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득.895 --- 한라산 백록담에 흰 사슴은 없다

[박종국]

1000字 隨筆
문득.895 --- 한라산 백록담에 흰 사슴은 없다


  새벽 6시 성판악이다. 아직은 컴컴하다. 헤드 랜턴과 함께 섣달 스무사흘 하현달이 왼쪽에서 조심스레 따라온다. 사라오름으로 부지런히 가는데 아무래도 뒤통수가 따갑지 싶다. 돌아보니 나뭇가지를 비집고 큼직하게 떠오르는 일출이다. 두근두근 웅장하고도 정말 아름다운 한라산자락의 일출이다. 급히 시계를 본다. 7시 25분이다. 엊그제 많은 비가 내렸어도 진달래대피소의 눈을 다 녹이지 못했다. 큰 나무가 벌러덩 바람에 넘어져 엉덩이를 드러냈다. 충치처럼 어딘가는 허점이 있지 싶다. 정상이 가까워지니 키를 낮춘 구상나무숲이다. 아마도 고온화 현상 때문인지 고사목이 늘어나면서 어수선하다.
  정상까지 3시간 4분으로 기록을 단축하고 싶었는데 아쉽다. 백록담을 들여다본다. 그 안은 허탈하도록 텅 비었다. 마치 커다란 화채 그릇 같은 백록담은 바닥이 거의 드러났다. 눈이 녹아봐야 눈물로 까짓것 얼마나 되랴. 2월의 기상관측 이래 최대라고 할 만큼 비가 내렸어도 그뿐 백록담을 채우지 못했다. 비스듬히 북벽 쪽으로 기울었어도 약간의 물이 고여 있는 것이 고작이다. 백두산 천지 다음인 한라산 백록담이다. 미련이 남았는지 몇 번이고 두리번두리번 훑어본다. 백록담에 전설일 뿐 그 어디에도 흰 사슴은 없다. 혹시 노루라도 있는지 찾아보아도 보이지 않는다. 얼음 몇 조각이 있을 뿐이다.
  한라산에는 전설의 흰 사슴은 없다. 삼족오에 못 미치는 까마귀가 뒤를 잇는 것은 아닌지. 곳곳에서 까마귀들이 소리를 내지르며 주위를 맴돈다. 자신들의 성스러운 영역이라고 경계하는 것처럼 보인다. 오늘은 신비스러운 안개도 뿜어 나오지 않는다. 다만 신선한 바람이 넘쳐 나오지 싶다. 써늘하지만 견딜 만하다. 철퍼덕 주저앉아서 제주 시내를 보고 서귀포 시내를 내려다본다. 성산 앞바다까지 들어온다. 눈향나무가 바람을 피해서 잔디처럼 바닥에 찰싹 눌어붙어 있다. 고개를 들거나 어깨를 일으켜 세우지 않아도 그 모습이 넉넉하고 아름답다. 쏟아지는 햇볕이 따스하며 나른하다. 내일이 입춘이다.