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연희동 집으로 이사를 오니 오래된 정원과 옥상 곳곳에 커다란 항아리가 있었다.
먼저 살던 주인아주머니는 "아파트로 가게 되어 놓고 가니, 김치든 장이든 원하는 걸 담아서 쓰라"고 했다.
그분은 "좋은 선물"이라고 했지만 커다란 감나무 아래 묻혀 있는 김장용 항아리가 내게는 어찌해야 좋을지
알 수 없는 곤란한 물건이었다.
고민 끝에 항아리를 화분으로 변신시켰다.
땅에 묻은 것을 파내어 바닥에 구멍을 뚫고 허브와 꽃을 심었다.
몇 개는 지인에게 선물도 했다.
전 주인아주머니는 김장 김치를 이항아리에서 숙성시킨다고 했었지, 아마도.
그 항아리들의 진정한 용처를 얼마 전 지리산 자락의 사찰 금수암에서 알게 됐다.
올 봄부터 함께 사찰음식을 배우는 일본인 친구들과 고속버스로 3시간을 달려 도착한
그곳은 아직 푸른 기운을 잃지 않은 소나무와 잣나무가 둘러싸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누런 콩이었다.
20년째 한국에 살면서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던 메주 만들기가 그날 과제였다.
물에 불린 콩을 6시간가량 푹 삶는 작업은 이미 끝나 있었다.
우리는 부드럽게 삶은 콩을 절구에 으깨는 작업부터 시작했다.
절굿공이를 들고 콩을 몇 번 찧으니 늦가을 햇살 아래 땀방울이 맺혔다.
충분히 으깬 콩을 덜어 네모난 메주를 만드는데, 메주가 적당히 숨을 쉴 정도로 공기를 빼가며
치대야 나중에 금이 가거나 갈라지지 않는다.
빵을 반죽할 때는 무심하던 내 손놀림이 메주를 치댈 때는 긴장이 돼 절로 힘이 들어갔다.
이날 소금.물.숯.대추를 항아리에 멓고 담그는 한국식 된장을 제대로 배웠다.
각자 두 개씩 받아든 메주를 고이 싸서 서울까지 돌아오는 길이 얼마나 흐믓했는지 모른다.
한구과 일본의 된장은 기후 풍토 식습관에 따라 달리 발달했다.
일본 된장인 미소(미소) 고우지(누룩)를 빼놓고 얘기할 수 없다.
고우지는 곡물에 누룩곰팡이를 배양해서 번식시킨 것으로, 도니장을 비롯해 청주.간장 등
발효 식품을 만들 때 들어간다.
일본 된장은 어떤 곡물을 쓰느냐에 따라 쌀된장. 보리된장, 콩된장으로 나뉜다.
일본 미서가 한국인 입맛에 달다고 느껴지는 것도 대두에 쌀누룩이 더해졌기 때문이다.
한국은 음력 정원 즈음 메주를 소금물애 담갔다가 60일 후에 도니장과 간장으로 나누지만,
일본에서는 콩과 소금, 물 등 같은 재료를 쓰면서도 애초부터 된장과 간장을 따로 만든다.
비슷하면서도 다른 두 나라읭 ㅡㅁ식 세계는 알면 알수록 오묘하다.
내가 가르치는 스페인 요리 수업에서는 유기농 채소와 유기농 올리브 오일, 무항생제 육류만을 쓴다.
된장과 간장도 건강한 땅에서 자란 콩과 깨끗한 염전의 소금, 오염되지 않은 물울 재료로
내 손으로 만들어 써야 요리의 싶은 맛을 낼 수 있는 것이 아닐까.
금수암에서 가져온 메주는 소쿠리에 담아 우리 집 양지바른 마당에 내놨다.
서서히 꾸덕해지며 말라가는 메주를 오늘 아침에 살펴보니 흰 실 같은 곰팡이가 생겼다.
아, 녹색 곰팡이가 아니면 그대로 둬도 좋다고 하셧지...
더 추워지기 전에 그때 메주를 같이 만들었던 일본인 친구들과 간장도 끓이고
된장도 만들어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년 2월에 적당한 항아리를 사서 도전해 봐야지.
아, 그때 그 항아리를 전부 처분하지 말 걸...
후회해도 때는 이미 늦었다. 히데코 요리연구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