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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로운 사람, 요셉
마태복음 2:13-15, 19-21
하나님의 평화가 말씀을 듣는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길 빈다.
오늘은 성탄 후 첫째 주일로, 2025년 마지막 송년주일이다. 한해 고생 많았다. 자신의 속도로 여기까지 왔지만, 저마다 남모를 아픔과 아쉬움이 있을 것이다. 여기까지 이르도록 인도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감사드린다.
먼저 지난 주일에 잘못 알려 드린 사실에 대해 교정하려고 한다. 성탄일 설교에서 베들레헴에서 성탄전야예배를 드리지 못한다고 단정적으로 말했는데, 나중에 뉴스를 보니 예수탄생교회에서 축하예배가 열렸다. 잠시 중단되었다가 2년 만에 이어진 예배였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지난 1년 동안 나는 얼마나 많은 실수를 했을까? 교정할 수 있는 실수도 있지만, 뼈에 사무칠 잘못도 했을 것이다. 다 하나님이 잘잘못을 가려주실 것이라고 믿지만, 당장 내 입장에서 송구(悚懼)한 마음을 드린다. 행여 상처를 받는 분이 있다면 송병구 역시 불쌍한 인생이니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기 바란다.
독일 속담에 “끝이 좋으면 다 좋다”(Ende gut alles gut)가 있다. 만약 내가 연말시상식에 올라선다면 뭐라고 말할까? “모두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 덕분입니다. 여러분과 함께 살아온 세월이 참 좋았습니다”라고 해야겠다.
예전에 어떤 사람은 이런 말로 자신의 소감을 밝혔다. “끝이라고 끝은 아니었습니다.” 야구경기는 9회말 투아웃부터라고 하듯, 인생에서 내 타율이 낮고, 아웃이 빈번하지만, 그래도 아직도 끝은 아니니 다시 도전 할 일이다.
한해를 잘 정리하고 새해를 행복하게 맞이하자. 세상이 어떻게 변한다고 해도 가정은 행복의 시작이고, 끝이니 식구들과 함께 열심히 사랑하기 바란다.
1)
성경의 대표적인 가족은 예수님의 가족이다. ‘성 가족’이라고 부른다. 예수님의 가족은 아기 예수를 중심으로 세 식구 모두 밝은 후광을 두른다.
세 식구만 특별하다고 구분 짓는 것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가족이 그런 복된 가정이 되라는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다. 세상의 모든 가정은 하나님의 식구이니, 모두가 거룩하고, 행복할 권리가 있다.
예수님의 탄생에는 많은 조연들이 등장하지만 내 생각에 가장 중요한 조연은 아버지 요셉이다. 사실 아버지는 말이 없다. 묵묵하게 듣고, 행동하고, 목숨을 걸고 움직인다. 한결같고, 꾸준하다.
마태복음은 요셉을 중심으로 아기 예수의 탄생과 기쁨, 위험과 피난을 들려준다. 메시야는 출생하자마자 험한 위기를 겪는다. 마태가 전한 복음서에 따르면 주의 사자는 모두 세 번 요셉의 꿈에 나타난다. 그만큼 요셉은 메시야의 탄생과 성장에서 아슬아슬한 역할을 도맡았다.
그런데 아버지 요셉에 대한 평가는 어머니 마리아에 비해 몹시 야박하다. 중세시대 이래 예수님 탄생을 주제로 한 성화를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요셉을 탄생의 초점에서 비껴놓았다. 그의 역할은 외양간 구석에서 밥을 짓거나, 여러 손님들의 방문에서도 늘 문간을 지키고 있다. 어떤 경우에는 성 가족 중 요셉의 머리에는 후광도 없다.
그럼에도 요즘 요셉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마치 부활절에 베드로에 가렸던 막달라 마리아가 첫 부활의 증인으로 점점 더 부각되고, 조명을 받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요셉에 대한 가장 큰 평가는 한마디로 ‘본보기’이다. 본이 된 사람, 모범 교사이다.
마태복음서에서 요셉은 한 마디 대사가 없다. 그는 다만 신실하게 행동할 뿐이다. 하나님의 사건은 매우 구체적인 현실 가운데서 묵묵히 부르심에 순종하는 사람에게 임한다. 그는 꾸준하였고, 한결같았다.
아기 예수의 탄생은 고통당하는 사람 모두에게 축하할 일이지만, 그러나 위협을 느끼는 사람도 있었다. 아버지 요셉은 아기 예수의 목숨을 노리는 헤롯의 탄압을 피해 애굽으로 피신하였다.
“... 주의 사자가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헤롯이 아기를 찾아 죽이려 하니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피하여 내가 네게 이르기까지 거기 있으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서 밤에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애굽으로 떠나가”(13-14).
그리고 헤롯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나서야 다시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온다.
“헤롯이 죽은 후에 주의 사자가 애굽에서 요셉에게 현몽하여 이르되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가라 아기의 목숨을 찾던 자들이 죽었느니라 하시니 요셉이 일어나 아기와 그의 어머니를 데리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니라”(19-21).
베들레헴에서 애굽으로 피신한 것도, 애굽에서 나사렛으로 돌아온 것도 자세히 생각해보면 아버지 요셉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버지는 묵묵히 어두운 밤길을 걸었다. 아버지는 산모와 어린 아기를 데리고 그 먼 길을 다녀왔다.
렘브란트는 요셉을 잘 조명한 화가이다. 그의 에칭화를 보면 어둠 속에서 등불을 든 요셉의 모습을 그린다. 그 얼굴은 렘브란트 자신의 자화상이다. 그 깊은 어둠이 얼마다 짙은 지 작은 등불에 세 식구의 실루엣만 겨우 드러난다. 세 식구는 ‘성 가족’으로 세상의 빛이 되었다.
요셉은 아버지로서, 그 시대의 떳떳한 사람으로 진지한 본보기였다. 인물은 인물을 만나야 한다는 말이 있다. 그런 점에서 아기 예수는 아버지를 잘 만났다.
2)
나는 달력을 참 좋아한다. 1991년에 고난모임 수익사업으로 처음 시작한 것이 교회용 달력 제작, 판매였다. 고난모임의 생존을 위해 체면불구하고 달력을 팔았다. 그때 180교회가 고난달력을 사주었다. 겨우 31살이니, 아직 체면일 것도 없는 나이였다.
첫 달력의 제목은 ‘오늘 읽는 복음서’이다. 겨우 7장짜리 달력인데, 박영 화가의 ‘바보 예수’ 연작이었다. 당시 우리의 경쟁 기업이 진흥카렌다였다. 물론 맘모스와 쥐꼬리의 대결이었다.
진흥카렌다 사장 박경진 장로님이 나 더러 그림 구경하러 오라고 연락을 주셔서 해서 회사 창고를 찾아갔다. 거기에는 나 밖에 구입할 사람이 없다면서 십자가 작품 여러 점을 안겨주었다. 물론 공짜는 아니었다.
그때 유화로 그린 성화 한 점을 구입하였다. 수십 년 동안 진흥카렌다가 성화달력을 만들기 위해 그린 원화중 하나였다. 주제는 ‘예수 피난’이었다. 화가는 이요한인데 그는 평생 성화만을 그렸다. 대부분 어디서 본 듯한 모방 작품이나, 거룩한 주제로 가득하였다.
이요한 작가는 자신에게 직접 그린 성화 250점이 있다고 자랑하면서, 앞으로 개인 성화미술관을 만들고 싶어 하였다. 나는 그 분의 꿈이 이루어지길 바란다. 장차 그분에게 성화미술관 개관 축하 소감을 듣고 싶다.
내가 구입한 그림은 요셉이 아기 예수와 마리아를 태운 나귀를 이끌고 가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다. 당연히 성경의 배경은 거친 광야인데, 화가 이요한은 푸른 풀밭을 배경으로 한다. 내가 이의를 제기했더니, 화가는 그렇게 하고 싶었다고 한다. 누구나 그런 마음이 들 것 같다.
그림의 한 옆에 서 있는 뜬금없는 삼나무는 성화 작가 고흐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였다. 성화를 그린 작가의 상상력이 뜬금없지만, 믿음의 눈으로 본 그 마음이 따듯하다.
마태복음의 평가에 따르면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다. 당시 약혼남인 요셉은 자신과 정혼한 마리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약혼자의 권리를 주장해 율법에 따라 재판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마리아에게 얼마나 가혹한 짓인가? 그래서 정혼은 없던 일로 하고, 조용히 관계를 끊으려고 하였다. 요셉은 율법을 곧이곧대로 따르지 않았다.
요셉은 즉 아내를 데려왔고, 아기를 낳기까지 보호하였으며, 마침내 안전하게 아기를 낳을 수 있도록 시종일관 함께 하였다. 성경은 이런 요셉을 가리켜 의로운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라”(마 1:19).
여기에서 의롭다는 것은 율법을 문자 그대로 깐깐하게 따지려 드는 태도가 아니라, 사람의 생명을 존중하여 이해하는 ‘사랑의 계명’으로 해석한 것을 말한다.
3)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입장에서 경험한 예수님을 이야기한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아들은 요셉의 선행을 통해, 마리아의 희생을 통해 이 땅에 메시야가 오셨다는 사실이다. 평범한 어머니와 아버지를 통해 ‘성 가족’은 가능하였다.
해마다 우리는 우리 곁에 찾아오신 아기 예수님을 기억하고 축하한다. 아기 예수님은 가장 연약한 아기의 모습으로, 가장 누추한 모습으로 구유에 뉘었으며, 가장 초라한 부부의 아들이 되셨으며, 가장 위험한 상황에서 피난자가 되셨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얼마나 가난하고, 비천하게, 고난을 겪으며 사셨던가? 다윗 왕가의 자손이요, 하나님의 아들이란 영광이 무색하였다.
요셉과 마리아는 아기 예수와 함께 그 출발 이전부터 사랑의 길에 목숨을 걸고 참여한 장본인 두 사람이다. 마리아는 복된 순명(順命)으로, 요셉은 묵묵한 진심으로. 두 분 다 목숨을 걸고 거룩한 위험에 참여하였다. 두 분 모두 고난의 역사와 희망의 역사를 두루 감당하였다.
마태복음이 조명하는 요셉의 충직한 역할은 아버지로서 의무감을 훨씬 뛰어넘는다. 아버지 요셉은 마치 창세기에서 야곱이 70명의 가족을 이끌고 애굽으로 피난 가듯, 그리고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 하듯, 아기와 마리아와 동행하여 애굽 땅을 다녀온 것이다.
예수님의 가족은 어땠을까? 화가들은 상상력을 발휘하였다. 프랑스 화가 조르주 드 라 투르(1593년~1652년)의 ‘목수 성 요셉’은 유명하다. 바로크 시대에 활동한 그는 어둠과 빛을 극명하게 대비하는 표현기법으로 그렸다. 작품 ‘목수 성 요셉’은 아버지 요셉이 들보에 구멍을 뚫고 있고, 어린 예수는 촛불을 비추며 일하는 아버지의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모습이다.
나중에 아버지 요셉은 모든 목수의 수호성인으로 불린다. 그리고 모든 세기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돕는 아버지로 존경을 받는다.
성화를 그리고, 또 보급하는 사람들의 신심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물론 경제적 이유도 있지만, 그것보다 더 소중한 가치를 찾는 일일 것이다. 그 가운데 진흥카렌다 박경진 장로님도 있다. 감리교회 장로로서 그의 인생은 참 모범적이다.
그는 누가 보더라도 참 겸손한 모습이다. 벌써 10여 년 전에 고희를 맞으면서 장학재단을 만들었다. 행복하게 늙은 셈이다. 그런데 젊은 시절은 결코 행복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였다. 입버릇처럼 “넌 주제 파악을 하고 살아야 한다. 결코 주제넘은 짓하지 마라. 분수를 알고 분수에 맞게 살라”고 말씀하셨다고 한다.
아버지의 말은 젊은 박경진을 위축시킨 운명론과 같았다. 이유가 있었다. 그는 한쪽 눈이 감긴 채 태어난 장애인이었다. 어려서 친구들은 눈이 하나밖에 없는 그를 ‘한 달에 보름밖에 못 보는 50% 인생’이라 놀려댔다. 늘 왕따와 무시를 당했다. 이런 이유로 수치와 부끄러움과 열등감 속에 성장했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고부터 자기 인생의 반전 기회가 주어졌다. 그는 성경을 알아가면서 자기 운명을 바꾸겠다는 마음을 품었다.
그 몸부림은 바로 기도에서부터 시작되었다. 남의 사무실 한구석에 책상 하나 놓고 사업을 시작한 그는 자잘한 인쇄 심부름에서 시작해 달력을 인쇄하는 일로 발전하였다. 그가 일군 기업이 진흥카렌다이며, 생의 마지막 사업으로 70세에 진흥장학재단을 설립하였다.
박 장로는 반쯤 감긴 자신의 눈이 그를 평생 겸손하게 하였고, 그 장애가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게 했으니 돌아보면 복이라고 고백하였다. 그 역시 의로운 인생이다.
무릇 그리스도인이라면 아버지 요셉을 닮은 사람들이다. 그런 의인들이 필요하다. 한국교회가 그런 겸손한 의인들의 모임, 선한 청지기들의 공동체라고 칭찬들을 그때가 오길 바란다.
요셉이 걸었던 베들레헴에서 애굽까지 그 길은 어떨까? 시나이 광야는 얼마나 험하고, 목마른 곳인가? 상인들이 걷던 ‘비아 마르’(via Mar) 길은 과연 어떤 의미였을까?
오늘 오후에 걷기도를 떠난다. 잠시 다녀오는 산책과 같은 거리지만 나름 의미를 부여한다. 걷기도는 순례의 일종이다. ‘순례’(巡禮)의 라틴어 어원 ‘페레그리니’에 따르면 ‘낯선 사람’이란 의미를 지닌다. 순례자가 된다는 것은 낯선 경계로 여행하며, 불편을 겪을 수 있는 위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런 위험으로 나아가는 길을 멈추면 내 마음도 늙은 것이다. 오늘 오후에 떠나 송구영신예배에 맞춰 12월 31일 오후에 귀가할 것이다. 올해로 19번째이다. 처음에는 ‘극기(克己)도’ 하듯이 걸었다. 시작은 47살이었으니 참 젊은 시절이었다. 뭐든지 할 수 있는 나이였을 것이다.
예수님의 피난을 기념한 예수피난교회가 이집트 카이로에 있다. 이집트 곱틱교회는 아기 예수의 피난을 가장 큰 자랑으로 여긴다. 내 경험에 따르면 고난의 전통 속에 있는 교회일수록 그들이 빚은 십자가가 아름답다. 곱틱교회의 가죽매듭 십자가가 대표적이다. 모슬렘이 지배적인 그 고난의 환경 속에도 오래도록 신앙의 역사를 지켜온다.
겉만 떠들썩하고, 화려한 교회를 경계하라. 오히려 속이 깊은 교회, 고난의 영성을 간직한 신앙을 지향해야 한다. 그러니 두려움 없이 세상과 마주하고, 공급해 주실 능력을 믿고 기도하고, 행동하고, 사랑하라.
2026년 새해에도 두려움 없이 거룩한 위험에 도전하라. 희망의 관점으로 미래를 창조하라. 꾸준히 한결같이 희망의 관점으로 이어가는 믿음의 헌신을 감당하라. 주님은 내 삶을 묵묵히 이끌어주실 것이다.
하나님이 내 인생과 언제나 동행하시고, 길 위에서 늘 만나주시며, 희망으로 인도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