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작수필] 조선 문학 5월호에 실린 수필 : 이달의 에세이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이기숙-
남편 친구인 P목한테서 전화가 왔다. 오늘이 자기 부인의 생일인데 워커힐에서 저녁이나 같이 하자는 것이었다. 나는 다른 약속이 있어서 사양하였으나 그는 "아주 어렵게 예약을 해 놓았으니 어지간하면 자기 청을 들어달라" 고 하는 바람에 하는 수 없이 남편과 함께 참석하기로 했다.
그는 30여 년이나 외국에서 살았는데 고국이 너무 그리워 역이민(逆移民)을 하게 된 순정파(純情派) 한국인이다. 그렇게 해서 고국에 돌아온 그는 벌써 20여 년째 목회활동을 하고 있다. 부흥사로, 대학교수로, 영어 강사로, 그야말로 눈코 뜰 새도 없이 바쁘게 뛰어다니던 유능한 목사였다. 따라서 보통 목사와는 달리 수입도 많고 인기도 높았다. 친구들을 만나면 의례 대접하는 것은 자기의 몫으로 생각하고 베풀기를 즐겼다.
그러던 그가 2년 전부터 당뇨병과 협심증에 시달리더니 얼마 전에는 반신(半身) 마비증상에 걸리게 됐다. 그래서 어느 한방병원에 입원하여 장기간에 걸쳐 치료한 결과 상당한 차도가 있어서, 요새는 손수 운전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호전되었다고 한다. 절뚝거리지는 않으나 아무래도 전과 같이 잘 걷지는 못하였다.
그런 분의 초청인지라 감히 거절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마음속으로는 생선회나 불고기정도면 족하리라 했는데, 굳이 그 비싼 워커힐까지 간다는 것이 적잖이 부담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자기 부인을 위한 지극 정성을 그 누가 감히 탓할 수 있겠는가? 이렇게 생각하니 더 할 말이 없었다.
사실 우리 어머니나 할머니 시대의 여인들은 대개 생일을 잊고 지내왔다. 그러다가 며느리를 본 후에야 겨우 미역국이나 얻어먹을 정도였다. 이에 비해 남자들의 경우는 항상 부인들이 챙겨주기 때문에 생일을 거르는 일은 거의 없다. 생선이나 고기반찬에 미역국을 곁들인 생일 상은 조촐하지만 언제나 정성이 깃들어 있었으니까. 그러던 것이 요즘에는 많이도 바뀌어 부인 생일을 잊고 지내는 남편은 마치 큰 죄를 지은 범인 취급을 받기가 일쑤라니 참으로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남편과 나는 그의 집에 들러 그들 부부를 차에 태우고 워커힐로 갔다. 4인분이 30만원이란다. 평소에는 만원짜리 음식도 마음놓고 먹지 않았던 처지라 영 마음이 편치 않았다. 그렇다고 내색할 수도 없고 그저 즐거운 척 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부인은 마치 어린아이같이 마냥 즐거워했다. 한번도 생일에 특별 이벤트로 축하를 받아본 적이 없었던 나인지라 부러운 마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웨이터가 안내하는 자리로 가 앉았다. 마침 옆자리에 앉은 사람들도 거의 우리 나이쯤으로 보여 가벼운 목례로 인사를 나누었다. 음식은 돈까스로 주문하고 음료수를 먹겠느냐고 묻기에 주스나 사이다를 달라고 했더니 추가 부담이란다. 가격을 물으니 보통 7-8천 원이고 양주는 몇 만 원이라 했다. 너무 비싸다는 생각에 이건 내 수준이 아닌데 하고 사양했다.
식사가 거의 끝날 무렵 갑자기 불이 꺼지더니 찬란한 조명과 함께 우리 민요가 흘러나왔다. 겹겹이 드리워진 막 안에서 북소리에 맞춰 율동하며 등장하는 무희들이 삽시에 내 시선을 사로잡았다. 혼란의 도가니였다. 막 앞에서 하늘하늘 춤을 추는 무희들, 연꽃을 타고 사뿐히 내려오는 무희, 갑자기 폭삭 내려앉는 무대 옆으로 서서히 솟아오르는 배경세트, 은은히 피어오르는 안개구름에 도취되어 있노라니 어느새 옆 무대에서는 선녀같은 무희들이 춤을 춘다. 전후좌우(前後左右) 눈길이 닿는 곳마다 춤과 노래와 마술 곡예 등이 펼쳐져 완전히 관중을 압도하고 만다. 참으로 장관이었다.
우리나라 쇼가 끝난 후 잠깐 쉬는 듯 하더니, 곧 이어 화려한 외국인 쇼가 시작되었다. 그야말로 그림 같은 외국인 무희들이 나와 캉캉이라는 춤을 추는데, 음악도 요란스럽고 거의 발가벗은 알몸으로 미친 듯이 흔들어댄다. 글세 이런 것을 가리켜 환상적이라고 할는지는 모르지만, 나 같은 촌뜨기는 오히려 발광적이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지 모르겠다. 아무튼 보기는 했어도 왜 그리 쑥스럽고 민망하던지, 혹시 아는 사람이라도 만날까 봐 걱정이 되기도 했다.
우리나라 쇼는 우리 정서에 맞아서 그런지 그런 대로 차분한 분위기여서 감미롭게 보았다. 사물놀이는 흥겹고 신이나 마음속으로 북과 꽹과리를 같이 치며 넋을 잃었다. 그런데 요란하고 화려한 외국인 쇼는 음악도 경쾌하고 빠르지만 무희들의 의상이나 몸 움직임이 어찌나 야하던지 잠시 현실을 잊고 붕 떠 있는 기분이었다. "남자들 특히 젊은이들은 어떤 기분일까" 하고 엉뚱한 생각도 해 보았다.
하루종일 2, 3만원을 벌기 위해 길거리에서 리어커를 끄는 사람, 노동판에서 막노동을 하는 사람, 소득도 별로 없는 농사를 짓는 사람, 살기 위해 바다 위에서 몸부림치는 어부들, 그나마 자기 수족으로 일 할 수 없어 복지재단에 의존해 사는 장애인들이 연상 속에서 오버랩 되어졌다. 비싼 만찬장에서 어울리지도 않는 쇼를 즐기고 있는 자신이 퍽 부끄럽다는 생각도 들었다.
덕분에 좋은 구경 잘 했다고 인사는 하였으나, 왠지 속마음은 그리 상쾌하지 않았다. 아니 벌써 복통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신경성 위장장애가 도진 듯 했다. 돌아오는 길에 남편의 표정을 훔쳐보았다. 성대한 생일 초대를 즐기고 오는 기분 좋은 사람의 얼굴은 아니었다. 그도 역시 나와 비슷한 심정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역시 서민인가 봐. 갑자기 상류층 행세를 하려니 잘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 독백아닌 독백을 중얼거렸다.
우리 부부는 몹시 허약해진 친구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 따라 나섰으나 생전 처음으로 접해보는 거금 8만원 짜리 음식은 여간 불편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도 친구 덕분에 잠시나마 화려한 상류생활을 흉내낼 수 있었으니 감사해야 할 일이지만 나로서는 그 후 며칠동안 병원신세를 져야했으니 말이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한다!" 는 속담은 바로 나를 위해 만들어진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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