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교와 교회, 섭리와 명암
이사 2,1-5; 로마 10,9-18; 마태 28,16-20 /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 2024.10.20.
1. 복음은 복음화를 지향한다
민족들의 복음화를 위한 미사를 오늘 전교 주일에 봉헌합니다. 교회가 이런 지향으로 미사를 거행하는 이유는 예수님께서 승천하시면서 지상에 남은 제자들에게 당신의 뜻과 삶을 이어가도록 당부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선교 명령 속에 예수님의 삶이 녹아 있습니다. 죽음의 십자가에서 흘리신 피가 스며들어 있으며 공생활 내내 고달픈 복음선포 활동 중에 흘리신 땀과 노고가 고스란히 담겨 있습니다.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사도가 되어서 온 생애를 다 바쳐 복음을 전했으며 거의 모두 박해를 받고 치명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세워진 것이 우리가 속한 교회입니다. 그래서 선교는 교회의 존재 이유가 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전하는 것이 부활의 길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어 누리는 길임을 당신 부활로써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교회와 그리스도인들 역시 선교에 부활 여부가 달려 있습니다. 계시된 복음은 선포되기 위하여 존재합니다. 그래서 복음은 복음화를 지향하는 것입니다.
2.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 사도
사도들이 부활의 증인 역할을 하게 된 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따르기만 하던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제자의 처지를 벗어났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나서 예수님처럼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생활과 실천으로 그 복음을 입증해 보이면서 아직 믿지 못하고 체험도 하지 못한 이들에게 믿을 수 있도록 자신의 생애와 재능과 기회를 몽땅 내어놓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도는 부활의 증인으로서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함으로써 부활을 증언하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그 사도들이 예수님의 부활을 덮어놓고 믿었던 광신자들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그들도 예수님께서 되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에는 헛소리라고 여기고 믿지 않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특별히 그들에게만 발현하셔서 믿도록 해 주셨고, 자신들도 그분처럼 복음을 전하면서 더욱 그 믿음이 진리임을 확신할 수 있도록 성령으로 함께 해 주셨습니다.
3. 사도들의 증언 위에 선 교회
교회는 그리스도의 교회이지만, 또한 사도들의 이런 증언 위에 서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성령을 보내주셨기 때문에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지만, 사도들이 목숨 바쳐 선교했기 때문에 교회가 세워질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사도가 된 제자들을 믿고 목숨을 바치셨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도가 된 제자들도 예수님을 목숨 바쳐 믿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산물이 교회였던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도들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교회를 믿습니다.
사도교부 시대의 교회
그 이후 교회의 역사가 무려 2천 년 이상 흘렀지만, 교회에 들어온 모든 그리스도인이 사도들처럼 목숨을 바쳐 믿으면서 선교한 것은 아니었고 그 유구한 역사 안에서도 마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의 역사만큼이나 명암은 어김없이 드리워졌습니다. 이미 가나안 땅에 정착해서 살고 있었던 막강한 부족들 틈바구니 속에서 겨우 겨우 간헐적으로 출현한 판관 지도자들이 활약한 덕분에 겨우겨우 명맥을 유지했지만 하느님께 대한 신앙은 뜨겁던 판관시대처럼, 유다인들과 로마인들의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살고 증거하며 치명하기를 마다하지 않았던 초대와 사도시대 그리고 사도교부 시대가 있었습니다.
로마의 후광을 입은 제국교회 시대와 집단개종된 중세시대 교회
그런가 하면 사울과 다윗 같은 출중한 지도자가 출현해서 이민족의 압박 속에서도 부강한 통일왕국시대처럼, 로마 제국의 공인을 받고 국교로까지 인정받아 제국의 온 시민이 가톨릭 신자이던 제국교회 시대도 있었고 그 로마제국이 망하자 이번에는 게르만 부족 연합 제국의 황제가 먼저 개종하고 그 제국의 온 신민을 강제로 집단 개종시켜서 가톨릭 천지가 되었던 중세시대도 있었습니다.
다윗의 아들로 왕조를 이어받은 솔로몬이 하느님께 지혜를 청해 받았다고는 하지만 말년에는 그 지혜를 사용하는 겸손의 자세를 잃어버리는 바람에 나라 전체를 우상숭배에 빠뜨리고 아들들이 왕권다툼을 벌여서 왕국이 둘로 갈라지고 말았던 분열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가톨릭 문화권 안에서 베드로의 후계자로 자처하던 자리가 황제의 칭호를 받은 교황이 되고 교회 성직자가 그 제국교회의 고위공직자로 군림하며 세속 군주들과 권력 다툼을 하다가 루터의 항의 소동 이후 개신교 그리스도인들이 갈라져 나갔던 분열 사태를 겪으면서 혼돈과 진통 속에서 중세시대는 근세시대로 넘어갔습니다.
유럽 모델을 확산시켜 팽창주의 선교를 감행한 근세시대 교회
그 이전에 이미 고대교회 시절 큰 공동체들에게 사랑을 베풀던 로마 공동체가 법적으로도 수위권을 주장하면서 정교회와 갈라섰기 때문인지 개신교로 인한 교회 분열 사태에도 불구하고 가톨릭 교회는 반성하기는커녕 더욱 폐쇄적이고 권위적으로 문을 닫아 걸었던 근세시대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비복음적인 교회 역사 안에서 발견되는 모습은 선교라기보다는 교회 제국의 확장이거나 교회 조직의 이식 작업에 불과했고, 그것도 유럽 가톨릭의 겉모습을 다른 대륙과 다른 문화에 옮겨심는 작업에 불과했습니다. 그리하여 제국주의 팽창정책을 펴던 유럽 열강들의 침략전쟁을 정당화시켜주는 도구 노릇을 하기도 했던 근세시대에 하느님의 섭리로 복음의 씨앗은 이 땅에 뿌려졌습니다.
4. 한국 교회, 근세시대 복음화의 열매
구약시대에 지도자와 백성이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을 때 소수의 예언자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목숨 걸고 외쳤던 일처럼, 로마제국이나 게르만제국 시대의 집단개종 사태 속에서 모두가 복음의 의미를 잊어버리고 있을 때 소수의 신앙인들과 학자들과 선교사들은 복음서가 알려주는 예수님과 사도들의 모범을 기억하고는 자신들도 헌신적으로 복음을 전하는 선교를 하고자 힘을 썼고 교회는 이를 기리고자 복자품에 올리고 성인품에 올리는 일을 계속했습니다. 이 땅에 들어온 복음의 씨앗도 그런 소수 각성한 학자들과 선교사들의 노력의 결실로 이루어진 한역서학서(漢譯西學書)들이었습니다.
정신적으로 비옥했던 이 겨레의 토양에 이 씨앗이 떨어지자 진리를 탐구하던 소수의 선각자들은 이를 새로운 학문 지식으로만이 아니라 신앙의 진리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래서 서학이 천주교로 전환되기에 이르자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북경 주교가 전달한 교황의 조상제사금지령이 계기가 되었고 이를 빌미로 조선 조정에서 내린 백 년의 박해 속에서도 우리 겨레가 증거한 첫 번째 선교적 결실은 교우촌입니다.
기간으로만 백 년이요 기록이 확인된 치명자들의 숫자만도 팔천 명, 구전상으로는 2만명이 넘는 희생을 치르면서 천주교 신자들이 건설한 교우촌은 이 겨레 반만년 역사 안에서는 물론 세계 역사 안에서도 유례가 없는 선교적 역사였습니다. 선교사의 직접적 도움 없이 평신도들의 자발적 노력으로만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이 세계 역사상 유례가 없는 일이라면, 피지배계층이 지배계층의 통치이데올로기를 거슬러 독자적인 가치관을 형성하고 아무런 무력 저항을 하지 않고 치명자를 내면서도 진리의 저항을 실천적으로 백 년 동안 이루어냈다는 것이 한민족의 반만년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습니다.
5. 천진암 강학회의 열매, 정약용의 저술
선교를 위한 하느님의 섭리는 교회의 제도 안에만 머물러 있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그 대표적인 경우입니다. 예수님께서 몸소 제자로 뽑으신 열두 사도가 교회의 공식 기둥이지만 바오로 같이 기성사도단에 끼지 못한 인재도 하느님께서는 필요하시면 의외의 방식으로 발탁하여 선교의 도구로 삼으십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교우촌이 제도교회에서도 찬탄해 마지 않을 만큼 신앙 순교자들을 배출해 냄으로써 진리를 실천할 산실이 된 한국 선교의 역사적 첫 결실이라면,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와 경세유표는 살벌한 제도권 안에서라면 불가능했을 저술 작업을 제도교회 바깥에서 이룩해낸 선교적 산물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촉망받던 조선 중기의 인재였던 정약용은 천진암 강학회에 모였던 선비들의 막내로서 광암 이벽으로부터 천주학의 세례를 듬뿍 받았습니다. 북경에 가서 세례를 받아 온 이승훈으로부터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천주교의 세례를 받기 전의 일이었습니다. 그는 다른 천진암 멤버들과는 달리 조정에 출사해서 당시 임금 정조의 사랑을 듬뿍 받았습니다. 그는 수원 화성도 실학적 지식으로 축조하는 등 당시 조선에서 독보적인 실학자였고 다른 벼슬길에서도 무고한 백성의 원성을 해결해주기 위해 애썼던 모범 공직자였으나 오직 천주교를 신봉한다는 이유로 다른 선비들로부터 그를 비난하는 상소가 그치지 않자, 그는 정조와의 교감 아래 형식적으로 배교했으며 정조는 다른 선비들로부터 그를 보호하고자 장기 유배를 보내길 내심 원했습니다. 시기상으로는 정조가 죽은 후 어린 임금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정순왕후가 노론 세력을 시켜 저지른 짓이었지만, 정약용의 학문을 아낀 정조대왕의 본심을 짐작하고는 대신들도 있어서 강진으로 유배를 보낸 것이 그 근거입니다. 윤지충이나 권상연처럼 죽이지도 않았지만 김범우처럼 매를 맞은 장독의 후유증으로 죽도록 고생시키지도 않고, 오히려 외갓집이 있었던 해남 근처 강진 땅으로 장기간 유배를 보냄으로써 그가 해남 윤씨 가문에서 소장하던 서책들을 마음껏 참고하며 학문 연구와 저술에 정진할 수 있도록 배려했습니다. 그 결과로 이룩된 산물이 5백 여권에 이르는 여유당 전서요 그 중에 빼어난 저작이 목민심서(牧民心書)와 경세유표(經世遺表)였던 것입니다. 이 두 권의 서책은 장차 동학혁명의 교과서가 되었고, 교우촌의 빛나는 실천 전통과 함께 지배계층의 무지막지한 통치이데올로기에 저항하여 백성이 주인이라는 민주주의의 뿌리요 핵심을 세울 수 있게 함으로써 이 땅의 문명을 앞당긴 선교적 산물이었으며, 천진암 강학회에서 이벽으로부터 천주학의 세례를 받은 학문적 영향이 쌓은 빛나는 금자탑이었습니다. 그로부터 백 년이 훨씬 지나서 국정을 농단한 대통령을 평화적인 촛불시위로 몰아낸 일은 이 주권재민이라는 민주주의의 원리를 후불제로 경험하고 있는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6. 교우촌의 열매, 안중근
이런 선교적 전통 위에서 또 하나의 빛나는 선교적 모범이 되었던 인물은 안중근 토마스입니다. 교우촌과 다산이 이룩한 선교적 전통, 즉 유가사상의 천명 의식을 바탕으로 가톨릭의 성체성사의 은총을 하느님 사랑과 겨레 사랑으로 증거한 선교적 모범을 보여준 안중근 토마스는 하얼빈 의거 후에 다산 정약용처럼 제도교회에서는 버림을 받았지만 그 덕분에 세상에서는 더욱 추앙하는 그래서 선교적인 인물입니다.
그는 교우촌에서 읽혀진 서책 120권을 독파하고 나서 부친 안태훈과 함께 파리외방전교회 빌렘 신부로부터 가톨릭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후 빌렘 신부를 도와 황해도 일대에서 눈부신 선교 활동을 펼친 덕분에 당시 교구장 뮈텔 주교가 전국 제일의 선교사로 맹활약한 그를 격려하러 해주 청계동 본당을 방문하기도 했을 정도였습니다. 우리로서는 선교사 안중근의 신앙을 의심할 수 없듯이 한글로 쓰여진 주교요지의 저자인 정약종이 교우촌의 교부 노릇을 수행한 것처럼 조카 정하상에게 한문과 교리를 가르치고 교황에게 드리는 편지 초를 잡아주고 주문모 신부가 위급할 때마다 강완숙에게 알려주는 등 보이지 않게 교회를 도왔던 정약용의 신앙도 물론 의심할 수 없습니다. 교우촌의 신자들이 비록 치명하지 않았다 해서 신앙을 의심할 수 없듯이 그렇습니다.
교우 여러분!
이 땅에 선교 역사에 나타난 하느님의 섭리는, 교우촌의 천주교 신자들은 자신들이 믿던 진리를 실천했고, 이를 정약용은 학자로서 저술을 통해 천주학의 진리를 사회적으로 적용한 것이고 이에 따라 안중근은 하느님 사랑으로 겨레를 사랑하는 행동을 통해 역사적으로 동북아시아의 복음화의 길을 연 것입니다.
교우촌의 진리 실천, 정약용의 실사구시적이고 토착화적인 신학, 안중근의 동양평화와 민족독립을 위한 실천 행동, 이 셋 다 이 땅에서 복음화를 위한 이정표가 될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선포하신 하느님 나라의 복음은 복음화를 지향하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