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원초적 삶의 형태가 살아 숨쉬는 인류의 고향, 인류 탄생의 땅 아프리카 대륙으로, 나는 求道(구도)의 길을 떠난다. 이번에도 내 여행의 동반자는 자전거다.
아프리카는 빈곤과 질병, 내전과 살육의 땅이다. 기아와 에이즈, 빈곤과 문맹, 살육과 난민, 인종차별과 환경문제 등 인류의 난제들을 모두 안고 있는 게 아프리카 지역이다. 자전거 바퀴가 닿는 곳에서 아프리카 사람들을 만나면서, 아프리카의 역사와 문화 그리고 고뇌와 환희가 뒤섞인 삶의 현장을 전하려고 한다.
佛家(불가)에서 역사는 영원한 승자가 없이 輪回(윤회)한다. 그렇더라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현세에 안은 짐은 너무나 벅차다. 인간이 인간으로서 존재하는 이유는 思惟(사유), 참 인간상에 도달할 수 있는 정신의 힘이다. 과연 버림받은 아프리카의 民草(민초)들까지 사유하고, 참 인간상에 도달하는 기회를 얻을 수 있을까, 이 話頭(화두)를 안고 나는 떠난다.
아프리카로 떠나기 전 내가 머물고 있던 체코의 프라하는 지난 1월 중순부터 계속된 함박눈으로 3월 중순에 접어들었지만, 童話 속의 도시처럼 은빛으로 반짝인다. 뜨거운 대륙 아프리카로 떠나는 1년간의 기나긴 자전거 여행을 준비하면서 두어 달을 보냈다.
이번 여행은 그 동안 내가 해온 여행과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그 험한 땅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돌아올 수 있을까」 하는 한 줄기 불안이 뇌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2000년 여름에 떠난 자전거 中東 횡단 (이스탄불에서 카이로까지)의 종착지는 이집트였다. 이집트를 찾으면서 아프리카 대륙에 발을 디딘 게 이번 아프리카 여행의 인연이 되었던 것일까.
「언젠가 다시 한번 아프리카 대륙을 찾으리라!」고 생각하며 돌아왔던 것이 이번에 열매를 맺게 됐다. 아프리카 여행은 喜(희)가 될까 悲(비)가 될까. 혹시 저승으로 가는 여정이 되는 것은 아닐까. 불안이 끊이지 않았다.
2003년 중국 長安(장안·현재 서안)을 출발하여 이탈리아 로마까지 고대 실크로드를 따라가는 여행 때 나는 추락사고로 오른쪽 다리가 부러졌다. 아프가니스탄을 지날 때 탈레반의 총알 세례를 피하는 행운 속에 여정을 이어가다가 그리스 정교회의 본산 아토스 산에 오르다가 사고를 당했다.
旅程(여정)은 예정대로 마무리했지만, 독일로 돌아가자마자 다리 뼈에 10cm의 철판을 나사 5개로 고정시키는 수술을 받았다.
모든 게 자업자득이다. 실크로드 횡단 기념으로 평생토록 남을 훈장을 몸 속에 받아 넣은 셈이다.
방랑벽
타고 난 역마살은 주체를 못하는 것인지, 수술 후 상처가 아물기가 무섭게 나는 지팡이를 짚고 戰火(전화)가 휩쓸고 지나간 코소보와 보스니아를 비롯한 舊(구)유고연방을 여행했다. 전쟁의 상처는 나의 상처와 마찬가지로 아물지 않고 있었다.
너무 무리한 탓에 예정된 여정을 다 돌 수 없었다. 靜養(정양) 중이었던 체코의 프라하로 돌아와 얼마간 시간을 보내자, 다시 걷는 데 무리가 없을 만큼 상처가 가라앉았다.
따사로운 햇살 아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같이 아름다운 프라하에서 나는 새로운 여행을 구상했다. 발틱海 연안 北유럽 11개국을 3개월간 자전거로 일주했다. 염려했던 다리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다.
여러 가지 사정으로 몇 년간 미뤄뒀던 아프리카 대륙 종단 여행에 욕심이 생겼다. 다리도 제법 쓸 만해졌지 않은가. 제일 큰 문제는 역시 돈이었다. 하지만 마음 가지고 모든 게 해결된다면, 세상사 무엇을 걱정하겠는가. 다 갖추고 출발한다면 그 여행이 무슨 재미가 있을까. 만사에는 다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런저런 망설임이 있었지만, 발틱海 연안 北유럽 여정에서 돌아온 직후인 2004년 12월부터 아프리카 여행 준비에 착수했다.
당초 잡았던 출발일은 2005년 3월1일이었다.
프라하에서 모로코 탕걸까지
內戰과 暴動으로 치안이 극도로 불안한 아프리카 나라들의 특수 사정을 고려하여, 月刊朝鮮 측에 영문 「객원기자증」과 「취재계획서」 발급을 요청했다. 영문 기자증을 받고, 여정의 정보를 수집하면서 출발을 2주간 연기한 끝에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위한 출발선에 섰다.
최대한 짐을 간소화했다. 일년간의 오지 여행인 관계로 자전거를 포함해서 전체 물품의 무게가 60kg을 넘었다. 뺄 것을 다 뺐지만, 생존에 필수적인 장비의 무게가 그만큼이었다.
짐 때문에 유럽대륙을 횡단하는 버스밖에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50시간의 여행이다. 비행기를 타면 제일 편리하지만, 40kg이나 되는 화물의 초과요금을 지불하면서 비행기를 탈 주머니 사정이 아니었다.
내 여행은 집을 나서는 순간부터 고행의 시작이었다.
프라하에서 아프리카 여정의 첫 출발지인 아프리카 대륙의 최북단 지브롤터 해협에 도착하는 데 2박3일이 걸렸다. 파리를 경유해서 모로코의 「탕헤르(Tanger)」라는 도시까지의 긴 이동이었다.
어머니
지난 3월14일 저녁 7시, 프라하 국제 버스 터미널에 섰다. 일요일 밤이다. 언제나 그러했지만 내 여행길에는 배웅해 주는 사람이 없다.
사람이 그리워지는 순간이다. 하지만 속세와의 인연을 끊은, 인연을 맺지 않고 살아가는 수도승에게는 감정의 사치에 불과하다.
먼 길을 떠나는 순간 마음에 걸리는 인연이 없는 것도 아니다.
얼마 전 눈 수술을 한 게 잘못되어 녹내장이 발병해 눈이 많이 어두워졌다는, 한국에 홀로 계시는 俗家(속가) 어머님의 모습이 차창 성에 위에 뿌옇게 떠오른다.
무슨 기구한 운명을 타고 난 것일까. 유학차 떠나온 지 20여 년, 오늘도 나는 이름 모를 곳으로 발길을 옮기고 있다. 어쩔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다가오는 인연의 무게. 그저 못난 자식을 둔 당신의 안녕을 기원할 뿐이다.
『휴게소에 잠시 들른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떠 보니 밤 10시다.
프라하를 출발할 때, 같은 버스에 동양인 남녀가 탑승하는 것을 보았다. 유럽을 찾는 배낭족들끼리 서로 인사하는 것조차 꺼린다는 얘길 들은 바가 있어, 한국 청년들이 아닐까 생각하면서도 아는 체하지 않았다.
휴게소 입구에서 마주쳐서 인사를 안 할 수도 없었다.
『한국 여행자세요?』라고 인사를 했더니, 신혼여행차 한 달간 유럽으로 배낭여행을 왔다고 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고 좋은 여행을 기원하는 인사를 나눴다.
외국 여행을 나오는 한국인들을 만나보면 20여 년 전 내가 한국을 떠나올 때에 비해 개인주의화가 많이 진행된 듯하다.
파리를 거쳐
이번 아프리카 여행에는 어떤 일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까.
설렘 반, 긴장 반의 야릇한 희열감을 음미하면서 어둠의 바다 위를 질주하는 차창에 기대고 꿈의 나래를 펼쳤다.
포근한 아침 햇살에 눈을 떠 보니 어느새 파리 근교다. 연일 발목까지 쌓이는 눈이 내리던 프라하와 달리, 파리의 나무들은 파릇파릇한 새싹을 내보이며 봄소식을 전하고 있다. 잊고 있던 파리에서의 추억들이 새록새록 피어오른다.
기억은 끊임없이 쌓이는데 추억의 공간에 부족함이 없는 이유는 뭘까.
10여 년 만에 다시 찾는 파리다. 터미널에 짐을 맡겨 놓고 잠깐이라도 센 강변을 걸어볼까 하는 생각이 없진 않지만, 그렇게 부지런한 체질이 아니기에 단념했다.
준비해 온 도시락을 먹고 3월15일 오후 1시에 출발하는 모로코行 버스를 기다렸다.
기다림! 피를 말리는 듯한 괴로움이 동반되는 기다림이 있고, 주체할 수 없을 정도의 기쁨이 함께하는 기다림이 있다. 1년을 작정한 긴 여행에서의 기다림이란 그저 고요한 시간의 흐름일 뿐이다.
정해진 시간은 오게 마련이다. 시간의 길고 짧음은 인간의 마음에 달려 있다.
출발 30분을 앞두고 짐을 맡기는 수속이 시작됐다. 이동 중의 분실과 도난을 방지하기 위해 자전거를 분해했다. 충격으로 깨어지지 않도록 잘 포장하고, 노트북 등 충격에 민감한 장비들은 배낭에 넣어 짐을 두 개로 줄였다.
짐 무게를 확인한 40代 중반쯤의 아랍계 프랑스인이 『30kg까지는 봐주겠으니 나머지 30kg에 대해 kg당 2유로씩, 60유로를 내라』고 했다. 한국돈으로 10만원 정도다.
비행기를 이용했을 때의 추가요금에 비하면 싼 편이지만, 긴 여정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에 선뜻 웃으면서 지불할 형편이 아니었다. 자전거로 일년을 여행하는 가난한 여행객임을 설명하고, 3분의 1 가격인 20유로만 내기로 타협을 봤다.
사회 구석구석이 합리화된 선진 유럽 나라에서도, 상황에 따라 상대의 편리를 봐주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과거 식민지 지역에서 많은 이민을 수용한 多인종·多문화 국가일수록 열린 사고에서 오는 관대함과 수용성을 느낄 수 있다. 그중에서도 가장 관용이 높은 사회가 프랑스가 아닌가 싶다. 그에 비해 이웃 나라 독일은 시스템에 잘 길들여진 탓인지 원칙주의에 입각한 사고방식이 지배하고 있다.
모로코에서 이민을 왔다는 「체크 인 데스크」의 호의 때문에 기분이 좋았다. 그는 버스 운전사를 불러 소개시켜 주면서 『여행 내내 알라의 가호가 함께하길 기원하겠다』고 축복해 주었다. 그의 진심 어린 마음에 첫 여행지 모로코로 향하면서 기대와 설렘이 솟아났다.
센 강 남쪽 다리를 지나 파리 시내를 벗어난 버스는 봄이 마중 나온 들판 속 고속도로 위를 달렸다. 36시간을 달려가야 한다.
생각을 접고 휴식을 취하는 게 최선이다. 아프리카에 도착하는 그 순간부터 일년간 치러야 할 「전투」를 생각하면, 36시간이 결코 길게 느껴지지 않는다.
버스가 고장나다
대형 버스엔 프랑스人으로 보이는 서로 동행이 아닌 듯한 남녀, 아프리카 친구 한 명, 귀향길에 오른 10여 명의 모로코人들이 타고 있었다.
프라하에서 파리까지 오는 동안 단잠을 잤는데도 잠이 또 쏟아진다. 평소 낮잠을 자지 않는데 여행에만 나서면 어디에서건 단잠을 자게 된다. 어쩔 수 없는 야전체질인 모양이다.
이날 오후 햇살 속에서 고요한 분위기를 쏟아내는 中世風의 작은 프랑스 지방도시에 들렀다. 60代 중반쯤으로 보이는 할아버지 한 분이 내 건너편 옆자리에 앉으며 인사를 건네왔다. 순박함이 느껴진다.
여행을 떠나는 기쁨이 얼굴 가득하다. 카사블랑카까지 가는데 이번이 네 번째란다. 계속해서 말을 하지만 나의 짧은 프랑스語 실력으로는 따라 갈 수 없다. 『영어를 하시는가』고 물어보았지만 지나친 주문이었다.
운전사 두 명이 교대로 끊임 없이 달리고 있다. 식사시간에만 휴게소에 들렀다. 바깥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 눈을 뜨니 자정에 가까운 시간대다. 다시 눈을 감고 30분 가량을 기다리렸지만 버스는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는다.
웅성거리며 모여 있는 사람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프랑스語와 영어를 동시에 구사하는 아프리카 친구한테 무슨 일이냐며 물었다. 『버스가 고장인데 수리가 불가능한 상태』라고 했다.
밤 기온이 꽤나 쌀쌀하다. 스페인 국경 근처로 아직 프랑스 땅이다. 운전사들은 속수무책이라는 표정을 짓고 있다. 고장으로 움직이지 못한다면 문제는 오히려 간단하다. 회사에 전화를 해서 새로운 버스를 보내오게 하면 된다.
아프리카 친구한테 통역을 부탁하며 『파리 본사에 연락해서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버스를 보내게 하라. 그렇지 않으면 클레임을 걸겠다』고 「위협」을 했다. 중국이나 인도 같은 곳이라면 「클레임」을 주장해봐야, 「무슨 잠꼬대 같은 소리냐」는 반응이 왔을 것이다. 하지만 다행히 이곳은 유럽이고 프랑스 영내다.
『한 시간 내로 버스를 보내겠다』는 본사의 회신이 왔다.
「이 늦은 시간에 과연 한 시간 내로 버스를 보내올 수 있을까」 하고 생각했다. 한 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약속한 버스가 도착했다. 승객들은 새 버스로 옮겨 탔다. 짐을 옮겨 싣는 일은 전부 운전사들이 했다.
무례하고 불친절한 스페인 사람들
『패스포트(여권)!』 하면서 어깨를 툭 치는 바람에 눈을 떴다.
국경 검문소 경찰 복장에 권총을 휴대한 50代 초반쯤으로 보이는 사람이 다시 『패스포트!』라고 소리치는 게 현행범을 앞에 두고 취조를 하는 듯한 명령조다. 자다가 홍두깨를 맞은 기분이다.
시계를 보니 새벽 3시 정각, 스페인 국경 검문소다. 자기 나라를 찾아온 손님한테 갖추어야 할 최소한의 예의범절도 갖추지 않는 무례한 이와 잠을 깨어 가면서까지 시비를 가리고 싶지는 않았다.
여권을 내밀자 문제가 없는지 버스표를 보잔다. 지금까지 무수히 유럽 나라들의 국경을 통과했지만 버스표 검사를 하는 출입국 경찰관은 처음이다. 할 말을 잊는 순간이다.
스페인 국경을 통과한 10여 분 후 편의점이 있는 주유소에 버스가 멈췄다. 편의점 안쪽에 있는 화장실을 나오다 물을 한 병 살까 하고 편의점에 들렀다. 같은 버스에 탄 승객 여러 명이 물건을 들고 계산대 앞에 줄지어 서 있다. 손님이 계산대 앞에서 기다리고 섰는데 점원으로 보이는 젊은 아가씨는 휴대폰을 붙잡고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지 않았으면 그냥 넘어 갈 일을, 아니 물을 살 생각만 안 했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때 늦은 후회를 하지만 이미 지나간 버스다. 국경 검문소에서 받은 열이 채 가시기도 전에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가….
계산대로 다가가서 『빌어 먹을 물 값 얼마야!』 라며 들고 있던 물병을 『꽝』 소리가 나게 내려 놓았다. 이쯤 되면 미안하다는 사과의 말이 나오는 게 세상의 상식이거늘. 이 스페인 아가씨는 영어도 아닌 스페니시로 응수하고 나섰다.
인종차별에 대한 단상
버스로 돌아와 잠을 청하려는데, 앞 자리에 앉은 모로코系 프랑스인들이 『코레안』 운운하는 소리가 들린다. 주유소 편의점에서 현장을 지켜 본 그들이 「성질깨나 있는 한국 친구」 이야기를 하는 모양이다.
낸들 즐거운 여정길 초반부터 화를 내고 싶겠는가. 하지만 부당한 행위를 눈앞에서 당하고도 웃고 넘어갈 만큼 마음 수양이 돼 있지 않은데 어찌하겠나.
물건을 사려고 줄지어 서 있던 사람들이 유색인종인 모로코系와 아시아인이 아닌, 우유빛 얼굴을 한 사람들이었다면 점원 아가씨가 그렇게 무례한 행동을 취했을까. 국경 검문소에서 그리고 주유소 편의점에서 우리는 분명히 인종차별을 당한 것이다.
요즘 유럽에서는 유색인종에 대한 차별이 눈에 띄게 강화되고 있다. 각국 국회에서 인권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는 인종차별적인 이민제한 법안이 통과되고, 국영방송에서까지 교묘하게 인종차별 의식을 고양시키기도 한다. 「문화의 갈등」이나 「문명의 충돌」이란 용어가 학문의 단계를 넘어 현실 속으로 들어온 느낌이다.
게르만의 대이동을 얘기할 것도 없이 유럽에서는 이민족의 유입이 역사의 물길을 바꾸었다. 흑인 노예들이 고대 로마제국의 영화를 꽃피우는 거름이 됐고, 식민지인들이 근대 유럽 제국주의의 중흥에 동력이 됐다.
제2차 세계대전 후 후진국의 값싼 인력이 경제개발의 토대가 됐다. 이렇게 불러들인 사람들을 이제는 배척하겠다는 것이다. 이율배반에 빠진 것이 요즈음 유럽사회의 이민정책이다.
버스에서 앉아 이틀째 밤을 보내고 나니 피로감이 밀려온다. 인도나 중국에서는 장거리 이동할 때 2층 침대버스를 이용할 수 있어 피곤이 덜했다. 유럽에는 침대버스가 없다. 싼 게 비지떡인 셈이다.
『휴게소에 들러 아침식사를 한다』는 안내방송에 눈을 떴다. 외국생활이 20여 년이지만 한국 음식이 아니면 식욕을 못 느낀다. 이 까탈스러운 입맛 때문에 여행은 내게 더욱 더 고행이다.
햇살이 눈 부신 테라스에 커피 한잔을 앞에 두고 앉았다.
사람들이 사뭇 친근하게 『잘 잤느냐』며 인사들을 건네 온다. 어제 저녁 주유소 사건 이후 이 사람들이 나를 대하는 태도가 확연하게 달라졌다. 살기 위해 유럽으로 이민을 왔지만, 문화와 종교가 다르다는 이유로 또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은 멸시와 따돌림 때문이 아닐까.
주유소 사건을 접하고서 그들의 마음에 맺힌 응어리가 조금이나마 풀렸던 모양이다.
내가 잘 나서 당당하게 스페인 여성 점원에게 큰 소리를 칠 수 있었던 게 아니다. 나의 조국 대한민국이 선진국의 문턱에 왔기 때문에 그 위세를 등에 업고 나는 큰 소리를 낼 수 있었다. 그게 내 솔직한 심정이다.
「올리브 숲」 이베리아 半島
거대한 이베리아 半島는 전체가 올리브 밭이다. 달려도 달려도 올리브 나무 숲이 끝없이 펼쳐진다. 바위산을 제외한 모든 들판과 산 꼭대기까지 개간을 하여 올리브 나무들을 심어 놓았다.
거대한 「올리브 숲의 바다」가 새로 만들어졌다는 게 정확한 표현일 것 같다.
미국과 유럽, 즉 西洋이 하는 일은 무엇이든 선진이고 옳은 것으로 간주돼 왔다. 하지만 돈 버는 일이 되면, 인간의 욕심을 위해 자연을 온통 갈아 엎는 서양적 사고와 방법론에 살이 떨릴 정도다.
고장으로 인해 지연된 시간을 만회라도 하듯 버스는 맹속력으로 달렸다. 그 앞으로 엷은 푸른색의 지중해 바다가 보인다.
이베리아 半島 최남단에 다가왔다는 신호다. 지중해와 대서양을 통하는 지점에 위치한 지브롤터를 왼쪽으로 바라보며 30분 가량 달린 버스는 스페인 최남단 알제리카라는 항구도시 연안부두 터미널 앞에 멈춰섰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아프리카 대륙이 펼쳐지는 지점까지 온 것이다.
해발 2000m는 족히 되어 보이는 직각의 거대한 바위산이 지브롤터 해협 바로 앞에 서 있다. 바다와 바위산 사이 1~2km도 안 돼 보이는 바닷가 주변에 고층 아파트群들로 즐비하다. 알제리카는 홍콩을 연상케 한다.
지브롤터 해협. 나폴레옹이 지중해와 홍해를 잇는 수에즈 운하를 건설하기 전까지 고대 로마 때부터 지중해와 대서양 간의 유일한 통로였다. 역사의 변천과 더불어 그 중요도가 다소 색을 바랜 것은 사실이지만 여전히 전략적 요충지다.
그래서 영국이 시골 읍 단위 규모가 될까 말까 한 지브롤터에서 아직도 손을 못 떼고 계속 점령하고 있는 것이다.
모로코 탕헤르(Tanger)까지의 연락선에 승선했다.
아프리카에 첫 발을 딛다
3월16일 오후 7시, 연안부두 터미널 2층에 설치되어 있는 스페인 측 출입국 심사대를 통과했다. 연락선 치고는 상당히 큰 여객선에 올랐다. 선상에서 바라보는 지브롤터 해협은 검은 먹구름의 하늘을 이고 있었다.
아직 차가움이 묻어 있는 바닷바람이 불어왔다. 사위는 온통 잿빛 세계다. 찬 바람 속에 선상 벤치에 혼자 앉아 있는, 상당히 특이한 복장의 독일 친구를 만났다.
이슬람 신비주의 교파인 「수피이즘」에 귀의하여 무슬림(이슬람교도)으로 改宗을 했단다. 독일에서 교사생활을 하다가 터키 여행 중에 이슬람문화를 접했고, 모로코 현지 여인과 결혼을 하여 자녀 둘을 낳았다. 현재 카사블랑카에서 소설가로 활동 중이라고 했다.
이슬람교도로 改宗한 서양사람을 만나는 건 이번이 처음이다.
이것저것 물었더니 『카사블랑카에서 만나게 되면 그때 얘길 나누자』며 연락처를 건네고 일어섰다. 더 이상 붙잡을 수 없었다. 인연이 있으면 또 만나게 될 것이다.
입국 수속은 의외로 간단하게 끝났다. 모로코는 한국과 無비자 협정 체결을 맺고 있어 비자 없이 3개월(90일)간의 체류와 여행이 가능하다. 관리는 여권에 입국 도장을 찍고 『좋은 여행이 되라』는 짧은 한마디를 건넸다. 유럽에서 푸대접을 너무 받은 탓인지 그 인사가 가슴에 와 닿는다.
20km 남짓 폭의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는 데 두 시간 가량이 소요됐다.
선실 대합실에서 파리에서부터 동승해 온 아프리카 친구 그리고 두 프랑스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눴다. 앞으로 연락하자며 이메일 주소를 교환했다.
『곧 도착하니 하선 준비를 하라』는 안내방송에 우리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지난 이집트 여행 이후 꼭 4년 만에 다시 찾는 아프리카 대륙이다. 배에서 내렸다. 얼굴에 다가오는 바람결에 푸근함과 그리움이 묻어 있다. 언젠가 다시금 꼭 찾겠다던 내 자신과의 약속을 떠올리며, 일년간의 아프리카 대륙 횡단 여정에 첫발을 내디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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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 글은 월간조선 2005년5월호부터 인기연재물로 지금도 계속 되고 있는 행창스님의 자전차 여행 이야기입니다. 이 스님은 예전에도 자전차 여행으로 잡지에 나온걸 본 적이 있는데 기차여행등 수많은 여행을 했답니다 참 부럽네요
요즘..체력이 계속 바닥나서 집에만 있는데, 이 글을 읽으니 부럽기도 하고 제 자신이 한심스럽기도 하고, 행창스님이 자랑스럽기도 합니다._()_
부럽습니다. 언제나 저는 이런 여행을 계획할 수 있을지.... 한 번 해 보고 싶은 방랑길입니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하는 군요. 고맙습니다.
지난 여름 겨우 4박 5일의 자전거 여해에서도 엉덩이가 헐어 고생했던 저입니다. 감히 혼자 갈 생각은 하지 못하고 학교에서 가는 걸 따라 갔는데. 저도 스님처럼 자유롭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