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음력 기준으로 쓰여진 것을 밝힙니다.
양력 기준으로 하자면 겨울이 봄이고, 봄이 여름이 돼는 아?d?d한 일이 많길래
그냥 음력으로 통일합니다 -ㅅ-;
*전투 증언은 Stephen Turnbull의 Samurai Invasion 에서 출췌한 것을 밝힙니다.
*배경 음악, MV 는 Disturbed의 Stricken 돼겠습니다. 배경음악이 싫으시다면 가볍게 "뒤로" 버튼을..ㅇㅅㅇ
뭐 아래로 쭉 내려서 정지하셔도 좋습니다만.
아래에 명군에 대한 활약에 대한 게시물이 나와있길래 한번 올려봅니다.
원래 역갤용으로 쓰던 것이지만 애초에 너무 귀찮아서-_-;;
-벽제관 전투 이전 조일의 상황
이미 7월부터 이치령에서 대승을 거둔 조선군이 수원 경로를 향해 북상중이었고,
영남에서는 경상군의 재 집결과 의병장의 활약으로 보급로 차단,
가토군은 7월 16일 구라도코로(쌀창고) 전투에서 조선군 기병대에 의해 엄청난 타격을 받은 후
9월 두만강을 건너 북상(하고 여진족에게 뒤질나게 엊어맞고)하고 다시 남하,
11월,12월 길주에서 결정적으로 얻어맞고 퇴각합니다.
그후 1월 평양성 전투가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이 돼겠습니다.
Daum Bark 님이 "명군 참전 후 더 많은 승전이 있지 않느냐" 라고 하셨는데,
아닙니다.
애초에 전라도 사수가 7월 9일, 그 시일로 권율휘하 장병들은 북상중이었고,
(물론 패배로 기록돼나) 함길도 조선 첫 대규모 반격이 8월 해정창에서 이루어졌으며,
그후 진주에서 대승, 11,12월 길주성에서 압승을 거두며 이미 12월에는 가토가 퇴각하고 있었습니다.
보시다시피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 첫 승전을 기록한- 명군 본대는 12월에서야 압록강을 건넙니다.
그리고 일본군이 명군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유인즉슨,
조선을 침공한 명분중 하나가 바로 명으로 가는 길을 트기 위해서입니다.
어짜피 명이랑 다이다이 까고, 또 어짜피 전쟁을 끝낼 마음이 전혀 없던 히데요시에겐
필연적으로 싸워야 할 존재입죠.
또한 고니시군 휘하 1만여명이 지키던 평양성 대패 이후 서울에서 재집결하는데,
1953년 봄 팔도에 퍼진 일본군 숫자가 5만여명입니다.
물론 명군 참전은 12월입니다.
...
이 전과에서 의병또한 빼놓을수 없는데, 이는 승군의 전적, 숫자는 기록돼지 않은바가 많아
좀 곤란합니다.
하지만 그당시 정규군과 비정규군의 차이가 없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애초에 군졸이 농사짓다 소집령 나면 집에 있던 군장 입고 마을 공터에 모이는게 군졸들이라,
애초에 장정들은 군사훈련을 받은 예비군이라 보아도 무방합니다.
어디로 좀 빠졌지만 호수기록시 1호가 집안에서 차출하는 남자 1명이라는 말도 있던것 같군요.
하여튼, 의병장들 대부분이 군사경력이 있거나, 부호인것, 유망한 선비인것으로 보아
정규군과 동등하거나 조금 떨어지는 통솔력을 가지고 있었다 보여지며,
임진왜란에서 의병활동과 관군활동을 떼어놓는건 좀 무리라는 생각입니다.
-벽제관 전투
1월 18일 개성탈환과 함께 조명 연합군은 계속 진격한바 돼겠습니다.
1월 21일 가토의 잔병이 함경남도 안변에서 강원도면으로 8일동안 달려서 철수하고,
1월 23일 한성에 남은 조선인들이 몇십마일 떨어진 조선군과 호응하기 위해
성 곳곳에 불을 지르며 반격을 시도하였으나 일본군의 빠른 대응으로 실패했습죠. 안습입니다.
개경에서 작전회의를 거친 후 이여송은 선봉 2만여명을 이끌고 고양시를 거쳐 벽제관에 진입합니다.

벽제관 지도.
그날 아침은 워낙 안개가 짙어서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못하는 상황이었다 전해집니다.
명군이 서울수복에 눈이 멀어서 결국 일본군에게 승점을 건네준거나 마찬가지이지요.
아침 7시경 맨 아랫 고지(제 1 고지) 다치바나의 선봉 500명이 명군 선봉 2천명을 도륙하고,
올라오는 도중 중앙고지 (제 2 고지) 에서 명군 2군과 만나
되려 도륙당합니다.
타치바나와 다카하시의 본대가 명군 2군과 계속 진창에서 전장의 세를 점하지 못하고 뒤엉켜 싸우는 동안
10시경 고바야카와의 6000명이 합류, 다카하시와 타치바나는 퇴각합니다.
고바야카와의 6천명은 아와야가 좌익, 이노우에가 우익을 맡았는데,
명군의 파상공격으로 일본군 좌익이 밀리는 동안 이노우에가 명군 측면을 역습하여
명군을 제2고지 위로 점점 밀어냅니다.
물론 이 모든것이 안개와 진창속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을 생각하면, 지랄맞은 전투입죠.
퇴각한 일본군 잔병이 명군 우익을 찌르면서 제 3 고개에서 이여송이 총 반격을 시도합니다.
고바야카와의 본대가 점점 물러나면서 명군 본대가 고개 안으로 들어섰고, 이미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장소라 대군을 운용하기엔 적합치 않은 장소입니다.
고바야카와가 명군이 진창으로 들어서자 삼면에서 공격하였고, 대성공합니다.
명군 기병들은 돌격이 불가능해 낙마하거나 하마한 채였고, 보병들도 진척거리는 전장에서
지랄맞은 전투를 치뤄야 했습니다.
명측 증언을 살펴보자면:
"사방에서 몇십만명의 왜병들이 쏟아져나왔습니다.
기치창검이 번뜩이자 명군 전원은 심장이 덜컹 했을것이 분명합니다. 제가 그랬으니까요.
왜병들이 창검을 뽑아드며 돌진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순식간에 사방이 포위?쨉? 했습니다.
이 장군님의 직속 본대는 여진인 기병이 대부분이라 화포나 총통이 없었고,
단창과 검으로 가볍게 무장했을 뿐이었습니다.
왜병들은 그것을 노려 진 안으로 뛰어들어 말을 눕힌후 잔인하게 기병들을 찔러죽이고
사방 팔방으로 검을 휘둘러 한번에 병사 대여섯을 베었습니다.
그를 본 군병들은 적과 대적하기를 겁내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싸움 도중 이노우에가 이여송과 싸움 중 생포에 가까웠으나 편장의 죽음으로
이여송은 가까스로 접전에서 이탈할수 있었습니다.
12시경 비가 쏟아지자 진창은 아예 개천으로 변해버리고 이젠 왜명 모두 서로 뒤엉쳐
누가 누구인지 모른채 살육을 거듭합니다.
고바야카와는 지칠대로 지치고 심한 타격을 입은 왜병을 후퇴시키고 조총으로(비내리는데? ㅇㅅㅇ)
명군을 향해 사격을 가합니다.
명군 선봉이 한꺼번에 무너지자 퇴각한 왜군은 다시 돌진했고, 그대로 명군은 개성으로 퇴각합니다.
명군 사상자는 6천명, 일본군 사상자는 그와 비슷하거나 조금 더 적을 것으로 추측?求求?.
그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군은 2월 16일 평양으로 철수하고,
북군과 합류하여 한성수복을 약조한 권율군은 행주에서 고립돼고, 우키타 히데이가 이끄는 한성 방어군,
3만여명이 행주산성을 공격하나, 그후 생긴 일은 너무나도 유명해서...
-명군 패배의 원인
애초에 벽제관은 두 고지로 이루어져 있어 기병돌격이 불가능에 가까운 지형이며,
게다가 눈이 녹고 비가 오면서 진창이 생겨 전투대형 유지에 많은 힘이 듭니다.
게다가 짙은 안개까지 끼여 양방에 큰 피해를 주었지요.
게다가 명군은 이미 행주산성에서 대기중인 권율군과 합류해야 하는 부감감까지 겹쳐 있어,
적을 만나면 매우 불리한 상황에서도 계속 진군하여 더 큰 피해를 유도합니다.
뭐... 그나저나...
(언덕위에서 구경하는 전투가 자신이 진창에서 격돌하는 전투와 느끼는 것이 다르다지만)
전투진행이 참으로 멋진것 같습니다.
만약 일본군이 명군에 대한 공포가 조금이나마 있더라도 고바야카와의 분전으로
명군에 대한 공포심이 깨져버렸다는것이 현재 교과서 및 학계의 기본적인 의견입니다.
전투가 참 멋지다고 제가 말했었나요? ㅇㅅㅇ
첫댓글 좋은 글 감사합니다 ^^
벽제관의 패배는 명군의 무리한 작전에 있습니다. 이여송이 기병대를 좋아해서 혹은 일본을 꺾고 나서는 얕잡아보는 마음에서 그랬겠죠. 일본도 한번은 붙어봐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으로 임한 전투입니다. 명군이 패배한 것은 사실이나, 명의 참전은 일본에게 조기승리의 기회를 앗아갑니다. 그런 점은 인정해야죠.
그리고 저는 승전이야기를 한것이 아니라 명의 참전이 많은 역할을 하였다는 점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남의 도움을 받은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도움을 받고서도 패배를 한 월남처럼 되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죠. 요는 인정할 거는 인정하자는 겁니다. 삼전도비도 역사이듯이.
명군이 필요없다고 하시는 분들이 많은데 적어도 심유경이 와서 금패꽂은 덕에 선조가 안전할수 있었고 전쟁이 장기화 될수 있는 시간을 벌었다는데 부터 주목해야 합니다.그 뒤의 명군의 부재는 비판받아야 마땅하지만 총체적인 전국의 변화에 있어서 명군이라는 변수가 없었다면
그 후에 파견될 일본군만 좋은일 시켜주는 거구요.이미 임란 전부터 무보수 중대장 내지 현대의 동네방위 체계로 운용 했던 조선군에게 정규전 수행이라는 능력 자체도 결여되 있던 상황에 단 1년이라는 시간만이라도 끌수 있다면 오히려 고마운 것입니다.
조선군이 이긴 전적을 보이면서 아 대단하지 않느냐 했는데 이미 상대편 국가의 원수가 수도를 이탈하고 망명을 생각하는 시점이라면 이것은 대단히 위험한 것입니다.적어도 일본군 계획에 차질을 준건 맞고 기타 조선군에 불필요한 존재다 라고 하시는분들은 명군의 군체계 도입여부나 무기 지원등에 대해선 이야기 하지
않죠.물론 그게 큰건 아닙니다.맨날 조선이 조공바치고 윗나라로 모신 노력에 비하면 말이죠.하지만 이런 작은 것들도 결코 무시 못할 부분이고 명군의 전투경과를 떠나서 군대가 어느 위치에 존재한다는 이유 하나로도 큰 도움이 되는 것입니다.
마키아 벨리도 원래부터 원군과 용병은 믿을만한 존재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그에 비하자면 원군치고 명나라 군대는 희생자도 많았고 초기 전국변화에 도움을 준 군대임엔 틀림 없습니다.
말마따나.. 처음 저 얘기가 화재가 됐을때 국빠님들의 주한미군 철수랑 맞물려서 제가 상당히 싫어했었는데... 지금은 내용만 따지고 보니까..
"왜병은 얼래빗, 명군은 참래빗" 아, 제개인적인 생각또한 명군이 임진왜란에 큰 역할을 했으나, 조선군은 그와 맞먹거나 아니면 더 큰 공적을 세웠다는 것입니다. 개개인의 이념과 성향을 떠나 피흘리며 싸운 자들이 잊혀지고 무시당하는것에 큰 거부감이 듭니다.
저는 사대주의자나 무슨 다른 소리를 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잊고 있는 뭤을 상기하고 인정할 거는 인정하자는 겁니다. 삼전도비도 역사이듯이 명의 도움도 역사입니다. 지금 어쩌자는 것이 아니라 너무 우리내부지향적인 것을 보자는 그런 생각이었습니다.
전혀 내부지향적인게 아니라, 사실을 사실대로 보는 것입니다. 명은 많은 공적을 세웠으나, 조선 육군 또한 명 개입 이전부터 명군을 능가하는 전공을 세웠습니다. 같은 주장을 하는듯 한데 서로 말이 틀린것 같군요.
그 사실이라는 것이 "우리끼리 해도 이겼을텐데"는 아니라는 겁니다. 어차피 우리가 주인이니 우리가 나서서 막아야 하는 것은 당연한겁니다. 칭찬하고 말고 할 사항이 아니죠. 문제는 얼마만큼의 역할이냐는 겁니다. 당연히 우리가 떠맡아야 하는데, 여기에 명군이라는 존재는 기둥을 든든하게 해주는 역할이었으니까요.
;;; 저는 우리끼리 (제대로) 이길수 있었을거라는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만. ㅇㅅㅇ
아래 어느분이 그러셔서 그런 겁니다. 님에게 해당되는 것은 아닌데요....
(적어도 임진왜란에 대해선) 저랑 딴판의 의견을 가지신 분의 주장을 제 의견과 옳아매는것은 바람직하게 보이진 않습니다.
아래 어느분과 논쟁을 하는데 님이 글을 다셔서 그냥 같이 말한 겁니다. 따로 지칭한 것은 아닙니다.
몇주 전부터 올린 게시글은 모두 %^&님과 상반됀 주장을 가지고 있으며, 이는 제 의견을 말하는 것이지 누구의 주장을 편들기 위해 올린 게시글들이 아닙니다. 물론 이 글은 제외입니다만. 뭐 이 글도 벽제관 전투를 분석하기 위한 글이였습죠.
네 알겠습니다. 건전한 논점을 교환하는 토론은 언제나 환영입니다.
제 입장을 이해해주시니 감사합니다 :)
보병 개개인의 용맹 보다는 고바야카와의 탁월한 전략기동이 전투승리의 한몫을 했지요. 왜병이 단병접전에 특출나게 강한건 꽤나 의문입니다;;;
왜병들이 특출나게 단병전에 소질있다는 것보다는 강한 지방 세력가들의 존재와 치열했던 전국시대라는 배경이 이를 이루어냈다고 보는게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도 삼국시대는 말할것도 고려 중기까지도 탁월한 사격능력과 함께 뛰어난 백병전 능력도 보유했지요
고려 시대때도 지방 향리들이 나름대로 실력있는 무장 세력을 보유했고 이들을 바탕으로 강력한 전투부대를 소유할 수 있었던거죠. 지방 무력집단이 소멸된 조선의 경우도 아직 토호세력을 중심으로 강한 무력집단을 보유했던 함경도군이 조선 최정예 군대였던 것도 이와 유사한 맥락이구요.
그게 번동아재님 블로그 가서 보면 임란이전 조선군이 왜 약한가에 대한 이유가 소상히 적혀 있는데 하여튼 그걸 보면 차라리 중국이나 고려마냥 가정을 둬서 상비군을 두는게 낫습니다.전에도 어떠분이 상비군이 없는 나라가 어딨냐고 하는데 문제는 그게 아니라 그 질과 실질적인 물리력 이라는게 더 중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