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건국 기년에 대하여 (900년설인가, 705년설인가)
어제와 그제 내가 카페에 전혀 글을 올리지 못했습니다. 조금 신경써야 할 일이 많았는데, 그 사이에 아주 치열한 설전이 있었군요. 그런데 미나모토노 요시쓰네님이 좋은 설명을 해주었는데, 좀 내용의 양이 부족해서 인지 반론이 나왔고, 그러다 보니 논점이 오히려 흐트러져 보기 좋은 토론이 되지 못해 좀 아쉽습니다.
나는 고구려토론방 422번 글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고구려사는 아직 모르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나는 현재 고구려 후기쪽에 주로 집중을 해서 공부를 하고 있어서 이쪽의 의문은 상당수 풀어가고 있지만, 초기사에 대한 의문은 아주 많이 갖고 있습니다. 나 역시 고구려를 연구해가는 과정에 있기 때문에 풀고 싶은 의문들이 많은 수밖에 없습니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고구려 건국기년의 재검토와 같이 건국 연대가 과연 기원전 37년이 맞는가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에 이미 고구려라는 이름이 등장한다는 점에서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올라갈 가능성이 매우 높습니다. 또한 고구려 자체의 전승에서 고구려가 900년이나 유지된 오랜 나라라는 주장이 있습니다. 물론 700년설이 맞다는 주장도 일본서기 등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에 섣부른 결론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나는 다만 졸본부여의 역사를 고구려의 선역사로 파악하고서 두 가지설의 장단점을 두루 취하는 방식으로 현재까지 잠정적인 가설을 세우고 있을 뿐입니다.“
고구려 통사까지 쓴 내가 이런 표현을 한다고 놀라는 분도 있겠지만, 연구자가 아직 덜 연구된 것은 모른다고 해야지요. 그래서 신농님이 처음 이 문제를 제기할 때도 조금 더 고민하고 글을 쓰겠다고 답을 했었습니다. 그런데 지금 토론 상황을 보니 내가 성급히 이 부분에 답을 해야 하겠군요.
자, 고구려 건국 기원에 대해서는 우선 <삼국사기>에 쓰여진 기원전 37년설이 있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멸망은 의심의 여지가 없이 668년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705년간 그 생명을 유지한 것이 됩니다.
그런데 이번 북한에서 온 고구려유물특별전을 관람한 분들이라면 보셨겠지만, 북한학계에서는 고구려 건국을 무려 240년을 올린 기원전 277년에 고구려가 건국된 것으로 봅니다. 따라서 고구려는 945년이라는 엄청난 장수를 한 국가가 됩니다. 물론 북한도 1976년 이지린, 강인숙이 쓴 <고구려역사>에는 기원전 37년설을 따랐으나, 이후에 토론을 거치면서 900년설을 따르게 된 것입니다.
고구려 700년 수명설과 900년 수명설로 두 가지 학설 가운데 우리 학계에서는 대체로 고구려 건국을 기원전 37년으로 보고 있습니다.
물론 과거 일본학자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일부 학자들 가운데는 고구려가 서기 1세기 후반에 건국된 것으로 보는 사람도 있습니다. 태조대왕때(서기 53년 이후) 비로소 국가를 이루었다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 설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지나치게 국가라는 단어에 집착하여 고대국가다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한 역사를 배제하려는 일본인의 우리역사 잘라내기 시각이 반영된 것입니다. 이미 고구려의 정치적 실체가 1세기 후반보다는 훨씬 전에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후한서 고구려전에는 왕망의 신나라 초(기원전 18-서기 17)에 고구려왕을 하고구려후로 이름을 고쳐 부르게 했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즉 이때에 고구려왕이란 실체가 이미 알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후한서 광무제기에는 광무제 8년(서기 32)에도 이미 고구려왕이 사신을 보냈다는 기록도 나오는 만큼 태조대왕 이전에 이미 고구려가 후한과 교류할 만한 정치적 실체로서 등장한 것은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삼국사기를 따라 기원전 37년설을 고구려 건국 시점으로 볼 경우, 먼저 이야기해야 할 것은 선고구려 세력에 대한 부분이다. 즉 고구려 건국이전부터 고구려를 세운 집단이 어떤 식으로든 정치적 실체를 갖고 있음을 자료를 통해 알 수 있기 때문이다.
흔히 이야기되는 것이
1-1 상서(尙書) 주관(周官)편의 공안국의 주에 실린 海東諸夷, 駒麗 扶餘, 駻貊之屬, 武王克商, 皆通道焉 기록.
1-2 일주서 왕회 편에 대한 성주대회에 여러 참석한 고이에 대해서 서 공조(孔晁)의 주석에 高夷는 東北夷인데 고구려라는 기록
- 그런데 이 기록을 통해 보면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를 멸망시킬 때 구려, 즉 고구려의 선조가 있다는 것으로 볼 수가 있는데 그렇다면 무려 기원전 12세기가 된다.
하지만 백제 토론방 132번에 내가 이미 이에 대해서는 비판의 글을 올린 바 있었는데, 윤내현 님등이 주장하는 이것은 사료 해석의 오류입니다. (윤내현, 『한국열국사 연구』(1998년, 지식산업사, pp56, 86-88)
공안국은 공자의 12대손으로 한무제 시기에 살았던 사람이며, 그는 단지 주 무왕이 정벌한 동이를 구려와 부여와 같은 족속이라고 말한 것이지, 기원전 12세기에 부여와 고구려가 존재했다고 주장한 것이 아니다. 기원전 100년경에 살았던 공안국의 말을 근거로 기원전 12세기에 부여와 고구려의 존재를 주장할 수는 없다.
또 일주서 역시 3세기 삼국시대 이후의 역사인식을 보여줄 뿐이다.
2-1 고구려를 세운 맥족이 이미 늦어도 기원전 5세기경에 존재했다. (맹자 고자편. 맥국에 1/20 세법 있다)
2-2 산해경 해내서경에는 이족이 동호의 동쪽에 있으며, 맥국이 한수의 동북쪽에 있고, 그 지역은 연나라에
가깝고 연나라에 의하며 멸망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夷人在東胡東 貊國在漢水東北 地近于燕滅之)
이 기록은 맥족의 나라가 맹자 시기에 존재했고, 연나라에 의해 멸망당했음을 말해주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적어도 기원전 5세기에서 3세기 사이에 맥국이라 불리는 실체가 있음을 말해준다고 하겠다.
이 문제도 사료 분석에 들어가면 사실 아주 명쾌한 근거를 가진 것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분명 기원전 시기에 맥족이 세운 나라가 있음은 확인할 수 있다. 물론 그 나라가 고구려인지 여부는 단정 지을 수는 없다. 다만 고구려를 건국한 세력들이 이미 국가적 경험을 지녔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다. 고조선의 국가적 경험을 본 맥족이 나라를 세우는 것이야 그리 어렵지 않을 것이다.
3-1 기원전 107년 현도군이 설치될 때 고구려현이 있었다
3-2 기원전 75년 요동쪽으로 현도군이 옮겨갔다.
한사군 문제를 여기서 거론하면 문제가 논지가 너무 길어지므로, 생략하고 어쨌든 고구려현의 존재는 고구려가 건국되기 이전부터 고구려라는 존재가 있었음을 알려주며, 그들의 조직적 저항에 의해 현도군이 퇴각했다고 보는 것이 현 학계의 정설입니다. 여기에 남만주 일대에 널리 분포되어 있는 적석총의 존재가 이 같은 선고구려 세력의 성장을 설명해주는 것으로 이해합니다. 실상 고고학 자료는 이 문제 해결에 있어서 그리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고고학 자료로는 이미 수많은 유물들이 나왔고, 그것이 고구려 역사냐, 선고구려냐를 가름하는 것은 문헌에 의해 해석되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고고학 자료를 설명하는 것은 여기서는 또 생략합니다.
위의 근거 가운데 특히 3번째 근거 때문에 고구려의 역사를 올려보자는 주장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럼 고구려 900년설의 근거를 보겠습니다.
1.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22 말미의 논찬에 고구려는 진한(秦漢)이후부터 중국의 동북쪽 모서리에 끼여 있었다는 부분 論曰 高句麗 自<秦>․<漢>之後, 介在中國東北隅, 其北隣, 皆天者有司
5. 광개토대왕 비문에 광개토대왕이 17대손인데, 실제로는 12대손에 불과하므로, 5대 왕이 빠졌다는 기록
顧命世子儒留王, 以道興治, 大朱留王紹承基業. 遝至十七世孫國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
6. 삼국지 고구려전에 고구려는 본래 연노부가 왕이 되었는데. 지금은 계루부가 왕을 낸다. 그러므로 한 차례 교체되었다. 연노부가 세운 나라가 선 고구려, 즉 졸본부여로 볼 수 있지 않는가.
本涓奴部爲王, 稍微弱, 今桂婁部代之.
7. 고구려 초기 왕들의 이름 가운데 두 가지 왕명이 나오는 것들이 있다. 이는 왕의 대수가 축소되면서 여러 왕이 섞인 것이다. (북한학계의 주장)
동명왕 (bc277-259) - 유류왕 (259-236) - 여율왕 (236-223) - 대주류왕 (223-138), - 애루왕 (138-93) - 중해왕 (93-19) - 유리명왕 (19-서기 18) - 대무신왕 이하 동.
이렇게 보면 무려 5명의 왕이 더 끼워들게 된다. 그런데 대주류왕의 재위 기간이 지나치게 긴 것 등이 좀 걸린다.
자. 여기에 또 하나 주장은 고구려 800년설이다. 근거는
1.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10년 문무왕이 고안승에 내린 책봉문에 역년이 거의 800년이 되었다는 문장이 그것이다.
新羅王致命高句麗嗣子安勝. 公大祖中牟王, 積德比山, 立切南海, 威風振於靑丘, 仁敎被於玄菟. 子孫相繼, 本支不絶, 開地千里, 年將八百. 至於建․産兄弟, 禍起蕭墻, 釁成骨肉, 家國破亡, 宗社滅
그런데 이 800년설은 그 근거가 신라인의 막연한 추측이므로, 별다른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그러면 700년설의 주장은 무엇인가.
1. 삼국사기에 나오는 기원전 37년설이 가장 확실한 근거다.
2. 일본서기 천지천황조 7년 10월조에 고구려 중모왕(추모왕)이 처음 나라에 세울 때에 천년동안 다스리려고 하였다. 모부인(유화붕ㄴ)이 나라를 잘 다스리더라도 불가능핟. 700년이 적당하다고 말했다. 지금 나라를 잃은 것은 그로부터 700년 후의 일이다.는 기록
冬十月、大唐大將軍英公、打滅高麗。高麗仲牟王、初建國時、欲治千歲也。母夫人云、若善治國不可得也。但當有七百年之治也。今此國亡者、當在七百年之末也
3. 고자 묘지명에 고구려 건국이 700년이 되었다는 기록 (고구려가 처음 세워진 후부터 나라가 망하기까지 708년, 30대 동안 공후장상이 끊어지지 않았다. (중간 생략) 나라는 7백년의 수명을 누리고, 집안은 30대 동안 그 업을 이었다.)
自高麗初立, 至國破已來, 七百八年卅餘代, 代爲公侯將相不絶,--- 國賴其存享七百之綿祚, 家嗣其業纂卅之遙基
4. 광개토대왕 17대손은 추모왕-유례왕-대주례왕 다음에서 17대손이므로, 고구려 광개토대왕이 19대라고 쓴 삼국사기의 신뢰성을 높여주는 자료로 활용될 수 있다. (위의 5번, 7번 주장에 대한 반론)
5. 삼국사기 지리지 고구려조에 통전을 인용하여 한나라 건소 2년(37년)에 주몽이 북부여에서 내려왔다는 기록
『通典』云 朱蒙以漢建昭二年, 自北扶餘東南行, 渡普述水, 至紇升骨城居焉. 號曰句麗, 以高爲氏
자. 이렇게 우선 사료를 정리하고 나니까 왜 이런 주장들이 나왔는지가 좀 이해가 될 것입니다.
첫댓글고구려 초기의 왕계를 보면 엉망인게 확실한데 분명 고구려 왕가에서 정통성 확립을 위해 여러가지 작업을 했을 겁니다. 여율왕이나 대주류왕등은 700년의 역사속에 들어가야 댓수가 적당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나이가 90살이나 나는 고국천왕도 있으니..
첫댓글 고구려 초기의 왕계를 보면 엉망인게 확실한데 분명 고구려 왕가에서 정통성 확립을 위해 여러가지 작업을 했을 겁니다. 여율왕이나 대주류왕등은 700년의 역사속에 들어가야 댓수가 적당해진다고 생각합니다. 아들과 아버지 사이의 나이가 90살이나 나는 고국천왕도 있으니..
=물론 900년 설이 허무맹랑하다는건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