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력과 자력, 그리고 절대 자력
〖문〗 ; 인간이 마음을 알기 위해서는,
저마다 이어져 내려온 방법이나 규칙이 있어서,
옛날부터 타력, 자력의 수행방법이 있는 것같으나,
정법을 자기 것으로 하기 위한,
조화의 절대자력이라고 하는 의미는 어떤 것입니까?
〖답〗 ; 먼저 타력에 대해 얘기하죠.
타력이란, 글자 그대로 다른 힘을 빌려서 마음을 알려고 하는 수행법입니다.
法然, 親鸞이 설명한 방식입니다.
당시의 시대적 배경, 또 불교를 대중에게 알려 주기 위해서는,
타력적 신앙을 설명하지 않으면 사람들을 모을 수 없었습니다.
문맹이 9할 이상을 점한 시대였고,
사람들의 마음은 아수라에 지배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 마음을 정상으로 되돌리기 위해서는
타력에 의한 수행법밖에 방법이 없었던 것같습니다.
오늘날 이 수행법으로 좋은가 하면,
타력은 글자 그대로 타인에게 맡기기 때문에
자신을 냉엄하게 주시할 수 없게 되고,
자기도취에 빠질 위험성이 있는 것입니다.
니치렌이 나무아미타불의 염불수행은 무간지옥에 빠진다고 비난한 이유도 거기에 있습니다.
자기만족은, 마음의 마에 지배된 모습이고,
신불의 자식이라는 자각으로부터 너무나 동떨어진 것이 되어버리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자력은 어떤가.
선종(禪宗) 등에서 보이는 자력,
즉 자신의 힘으로 깨달으려고 하는 방법이나, 이것 자체 문제는 없습니다.
문제는 승방에서 좌선을 하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되는 염려가 있다는 데 있고,
좌선만으로는, 인간은 절대로 깨닫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석가는, 6년의 고행을 버림으로써 크게 깨달았습니다.
물론 크게 깨닫는 전제로서의 6년 고행은,
후세의 사람들에게 많은 시사(示唆)를 주지만,
이것을 보고, 좌선을 지고(至高)한 것으로 보는 것은 틀린 것입니다.
그것은 정법을 이해하고, 실천하는 좌선을 하면 좋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이것은 자기만심(自己慢心)이라고 하는,
마음의 마(魔)에 침범 당하기 때문입니다.
니찌렌은 여기에서도 선천마(禪天魔)라는 표현을 써서,
승방에서의 수행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자기만심은 자기 자신을 잃을 뿐만 아니라,
남을 또한 다치게 하고,
자비와 사랑이라는 신(神)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져 버리기 때문입니다.
정법이란, 이러한 틀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일상생활 그 자체입니다.
승방에서의 수행은, 정법을 깨닫는 하나의 과정에 지나지 않습니다.
좌선은 일상생활을 살리기 위한 방법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끝으로, 정법에 따른 조화의 절대자력은 무엇인가.
먼저 자력과 절대자력을 구분할 이유를 말하면,
자력은 자아(자기보존)에 집착한 것이고,
절대자력은 신불(神佛)의 자식으로서의 자각에 의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신불의 자식이란, 자비와 사랑뿐입니다.
자비와 사랑으로 되돌아가는 마음에 대해서는,
우리는 반성이라고 하는 기회를 통해서 이것을 수정하고,
일상생활 속에서, 조금이라도 자비와 사랑의 마음을 살려 가려고 하는 것입니다.
석가의 정법이 절대자력을 설법한 까닭은,
인간의 마음에 우주즉아(宇宙卽我) ---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은 만물의 영장으로서, 모두 평등하게,
우주즉아를 깨달을 권능이 주어져 있고,
우주즉아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진 상념행위가,
오늘날의 자기 자신을 만들고 있기 때문에,
그것을 원래대로 되돌리는 데는 타인이 아닌,
자기 자신이 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기 자신이 바르게 자신의 마음을 보기 위해서는,
반성이라고 하는 기회가 있고,
반성의 기준이 자비와 사랑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매일의 생활이,
항상 중도를 지키도록, 노력하는 곳에 깨달음이 있는 것입니다.
더구나 절대자력이라고 하는 명칭은,
통상의 자력과 구별하기 위해 붙인 것입니다.
마음의 지침 - 다카하시 신지 -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