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렁이를 향해
나희덕
소나기 지나고
햇빛 쏟아지는 오후
아스팔트 위에서 꿈틀거리는 지렁이 한 마리
길고 검붉은 몸,
어느 쪽이 머리이고 꼬리인지 알 수 없지만
그가 물기를 잃고 고통스러워하고 있음은 분명했다
아스팔트 위에서 말라가는 몸을 꿈틀거리는 것이
지렁이만은 아닌 듯도 해서
나는 지렁이를 가까운 숲 그늘로 옮겨주었다
막대기 끝에서 버둥거리던 지렁이는
흙으로 돌아가자 조금 안심하는 것처럼 보였다
지렁이에게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찰스 다윈은
지렁이의 몸이 어떻게 분변토를 쌓아 올리는지를 관찰하느라
그 가늘고 느린 몸을 따라다니며 몸을 숙였을 것이다
지렁이는 눈도 귀도 없지만
피부로 빛을 감지하고 진동을 느낀다는 것
잎사귀와 함께 진흙이나 돌을 즐겨 먹는다는 것
분변토 덕분에 식물이 싹을 틔울 수 있고
인간의 유물이 썩지 않고 보존될 수 있었다는 것
지렁이가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그 즉흥적 행위에서 지성을 읽어낸 것도 다윈이었다
지렁이를 향해 걸음을 멈출 수 없었던 사람
지렁이에게 빛과 어둠을 주고
음악을 들려주고 마침내 땅속까지 따라간 사람
내가 숲 그늘을 쉽게 떠나지 못한 것은
지렁이 때문이 아니라
지렁이를 향해 다가가던 사람의 마음 때문인지도 모른다
나희덕
1989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시집 『뿌리에게』『그 말이 잎을 물들였다』『그곳이 멀지 않다』『어두워진다는 것』『사라진 손바닥』
『야생사과』『말들이 돌아오는 시간』『파일명 서정시』『가능주의자』 등이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