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사람 특별기고(2021. 2. 1.)
산림지사(山林之士)와 경의(敬義)의 본향 합천
합천은 산곡임하(山谷林下)에 은거하면서 학덕을 겸비한 유림(儒林)의 본향이었다. 남명 조식(1501∼1572) 때문이다. 남명은 기묘사화(1519 중종 14년)로 부친과 일가 등이 죽임을 당하거나 파직되자 고향인 합천 삼가로 낙향, 제자양성에 평생을 바쳤다. 정인홍(1536∼1623), 최영경(1529∼1590), 전치원(1527∼1596), 곽재우(1552∼1617), 정구(1543∼1620), 이대기(1551∼1628) 등 수십 명의 제자들을 길러 강우유맥(江右儒脈)이라 일컬어지는 남명학파를 이루었다. 남명과 퇴계 이황(1501∼1570)은 같은 해에 태어나 낙동강을 경계로‘좌 퇴계, 우 남명’으로 경상좌도와 우도를 대표하는 성리학의 거두였다. 퇴계가 남명에게 천리신교(千里神交)를 맺어 출사를 권했으나 남명은 하늘의 별처럼 사모하나 벼슬에 나아갈 수 없다는 답장을 보냈다고 한다. 두 사람은 편지는 주고받고 서로 존중하면서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는 학문적 경쟁자였다.
남명은 현실을 비판하고 실천적인 학문을 주장하였다면, 퇴계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학문을 이론화했다. 두 사람은 출처관(出處觀)도 달랐다. 퇴계는 33세에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37년간 벼슬을 했다. 반면에 남명(南冥)은 13번이나 왕의 부름을 받고도 응하지 않았다. 그는 훈구세력과 간신들이 판을 치는 조정에서는 자신의 뜻을 펼 수 없다고 생각했다. ‘나가면 하는 일이 있어야 한다(出則有爲)’는 신념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산림(山林)에 은거하면서 학문과 후세 교육에 힘쓴 사림(士林)들이 남명학파의 주류였다. 관직을 탐하지 않고 산림에서 침잠성리(沈潛性理)한 학자 중 왕의 부름을 받은 유림을 산림지사(山林之士) 혹은 산림으로 불렀는데 합천의 정인홍이 효시라고 한다.
남명 사상의 핵심은‘경(敬)’과 ‘의(義)’다. ‘경’은 수양을 ‘의’는 실천을 통해 실현된다. 상소로 조정의 잘못을 과감하게 지적하고, 왜구의 침략에 철저한 준비가 필요하다고 문하생들에게 역설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남명 문하에서 많은 의병장(義兵將)이 배출된 것은 남명의 실천적 가르침의 결과였다. 대표적인 인물은 정인홍, 곽재우, 전치원, 이대기, 김면 등이다. 곽재우는 의령·창녕, 전치원과 이대기는 초계, 김면은 고령·거창, 정인홍은 합천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서로 연계 협력했다(1). 이들의 활동은 경상우도 지역에서 왜적의 활동을 봉쇄함으로써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끄는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연유로 권율(1537~ 1598)은 초계에 도원수진을 두고 무과 900명을 뽑아 군사훈련을 시키면서 전쟁을 치루었다. 옥살이에서 출소한 이순신은 도원수 권율에게로 가서 백의종군하라는 왕명을 받들어 1597년 46일간 초계에서 머물렀다. 이곳에서 원균의 칠천량 패전소식을 듣고 권율의 명을 받아 남해안 전황을 살피러 길을 떠나 진주 수곡에 머물던 중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지를 받는다. 이렇듯 합천은 경의를 실천한 우리 선조들의 고향이다.
나는 합천군 용주면에서 1958년 태어났다. 원 고향은 쌍책면 하신마을이다. 초등학교 교사였던 선친의 직장을 따라 합천군 5개의 면(面)으로 옮겨 살았다. 야로초등학교에 입학하고 합천초등을 거쳐 삼가초등을 졸업했다. 삼가중 3학년 재학 중 선친을 따라 진주로 전학을 갔다. 조선입국(造船立國: 배를 건조해서 나라를 일으킴)이라는 당시 국가의 정책에 영향을 받아 부산대 조선공학과에 입학했다. 학사와 석사를 마치고 조선산업의 발원지이자 세계 최초의 조선해양공학과를 설립한 영국 글라스고우대학으로 유학을 가서 조선해양공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94년 부산대 교수로 부임하여 한국조선해양산업을 세계 1등으로 만드는 초석인 교육과 연구에 매진해 왔다. 2016년 부산대 20대 총장으로 선출되어 4년 간 봉직하고 현재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출생 후 약 15년 동안 줄곧 합천 여러 곳에서 살았지만 합천을 본격적으로 이해하게 된 것은 부산대 총장으로 선출된 2015년 11월 부터였다. 당시 정부는 대학총장 직선제 선출을 반대했다. 하지만 부산대는 대학의 자율성과 민주화를 염원하는 교수들의 210일간 총장실 점거 농성에 이어 직선제를 요구하면서 투신한 고현철교수의 희생으로 직선제를 밀어붙였다. 그 후 나는 72%의 압도적 지지를 받고 총장으로 선출되었지만 정부는 6개월이 지난 2016년 5월에 임명장을 주었다. 사실 직선제를 반대한 정부가 쉽게 임명을 해 줄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총장 당선 후 마음을 다잡기 위해 서예와 등산을 했다. 서예는 합천초등학교 시절 이수해선생의 사사로 시작해 합천군과 경상남도 초등학교 서예전에서 특선을 한 경험이 있다.
합천은 1413년부터‘협천(陜川)'으로 불린 고을이었다. 높이 솟은 산 사이 좁은 계곡을 흐르는 '좁은 내'라는 뜻이다. 1914년 협천군·초계군·삼가현의 세 개의 고을이 합해 지면서 협(陜)으로 쓰고 읽기는 합(合)으로 했다고 한다. 수려한 산들 사이로 황강이 유유히 합천을 흘러 지나간다. 황강(黃江)은 전북 무주군, 경북 김천시와 경남 거창군의 3도가 만나는 경계에 있는 삼도봉(1,180m, 일명 초점산)에서 발원하여 낙동강으로 흘러가며 길이는 111km이다. 황강의 북쪽은 초점산, 수도산, 단지봉, 가야산, 남산, 우두산, 비계산, 오도산 등의 준봉으로 이어지는 수도지맥(황강지맥)이다. 남쪽은 남덕유산, 금원산, 기백산, 황매산, 금성산, 악견산, 한우산, 자굴산으로 이어지는 진양기맥(晉陽岐脈)이 뻗어 있다. 진양기맥의 남쪽은 남강이 흐른다. 황강을 따라 뻗어 있는 북과 남의 이러한 맥길을 따라 걷고 산속의 천년고찰을 방문하면서 고향의 옛 산림지사 들의 삶과 사상을 회상했다. 이 분들의 도움이 있었는지, 나는 황강기맥 걷기가 끝나기 하루 전 조선시대 대제학으로 불린 총장 임명 통보를 받았다.
나는 완산(完山) 전(全)가의 22대손이다. 득관조(得貫祖)는 고려 공민왕 때 홍건적을 격퇴한 공으로 성씨를 하사 받은 완산군 전집(全集)이다. 고향 합천으로 이주한 입향조(祖)는 19대조인 하민이다. 18대조 승덕은 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4대조는 앞에서 언급한 남명의 제자이자 초계 의병장으로 활동한 탁계(濯溪) 전치원(全致遠)이고 탁계문집을 남겼다. 사후 이조판서로 추서되었다. 묘비문은 대제학 채유후가 적고 미수 허목이 글로 썼다. 서예 솜씨가 뛰어 났으며, 스승인 남명의 묘비에 대곡(大谷) 성운(成運)이 지은 묘비명을 썼다. 초서(草書)를 엮어서 만든 탁계초첩(草帖) 원본이 남아 있다. 탁계문집에 수록되어 있는 다음의 약서감회(約誓感懷)는 의병장으로서 1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홍의장군(곽재우)을 돕겠다는 우국충정의 뜨거운 마음과 다짐을 표현한 한시로 내가 붓글씨로 썼다.
濯溪 約誓感懷(탁계 약서감회)
天地紛紛國勢傾(천지분분국세경) 세상은 어지럽고 나라는 힘이 기울어
中興誰是破虜兵(중흥수시파로병) 누가 다시 나라를 일으키고 적을 무찌를까
含羞冒恥生猶愧(함수모치생유괴) 수모 속에 살아 있는 것 오히려 부끄러운데
擧義扶綱死亦榮(거의부강사역영)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다면 죽어도 영광이네
許國恨無三令喚(허국한무삼영환) 나라위해 군대 호령할 사람 없음이 한스러운데
同心今得百人名(동심금득백인명) 지금 당장 마음 맞는 백명을 얻었네
鼓行響應紅衣將(고행향응홍의장) 홍의장군 진영에 가서 도우고자 하니
明日趨風白馬營 (명일추풍백마영) 다음날 백마진영에 질풍같이 달려가리라
탁계의 아들은 수족당(睡足堂) 전우(全雨), 1548∼1616)이고 정인홍의 제자이다. 부친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공로로 사축서별제(司畜署別提)와 중림도찰방(重林道察訪)에 임명되었고 수족당문집을 남겼다. 수족당의 아들이자 나의 12대 조부(祖父)인 두암(斗巖) 전형(全滎, 1609∼1660)은 1636년(인조 14년) 8월 출발하여 1637년 3월 돌아온 조선통신사 사절단의 일원으로 정사 임광, 부사 김세렴과 함께 능서관(能書官)으로 일본을 다녀왔다. 두암은 일본사행록(使行錄)인‘해사일기(海槎日記)’를 남겼는데, 현재 2개월의 일기만 남아 있고 원본은 합천 종손 고택에 보관되어 있다. 두암은 시문과 서예에 뛰어나 일본사람들의 요청으로 시문을 많이 써주었다고 한다(2). 1647년(인조 25년) 김수로왕릉을 보수할 때 묘비문(墓碑文)을 썼다. 서예교본 두암법첩을 남겼고 원본이 보관되어 있다. 긴 세월 동안 종손인 전호열 전 쌍책면장의 고택에 보관되어 왔던 우리 집안의 가보들인 탁계문집(濯溪文集), 수족당문집(睡足堂文集), 두암(斗巖) 유묵판(遺墨板)과 시습재(時習齋) 등 유교책판 114판은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어 한국국학진흥원에 소장되어 있다.
남명보다 3살 아래인 황강(黃江) 이희안(李希顔·1504∼1559)은 남명과 교유한 산림지사다. 그는 28세 때 황강이 보이는 언덕에 황강정(黃江亭)을 짓고 제자들을 길렀다. 같은 마을에서 태어난 전치원은 황강의 문하생이었고 스승이 돌아가신 후 1564년 청계서원(淸溪書院)을 지어스승을 제향했다. 이후 전치원과 이대기도 이 서원에 제향되어 후손들이 세 산림지사의 경의(敬義)의 삶을 추모해 오고 있다. 전치원 또한 황강정 가까운 언덕에 1578년 춘강정(春江亭)을 지어 후학을 양성했다. 무성부원군 윤형을 비롯한 다수의 문인을 배출했다. 손자인 전형은 춘강정을 와류헌정(臥遊軒亭)으로 바꾸었고 현존하는 건물은 1898년 복원된 것이다.
왕을 어린아이로, 대비를 세상물정 모르는 과부인 아녀자로, 벼슬아치는 백성들의 껍질마저 벗기는 탐관오리라고 상소를 올린 학자,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몸에 차고 경계와 반성을 그치지 않은 선비, 칼을 몸에 품어 의병을 키운 행동하는 지성인 남명선생은 오늘에도 큰 울림을 주고 있다. 공자(孔子)는 정치란“君君臣臣父父子子”라고 했다. ‘임금은 임금답고 신하는 신하답고 아비는 아비답고 자식은 자식다워야 한다'는 말이다. 나라를 버리고 도망간 군주, 말로만 나라 걱정하는 관리들을 보면서 왜적을 물리칠 수 있다면 죽어도 여한이 없다는 이순신의 통곡의 소리 ’진중음(陣中吟)‘을 붓글씨로 되새겨 보았다. 직분은 다하지 않고 자리만 탐해온 나의 삶은 아니었던가 성찰하면서.
이순신 진중음
天步西門遠(천보서문원) 君儲北地危(군저북지위)
孤臣憂國日(고신우국일) 壯士樹勳時(장사수훈시)
誓海魚龍動(서해어룡동) 盟山草木知(맹산초목지)
讐夷如盡滅(수이여진멸) 雖死不爲辭(수사불위사)
임금의 행차는 서쪽에서 멀어지고/왕자는 북쪽 땅에서 위태롭다.
외로운 신하는 나라를 걱정할 때이고/사나이는 공훈을 세워야 할 시기로다.
바다에 맹세하니 물고기와 용도 감동하고/산이 맹세하니 초목도 알아준다.
원수를 모두 멸할 수 있다면/비록 죽음일지라도 사양하지 않겠노라.
(1) 남명학연구 제2집,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1992, “탁계 전치원과 설학 이대기의 의병활동”
(2) 이상규, “1636년 일본사행록, 『海槎日記』의 작자와 내용소개”, 한일관계사연구 Vol.57, 2017.8. pp. 497-554
전호환(全虎煥) 전 부산대학교 총장
1958. 경남 합천 용주 출생
영국 글래스고대학교조선해양공학 박사
부산대학교 조선해양공학과 학사, 석사
2020.05~ (사)동남권발전협의회 상임위원장
2017.03.~ (사)부산글로벌포럼 공동대표
2016.05.~2020.05 제20대 부산대학교 총장
2013.03.~2015.02 부산대학교 대외협력부총장
1994.03~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교수
2017 일본조선해양공학회 2016년 최우수논문상
2010 제2회 국가녹색기술대상 국토해양부장관상
2010 사단법인 대한조선학회 학술상
2008 사단법인 해양산업발전협의회 부산해양과학기술상
2005 제4회 부산과학기술상 공학상
2016. 국립대 중 유일하게 직선제 선출. 부산대 최초 공대 출신 총장
부산대 조선해양공학과 출신인 전 총장은 1994년 부산대 교수로 임용됐다. 대외협력부총장을 거쳐 부산대 제20대 총장에 취임한 2016년 5월 12일부터 2020년 5월 11일까지 4년간 부산대를 이끌었다.
전 총장은 대학 비전과 마스터플랜을 통해 부산대의 미래혁신 방향을 제시했다. 기초과학연구원(IBS) 기후물리연구단(ICCP)을 유치하는 등 연구중심 대학으로서 국가경쟁력을 키우는 데 주력했다. 학부 교육개혁과 최고 연구환경, 복지환경 조성, 대학 자율성 실현에도 힘을 쏟았다는 평가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