명은 범할 수 없는 하느님의 소유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의 피를 흘린 자 그자도 사람에 의해서 피를 흘려야 하리라.”(창세기 9장 6절)는 율법이 생깁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 율법을 새롭게 해석하십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죽음에는 죽음으로 갚아야 한다는 과거의 원칙, 그 공평한 균형이 더 이상 유지되지 않습니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끼쳐지기를 바랍니다. 남을 혐오하고 경멸하고 배척하는 마음을 곧 살인과 비교하고,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 분노에서 상대방에 대한 독설이 나옵니다. 멍청이라고 하는 자와 바보라고 하는 자는 큰 차이가 없습니다. 결국 화를 내면서 자기 형제를 욕하거나 그의 명예를 훼손시키는 자는, 누구나 살인자와 같다는 말씀이고, 중앙 법정에 넘겨지거나 불붙는 지옥이란 하느님의 심판을 뜻합니다.
신앙 공동체로서 살려면 증오와 적개심은 반드시 피해야 하는 장애물입니다. 그것을 정신적인 살인으로 여기시는 주님의 뜻을 되새기며, 어렵더라도 용서와 화해의 길을 선택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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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박형순 바오로 신부님]
한번 생각해 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과 비교된다면 어떨까요?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한다고 할 수 있을까요? 대답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적어도 그들은 율법에 기록된 것들은 형식적이라 하더라도 착실하게 지키면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예수님 말씀에 따르면, 우리의 의로움이 그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못하면 우리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그럼 우리는 좌절해야 할까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의로움은 계명 그 자체에 존재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의로움이 커지는 길을 제시해 주십니다. 단순하게 살인하면 안 된다는 계명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형제들에게 성을 내지 말아야 합니다. 욕도 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물 봉헌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예물을 봉헌하는 사람의 마음가짐, 이웃들과의 관계가 중요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의로움을 실천하는 구체적 방법입니다. 럼 우리는 이 말씀을 따라 지키면서 의로운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이것 또한 쉽지 않습니다.
형제와 이웃들을 향해서 욕을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없을 것이고, 성당에서 예물과 우리의 마음을 봉헌하면서도 원한 품은 사람들과 화해는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그럼 우리는 의로운 사람이 아닐까요?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한 것일까요? 그래서 우리에게 하늘나라는 도달할 수 없는 장소일까요?
지금 우리의 의로움은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보다 부족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알려 주신 대로, 우리의 시선을 계명 그 자체가 아닌 우리 주변의 형제들에게 두어야 한다는 사실임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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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 올리베따노 이영근 아우구스티노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 하여라.“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하는 의로움, 곧 율법의 형식이 아니라 율법의 정신을 지키는 이들, 율법을 아는 것이 아니라 율법을 실천하는 이들이 하늘나라에 들어간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은 여섯 가지 의로움 중에서, 첫 번째의 의로움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것은 “살인”에 대한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체적 행동의 결과로서의 살인에 대한 단순한 문자적, 형식적 차원에서의 율법을 넘어서, 율법의 참 정신인 궁극적이고 본질적인 차원을 설명하십니다.
곧 원리상 살인으로 적용할 수 있는 내면적 동기를 말씀하시면서, 구체적으로 세 단계로 말씀하십니다.
<첫째>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것, 곧 단순한 내적인 분노요, <둘째>는 형제를 ‘바보’라고 말하는 것, 곧 천박하다고 멸시하는 것이요, <셋째>는 형제를 ‘멍청이’라 말하는 것, 곧 불경하다고 매도하는 것을 말씀하십니다.
이로써,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들을 능가한 의로움을 제시하십니다. 곧 살인의 내면적 혹은 근본적인 동기까지 금지하시면서, 동시에 더 나아가 살인과 분노와 모욕과 매도를 “화해하라”는 사랑으로 대치시킴으로써 “살인하지 말라”는 구약의 율법을 사랑으로 완성시키십니다.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 예물을 바쳐라.”(마태 5,23-24)
이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예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라는 것을 깨우쳐줍니다. 곧 제단의 예물만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우리 자신이 예물이라는 말씀입니다.
마치, “야훼께서는 아벨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시고 카인과 그가 바친 예물은 반기지 않으셨다.”(창세 4,4)고 하시며 예물과 예물을 바치는 이를 하나로 간주하셨듯이, 예물을 바치는 이를 예물로 삼으십니다. 결국, 형제와 맺는 관계가 곧 하느님과 맺는 관계임을 말해줍니다.
오늘도 예수께서는 우리가 바치는 예물이 있어야 하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가 예물을 들고 당신 앞에 나서기에 합당한 사람이기를 바라십니다. 당신께서 기뻐하시는 예물은 형제를 사랑하고 화해하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이처럼, 중요한 것은 제단의 예물이 아니라, 예물을 바치는 사람의 “의로움”입니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형제를 소중하게 여기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곧 얼마나 형제들 사이의 우애와 사랑을 중요시하셨는지를 말해줍니다.
결국,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의 근본적인 정신이 “화해”에 있음을 말합니다. 곧 용서와 형제애, 우애가 이 율법의 정신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형제 상호간의 화해를 거듭 강조하여 촉구하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마태 5,25) 그러니 늦기 전에 기회가 있을 때 지체치 말고 화해하라는 촉구입니다. 시비를 가리고, 따지기 전에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용서받아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언제나 사랑받아야 할 존재요, 받은 그 사랑을 하염없이 내어주어야 할 존재라는 말씀입니다.
하오니, 주님! 얼른 화해하게 하소서!
지체치 말고 기회가 있을 때 먼저 화해하게 하소서!
화해한 제 자신이 당신께 드리는 참된 예물이 되게 하소서!
시비를 따짐이 아니라 화해를 이룸이 의로움이기 때문입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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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주교구 반영억 라파엘 신부님]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이른 아침 몸을 씻으면서 육체적인 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마음인데 마음보다 육적인 것에 집착하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외적인 더러움보다 지저분한 마음을 품고 있는 것이 더 문제입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며 탐하고 즐겼던 모든 것에 주님의 자비를 간구합니다. 육적인 것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께서 원하시는 것은 육을 거스르게 마련인데 양다리 걸치기를 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요?
살아가면서 무엇인가 잘해 보려고 하면 남의 단점이 유난히 잘 보이게 됩니다. ‘사람이 왜 저럴까? 이렇게 하면 좋을 텐데…이런 것 하나 제대로 못 하나!’ 하면서 사람을 판단하고 마음에는 화를 쌓기 시작합니다. 이런 것도 성장의 과정이기도 하지만 늘 나는 잘하는데 남이 따라주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한 단계를 넘어서서 남의 부족함을 채워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으련만 오늘도 여전히 탓을 남에게 돌립니다. 그러다 결국은 남이 문제가 아니라 내가 문제 덩어리가 되어 남의 입에 오르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재판에 넘겨지고, ‘바보’라고 하는 자,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일상 안에서 흔히 벌어지는 일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실까? 사소한 것을, 소홀히 하면 결국은 큰일을 저지르고 마는 것입니다. ‘바늘 도둑이 소도둑 된다.’는 옛말도 있습니다. 따라서 먼저 ‘마음을 다스려라.’‘뿌리를 다스려라.’는 말씀으로 받아들이면 좋겠습니다. 성을 다스리지 못하면 미움이 생기고 미움이 커지면 더 큰 죄를 범하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죄악에 떨어지지 않도록 먼저 마음을 단속해야 하겠습니다.
마음속에 분노를 품고 있는 사람은 상대방에게 온갖 해악이 미치길 은연중에 바라기 마련입니다. 심지어는 죽었으면 하고 바라기도 합니다. 그래서 요한의 첫째 편지 3장 15절에서는 “자기 형제를 미워하는 자는 모두 살인자입니다” 하고 말합니다. 따라서 겉으로 드러난 행위도 중요하지만, 마음 안에 싹트고 있는 화에 대해 무엇보다도 두려움을 가져야 합니다. 사실 형제와 이웃 간의 관계가 중요하지만, 주님과의 관계가 올바로 서지 않고는 그 관계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주님 앞에 흠 없는 나를 가꾸고 주님의 마음으로 빛나는 오늘이기를 바랍니다.
하느님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사람들 앞에서 의롭습니다. 그리고 사람들 앞에서 의로운 사람은 하느님 앞에서도 의로워야 합니다. “마음이 똑바로 향해 있으면 행동 또한 바릅니다. 그리고 마음과 행동이 일치할 때 구원의 은혜를 입을 것입니다.”(성 아우구스티누스) 되새겨 봅시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마태 5,20) 의미는 무엇일까요? “능가하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의 의로움이 세상의 의로움을 능가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의로움의 징표는 화해입니다. 하느님과의 화해를 원하시거든 먼저 사람과 화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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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교구 조명연 마태오 신부님]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올해부터 본당신부로 살면서 더 바쁘게 사는 것 같습니다. 우선 성당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습니다. 본당신부의 유일한 휴일이라고 하는 월요일에도 사제관에 앉아 하루 종일 글을 쓰고 있습니다. 또 초보 본당신부로 해야 할 것이 너무 많습니다. 워낙 능력과 재주가 없다 보니, 시간을 쪼개고 써야 간신히 조금 본당신부답게 사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살면서 힘이 빠질 때가 종종 있습니다. 왜 그럴까 싶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을 읽다가 길을 떠나시는 예수님을 묵상하면서 그 이유를 조금이나마 깨닫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한곳에 머무르시지 않고 늘 길을 떠났습니다. 그 떠난 길에서 기적이 이루어졌고, 그 자리에서 기적이 선포됩니다. 저의 모습을 깊이 반성할 수 있었습니다. 한곳에만 머물러만 있던 저의 모습을 말이지요.
한곳에만 머물러 있으면, 새로움을 얻기가 힘듭니다. 만나는 사람만 만나게 되고, 편하고 친한 사람만 만나며, 자기에 도움 되는 사람만 부르게 됩니다. 익숙한 것만을 찾고 편하고 쉬운 것을 향해서만 나아가려고 합니다. 새로움이 자리잡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길을 떠나지 않는 모습입니다. 예수님과 함께하지 않으니 힘이 빠져서 늘 피곤함만 느꼈던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계속해서 떠나셨다는 것은 늘 새로운 시작을 하셨다는 것입니다. 새로움을 간직해야 말과 행동에 힘이 생기게 됨을 당신 삶으로 직접 보여 주신 것이지요.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찾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곳으로 끊임없이 걸어갈 수 있는 용기가 필요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 5,20)
당시의 종교 지도자들은 정말로 열심히 살았습니다. ‘의로움’ 그 자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이것만으로는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자리에 그냥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지요. 그들은 새로움을 완전히 잃어버린 상태에서 율법의 세부 조항 자체를 하느님을 받아들이면서, 율법의 근본정신인 사랑을 완전히 잊어버렸습니다. 의롭게 사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 전혀 의롭지 않은 삶을 살게 됩니다.
주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움은 앞서 말씀드렸듯이, 길을 떠나는 것이었습니다. 편하고 쉬운 것, 익숙하고 하고 싶은 것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어떤 형제와도 화해하고 타협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이 새로움이 우리를 구원의 길로 확실하게 인도해 줍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 사제연수에 참석하면서 새로움을 얻고 있습니다. 행복한 시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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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교구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그대 비록 분노하더라도>
마태오 5,20ㄴ-26 (화해하여라)
그때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고 옛사람들에게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자기 형제에게 성을 내는 자는 누구나 재판에 넘겨질 것이다. 그리고 자기 형제에게 ‘바보!’라고 하는 자는 최고 의회에 넘겨지고, ‘멍청이!’라고 하는 자는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제단에 예물을 바치려고 하다가,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법정으로 가는 도중에 얼른 타협하여라. 그러지 않으면 고소한 자가 너를 재판관에게 넘기고 재판관은 너를 형리에게 넘겨, 네가 감옥에 갇힐 것이다. 내가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그대 비록 분노하더라도>
다른 사람에게 분노하는 사람아
그대의 분노에는 까닭이 있겠지만
그대를 분노하게 하는 그 사람은
하느님께서 당신 모습대로 지으신 사람이니
마치 하느님의 모습이 없는 듯이
그 사람을 함부로 대하지는 말게나
그 누구도 스스로 다른 사람에게서
하느님의 모습을 지울 수 없는 것이니
그대의 분노가 정당하기 위해서
참으로 필요한 것은
사람에게 당신의 모습을 부여하신
하느님께 대한 우선적인 믿음과
그 사람이 지닌 하느님의 모습만은
훼손하지 않으려는 마음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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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치스코회(작은형제회)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님]
<우리의 착한 행실은>
어제 율법을 폐지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다고 주님께서 말씀하셨는데 오늘은 율법을 어떻게 완성해야 하는지 하나의 예를 들어 가르쳐주십니다.
살인하지 말라는 율법 준수에 만족하지 말고, 성내지도 말고 남에게 바보 멍청이 소리도 말라고 하십니다.
판공 성사를 주다 보면 고백소에 들어와 아무 말 않는 분이 종종 있습니다. 그래서 고백하시라고 하면 고백할 것이 없다고, 다시 말해 죄 없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러면 왜 고백소에 들어왔냐고 여쭈면 마누라가 하도 보라 해서 들어왔다고 하십니다.
그래서 죄 없는 사람이 어디 있냐고, 누구를 미워하거나 화내거나 한 적도 없냐고 제가 여쭈면 있다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그분은 살인이나 사기와 같이 큰 죄만 죄로 생각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뿐 아니라 많은 분이 손에 피를 묻혀야지만 죄라 생각하고, 오늘 주님 말씀처럼 성내거나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것은 죄라 생각지 않습니다.
감정 폭력이란 말이 있고 책도 있습니다. 물리적인 폭력이나 성폭력과 비교하여 감정적인 폭력도 폭력이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미움이나 분노나 무시나 모욕과 같은 감정적인 폭력이 그 자체로 누구를 죽이지는 않아도 자살로 몰기는 하지요.
꽃으로라도 때리지 말라는 말이 있는데 꽃으로 때린다고 피 한 방울 흘리게 하지 않지만 거기에 미움과 분노와 모욕이 담겼다면 그것으로 심지어 자살하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은 살인하지 않음은 물론 감정적인 폭력조차도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실은 이것도 아직 완성이 아닙니다. 이어지는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완성의 정도를 높이십니다.
살인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는 정도를 넘어 적극적으로 사랑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미워하지 않는 것이 완성이 아니라 사랑하는 것이 완성이요, 사랑하는 것도 원수까지 사랑할 때 최고의 완성이라고 가르치시는 것입니다.
사실 우리 사랑은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소극적인 사랑에 그치기 쉽습니다. 그런데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 우리 사랑의 목적이라면 최고로 잘해봤자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는 것이지 사랑하는 것이 아니며,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 않기 위해 무관심해 버릴 수도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무관심하면 완벽하게 미워하지 않고 분노하지도 않습니다. 그리고 무관심하면 미워하는 고통도 분노하는 고통도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종종 미움과 분노의 고통을 피하려고 무관심에 숨습니다.
사실 미워하는 고통만큼 큰 고통도 없지요. 그래서 우리는 무관심의 유혹을 자주 받는데 그렇기에 미움이 무관심보다 낫고 더 사랑입니다.
미워하면서까지 사랑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미움은 사랑의 끈이고, 고통을 피하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는 사랑의 용기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사랑의 끈인 미움을 쉽게 포기하지 말 것이며, 미워할지라도 사랑하겠다고 용기를 낼 것입니다.
미움의 고통이 두려워하여 무관심하지 말고, 미움이 두려워 작은 미움을 큰 미움으로 만들지 말며, 미움을 사랑으로 완성하려는 큰 용기를 우리는 낼 수 있어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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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네딕토회 요셉수도원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화해하여라!”>
- 사랑의 화해도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이다 -
내 안의 괴물들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길들이기
“주님은 나의 빛 나의 구원,
나 누구를 두려워하랴?
주님은 나의 요새, 나 누구를 무서워하랴?
나의 적 나의 원수, 그들은 비틀거리리라.”
(시편27.1-2)
저에게 하루중 가장 행복한 시간은 둘입니다. 하나는 하루의 영적전투를 끝내고 오후 8:30분 잠자리에 들 때의 취침시간이요, 하나는 오전 12:30분 기상하여 주님과 함께 주님과 깊이 일치하여 고요한 시간에 강론을 쓰는 시간입니다. 수십 년된 습관입니다. 2014년 산티아고 800리 2000km 순례때로 그랬습니다. 강론쓰는 시간은 주님과 만남의 시간, 기도의 시간, 회개의 시간, 공부의 시간, 치유의 시간이요 어제의 하루와 화해하는 시간입니다.
“화해하여라!”
화해도 은총이자 선택이요 훈련이자 습관입니다. 내 안의 괴물을 사랑의 훈련으로 길들이는 것입니다. 바로 오늘 강론의 제목이기도 합니다. 저절로 화해가 아닙니다. 바로 끊임없는 기도와 끊임없는 회개가 전제되는 화해입니다. 참으로 화해의 종류는 다양하여 끝이 없습니다. 어찌보면 삶은 “화해의 여정”일 수 있습니다.
주님과 깊어지는 일치와 더불어 화해요 그에 따르는 순수, 겸손, 자비, 겸손입니다. 넷인 듯 하나 하나이고 바로 예수님이 그 원조가 됩니다. 그러나 순수가 우선입니다. 순수의 힘은 하느님의 힘입니다. 참으로 주님을 닮아갈 때, 순수와 겸손이요 자비와 지혜입니다.
“죽음은 이해하는 것이 아니라 화해하는 것이다.”
이미 타계한 세계 최고의 신화학자 조셉 캠벨의 말입니다. 제가 지금까지 평생 수십년간 애독했던, 또 무수한 영감에 강론에 많이도 인용했던 세권의 책이 있습니다.
조셉 캠벨의 이윤기가 번역한, 위의 지혜의 말씀이 담긴 책 “신화의 힘”이고, 니코스카잔스키스의 안정효가 번역한 “영혼의 자서전”이며, 여호슈아 헷쉘의 이현주가 번역한 “사람을 찾는 하느님”입니다. 성서와 더불어 평생 보관하여 읽는 책입니다. 특히 수려秀麗한 번역은 원문처럼 느껴질 정도입니다.
어제는 어머님 18주기 기일을 맞이하여 어머님 성묘에 다녀왔습니다. 2005년은 수도원 개원이래 초유의 위기와 혼란을 겪던 해였고, 큰 가닥이 잡히고 정리되자 그해 6월14일 선종하셨습니다. 어머님의 기도의 힘이라 믿습니다. 어머님과 합장된 아버지를 위해서도 기도했고, 인근 묘원에 있는 작은 어머님, 그리고 첫째 요셉 형님 묘소에서도 기도했습니다. 특히 돌아가신 분들과 죽음과 화해한 듯 참 내적인 평화와 고요를 느꼈습니다.
제가 수도원을 찾을 때마다 꼭 방문하는 곳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안식년중 만3개월 미국 뉴저지주 뉴튼 수도원에 머물때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날마다 찾았던 곳이 수도원 묘지입니다. 이 또한 죽음은 물론 하느님과 주변 이웃과 내 자신과 화해하며 영적전의를 새로이 했던 은총의 시간이었습니다.
“죽음을 날마다 눈앞에 환히 두라”는 사부 성 베네딕도의 말씀이 몸과 맘에 밸 때 오늘 지금 여기서 본질적 깊이의 화해의 삶을, 순수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삶을 살게됩니다. 이와 더불어 떠오르는 제 좌우명이요 묘비명입니다. “하루하루 살았습니다” 자작 고백 좌우명시이자 장차 묘비명이기도 합니다.
“화해하여라!”
바로 오늘 산상설교 3일째 복음 소주제입니다. 우리의 의로움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첫 번째 길이 바로 화해입니다. 살인의 근본 뿌리인, 내 안의 괴물같은 실재인 분노와 멸시의 감정을 다스리고 길들여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누구나에게 내재한 괴물들입니다. 가라지가 없는 밀만의 현실은 애당초 불가능합니다. 끊임없는 기도와 회개를 통한 화해와 조화의 삶이 필요합니다. 이래야 화해火海의 태풍은 미풍의 화해和解로 변합니다. 제가 늘 강조하는 것이 미풍을 태풍으로 바꾸지 말고 태풍을 미풍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바로 화해와 절제의 훈련이 이를 가능하게 합니다. 내 안의 괴물을 발본색원 뿌리 뽑을 수는 없습니다. 교황님의 “잡초는 결코 죽지 않는다(Weeds never die)”는 말씀도 이런 진리를 의미합니다.
100% 순수는 없습니다. 조화와 화해의 순수요, 내 안의 괴물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잘 길들여 갈수록 평화 공존의 순수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형제를 “바보!”, “멍청이!”라고 하는 자들은 내 안의 괴물을 길들이지 않은 자들이나 못한 자들입니다. 화해의 영적훈련이 습관이 전무한 자들입니다. 정말 내 안의 괴물들을 방치할 때 그 인생 괴물이나 폐인이 되기 십중팔구입니다.
예물을 바치려 할 때 원망을 품고 있는 자와 화해하고 예물을 바치라 권고하는 주님이요, 고소한 자와도 신속히 타협, 화해하라는 말씀입니다. 괴물의 유혹에 빠져 미풍을 태풍으로 만들지 말라는 것이며 태풍도 가능한한 미풍으로 바꾸라는 것입니다.
이런 감정과 마음이라면 절대 미사 못합니다. 그래서 예전 원장 재직시 수도 형제들과의 관계가 무례와 불손으로 몹시 불편할 때, 형제가 분명 잘못했는 데도 사과가 없을 때 제가 먼저 불러서 사과하고 미사했던 일이 여러번 생각이 납니다. 또 저에게 몹시 심한 패악질을 한 형제가 미사전 무릎을 꿇고 고백성사후 미사를 드렸던 일도 생각납니다. 이런 경우는 한없이 고맙고 감동스럽고 제 자신도 회개하게 됩니다.
어제 수도원에 돌아와 보니 책임감 강한 착한 수련 수사가 새책 “성 베네딕도 수도규칙”을 구입하여 제 방 편지함에 꽂아 놓았기에 감사인사 전했습니다. 1991년 초판본을 32년간 사용하다 받은 2017년 7쇄의 새책입니다. 앞으로도 새책과 더불어 32년동안 공부하고 가르쳤기에 색도 바래고 많이 낡았지만 역사가 배어있기에 과거와 화해하는 마음으로 계속 영구보존할 생각입니다.
이 화해하는 마음 모두는 은총과 훈련의 노력을 통해 내 안의 괴물들을 사랑의 인내와 훈련으로 잘 길들여 갈 때 가능합니다. 바로 이런 이들이 율법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여 오늘 지금 여기서부터 하늘 나라를 사는 이들입니다. 바로 이에 결정적 도움을 주는 분이 성령입니다. 바로 바오로 사도의 말씀이 큰 위로와 격려가 됩니다.우리를 위로하고 용기를 주며 우리에게 공감하는 위로자 성령님입니다. 회개를 통해 무지의 너울을 치워주심으로 괴물들을 무력하게 하는 성령의 은총입니다.
“주님께 돌아서기만 하면 그 너울은 치워집니다. 주님은 영이십니다.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우리는 모두 너울을 벗은 얼굴로 주님의 영광을 거울로 보듯 어렴풋이 바라보면서, 더욱더 영광스럽게 그분과 같은 모습으로 바뀌어 갑니다. 이는 영이신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점차 성령의 성화은총으로 주님을 닮아가면서 잠재한 괴물들이 길들여지는 것이요, 마성魔性이나 악성惡性도 정화되고 성화되는 것이니 바로 성령의 은총이요,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바오로 사도가 바로 이의 모범입니다. 화해의 달인이요 순수와 겸손, 자비와 지혜의 모범입니다. 다음 바오로의 고백이 참 통쾌합니다. 그대로 제 고백으로 삼고 싶습니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은 우리 자신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선포하고, 우리 자신은 예수님을 위한 여러분의 종으로 선포합니다. ‘어둠 속에서 빛이 비추어라.’하고 이르신 하느님께서 우리 마음을 비추시어,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빛을 주셨습니다.”
그대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완전히 자기 안의 괴물들을 무력하게 한, 괴물들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진 주님의 종, 모든 이들의 종이 된 화해의 달인, 자기 절제의 달인 바오로입니다. 새삼 우리의 영성은 주님과 이웃을 섬기는 종과 섬김의 영성임을 깨닫습니다.
그리스도의 얼굴에 나타난 하느님의 영광을 알아보는 은총의 빛이 우리 무지의 어둠을 몰아내며 괴물들을 길들여 순종하게 하며 자발적 기쁨으로 종과 섬김의 영성을 살게 합니다. 바로 여기에 결정적 도움이 되는 날마다의 주님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입니다.
“자비와 진실이 서로 만나고,
정의와 평화가 입맞추리라.
진실이 땅에서 돋아나고,
정의가 하늘에서 굽어보리라.”(시편85,11-12).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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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교구 이병우 루카 신부님]
"너희의 의로움이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을 능가하지 않으면, 결코 하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마태5,20)
<능가해야 하는 의로움!>
오늘 복음(마태5,20ㄴ-26)은 '화해하여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을 의로운 사람들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그들이 지니고 있었던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 예로 '화해하여라.'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율법과 예언서들 안에 계시되어 있는 하느님의 뜻(계명)을 철저하게 지킨 사람들이 바로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입니다. 그들의 의로움을 지금 우리의 모습으로 표현하면 이렇습니다.
매일 바쳐야 할 기도(아침저녁기도.삼종기도.묵주기도.성무일도 등등)를 빠트리지 않고 잘 바친다.
매일 미사에 참례하거나 주일미사와 의무대축일 미사에 빠지지 않는다.
대단한 의로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 대단한 의로움을 능가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모습으로 '화해에 대한 말씀'을 하십니다.
"살인해서는 안 된다. 살인한 자는 재판에 넘겨진다."
율법 학자들과 바리사이들의 의로움은 이 율법에 그친 의로움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살인을 해서는 안 된다.'는 의로움을 능가해, 형제에게 '성'을 내거나, '바보!'라고 하거나, '멍청이!'라고 해서도 안 된다고 하십니다. 만약 그렇게 하면 "불붙는 지옥에 넘겨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얼른 화해하라!'고 하십니다.
참으로 무서운 말씀입니다. 능가해야 하는 의로움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를 깊이 깨닫게 됩니다. 내가 하려고 하면 어렵습니다. 아니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영인 성령께서 내 마음 안에 머무신다면 능히 해 낼 수 있습니다. 내가 하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영께서 하시는 일이니까요.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2코린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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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성심시녀회 김연희 마리아 수녀님]
(5분 아침묵상)
https://m.youtube.com/watch?v=aNrNra711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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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한 구속주회 한상우 바오로 신부님]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하여라. 그런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쳐라."(마태 5, 24)
화해하는 법을
배웁니다.
화해는 감정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하려는
노력입니다.
감정과 사람을
혼동하지
않는 것입니다.
올바른 관계를
맺으려는
의로움을 통해
화해의 주님을
만납니다.
상처와 아픔까지
존중하는 법을
다시 배웁니다.
상처를
소독하고
약을 바릅니다.
뒤틀린 마음이
헤아리는 마음이
됩니다.
가야할 곳을
알기
때문입니다.
빛과 어둠의
제 아픔까지
주님께
봉헌합니다.
상처와 아픔이
서로 만납니다.
소중한 이름을
되찾게 됩니다.
화해도 성장을
필요로 합니다.
아픔을
소유하지 않는
법을 배웁니다.
화해의 주님을
닮아갑니다.
아픔도 익어가고
마음도 익어갑니다.
화해를 위한
축복의
아픔이었습니다.
아픔도 상처도
놓아줄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서로를 알아보는
소중한 화해의
시간입니다.
상처로
우리가
누군지를
알게되며
서로의 화해로
하느님께서
어떤 분이신지를
알게 됩니다.
우리는
화해가 필요한
하느님의 땅에서
살고 있습니다.
서로를 풀어주는
하느님의
화해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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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nce 2013. 10. 24
연희동성당 류상현 스테파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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